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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도 살고 너도 사는 길 (삼상 2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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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매일 매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야 하고, 또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늘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모두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한 사람도 죄로 인하여 멸망받기를 원치 아니하십니다. 그래서 햇빛을 주셔도 의인이라고 더 햇빛 주고 악인이라고 어두움을 주며, 비를 주셔도 의인이라고 비주고 악인이라고 비 안주시는 게 아닙니다. 모두 가리지 않고 사랑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에스겔 18장에도 보면 ‘하나님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 회개하고 사는 것을 기뻐하신다.’라고 했습니다. 마귀는 모두가 망하는 길로 인도합니다. 마귀를 따라가면 모두 망합니다. 한 사람도 마귀를 따라가서 망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귀의 길은 버리고 하나님을 쫓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따라갈 때 우리의 가정도 다 같이 잘 살고 다 같이 행복한 가정이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누구는 울고 누구는 기뻐하며, 누구는 잘되고 못되는 게 아닙니다. 다 같이 잘 되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업을 하던, 정치를 하던, 기업을 하던, 학자가 되던, 연예인이 되던, 어느 분야에 가든지 항상 모두 잘되는 길을 찾아야 됩니다. 나도 살고 너도 살며, 모두가 잘사는 길을 우리는 찾아야 됩니다. 그 길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런 길로 가야 됩니다.

  요사이 YTN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시중 참기름 147개 제품 중에 76개가 불량품이라고 합니다. 51.7%가 참기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값싼 콩기름, 들기름, 유채기름을 넣어 섞어 만들었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꿀을 가짜로 만듭니다. 설탕을 끓이고는 초콜릿을, 시럽을 섞어가지고 밤 꿀같이 만들어, 이게 꿀이라고 속입니다. 몇 천 병, 몇 만 병을 이렇게 만들어 전국에 유통합니다. 이름은 최고로 붙입니다. ‘어디서 온 토종꿀’, ‘영유아식’이라고 탁 붙여놓았습니다. 올리브유에도 발암물질이 들어가 있다고 합니다. 카드뮴, 중금속이 검출되었다고 합니다. 애들 먹는 걸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OECD국가에 와 있고, 세계에 앞서가면서 먹는 음식 식료품을 이럴 수 있습니까? 한 사람 죽이는 강도는 그 한 사람만 죽이지만은 몇 만 명, 몇 백만 명이 먹는 것을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이것의 첫째 책임은 감독하는 공무원입니다. ‘우리 뭐 사람 얼마 안 되는데, 다 모릅니다.’ 이거는 아주 무책임한 변명입니다. 참기름 조사하는 데 몇 명이 필요합니까? 가져다 검사하면 됩니다. 아주 나쁜 아저씨들입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지금 우리나라가 이 먹는 음식가지고 자기는 그렇게 돈 벌려고 하고 남은 그렇게 해를 가해 벌면, 그게 내 안에 들어와 살이 되겠습니까? 자기에게도 독이 됩니다.

  우리는 항상 무슨 장사를 해도 좋은데 남을 유익되도록 해야 합니다. 남이 잘 되도록 하는 데 목표를 두고 하십시오. 식당 왜 합니까? ‘돈 벌려고.’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닙니다. 기독교 정신은 식당해서 ‘내가 워낙 만드는 솜씨가 있어, 이거 좋은 음식 싼 음식을 맛있게 만들어 많은 사람을 건강하게, 기쁘게 해야 되겠다.’ 이렇게 해서 식당 해야지, 속여가지고 잘 살려고 식당하면 안 됩니다. ‘내가 왜 옷가게 하느냐? 내가 왜 슈퍼 하느냐? 내가 왜 농사짓느냐?’ ‘나는 이런 데 은사가 있어서, 이것으로 많은 사람을 유익되게 해야 되겠다.’ 이런 마음으로 모두 직업을 선택해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무엇을 해도 좋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0장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살며, 하나님의 유익을 주고 교회에도 거치는 자가 되지 말며, 교회 안에 들어가서 남 애 먹이는 사람이 되지 마라.’라고 나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필요한 사람, 유익을 주는 사람,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다 같이 잘 사는 삶을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당해야 됩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나쁜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사람은 네 가지 삶이 있습니다. 첫째는 제일 나쁜 게 두 가지고 좋은 게 두 가지인데, 아주 지옥밑창에 가는 가장 나쁜 삶은 ‘나는 살고 너는 죽는 거.’입니다. 이것이 제일 나쁩니다. 강도도 알고 보면 이것입니다. ‘나는 살고 너 죽이는 거’ 이게 강도입니다. 소매치기, ‘나는 집어넣고 너 주머니는 빼앗기며, 내 주머니 채우는 거’ 이게 소매치기입니다. 절도 모든 범죄는 ‘내 잘되고 너 못되게 하는 거’ 이것이 제일 나쁩니다. 그게 발전해 가지고 천하에 모든 죄를 다 짓습니다. 모든 불행은 ‘나는 행복하고 너는 불행하게 하며, 내 잘되고 너 못되게 하는 것’ 이것이  가룟 유다의 길입니다. 가룟 유다 보십시오. 자기는 좋고, 선생님 팔아먹는 거, 이것이 제일 나쁩니다. 제일 나쁜 삶입니다. 제일 나쁜 삶은 무엇입니까? ‘나는 살고 너는 죽으며, 나는 잘되고 너는 못되며, 나는 행복하고 너는 불행하며, 내 행복 위해서 상대방의 행복을 파멸시키는 거’ 이것은 제일 나쁩니다.

  두 번째, 이것 보다 조금 낫기는 나은 삶이 있는데 그것은 ‘너도 못 먹고 나도 못 먹으며, 둘이 다 버리자, 다 먹지 말자.’입니다. 처음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쁜 놈입니다. ‘나도 안 되고 너도 안 되고.’ 이것은 아주 나쁩니다. 그럼 제일 좋은 삶, 성도 가운데 이 세상에 하여튼 최고의 삶은 어디 있느냐, 가장 거룩한 사람, 사도의 삶, 하나님 기뻐하는 삶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죽고 너는 사는 삶’입니다. ‘나는 안 되더라도 너는 되게 하는 것’입니다. 너의 죄를 내가 덮어쓰고 이 어머니의 사랑 같은 ‘나는 배고프고 너는 배부르며, 나는 굶고 너는 먹으며, 나는 죽고 너는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살신성인입니다. 강재구 소령이나 많은 애국자 순국선열이 모두 이런 삶입니다. 순교자의 삶은 모두 ‘나는 죽고 너는 사는’ 예수님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온 인류를 위해 당신은 죽으시고 모두를 살리는 삶이셨습니다. 할렐루야! 폭군의 삶은 무엇입니까? ‘나 하나 살고 너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도 얼마나 지상에 그런 사람들이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는 이것은 너무 살기 어려우니까 그런 삶은 몇 명이 안 됩니다.

  우리는 그 다음, 그 다음 삶을 따라야 됩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오늘 본문에 있는 대로, ‘너도 살고 나도 살고’입니다. 할렐루야! ‘너도 잘되고 나도 잘되고’ 내가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남에게 유익을 주며, 너에게도 기쁨 나에게도 기쁨, 너도 축복 나도 축복,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이런 삶을 우리에게 선물해 주십니까? 우리가 무엇을 가지든지 어떤 성공을 하든지, 어디에서 살든지 한국이나 미국이나, 무슨 사업 어떤 일을 하든지,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내 잘되고 너 잘되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방 쓸고 돈 줍고’ 그런 다 같이 기뻐하는 좋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어렵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주신 은혜로, 주님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이 삶을 살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모든 성경에 나오는 종들은 믿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삶과 생활이 남에게 유익을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다윗도, 다윗을 왜 하나님이 이렇게 그와 그의 생애, 그의 나라와 가정, 가문, 자손들을 축복하시고, 왜 이토록 아끼고 사랑하시며 다윗 편에 서셨습니까? 왜 하나님이 사울은 버리고 다윗을 사랑하셨습니까? 다윗이 누구보다도 특별한 위대한 정치가냐,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윗은 그 성품이, 그의 인격이 절대로 남을 해롭게 안 합니다. 다 같이 잘 사는 언제나 양보하고 언제나 남을 위해서 언제나 귀한 일을 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엔겐디라고 하는 황무지에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서 숨어있습니다. 사울은 왕인데도 욕심이 있어 자기 사위도 죽이며, 자기 사위를 도와주는 제사장도  85명을 죽였습니다. 이렇게 사람이 욕심을 부리면 안 죽이는 게 없습니다. 우리나라 왕들도 보십시오. 자기 아들, 형제, 부모도 죽입니다. 세조 같은 사람은 조카도 죽이고 무섭습니다. 자기 살려고 할 때 안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이 사위인데도 창을 던집니다. 다윗은 기적같이 피해 겨우 살아 나중에는 궁궐에 있을 수 없어 도망치는 데, 끝까지 다윗을 따라옵니다. 그렇게 군대를, 오늘도 3000명을 풀어 가지고 다윗을 따라 갑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안 믿으면 말도 안 합니다. 날마다 기도하면서 이럽니다. 새벽기도 안 빠지면서 이런니까 참 이상합니다. 모두 하나님의 뜻이라고 그러고 합니다. 이게 마귀의 뜻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이거 하나님 기뻐하는 일이고, 당연히 다윗은 나쁘니까 없어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아무리 나쁘고 잘못했을 지라도 남을 해치는 것은 하나님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건 하나님의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길을 걸어가도 말을 해도 남에게 해 되는 말하고, ‘나는 잘했다. 너 못했다.’ 그러면 이미 그 사람은 시험 든 것입니다. 저도 집에서 말 할 때, ‘아~ 집사람 잘못하고 내 잘했다.’라고 제가 기도하지 않아서 그 말 나갑니다. 그 말 자체가 벌써 제가 잘못된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주장하는 마음이 아닙니다. 저도 그런 말 할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뭐 이렇게 했냐? 그럴 수 있냐?’ 그래도 집사람은 ‘주의 종 목회하는 데, 사람 같지 않은 거.’ 그러지도 않고 가만히 기다립니다. 그러면 제가 깨닫습니다. ‘아이고~ 내가 또 잘못 말했구나. 아이고~ 내가 기도하지 않아서 엉뚱하게 말했구나.’라고 당장 제가 깨닫습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잘했다.’ 그러면 이미 마귀에게 제가 걸려듭니다. ‘나는 의롭
고 착하며, 나는 문제없고 너 문제 있다.’ 그러면 벌써 시험든 것입니다. ‘나는 목회 잘하는 데, 우리 교인들이 못한다. 나는 기도 많이 하고 의로운데, 장로님들 때문에 교회 안 된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 말 하면 이미,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못 선 것입니다. 내가 틀린 것입니다. ‘나는 잘했는데 우리 아이들 못한다.’ 그러면 틀린 것입니다. 그 마음 들어오면 벌써 틀린 것입니다. ‘나는 잘 하는데 오늘 이 시대가 문제다.’ 아닙니다. 언제나 ‘내가 잘못하고 부족하다.’ 이럴 때 그 가정에, 그 나라에 평화가 오고 다윗과 같이 그 가는 길을 하나님이 열어주십니다.

  오늘 다윗은 어디에 숨어 있었습니까? 막 3000명을 풀어가지고 오니까, 다윗은 목동 출신입니다. 엔겐디에서 계속해서 양을 치니까 어디에 뭐가 있는지 너무 잘 압니다. 우리나라처럼 소 먹이러 가면 아침에 갔다 저녁에 오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은 양을 먹이러 가면 6개월 씩, 1년 씩 집에 오지도 않고 계속 풀 뜯으러 양을 몇 백 마리 데리고 다닙니다. 다윗은 그 지역에 비가 오고 추위가 오니까 늘 숨는 굴을 잘 압니다. 훤하게 압니다. 사울이 자기를 찾으러 군대를 이끌고 오니까, 다윗은 황무지 굴속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사울 왕이 전부 찾다가 굴로 들어와 볼일을 봅니다. 원어에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 뒤를 밀었다는 것은 이제 화장실에 온 것입니다. 임금이니까 아무데
나 못보고, 그래도 체면으로 굴속에 들어와 ‘옷을 앞으로 무릎을 내렸다.’는 말입니다. 모두 화장실 용어입니다. 그때는 통옷을 입었습니다. 이제 옷 내리고 힘 줄때에 다윗이 뒤에서 봅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같이 있던 부하가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며, 끊임없이 몇 년을 이렇게 죽이려고 하는 악한 왕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저 왕을 해치우라고 하나님이 붙여주신 겁니다.’ 칼을 찌를 것도 없이 헤딩만 해도 그냥 나가떨어집니다. 창도 필요 없습니다. 뒤에서 그냥 하나만, 부하도 없습니다. 그 굴에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이 사람만 볼일 보고, ‘이 사람아! 가만있게!’ 하고 혼자 올라왔습니다. 화장실에도 혼자 가면 안 되는데 안심하고 와 가지고 이래 앉아있는데, 그냥 탁 치면 됩니다. 다윗은 골리앗도 이긴 사람입니다. 다윗은 사자하고도 싸워서 이긴 사람입니다. 그 용맹 있는 다윗 앞에 지금 나이 많고 자기를 죽이려고 끊임없이 고통을 주며, 잠 한잠 못 자게 혹독한 고통을 준 사울 왕이 거기 앉아있는데, 더구나 뒤를 보고 앉아있는데 그냥 귀 잡고 때리면 됩니다. 세상에 원수가 1m(미터) 앞에 이렇게 와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여러분! 고통을 안 당해 그렇지 정치적인 이런 고통은 세상이 말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어떻게 했습니까? ‘절대로 그러면 안 된다. 내가 살기 위해서 임금을 죽일 수 없다. 나를 해쳤다고 내가 해칠 수 없다. 하나님이 기름 부은 종을 절대
로 그럴 수 없다. 내가 임금 되기 위해서 임금을 죽이는 것은 안 된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도 이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저는 간증하라고 하면 제가 잘한 건 없어도, 이런 이야기는 수없이 많이 할 수 있습니다. 어떤 기회가 내게 와도 떡이 내게 굴러 와도 복이 내게 굴러 와도 잡으면 안 됩니다. 내게 좋다고 해서, ‘이건 내거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라고 받으면 안 됩니다. 모두 남에게 줘야 됩니다. 내가 가지면 벌써 죄가 됩니다. 내가 벌써 누리려고 하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울은 결국 전쟁터에 가서 삼형제 아들하고 모두 죽지 않습니까? 만약에 다윗이 그 때에 사울을 죽이고 왕이 되었던들, 다윗이 왕을 할 수 있겠습니까? 왕 못합니다. 남을 해치고 누리는 자리는 이 세상에서 누릴 수가 절대로 없습니다. 남을 해치고 남을 불행하게 하며 앉아있는 행복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남의 재산을 빼앗아서 누릴 수 있는 행복은 절대로 없습니다. 이 세상에 불행이, 고통이 실패가 공연히 오는 게 아닙니다. 모두 잘못한 자기의 인과보응에서 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를 바랍니다. 신문에 나는 큰 사건들, 우연하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베풀면 행복이 오고, 사랑을 심으면 또 한 축복이 옵니다. 그러나 미움과 증오와 시기와 질투로 내 살기 위해서 남을 해치는 것은 반드시 불행한 것이 돌아옵니다. 남의 행복을 빼앗지 마십시오. 남의 재산을 빼앗지 마십시오. 남의 재산 빼앗는 사람 너무 많습니다. 큰 기업 멀쩡하게 잘 되는 기업, 권력을 잡았다고 빼앗는 거, 역사에 얼마나 많이 봤습니까? 안됩니다.

  우리 교회도 엄청나게 부자 한 분이 오셨는데 이 분은 남의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신문에 큰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제가 우리 교인이라고 말 안했습니다. 그 어머니가 자기 딸하고 이렇게 좋아하는데, 자기 딸 말고 사위될 사람이 다른 아가씨를 좋아해 청부를 해 그걸 죽여 버렸습니다. 남의 행복과  재산을 빼앗고 행복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간단합니다. 어떤 분은 형부도 빼앗습니다. 있을 수 있습니까? 언니 잘 사는데 형부를 빼앗습니다. 여러분! 동생 믿지 마십시오. 안 됩니다. 신문에 보니까 여자친구가 대학친구를 데리고, 자기 약혼한 남자하고 춘천에 드라이브를 갔습니다. 슈퍼에 가서 약혼한 아가씨가 무엇을 사가지고 왔는데, 그 30분도 안 되는 사이에 같이 데려간 친구하고 약
혼 남자가 둘이 눈이 맞아 기어이 약혼녀 버리고 그 사람하고 결혼하였습니다. 그럴 수 있습니까? 약혼하고도 친구 데리고 다니지 마십시오. 믿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더라도 남의 행복, 남의 축복, 남의 자리 엿보지 마십시오. 빼앗지 마십시오. 여러분! 남이 잘 사는 일에 우리가 복을 빌어주고 축가를 불러주며, 노래를 불러주고 기도해 주는 복의 근원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서로 사랑하며 ‘너 살고, 나 사는 나라’를 만들어야 됩니다. 다 같이 잘 사는 나라 만들어야 됩니다. 오늘 한국교회 우리 사회는 너무 인간관계가 파멸되어 있습니다. 전부 모든 분야에 ‘혼자만 살겠다.’합니다. 교회도 그렇습니다. 원로 목사님하고 후임자하고, 우리 기독교계 대표적인 몇 개 큰 교회들이 본을 보이지 못 했습니다. 원로 목사가 후임자 데려놓고 후임자를 천하에 망신주고 그럼 되겠습니까?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저도 부목사님 모두가 천사가 아닌 이상 허물이 있어도, 딸 같이 생각해서 모두 묻어 가지고 어디 좋은데 가도록 하지, 그걸 교인들 앞에 공개하고 신문에 내개하면 되겠습니까? 후임자를 왜 그렇게 합니까? 사람을 왜 그래 잔인하게 죽여 버립니까? 그리고 모두 ‘기도하고 그랬다.’고 합니다. ‘하나님 뜻이고 성령의 감동하심과 충만하심으로 이런 짓 한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있던 교회는 교회를 반 토막을 냈습니다. 날마다 싸우더니만은 톱을 가지고 지붕 위에 올라가서 대들보를 잘라 가지고 나누었습니다. 모두 한 가지 말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기도해 가지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다.’라고 합니다. 여러분! 내 잘 되고, 너 해치는 일은 마귀입니다. 하나님이라 그래도 절대로 하나님은 그곳에 같이하지 않습니다. 밤낮으로 금식기도, 통성기도, 아무리 해도 그들은 마귀에게 놀아나고 있습니다. 제가 별의별걸 다 봤습니다. 그 교회 자른 교회, 제가 목회까지 했는데, 모두 망했습니다. 안 망한 사람 없습니다. 저렇게 열심히 새벽기도를 하루도 안 빠집니다. 그런데 그 분들 몽땅 다 망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를 갈랐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자기들이 갈라놓고 찬송합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안 받으십니다. 후임자가 원로 목사님 못 살게 하고, 요사이 어느 교회는 원로 목사님이 강단 위에다가 요를 갖다 놓고 여기 와서 철야기도, 금식기도 합니다. ‘후임자! 너 그럴 수 있냐’ 그리고 여기 와서 또한 금식하는 목사님도 계십니다.

  한국교회가 평안이 없습니다. 지금 목사, 장로끼리 막 생명 걸고 싸웁니다. 교회가 좋은 본을 보여야 되는데 본을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잘 했으니 내말 들어라. 내가 최고다. 내가 의롭다. 너 틀렸다. 너 목사 나가라. 내가 잘 하니 장로님 당신들이 잘못했습니다.’ 강단에서 막 쳐 댑니다. 누가 치라고 올린 강단이 어디 있습니까? 축복해주고 위로해 주며, 다 같이 반성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이거 본받아 가지고 오늘 우리나라가 안 싸우는 곳이 없습니다. 학교도 대판, 기업도 대판, 정치고, 여의도고 뭐 하여튼 어디고 간에 우리나라 사람은 해외 가도 싸웁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때에 이렇게 교실에서 싸우고는 이렇게 ‘야~ 수업 끝나고 다리 밑으로 와.’ 이렇게 해서 또한 거기 가서 대판으로  싸웁니다. 우리 모두 싸움하지 맙시다. ‘내 잘했다.’ 이런 말은 하지 맙시다. 이렇게 해서는 문제가 해결 안 됩니다. ‘나는 부족합니다.’해야 됩니다.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3절에 보면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라고 나옵니다. 에베소서 4장 31절-32절,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따라하십시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불쌍히 여기며,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으로 입으라.” 우리도 옛사람은 나 밖에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새 사람 되며, 성령이 내 안에 오시고 주님이 내 죄 사해 주시며, 마귀에게 속한 우리를 건져 주셨기에 우리는 새로운 마음으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할렐루야!

  내 마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마음, 성령이 주시는 마음입니다. 오늘 이 시간 나온 모든 여러분의 심령위에 성령이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 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주 안에 감추인 새 생명 얻으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하늘의 은혜와 평화를 맛보니 찬송과 기도로 주함께 살리라. 영생을 맛보며 주 안에 살리라 오늘도 내일도 주 함께 살리라.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 옛것은 지나고 새 사람이로다 그 생명 내 맘에 강같이 흐르고 그 사랑 내게서 해 같이 빛난다. 영생을 맛보며...♬ (찬송가 493장) 아까 우리 김 집사님은 한 절만 불러도 박수 해 놓고 저는 지금 몇 절을 불러도 박수도 안 하고 도대체...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이 축복, 이 영광, 이 부유함, 이 자유함, 이 이상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을 얻었으니, 주님이 내 안에 계시니 이런것 가지고 그러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은 왜 사랑을 못합니까? 마귀에게 속했으니까... 마귀, 죄, 사망, 똑같습니다. 삼박자라고 그러지 않습니까? 죄가 있는 곳에 마귀가 있고 마귀가 있는 곳에 사망이 있으며, 사망에 매여 있으니 누굴 사랑하고 누굴 덮어 주겠습니까? 예수가 내 안에 계시니, 여러분! 지난번에 사람 그렇게 많이 죽인 그 지존파라든지, 막가파 그 사람들도 너무 예수의 사랑에 감동을 받아 몸을 남에게 감사하며 주고 갔습니다. 그 안에서 화장실 청소하고 성경 읽으며, 기도하면서 모두 사랑하다가 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의 사랑이 내 안에 강같이 흐르니까 주고 싶어 미치는 것입니다. 마지막엔 간수장 위해서 기도하고 그렇게 가는 것입니다. 예수의 사랑이 내 안에 강같이 흐르니깐.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예수의 생명,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자녀의 생명이 여러분과 함께 하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 여기에 우리 이 목사님 계시는데 며칠 전에 우리 아버님 추도예배 하는데, 우리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에 이 추도 예배는 원래 기독교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라파, 유럽 사람들은 어떤 사람 무슨 기념을 하더라도 죽은 몇 주년은 일절 안 한다고 합니다. 대신 탄신으로 합니다. 그래서 모차르트 탄신 몇 주년, 베토벤 탄신 몇 주년이지, 모차르트 죽음 몇 주년은 절대로 하는 거 없다라고 합니다. 기독교 나라는 링컨 탄신 몇 주년입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기독교는 언제나 생명, 그래서 우리 기독교의 최고 명절은 두 개인데 하나는 성탄절이고, 하나는 부활절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절기는 두 개 밖에 없습니다. 최고의 절기가 성탄절과 부활절인데 똑 같은게 무엇입니까? 성탄절은 예수님 탄생하신 날이고, 부활절은 다시 온 인류를 살린 날입니다. 전부 생명 있는 절기에 맞춥니다. 예수님 돌아가신 날 지키는 게 어디 있습니까? 예수님 십자가에 못 박힌 날을 지킵니까? 그거 지키는 게 아닙니다. 탄생하신 거. 기독교는 생명입니다. 생명...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는 돌아가신 분에게 예배 안 드리는 거는 ‘돌아가신 분은 하늘나라 가셨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영광스러운 아버지 보좌에 가 계시는데 하나님께 예배드리면 우리 아버지도 거기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지, 땅에 있는 무덤에 있는 귀신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1년에 한 번씩 귀신 되어 찾아오는 그 아버지가 아닙니다.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 나라에 가 계십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기독교는 살아계실 때 잘 하는 것입니다. 살아 계실 때 굶어놓고 말이지, 돌아가시면 부사 갖다 깎아 놓고 그거 잡수시고 가면 다행인데 자기가 먹고 안 됩니다. 그것은 살아계실 때 이번에 부사 해 드리고 잘 해 드리고... 할렐루야!

  살아계실 때 부모에게 잘 해야 됩니다. 돈도 많이 드리고, 아끼지 마십시오. 부모님이 먼저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잘 됩니다. 저도 전도사로 있을 때 교회에서 텔레비전을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어머니 먼저 해 드렸습니다. 시골 전 군에서 텔레비전을 우리 아버지, 어머니 먼저 보셨습니다. 40년 전에 그 때 어려웠습니다. 텔레비전 보기가 어려웠습니다. 냉장고도 제일 먼저 우리 어머니 해 드렸습니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잘 해야 됩니다. 용돈 많이 드리고, 연세 많으면 돈이 최고입니다. 어떤 분은 왜 연세 많은데 돈이 필요하냐 하시는데 나이 많아 보십시오. 믿을 게 하나도 없는데 돈 밖에 없습니다. 왜 돈을 안 드리십니까? 돈 많이 갖다 드리십시오. 드리면 나중엔 다시 돌아옵니다. 그게 어디로 가겠습니까? 연세 많아 가지고 살아 계실 때 살아 있는데 맞추어야 됩니다.

예를 들면 귀신 제사 지내면 어디든지 ‘오세요. 오세요.’ 그러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모두 어이어이 그러면 다 오게 돼 있는 게 귀신입니다. 그래서 아버지한테 제사 지내면서 아버지 이름으로 하면 아버지가 오는 게 아니라 아버지를 위장한 귀신이 옵니다. 그런 아버지 같으면 내가 괜찮지만, 아버지 귀신이 오는 게 아니고 돌아다니는 이 많고 많은 귀신이 찾아오는데, 엉뚱한 귀신만 좋게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십시오.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 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남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니까 사랑하며 용서합니다. 할렐루야!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사는 길이 하나님이 성령이 기뻐하는 일 입니까? 다 같이 사는 길, 너도 살고 나도 살고, 당신도 좋고 나도 좋고, 부모님도 좋고 나도 좋고, 우리나라도 좋고 나도 좋고, 세계 우방국가 하고도 다 잘 지내고, 모든 세대와 함께 잘 지내는 길이 무엇입니까? 교회도 그렇습니다. 교회도 500명만 넘어서면 그 지역을 위해야 됩니다. 1000명만 넘어서면 한국 교회를 위해야 됩니다. 자기 교회만 생각하고 목회하면 안 됩니다. 우리 교단의 짐도 짊어지고 교계의 짐도 짊어지며, 나라와 민족의 짐도 짊어지면서 우리 교회로 말미암아 나라도 잘 되고 우리 정치도 잘 되며, 경제도 잘 되고 한국 교회가 모두 잘되며, 세계가 잘 되는 일을 우리가 생각하며 목회해야 됩니다. 여러분이 마
음을 넓히셔서 내 하나만 생각하고 살아가지 말고 항상 전체를 생각하면서, 넓게 그물을 펴는 다윗과 같은 복된 나라, 복된 가정, 복된 축복이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김삼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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