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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께 속한 자유인 (고전 7: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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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복을 받은 자들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죽음과 두려움, 죄와 심판, 그리고 세상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믿습니까?
오늘 본문은 이러한 축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본문 22절입니다.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자요 또 이와 같이 자유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당시 그리스도인 가운데 종의 신분으로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종의 신분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요 더 이상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인 종의 신분이나 자유인의 신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안에 속했느냐 속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내면적 자유인이 참 자유인이라는 것입니다. 외형적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자유를 잃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독립하는 것이 자유라고 아담을 유혹했습니다. 아담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수로 빌라도 앞에 섰지만 사실은 자유인입니다.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유인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예수님을 자기 마음대로 재판하는 듯이 큰 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두려움과 불안의 종이었습니다. 그러한 빌라도의 심리상태를 성경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감옥에 넣은 바리새인들이나 제사장들이 오히려 자유인이 아니라 시기와 독선과 무지의 종이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 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23절입니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옛날에는 종이 되는 이유가 세 가지였습니다. 전쟁포로, 빚을 갚지 못했을 경우, 그리고 종의 자식은 자동적으로 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눈가가 값을 지불하고 사서 놓아주면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값을 치른 종은 문서상으로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더 이상 이전 주인의 노예 상태로 있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사회 상황을 비유로 하여 성도들을 값으로 샀다고 말합니다. 성도들을 값으로 산 것은 금이나 은과 같은 현실적인 재화로 산 것이 아니라(벧전 1:18)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역사적이고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값을 치렀기에 우리는 더 이상 사탄과 죄와 죽음의 종이 아닙니다.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만 섬기는 종이 되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을 위하여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은 세상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세상의 종이 되어 삽니다. 어떤 이는 돈의 종이 되어 삽니다. 돈은 다스려야지 사랑하지 말라 했습니다. 미국 시골에서 있었던 얘기입니다.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은 할머니 한분이 목사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렇게 사랑하던 우리 집 개 메리가 죽었습니다. 장례식 주례를 해 주세요.” 목사님은 한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저는 개 장례식은 못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개를 너무 사랑해서 장례식도 치러주고 비석도 만들어 줍니다. 거절을 당한 할머니는 일어서 나가면서 독백하듯이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 집 메리를 위해서 보험을 든 것이 있었는데 이번에 메리가 죽자 보험금을 탔습니다. 5천불을 탔는데 이 돈은 장례식을 치러주는 목사님께 모두 드리려고 했습니다. 목사님이 못하신다면 건너 마을에 있는 천주교 신부님에게 부탁을 드려야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목사님이 할머니 가는 길을 막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할머니, 왜 그 메리가 개신교도였다는 것을 말하지 안 했어요?”라고 했답니다. 그 목사님은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분이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도박의 종이 되어 삽니다. 우리 사회가 지금 “바다이야기”로 홍역을 치르고 있습니다. 도박은 중독증이 있습니다. 일단 도박에 미치면 헤어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도박의 종이 됩니다. 이번 추석명절에 <타자>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타자’란 화투를 특별히 잘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한국 제일의 ‘타자’라는 선생이 젊은 제자에게 화투를 가르치고 말합니다. “적당히 하다가 그만두라! 그렇지 않으면 손을 하나 잃게 되고, 어니면 생명을 잃는다.” 결국 화투하는 사람들은 거기서 헤어나지 못하더라고요. 한국 3대 ‘타자’ 가운데 하나라는 사람도 보니 의수를 하고 있었습니다. 손이 잘린 것입니다. ‘타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거의 다 죽든지 불행한 삶으로 마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또, 어떤 이는 판단의 종이 되어 삽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틈만 나면 자기들의 잣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쉽게 저지르는 죄가 판단의 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까? 하나님이 판단의 주최가 아니라 자신들이 판단의 주최로 살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이 판단하지 말라고 그렇게 강조했습니까?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정죄를 징계하시면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이유는 판단 받는 사람을 보호하시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판단하는 사람을 그 판단의 흉악한 결과로부터 보호하시기 위해서 입니다. 아무리 의로운 쪽에 서서 하는 판단이라도 판단하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 상처가 생깁니다. 그리고 마음이 단단해 집니다. 영혼이 메마르게 됩니다. 기도가 막힙니다. 판단은 분노나 미움을 촉발하게 합니다. 분별과 판단은 다릅니다. 분별은 영적인 지혜에서 오는 반면, 판단은 분노의 영과 미움의 영을 불러 옵니다. 판단은 나의 의(義)의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재는 것입니다. 판단의 영에 지배를 받게 되면 잘못을 누군가에게 전가하되 책임은 지려 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제일 잘 섬긴다고 생각했던 자들입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 가운데 의외로 판단의 영에 붙들리어 사는 분들이 많습니다. 판단의 영에 붙들려 살면 마음의 병과 육체의 병에 걸려 살게 됩니다. 판단의 영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판단하려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내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어? 하나님은 과연 나를 사랑하시나?” 어려운 일이 생길 때 우리의 잣대로 하나님을 판단하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판단의 영에서 자유로웠기에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판단할 수도 있었습니다. 당시 사람을 죽여 제사하는 것은 이방 종교의 풍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주어졌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판단하지 않고 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지 않고 오직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이 되고 축복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또, 남을 미워할 때 사람의 종이 됩니다. 미움의 노예에서 벗어나야 자유인이 됩니다. 삶은 곧 인간관계라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닙니다. 서로 부딪치며 살다보면 미워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서 빨리 해결해야 합니다.
제가 젊은 시절 흥미진진하게 본 영화가 있었습니다. <빠삐용>이란 영화입니다. 스티브 맥퀸과 더스틴 호프만이 주연하는 영화입니다. 실존 인물인 앙리 샤리에르의 자서전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빠삐용’(papillon)은 프랑스어로 나비를 의미하는데 앙리 샤리에르의 별명입니다. 빠삐용은 살인죄로 ‘악마의 섬’이란 곳에 유배됩니다. ‘악마의 섬’이란, 그 섬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한 사람이 없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호심탐탐 탈출 기회만을 노렸습니다. 번번이 실수하여 결국 독방에 갇히게 됩니다. 빛도 차단된 독방입니다. 그는 그곳에서도 살아남기 위하여 운동을 합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방을 걷다가 벽에 부딪혀 코피가 납니다.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도 잡아먹습니다. 영양을 보충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까지 계속 탈출을 시도한 것은 그는 결코 살인한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나이 24세이던 1930년 3월 26일 새벽 3시 살인사건이 일어난 근처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으나 그 사건과는 아무 연관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명심에 불타던 젊은 검사는 사건 현장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앙리 샤리에르를 범인으로 지목하였고, 거짓 증인까지 내세워 그에게 살인 누명을 씌웠습니다. 이듬해인 1931년, 법정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그는 종신수 유배지에 유배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자신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검사와 거짓 증인들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이 그로 하여금 ‘악마의 섬’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게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앙리 샤리에르는 자루에 야자열매를 채워 바다에 던진 후 그것을 구명대로 삼아 절벽 위에서 바다를 향해 뛰어내렸습니다. 그가 탈출을 시도한지 아홉 번 만에 상어 떼가 우글거리는 섬에서 탈출에 성공합니다. 탈출에 성공한 그가 환호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그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시작한 지 13년 만인 1944년이었습니다.

그가 ‘악마의 섬’에서 탈출한 이후의 이야기는 그의 두 번째 자서전인 <방코>(Banco)에 상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탈출 직후 그는 남아메리카의 밀림 속에 몸을 숨깁니다. 밀림 속에서 무서운 존재는 당연히 호랑이, 사자, 곰, 독사와 같은 것이라고 우리는 상상합니다. 그러나 앙리 샤리에르에게 그런 짐승은 전혀 무섭지 않았습니다. 권총으로 물리치면 됩니다. 그에게 밀림 속에서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웃는 얼굴로 다가오지만 사기를 치거나 자신이 탈옥수임을 알고는 공갈협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인간에 대한 증오심으로 넘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에게 살인범의 누명을 씌운 자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모든 것을 견디어냈습니다.
마침내 범죄시효가 만료되자 1967년 꿈에도 잊을 수 없었던 프랑스 파리에 입성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61세가 되었을 때입니다. 36년 동안 오직 복수의 마음으로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그는 번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과연 복수를 해야 하는가? 그는 8일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원수들을 용서하기로 하나님 앞에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서전의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장식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리고 나는 나 자신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친구여, 네가 이겼다. 너는 이제 자유인이다. 너는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 서 있다. 네가 복수하려던 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더 이상 알려고도 하지 말아라.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 가운데 네가 가장 행복한 존재다’.”

누가 자유인입니까? 복수를 포기하고 원수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용서하십시오. 그래야 자유인이 됩니다. 사람의 종으로 살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십시오. 그래야 주님께 속한 자유인이 됩니다. 한 여인이 두 남편을 섬길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만일 누가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면서 세상일에 흠뻑 젖어 있다면 그는 세상의 종이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남은 생은 오직 그리스도만을 위하여 살겠다는 다짐이 이 아침에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김성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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