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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 (느 9: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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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한 번 먹으면 모든 기억이 지워지는 약이 있겠습니까? 닐 기유케트가 쓴 [모든 것을 새롭게]라는 책에서는 그런 약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머스(Mirth:기쁨)라는 주사입니다.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 반응 차단'의 영문 머리글자 약자입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자꾸 기억이 나 고통스러운 사람들이 이 주사를 맞으면 고통스러운 기억을 한꺼번에 싹 지워 줍니다. 불과 한 달 전에 남편과 사별한 54세의 루이자라는 부인이 나옵니다. 남편과 사별한 후 남편에 대한 기억으로 괴로워합니다. 남편의 외모와 웃음이 눈에 선한 듯합니다. 그의 유머 감각, 친절한 성품, 변함없는 사랑, 그리고 독실한 신앙이 생생하게 떠올라 고통스러워합니다. 의사는 고통스러운 기억을 모조리 지워주는 머스를 맞으라고 합니다. 24세기 최고의 발명품 가운데 하나인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기억 반응 차단'(an acronhym for Mnemonic Interception of Reactions to Traumatic Happenings)이라는 주사를 맞으면 공포와 분노, 좌절 등 모든 종류의 정신적 고통을 사람의 의식에서 삭제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소설 속의 이야기입니다. 실제 `망각의 알약'이 연구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애초부터 고통스러운 기억이 정신적 장애를 가져올 만큼의 강도로 저장되지 않도록 막아주거나, 옛날 기억이 되살아날 때마다 복용하면 그 기억의 고통을 완화시켜주는 망각의 알약을 만든다고 합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약이 얼마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으로부터 사람들에게 평안을 줄지 미지수입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스러운 기억, 이혼, 성폭행, 삼풍 백화점 붕괴와 같은 사고, 베트남 전 참전 군인들이 겪은 끔찍한 경험 등을 하면 그 기억을 죽는 날까지 남아 사람들 괴롭힙니다. 불면, 악몽, 사회생활 부적응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고 불리는 정신적장애에 시달리게 합니다. 그래서 평생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아무리 좋은 집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주어진다하여도 결코 행복하지 못합니다. 정상적인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이 치유되기 전까지는 그 기억의 포로로 정서가 병들어 살아갑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당시 유대인들에게도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이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스룹바벨이 포로에서 돌아와 파괴된 성전이 회복하였습니다. 철저하게 무너졌던 예루살렘 성벽이 총독 느헤미야에 의해 회복되었습니다. 그리고 흐트러졌던 예배 생활이 학사 에스라에 의해 회복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이었습니다. 시간은 지났지만 유다 민족이면 누구나 기억하고 있는 처절하고 치욕스러운 기억들이 있었습니다.바벨론 포로 생활하면서 얼마나 많은 아픔 기억이 있었겠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제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열조가 교만히 하고 목을 굳게 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입니까?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은혜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어 선민을 만들어 주시고 애굽에서 종살이 하고 있을 때 그들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홍해의 기적을 통해 구원해 주시고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 먹이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참으로 참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을 섬기며 복된 삶을 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18절을 보십시오. 광야에서 송아지를 부어만들어 그것을 가지고 애굽에서 인도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설만하였습니다. 업신여기고 멸시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무엇을 하였습니까?
25절을 보십시오. 견고한 성들과 기름진 땅을 취하였습니다. 먹고 살만하게 되었습니다. 부자가 되었습니다. 배불리 먹어 살찌고 큰복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26절을 보십시오. 오히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주를 거역하고 주께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멸시하였습니다.

바벨론 포로고 끌려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치욕스러운 삶을 산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끝없이 용서해 주었는데도 그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열왕과 방백과 제사장들과 열조가 주의 율법을 지키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악행을 저질렀습니다(35).
그래서 오늘날 어떤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까? 36,37절을 보십시오. 포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에 오기는 왔지만 여전히 종된 생활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방 왕의 속국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그들이 관할하고 있고 소산을 그들이 세금으로 거두어 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곤난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과 같이 사람은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인생을 지배해 버리는 고통스러운 기억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까?
오늘 성경에서 느헤미야와 레위인들은 이 치욕스러운 기억, 드러내 놓고 싶지 않은 기억, 민족적인 불행을 가져오게 하고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지 못하게 만드는 참으로 자유함과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기억을 어떻게 해결합니까?

1. 숨기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와 회개하며 드러내 놓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민족을 보십시오. 1절을 보십시오. 초막절이 끝나고 이틀 후에 다시 모였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하고 베 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쓰고 이방인들과 관계를 끊고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철저하게 자복합니다. 말씀에 비추어 철저히 회개를 합니다. 3시간 말씀을 듣고 3시간 자복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이것이 고통스러운 기억, 숨기고 싶은 기억, 나를 죄의 노예로 붙들어 놓고 있는 기억, 이루어 놓은 것을 누리지 못하게 하고 진정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하게 하는 부끄러운 기억으로부터 자유함을 받은 길입니다. 그 기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 옵니다. 하나님께 다 내어 놓으면 하나님은 주홍같이 붉은 죄도 양털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숨기면 숨길수록 위선자가 되고 그 고통스러운 기억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일본을 보십시오. 자꾸 과거의 잘못을 숨기려고 합니다. 위안부가 없었다고 합니다. 일제 36년은 한국을 근대화시켰다고 합니다. 그렇게 숨긴다고 숨겨집니까? 이웃 나라와 관계만 불편해집니다. 독일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끗이 시인하고 드러내 놓고 머리숙였습니다. 유럽에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과거가 이제 문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가 살다 보면 남에게 말하고 싶지 않고 자신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의 쓰라린 실패일 수 있습니다. 이혼일 수도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성폭행일 수도 있습니다. 알코올 중독일 수도 있습니다. 끔찍하고 충격적인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의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커다란 실수 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숨긴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세월이 지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강박증에 시달리고 자학하며 중독으로 회피해 보려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도피일 뿐입니다. 술을 진탕 먹고 잊으려고 한다고 잊을 수 있습니까? 눈을 뜨면 고통스러운 기억은 여전히 두려움으로 행복한 느낌을 덮어 버립니다. 공포감, 모멸감, 미움, 수치심은 여전히 내면 깊숙이 자리잡고 자신을 괴롭힙니다. 치유받지 못하면 신앙 생활을 해도 하나님과 진실한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형식적일 뿐입니다. 사람과도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못합니다. 무책임하고 충동적이고 진실하게 말할 자리에서도 거짓을 말합니다. 그 고통스러운 경험으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길은 우리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와서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시간이 모든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상처를 치유해 주십니다. 술로 잊는다고 잊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일중독으로 약물 중독으로 관계 중독으로 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남편 다섯을 두어 고통스런 기억으로 처참하게 살아가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자기 부모에게도 아는 모든 사람에게 숨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람 만나기를 싫어합니다. 대인 기피증, 대인 공포증에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인의 숨기고 싶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여인을 찾아갔습니다. 그 여인의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예수님께 내어 놓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께 자신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드러냈을 때 예수님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 4: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회복되어 동네에 들어가 사람들에게 자신이 만난 메시야를 소개하였습니다.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어떤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다할 지라도 우리 주님께 다 드러내 놓으시기 바랍니다. 사건과 정서를 구별하여야 합니다. 이미 사건을 지나갔습니다. 그 사건 속에 정서를 붙들어 놓으면 안됩니다. 느낌과 사실은 일치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내어 놓으면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간음죄를 졌습니다. 자기 부하의 아내를 범했습니다. 숨기고 싶은 기억입니다. 다윗이 그 고통스런 기억을 끝까지 숨기고 살았다면 다윗은 성군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선지자가 와서 그의 죄를 지적할 때 그는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았습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그의 죄를 용서해 주었습니다. 바울에게도 숨기고 싶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었습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살인 방조를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죽이려 했습니다. 베드로에게도 숨기고 싶은 고통스러운 기억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모른다 부인하였습니다. 저주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도 베드로도 우리 하나님께 다 내어놓고 용서받고 하나님께 쓰임받은 시대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예수앞에 나오면 모든죄사하고 주의품에 안기어 편히쉬리라 우리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1절)”
“예수앞에 설때에 흰옷을 입으며 밝고빛난 내집에 길이살리라 우리주만 믿으면 모두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205장 3절)”

2. 하나님이 고통스런 기억을 치유시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회개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 우리가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나갈 수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니까?
수많은 세월 동안 바벨론 포로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을 보시기 바랍니다. 레위인들이 하나님께 찬양하고 기도하는 내용입니다. 과거의 아픈 역사를 생각합니다. 천지 창조부터 출애굽까지 역사 회고(6-15)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내려갔던 땅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포로가 되어 치욕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광야 시대부터 바벨론 포로까지(16-31),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갈 때 반드시 통과할 광야입니다. 율법을 주시고 말씀을 붙들고 가라고 했습니다.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진정한 복을 누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하나님보다는 물질을 의지하다 결국 바알신을 섬기며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 물질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의 역사 회고(32-38)를 회고합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징계의 댓가로 간 땅입니다. 그곳에서도 순종치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지난 아픈 기억들을 고백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6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고 합니까?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라고 고백합니까? 원망하지 않습니다.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셔서 마땅히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십니다. 택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7).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성도님과 저를 택하신 분이시고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나를 만드셔서 그분과 결혼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그 사업을 하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고 그 고통을 겪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교회에 나오게 하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고통가운데 부르짖을 때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다를 갈라지게 하시고 바다 가운데를 육지같이 통과하게 하시고 원수를 진멸시켜 주시며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11). 말씀을 주시어 영적 만족을 누리게 하시며 먹을 것을 주어 배부르고 목마르지 않게 하십니다(13-15). 21절을 보십시오. 광야 생활 40년 동안 결핍함이 없도록 했다고 했습니다. 25절을 보십시오. 풍성한 삶을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0, 31절을 보시시오. 긍휼을 베풀어주시고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치유하지 못하는 고통스런 기억들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맡기면 내가 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을 하나님은 치유시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상처난 영혼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끝없이 쓰레기 통을 뒤지며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망가져 가는 정신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중독으로 쓰러져 가는 육신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죄의 노예가 되어 기쁨을 잃어버린 인생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고통의 늪 속에서 행복을 잃어버린 가정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망가져 가는 삶의 터전, 기업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애굽의 포로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광야에서도 인도하시고 먹여 주신 하나님, 바벨론 포로에서도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고통의 늪 속에 들어간다 할지라도 회복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지금 처함 고통의 현장이 먹고 사는 것 때문에 찾아갔다 노예가 되어 고통당한 애굽입니까? 소원을 가지고 가나안 복지를 향해 가지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광야입니까? 아니면 주신 복을 관리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교만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 바벨론 입니까?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나오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상처난 마음을 치유시켜 주시고 무너진 삶을 회복시켜 주실 줄 믿습니다. 외아들의 죽음 앞에 처절하게 무너져 갔던 여인도 예수님 만나 회복되었습니다. 문둥병으로 사람들과 가족들에게 소외되었던 고통스러운 기억을 가지고 살았던 문둥병 환자도 우리 주님 만나 회복되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 잡힌 여인도 주님 만나 용서받고 새삶을 살았습니다.

“주여 나의 병든 몸(영혼, 마음, 가정, 직장, 삶) 을 지금 고쳐주소서 모든 병을 고쳐주마 주 약속하셨네 내가 지금 굳게 믿고 주님 앞에 구하오니 주여 크신 권능으로 곧 고쳐주소서 (528장 1절)”
우리 하나님 말씀합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출 15:26)”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렘 29:11)”

3. 하나님은 고통스런 기억을 창조적으로 활용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고통스러운 기억을 통하여 깨달았습니다. 무엇을 깨달았습니까? 오늘날 종이 된 이유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36) 풍요로운 소산을 먹지 못하고 행복한 삶을 살지 못한 이유가 왜 그렇다는 것입니까? 34,35절을 보십시오. 돈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전쟁 준비를 잘못해서가 아닙니다. 건강하지 못해서가 아닙니다. 근본적인 것은 주를 섬기지 아니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무엇을 합니까? 3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잘 섬겨야겠다는 언약 문건을 만듭니다. 선언문을 만듭니다. 헌신 선언문을 만듭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를 비롯하여 민족 지도자 84명이 서명을 합니다. 이것이 10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과거가 거름이 된 것입니다. 과거가 거침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된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하나님께 가지고 나오면 하나님은 그것을 창조적으로 사용해 주십니다.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입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 내어놓고 맡기면 하나님께서 그 기억을 창조적으로 활용해 주십니다. 다윗은 간음으로 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 때문에 절망하고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가 부인하고 저주하고 갈릴리 호수로 도망하였습니다. 밤이 맞도록 고기를 잡았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이것으로 베드로의 인생이 끝난 것이 아닙니다. 그 새벽에 예수님은 도망간 그를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오른 편에 그물을 던지게 하여 밤새워 잡지 못한 고기를 153 마리를 한 번에 다 잡게 하였습니다.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신 후(고기와 떡) 예수님께는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먹이라”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치라” 다시 물어 보았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양을 먹이라” 사명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살인방조한 고통스런 기억이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 나쁜 경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을 가진 자에게 예수님을 찾아가셨서 그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려고 가는 사울에게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나타나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행 9:4)”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 그 아픈 기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 하나님의 사명을 주어 세상을 변화시켰습니다.

C.S 루이스 교수에게 한 젊은이가 "선생님! 신이 살아 계시다면, 이 세상에 형언할 수 없는, 설명할 수 없는 고통이 왜 이다지도 많습니까?"라고 질문했다고 합니다. 그때 루이스 교수는 '젊은 형제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러지 않아도 오만한데, 고통마저 없었다면 사람들은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고통은 사람들을 깨우쳐주는 하나님의 확성기지, 하나님의 메가폰이지'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치유시켜 주시고 나쁜 경험을 선하게 사용하였습니다 (롬8:28). 하나님께 내어놓으면 고통스러운 기억은 오히려 강한 생존 본능을 만들어 주고(약1:2-4) 탁월함을 향한 욕구를 주며(마25:21) 같은 상황으로 고통하는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는 독특한 경험이 되게 합니다.(고후1:3-4)

24세기 최고 발명품인 영혼의 진통제라는 머스를 다시 해 보겠습니다. 비극적 사건이 벌어진 사람은 24시간 내에 의무적으로 정부에게 맞게 했습니다. 루이자 부인은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거부하는 사람들이 사는 '제스트'(ZEST: '사회적 내성 교육 지역'[Zone of Education in Social To Ierance]로 옮겨갔습니다. 그녀는 '눈물의 골짜기'라는 제스트로 강제 이주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가보니까 이곳 사람들은 인위적인 쾌락이나 공포, 번뇌 같은 것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더없이 풍부하고 강력한 감정을 발산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보여 주는 생동감과 활력은 역설적이게도 그곳의 이름과 너무나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제스트('열정'이라는 뜻)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말 그대로 열정으로 가득 차서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도 슬픔은 있었고 특히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할 때의 고통은 쉽게 견디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루이자는 그곳에 도착한 직후 '고통 관리'라는 이름이 붙은 워크숍에 초청받았습니다. 워크숍의 책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로즈매리 할로우가 말합니다. "고통은 그 자체만으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오히려 고통은 나쁜 것이라고 해야 될 거예요.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고통이 좋을 때도 있어요. 심지어는 나쁜 점보다 좋은 점이 더 많은 경우도 있지요. 이것은 고통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사람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헤어진 경우라면, 우리가 겪는 고통은 바로 그 대상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 될 수도 있어요. 그들이 곁에 없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이따금 그들에 대한 그리움에 빠져 들기도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거든요. 그건 좋은 거예요.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키워 갈 수 있어요. 슬픔은 추하면서도 아름다움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제 슬픔은 그녀의 삶 가운데 일부일 뿐 전체를 지배하지는 않았습니다. 고통이 없는 '주'에서는 자살률이 위험수위에 올랐습니다. '주'에 사는 사람들은 고통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스 요법 덕분에 모든 고통이 제거되었지만, 극심한 권태는 몰아 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고통이 없는 삶은 지극히 건조하고 진부했으며 아무런 의미도 없게 되었습니다. 자살이 마치 전염병처럼 파국적인 상황으로 치닫게 되자, 정부는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는 무능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전복되고 말았습니다. 새로운 정부는 머스 요법의 부정적인 영향을 간파하고 그것을 전면 철폐했고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깨닫게 된 것은 그 이후의 일이었답니다.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눈물을 배워야 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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