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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라 (골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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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믿음을 위함이니....”(골로새서 1:4~5)

  목회의 삶 중에 많은 사람들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그 때마다 인생의 끝을 정리하는 그 분들을 보면서, 죽음 앞에서는 이 세상에 살면서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던 모든 것이 무익한 것임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죽음의 과정을 지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믿음이고 소망이며 사랑이라고 확인해 보았습니다.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죽어야 하고, 영원한 소망의 확신을 가지고 죽어야 합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그 사랑 안에서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랑만이 우리로 죽음을 축복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죽음을 가치 있게 맞이하게 해주는 우리가 꼭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분명하게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은 무엇 일까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 역시 믿음이고 사랑이고 소망임을 봅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지고 살 것을 말씀했고, 이 세 가지의 균형 잡힌 신앙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향해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한다”(살전1:3) 고 했고, 고린도 교회를 향해서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고 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대하여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골  1:3)고 기록했습니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너무 귀함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럼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시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자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이 예수 안에서 구원받고 영생을 얻는 진리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도마처럼 의심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의 사실을 목격하고 그것을 전하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도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요 20:25)면서 믿지 않았습니다. 이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도마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 20:28)고 하셨습니다.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보고서야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 20:28)고 고백하는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 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어 놓으신 모든 일들과 약속을 믿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루어 놓으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과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신 그 은혜의 약속을 믿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이러한 진리에 대하여 분명하고 철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을 때에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믿음과 함께, 소망은 무엇을 소망하는 것입니까?

  바울은 “하늘에 쌓아둔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그 소망을 위하여 살 것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 6:20-21)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에 보화를 쌓아 가는 사람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 1:3),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는”(벧전 1:4)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 하였도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딤전 6:13-15)라고 하면서,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딤전 6:17)고 했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하늘에 소망을 쌓아 가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믿음과 소망과 함께, 사랑은 무슨 사랑입니까?
  바울은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생명력입니다. 우리나라의 어머니들은 자녀들을 사랑하는 것 때문에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자녀사랑이 삶의 의욕인 것임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온전하고 풍성한 사랑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는 것이 되게 하여 더 큰사랑을 가지게 하는 신비적 삶을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모든 삶의 내용을 가치 있게 만들어 갑니다. 그 사랑 안에 있으면 죽음도 담대하게 맞이하게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하는 생활에 적극적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존재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는 사랑하며 사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주지 못하는데서 불행해 지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인들이기에, 그 사랑 안에서 산다는 것을, 모든 성도를 향해 사랑하며 사는 생활로 드러냈습니다. 이런 골로새 교인들을 볼 때에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과 소망과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입니까?
 
  복음의 말씀을 들음에서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6절)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르매’라는 원어 ‘파레이미’는 ‘가까이 있다’, ‘옆에 있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가까이 하고 옆에 두고 사는 것만이 아니라 그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복음의 말씀과 가까이 하는 신앙에서 듣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6)고 했고, 바울은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고 했습니다.
  복음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데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복음을 듣는데서 그들에게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듣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은 불행한 일입니다. 복음의 진리를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 귀가 열리는 데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는 데서입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대개의 사람들이 아는 것이 많습니다만 깨닫는바가 적어서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기간을 공부했고, 그렇게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해도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함으로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으로 살아감을 봅니다.
  깨달음에도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고,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으며, 매 맞고 깨닫는 사람, 그리고 잃어버리고 깨닫는 사람, 그리고 죽을 지경이 되고서야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 보면 어떤 사람이 한 드라크마의 동전을 잃어버리고는 그 동전 하나를 찾기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을 봅니다.(눅 15:8) 그것은 잃어버리고서야 그 드라크마가 귀한 것임을 깨닫는 깨달음은 늦은 깨달음입니다.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보면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가서야 깨닫게 되는데 그 깨달음은 아무 소용없는 깨달음입니다. 
  우리는 복음에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하심의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은혜를 깨닫는 생활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가지고 사는 역사를 만들어 줍니다.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려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사 44:18)

  ‘니고데모’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에 정통한 학자로 바리새인이고 산헤드린 의원으로 유대인들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밤중에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면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거듭남을 깨닫지 못하는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삽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고 반문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면서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고 하셨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은 못  배워서가 아닙니다. 깨닫는 지혜가 없어서입니다. 어떻게 보면 깨달음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축복입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가 들려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들을 수 있는 신령한 귀가 열려야 합니다. 들려진 그 말씀 안에서 깨닫게 하시는 성령의 깨우침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데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됩니다.

  열매 맺고 자라는 데서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열매를 맺어 자라는 도다’고 했습니다. 복음을 받아드려 복음의 열매를 맺을 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알곡의 신앙인이 되어야 자라 가는 신앙인이 됩니다. 복음의 알곡이 되어야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가지고 살아가는 교인이 됩니다. 복음을 받았으되 쭉정이가 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아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마 3:12)고 하셨습니다. 쭉정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쭉정이는 껍질뿐이기에 새로운 성장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쭉정이는 태워져 없어지고 마는 것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결코 쭉정이가 되지 마십시오. 쭉정이 신앙에서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복음의 진리를 주시기까지 하신 그 하나님의 의도를 이루어 드리는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의 확신을 가지십시오. 영생을 소망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이러한 알곡의 그리스도인으로 더욱 자라 가십시오. 그렇게 함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더욱 풍성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라’에 관해서 말씀했습니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출신으로 골로새 교회 설립자입니다. 바울은 그를 가리켜 우리와 함께 종이 되었고, 사랑을 받는 자이며,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군(7절)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옥에도 갇혔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에서도 선교에 큰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에바브라는 쭉정이가 아니라 열매를 맺는 신앙인이었습니다. 더욱 그리스도의 온전한 사람으로 자라 갔습니다. 이러한 에바브라는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을 살뿐 아니라 그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골로새 교인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부산행 열차에 한 꼬마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1,2 학년쯤으로 동행하는 어른도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나 낯설어하는 표정을 짓지 않았고 싱글벙글 기쁜 표정으로 즐거워하고 있었습니다. 창밖을 바라보며 황금벌판과 지나치는 창밖의 광경을 보며 즐겼고 기차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재미있어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꼬마의 모습은 의젓하게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었는데, 그 아이는 기차가 정거장에 설 때마다 밖으로 달려 나갔다가 들어오곤 했습니다. 이상해서 아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꼬마야, 어딜 갔다 오는 거니!” “우리 아빠한테 갔다 와요.” 꼬마는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너희 아빠가 어디 계신데?” 이 물음에 아이는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차의 기관사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셔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인생의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열차를 타고 가는 이 아이와 같을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믿음과 그분의 약속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확신, 그 분의 사랑 안에서 사랑하며 기쁨과 즐거움 속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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