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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의 손이 함께 하시매 (행 11: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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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설교에 마음이 찔렸습니다. 마음에 찔리면 회개를 해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스데반을 향하여 이를 ‘벅벅’갈았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바른 소리를 하면 듣기 싫어하는 것처럼 말이죠. 그리고 스데반이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이 보인다고 하자 귀를 막으면서 무자비하게 달려들어 돌로 내리쳐 그를 죽였습니다. 피를 본 야수가 본성을 드러내듯이 유대인들은 스데반의 죽음을 필두로 해서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대적인 핍박이 예루살렘에서 자행되었습니다. 특히 핍박에 앞장을 섰던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한다고 생각하여 교회를 아예 잔멸하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집집마다 들어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습니다. 심지어는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다메섹과 같은 이방지역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서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에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예루살렘에 더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도 외에는 유대와 사마리아 등 곳곳으로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흩어짐을 통해서 복음이 확산케 되었습니다. 신자들 개인적으로는 핍박이 슬프고 고달픈 것이었지만 거기에는 신자들을 흩어지게 함으로서 복음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가 숨어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는 그 흩어진 신자들이 이제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넘어서서 멀리 이방세계로 까지 나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핍박을 피해 흩어진 신자들은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갔습니다.

베니게는 페니키아를 가리키는데 팔레스타인 해변지역으로서 지금으로서는 얼마전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른 레바논지역입니다. 구브로는 팔레스타인 해변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섬으로서 싸이프러스라고 하는 지중해에 있는 큰 섬입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예루살렘으로부터 약 500킬로미터나 떨어진 수리아지방의 수도로서 로마시대 당시 로마, 알렉산드리아 다음으로 큰 도시였습니다. 당시에 인구가 50만 이었으며 그 화려함으로 인해서 동방의 로마, 동방의 여왕, 아름다운 도시 안디옥이라 불리워졌습니다. 핍박을 피해서 신자들은 이렇게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을 벗어나서 이제 이방세계 곳곳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주 예수를 전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디에 있든지 자신들의 처지가 어떻든지 복음을 전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복음전파의 열정은 마치 요원의 불과 같아서 그 어떤 것도 그들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멈추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핍박은 마치 불똥이 튀어 불이 더 확산되는 것처럼 온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지금 핍박을 피해 정처없이 이리저리 나그네처럼 피해 다니는 신세입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스데반과 같은 훌륭한 집사님을 잃은 충격과 슬픔도 가시지 않았습니다.(행8:2)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불쌍하고 처량합니다. 급히 도망하느라고 모든 살림살이와 집, 재산도 두고 떠났을 것이기에 가난한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환난과 핍박중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 생각은 고사하고 자신들 앞가림하기도 바쁘지 않겠습니까? 복음을 전하더라도 일단 생활이 좀 안정된 후에나 핍박이 잠시 수그러들기를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전도하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치 가난해지거나 어디가 아프거나 자식들이 속을 썩이거나 시험에 떨어지는 등 불행한 일을 당하면 위축되고 전도하는 것이 괜히 부담스럽지 않습니까?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힘든 형편이 전도문을 막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핍박을 피해서 흩어진 초대교회 성도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핍박을 피해서 이리저리 쫓기어 다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것에 주눅이 들지 않았습니다. 환난이 지나가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어서 자신들과 같이 고생하며 핍박을 받을지도 모르면 어떡하나 해서 전도에 소극적이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에 대한 대한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사람들을 살린다는 분명한 확신이 있었기 대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과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대속의 죽음이며 부활하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아들이신 것이 그들에게는 너무나 확실했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시며 그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을 그들은 전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구원받는다는 것을 그들을 분명히 확신하였습니다.

나아가 먼저 믿은 자신들의 삶의 목적이 예수를 전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온 세상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럴 때 믿고 셰레를 받는 사람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지만 이제 세상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것은 먼저 믿은 신자들을 통해서 이루신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해서 하늘나라를 넓혀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하여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그들은 알았습니다.

이에 그들은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한 번만 더 그리스도를 전파하면 죽인다고 엄포를 놓았을 때도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옳은가 너희들 말을 듣는 것이 옳은가 생각하라면서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전하였습니다.(행4:18-19, 행5:228-29 등) 감옥에서 금방 나와서도 다시 사람들에게로 찾아가서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행5:20-21) 이런 그들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행5;42) 그들은 집에 있든지 성전에 있든지 날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것을 전파하였습니다. 그들은 모든 기회를, 장소를 전도를 할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핍박을 피해서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게 되었을 때 자신들의 처지에 슬퍼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들에겐 자신들의 처지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 “오직 복음”이 그들의 삶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핍박당하고 환난당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이 처지가 인간적으로 볼 때 불행하고 처량하였지만 그런 것들이 그들이 전도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복음보다 시급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에 따라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초대교회 성도들이 어디에 있든지 자신들의 처지와 형편을 넘어서서 복음을 전파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전도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때와 환경, 형편을 가리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즉 무슨 일을 만나든지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먼저 예수님을 전파하겠다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내 형편이 좀 나아지면, 내가 건강해지면, 내가 결혼을 한 다음에, 내가 취직을 한 뒤에, 자식들이 결혼한 후에 등 조건을 내세우고 형편이 나아지기를 기다린다면 우리는 켤코 전도할 수 없습니다. 설사 그런 조건들이 충족된다고 하여도 형편을 앞세우는 사람들은 또 다른 이유 때문에 또 미루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현재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가장 절호의 전도의 기회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서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이 거부할 것 같지만 오히려 사람들은 어려움 가운데서도 무엇이 있길래 저렇게 예수를 전할까하며 더욱 관심을 가지고 복음에 대해 진지하게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죄수의 몸으로 있으면서도 간수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며 계집종은 그녀의 여주인에게 천국의 소망을 들려주었습니다. 바울도 옥안에 갇혀 있으면서도 로마황제이 근위대들에게 복음을 전하여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고 하였습니다.(딤후4:2) 즉 때 거리가 있든지 없든지 예수님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영어성경(niv)으로는 in season and out of season이라고 되었는데 이는 전도의 계절이든지 아니든지 전도하라는 것입니다. 즉 전도에는 철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전도할 때가 있고 지금은 전도할 때가 아니다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에는 때가 없습니다. 공부는 때가 있습니다. 학생시절에 공부하지 않으면 하기 힘든 것이 공부입니다. 농사도 때가 있습니다. 씨뿌리는 때가 있고 추수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에는 때가 없습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모든 처한 상황이 전도할 기회입니다.
가난하면 가난한대로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건강하면 건강한대로 아프면 아픈대로 자식들이 잘 되면 잘 되는대로 자식들이 속썩이면 속썩이는 대로 우리의 형편과 처지를 넘어서서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 전도인의 자세입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띠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10;14),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고전1:21). 전도는 이처럼 중요합니다.


이제 20절과 21절을 보십시오.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여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안디옥에 처음 도착한 신자들은 복음을 전하였지만 그들이 전도한 대상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직 헬라인들에게는 전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만나서 전도할 때도 “유대인이세요?” 물어보고 유대인이라고 하면 다가 갔지만 헬라인처럼 생겼거나 헬라인이라고 하는 자들에게는 복음을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당시 안디옥의 인구가 50만이며 그중 유대인이 7분의 1이었다고 하니 7분이 6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유대인들에게만 한정해 놓고 복음을 전하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세상 모든 족속을 제자삼으라고 하였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였지만 그들에게 땅끝은 땅 끝에 사는 유대인일 뿐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아직도 이방인들을 향햐서 마음이 열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설사 이방인들에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오랫동안 젓어 있던 이방인을 배타하는 유다이즘을 벗어던지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구브로와 구레네 출신 몇 사람이 헬라인들에게도 주 예수를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성령님이 그들 마음에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음성을 들려주었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그들 사람 자체가 개방적이고 진취적이어서 어떤 사람들에게라도 잘 다가가는 기질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이 헬라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한 것은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구분하지 않고 또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는 것을 밝히 깨달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은 유대인이지만 헬라인들에게 다가 갔습니다. 그들은 인종의 장벽을 넘어섰습니다. 율법에서 이방인들과 교재하지 말라는 율법의 장벽을 넘어섰습니다. 또 자신들은 떠돌아 다니는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정착하여서 안정된 삶을 누리고 있다는 외적인 조건도 넘어섰습니다.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여서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자신들의 복음이 그들에게 어리석게 보이면 어떠할까하는 염려도 넘어섰습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이 담대하게 용감하게 복음을 전하였을 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여서 수단한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전도하는 자는 절대로 사람을 가려서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헬라인들이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똑똑하다고 생각하면서 복음을 거부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왔고 이를 계기로 안디옥교회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저 사람은 예수 믿을 것 같지 않고 저 사람은 예수 믿을 것 같은데 오히려 반대로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사람은 복음을 전해도 꼭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만 다가 갑니다. 공부를 많이 하거나 돈이 많은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다가가지 않습니다. 부자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고 해서 꼭 교만한 것이 아닙니다. 또 가난하다고 하여서 꼭 겸손한 것도 아닙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누구가 구원받고 누구가 구원받지 못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나름대로의 선을 걷어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로 다가가야 겠습니다.

나아가서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의 손이 그들을 홀로 내버려 두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는 그들과 함께 해 주었습니다. 주의 손이 함께 했다는 것은 주님이 도우셨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자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주께서 어떻게 그들을 도우셨을까요? 사도행전 16장 13절 이하를 보면 그 실례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 빌립보에 건너갔을 때 그는 강변에 있는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행16:13-14)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주께서 루디아의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듣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안디옥에서도 주님께서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제쳤습니다. 성령의 감동감화의 역사, 복음을 깨닫는 역사를 주께서 친히 이루셨습니다. 그럴 때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헬라인들이 핍박을 피해 이리저리 피해다니는 유다인들이 전해주는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주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전할 때 가져야 할 중요한 자세를 배웁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복음을 전할 때 주님께서 내 곁에 계셔서 나를 도우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셔서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역사를 일으키시는 것입니다. 내 가 전도할 때 주의 손이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주의 손이 함께 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여시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단지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 도구로 사용되어지는 것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할 때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시므로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열심히 전한다는 심정으로 전도를 하면 됩니다. 전도자의 힘으로 사람의 속 마음을 변화시켜서 주를 믿게 만들어야 한다면 얼마나 힘들고 마음에 부담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며 믿고 안 믿고는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다고 생각하면 마음의 부담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입니다. 정말 어려운 일은 성령님이 하시고 나는 그 도구로 쓰임받는 것이니 즐겁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농담하듯이 전도할 수는 물론 없겠죠, 전도하면서 우리 안에 전도를 받는 사람이 꼭 돌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아가 내가 전도를 해서 어떤 사람이 주께 돌아 왔을 때 그것이 마치 내가 잘해서 거둔 공로요 열매인 것처럼 자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열심히 도구로 헌신했으나 그 도구를 통해서 일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나는 겸손하게 뒤로 물러서고 일을 하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해야 하며 주님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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