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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안식(5) : 길들임 (출 20:8~11; 마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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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5) - 길들임
출20:8~11/ 마12:1~8

시편 23편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양입니다.  이 말이 주는 경험적인 의미를 우리는 충분히 알지 못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양을 키우는 것이 삶의 일부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말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시편 23편을 좋아하고, 특별히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 혹은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또는 내 잔이 넘치나이다와 같은 말들은 좋아하지만, 여호와는 나의 목자다라는 말은 소홀히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목자이시라면,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서 길들여질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에서 말하는 우리가 좋아하는 말들은 목자에 의해서 충분히 길들여진 양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길들인다는 말을 하면, 생떽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생각납니다.  생떽쥐페리는 어린 왕자에서 여우와 어린 왕자의 대화를 통해 길들인다는 의미를 말해줍니다.  거기에 보면, 길들인다는 것은 우선 관계를 맺는 거라고 말합니다.  길들이기 이전에 여우는 수없이 많은 여우 중에 하나에 불과하지만, 길을 들이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여우가 됩니다. 

어릴 때 야생의 새인 때까치를 길들여 본 것이 기억납니다.  이 야생의 어린 새는 처음에는 나를 두려워했지만, 시간이 지나니까, 내가 다가가면 먹이를 달라고 입을 벌렸습니다.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아마 조금 더 길들여지면 내가 가는 곳을 졸졸 따라왔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길들여진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좋아진다는 것을 넘어, 나의 생각과 의지가 하나님의 생각과 의지에 깊이 의존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시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어린 왕자에서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이는 방법을 말합니다.  우선 참을성이 있어야 되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멀리 떨여져 있다가 하루 하루 지남에 따라 조금씩 가까이 다가와 앉게 되는 거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다가와 앉을 때 같은 시각에 오는 것이 더 좋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길들이는데 올바른 규칙(의식)이 있어야 되기 때문에.  규칙이 뭐야 라고 어린 왕자가 물으니까, 여우는 그건 어느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들고 어느 한 시간을 다른 시간과 다르게 만드는 거지라고 말해줍니다. 

이렇게 보면, 안식일은 하나님과의 사귐, 하나님께 길들여지는 데 필요한 규칙(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안식일의 시간은 다른 날과는 다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평일을 가리키는 이름이 따로 없습니다.  평일은 다만 안식일과의 관계에서 불릴 뿐입니다.  예를 들면, 일요일은 “안식 후 첫날” 이런 식으로 불립니다.  금요일은 “안식일 전날” 이런 식입니다. 

오늘 구약의 말씀은 십계명 중 안식일에 관한 본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기억한다는 말은 지적인 암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안식일의 은총과 축복을 일상의 삶에서 재현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누렸던 하나님과의 축복된 관계를 엿새의 삶 속에서 되새김질하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가졌던 하나님과의 임재를 엿새 동안 누리라는 것입니다. 

구약에는 십계명이 두 번 나오는데, 오늘 읽은 출애굽기 본문과 또 신명기 5장이 그것입니다.  신명기 5장 12절에서는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는 지킨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은 준비하고 고대하고 기다린다는 뜻을 갖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한 주의 정점이라면, 한 주의 전반부(월, 화, 수)는 안식일을 기억하며 되새김질 하면서 보내고, 한 주의 후반부(목, 금, 토)는 다음 안식일을 준비하고 고대하면서 보냅니다.  유대 식대로 한다면, 후반부는 신부를 맞을 준비를 하면서 보내고, 후반부는 결혼의 기쁨을 기억하면서 보냅니다. 

안식일을 준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잘못 알아들으면, 엿새 동안도 안식일에 묶여서 살아라, 온통 교회를 생각하면서 살아라라는 말로 들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맞고 보내는 의식을 한 가정을 중심으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안식일은 집안의 절기였지, 회당이나 성전의 절기가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안식일은 일상의 삶의 특별한 한 부분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도 안식일(주일)을 너무 교회의 프로그램에 맞출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교회가 성도들을 너무 많은 프로그램과 봉사로 잡아 놓을 필요가 없습니다.  주일은 한 가정 식구가 모두 만나는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가 주일에 예배는 중요합니다.  예배는 여전히 주일의 중심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귐을 갖고, 주님의 임재를 다시금 경험하며, 성도들 간의 교제를 통해 믿음의 공동체를 확인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일 하루 종일을 교회에 묶여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도 가정에서 지키는 안식일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가정에서 지키는 의식을 가졌으면 합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맞으면서 전통적인 가정예배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우선 두개의 촛불을 킵니다.  출애굽기의 안식일 계명이 기억하라라고 말하며, 신명기는 지키라고 말하기 때문에.  시편을 한 편 읽고(카바랏 샤밧트), 자녀를 축복하고, “너희에게 평안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남편이 잠언31:10~31(현숙한 아내에 대한 칭송)의 말로 아내를 축복하고, 키두쉬 기도(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기도)를 드리면서 포도주를 축사하고, 손을 씻는 의식을 갖고, 첼롯이라는 안식일 빵을 놓고 축사하고, 웃고 노래하면서 음식을 먹고 즐깁니다.  식사가 끝난 후 축사하고(신8:10, 네가 먹어서 배불리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로 네게 주셨음을 인하여 그를 찬송하리라) 나머지 저녁 시간을 가족과 친구와 대화하면서 토라를 공부한다.

우리도 이런 유대인의 안식일 지키기를 활용한다면, 우리도 우리 가정에 맞는 키두쉬 의식을 마련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우리도 온 식구들이 모여 촛불을 두개 켜 놓고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맞으면서 드리는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 우주의 왕이시여,  당신의 계명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으며, 우리에게 안식일의 촛불을 밝히라고 명하신 당신을 송축하나이다.  우리의 처소를 밝히는 안식일의 촛불이 우리 가정을 비추는 평안과 행복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이 거룩한 안식일에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당신의 영광으로 우리를 비추소서.  우리의 어둠을 밝히시며, 우리와 온 인류를 인도하소서.  당신의 자녀들을 진리와 빛으로 인도하소서.  아멘.”

그리고는 함께 할 수 있는 간단한 식사를 나눕니다.  식사를 나누면서 자유롭게 가정의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습니다. 

마칠 때는 간단한 기도로 마칩니다.  더 나아가 간단한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내일 주일을 맞으면서 그 예배를 위해서, 또 설교자와 예배드릴 때 성령께서 함께 하시길 기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 맞고 보내는 간단한 의식을 통해 안식일(주일)의 특별함을 가정적으로 기억했으면 합니다.  출애굽기의 말씀대로 기억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임재를 누리를 것입니다.  이는 말씀을 묵상하는 방법이 좋습니다.  주일 예배시에 받은 말씀 하나를 고릅니다.  성경말씀 중에서 고를 수도 있고 설교 말씀 가운데서 고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엿새 동안 되새김질을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일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그것을 하나의 습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안식일 의식이 생긴 후에 2천년을 끊임없이 기억하고 지키는 일을 해 왔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이것이 길들임입니다.  그들은 뇌리에, 의식에, 몸의 세포에까지 배이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한 번에 이 모든 일에 길들일 수 없습니다.  참을성이 있어야 합니다.  온 가족이 못하면, 혼자서라도 간단하게 안식일의 의식을 갖는 것도 좋습니다.  간단하게 기도문을 하나 읽는다든지 성경을 한 구절 읽고 잠자리에 드는 것도 좋습니다. 

오늘 신약 본문에서는 전통적인 유대인의 안식일을 깨뜨리는 것 같은 본문이 나옵니다.  복음서에 많이 나오는 안식일에 병을 고쳐주는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여기 보면, 안식일 준수는 문자적인 관습이 아니라, 그 정신임을 강조합니다.  오늘 특별히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씀은 우리가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는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 줍니다. 

길들임에는 분명한 주체가 있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길들여지느냐입니다.  우리는 잘못하면 규칙에 길들여지고, 나의 습관에 길들여지고, 전통에 길들여지고, 교회에 길들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가 길들여 질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에 이끌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습관, 혹은 교회의 전통이나 법이 우리의 주인이 됩니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킨다면 안식일을 지키는 이유가 뭐냐, 본질이 뭐냐 하는데 우리는 늘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안식일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이것이 우리 영성의 척도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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