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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마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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펴온 글입니다. 제목은 ‘국회의원 모내기 하듯이’입니다.
국회의원 모내기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얼마 전에 국회의원들이
    한 줄로 서서 모내기 하는 장면을 매스컴을 통해 방영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잡지사의 편집인이 쓴 글에
    10분 후에 가보니 국회의원들이 한 명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선행입니다.
나쁜 일은 소리 없이 남 몰래 해치우지만       
선행을 하면서 침묵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자신의 존재를 타인의 평가에 기대고 살아가는,
    정치인이나 스타 같은 타자 지향적인 사람에게는   
침묵 중의 선행이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선행은 달라야 합니다.
이웃사랑에 대한 실천은 한국교회가 가장 열심히 했습니다.
작은 교회는 작은 교회대로, 큰 교회는 큰 교회대로 했지요.
그러나 열심히 해 온 것에 비해 사회에서 인정을 못 받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사회복지사업의 70%는 교회가 감당하고 있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신뢰와 신망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타 종교에 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 오해를 받습니다.
저는 당연하다고 봐요.
왜냐하면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기독교의 구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경건으로 삼고 있는 대표적 신앙행위가
      구제, 기도, 그리고 금식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구제를 행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의 선한 행위를 보이고자 나타내는 습관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행동은 경건한 척하면서 외식하는 것이라고 지적하며
      외식적인 경건을 금하고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구제에 관한 교훈을 마음에 세기며
오른 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구제의 손길들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먼저 예수님의 경건의 원칙이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경건의 원칙은 무엇입니까?(1절)
1절 [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
보이려고 하지 마라. 외식적으로 위선적으로 하지 말라 고 합니다.
위선에는 두 가지 위선이 있습니다.                   
주위에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하면서, 혹은 그 어려움을 의식도 못하면서
혼자 열심히 성경 읽고, 찬송 부르며
    성수주일 하고 새벽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가 하는 것은 야고보서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약2:17절에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 이라고 합니다.
        즉 구제 없는 신앙생활이 위선이라는 것입니다.
행10:2절 이달리야 군대 백부장을 고넬료를 소개할 때
[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
  경건한 사람의 모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제 많이 하고 항상 기도하는 경건한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선을 행하더라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선행도 위선적인 신앙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위선적으로 신앙생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쉽게 범할 수 있는 오류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신앙생활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의식하며 구제, 기도, 금식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는 믿음은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외식이란 가면을 쓰고 무대에 선 배우와 같습니다.
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는 있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열납 하지 않습니다.
그런 신앙은 자신에게도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나에게 착각된 자아상을 갖게 합니다.
이 정도면 됐지 생각하지만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마7:23절 말씀처럼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습니다.                      낭패를 당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습니까?
첫째, 위를 향한 초점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느8:10절에 느헤미야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이룬 것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힘이었기 때문입니다.
행9:36절 이하에 욥바 성에 과부 다비다가
          죽었다가 다시 깨어날 수 있었던 것도
평소에 하나님께 초첨을 맞추어 선행을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홀로서기를 연습해야 합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기도하고
홀로 큐티 시간을 통해 말씀으로 스스로를 강건케 하는 사람
남몰래 구제하는 손길을 하나님이 인정하십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를 통해 생명의 언약을 세울 때, 
가장 은밀한 부분을 택한 것은
하나님께서만 보실 수 있는 모습의 중요함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떤 경우에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야 한다`고 말하다가,
    다른 경우에는 `보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좀 헛갈리시죠? 서로 모순되어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어떤 경우에 보여야 하고 어떤 경우에 보이지 말아야 하는가?
신학자 브루스(Bruce)는
`우리가 감추고 싶을 때에는 나타내야 하며,
      나타내고 싶을 때에는 감추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스코트(Scott)는
드러나야 할 도덕적 의와 드러나지 않아야 할 신앙적 의를 구분합니다.
우리의 도덕적인 의는 드러나야 하지만, - 정직, 진실, 신용 등등
    우리의 신앙적 헌신은 감추어져야 한다고 합니다. - 구제, 기도
하지만 드러내든 드러내지 않던,
그리스도인은 오직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상을 얻지 못합니다.
<천사같이 오셨다가 천사같이 떠난 할머니, 보고 싶어요.>
동아일보 2005-12-29 기사제목입니다.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40년이 넘도록 한센병 환자들을 돌본
    마리안(71) 수녀.  마가레트(70) 수녀이야기입니다.
그 많은 선행을 숨어서 한 이 두 수녀들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를 찾아간 기자에게
“내 몸이 늙어 부담 줄까봐 몰래 떠나왔어요.
  마음은 두고 왔으니, 친구들 서운해 마세요” 라고 한마디 하였다고 합니다.
그것도 마가레트 수녀는 기어코 숨어서 안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40년 봉사 후 떠난 마리안 수녀는
    지금도  `눈뜨면 한국 생각 잠들면 소록도 꿈` 을 꾼다고 합니다.
천사같이 왔다가 천사같이 떠나는 사람들
  저와 여러분들의 케릭터( character)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왜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까?               
2. 왜 구제할 때 나팔을 불지 말아야 합니까?(2절)
2절 [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
기도와 금식과 함께 구제는
유대 사회에서 적극적으로 권장되고 칭찬을 받는 행위였습니다.
랍비의 글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온 세상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우려는 자와 같다. 
왜냐하면 자선과 정의를 행하는 자는
      지구를 야훼의 사랑으로 채우기 때문이다.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확실히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에 속한다.`
유대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일정한 액수를 부담해서
    가난한 사람을 돕는 공동적인 방식이 있는가 하면,
개인이 자원해서 기부하는 자발적 방식도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구제할 때도,
유대인은 가난한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려고 했습니다.
유대인은 대중 앞에서 가난한 사람을 모독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 때에도 가급적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도 구제 자체를 금하지 않으시고 강조했습니다.
마19장에 부자청년에게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
다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이런 행위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엄격하게 경고하였을 따름이다.
이 말은 개인의 자발적인 구제에 관한 것입니다.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여기서 `외식하는 자`란 배우처럼 연기하는 자,
    속마음과 달리 겉으로 연극하는 자를 말합니다.
여기서 외식하는 자는 가난한 자를 위해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제하는 듯이 크게 떠벌리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즉 사람으로부터 칭찬을 받기 위해 구제합니다.
굉장히 많은 돈을 기부할 경우에는
    이를 알리기 위해 사람들이 나팔을 불었다고도 한다.
혹은 구제하는 사람이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 행위를 알리려고
    직접 크게 나팔을 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구제를 통해 칭찬과 갈채를 받고 싶어 하는
      인간의 유치한 욕망을 폭로하고 비판합니다.
예수님은 `외식적으로 구제하는 자는 이미 상을 이미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무슨 보상을 받았는가?                         
그는 다른 사람들의 공개적인 칭찬을 받거나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자축함으로써, 이미 보상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더 이상 하나님에게 받을 상이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는 공개적인 구제 행위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계획적이고 계산적인 구제 행위도 비판합니다.
남의 칭찬을 받으려고 하거나 심리적인 위안을 얻으려고 구제해서도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든 자신이든, 사람을 의식하면서 구제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구제를 하는 것만이 참다운 선행인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은 구제를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3. 성경적인 구제의 원리는 무엇입니까?(3절)
6:3절 [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 고 합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고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은밀하게 하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은밀하게 한다고 해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를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한 두뇌의 지배를 받고 있는 같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이고 한 두뇌의 명령을 받고 있는 오른손과 왼손이
      서로의 하는 일을 모를 수 있을까요? 
생물학적으로 이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십니다.

마25:31-46절에는 양과 염소의 비유가 나옵니다.
종말의 때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거처럼
    천국백성과 지옥백성을 구분하신다고 하십니다. 
천국백성은 오른쪽, 지옥백성은 왼쪽으로 구분하는데 구분하시면서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34-39절에
[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
그러자 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놀라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 우리가 어느 때에 주의 주리신 것을 보고 공궤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
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자신들의 기억을 더듬어도
예수님을 공궤하고 예수님을 돌보아 드린 일이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자의 말씀은 간단합니다. 40절에
[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
여기서 우리는 [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는
    말씀의 해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른편에 있던 사람이나 왼편에 있던 사람이나 다 자신이 한일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에 대해 처음에는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한 일이
    그리스도께 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자신이 남에게 한 일을 하나님께 한 일인 줄 몰랐던 사람,
        아브라함입니다.
이 사건을 두고 히13:2절에 보면 
[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여기서 단어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바로 `부지중에`라고 하는 말입니다. 
즉, `알지 못하는 가운데`, `무의식중에`라고 하는 말입니다.
오른손과 왼손은 한 몸에 붙은 지체로서
한 두뇌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서로가 하는 일을 모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식중에 한 일이라면
다시 말해 우리의 머리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를 것입니다. 
심지어 오른손이 한 일을 오른손 자신도 모르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착한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착한 일 인줄 모르고 하는 것!
그것이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보상`이나 `답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본인이 한 일을 당연한 일로 알고 특별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누가 알아주기를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TV 프로그램 중에 `칭찬합시다` 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칭찬 받을 만한 사람들을 찾아서
  그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들을 소개하고 선물을 주는 프로그램인데,
  그 프로그램을 보면 공통점 한 가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칭찬 받는 주인공들이 한결 같이 하는 말이,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제가 왜 칭찬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입니다.
정말 십일조를 하는 교인은 자신이 `십일조`를 한다고 우쭐대지 않습니다. 
그것은 당연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새벽기도, 철야기도 한다고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도는 당연히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착한 일을 한다고 의식하고 하지 않습니다. 
  자연스럽게 그 사람은 착한 행실을 합니다.
아무도 내가 호흡을 해야지 하고 의식하며 호흡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의식하지 않아도 호흡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걸어가면서 의식적으로 `오른발이 움직일 때는 왼손을 흔들어야지` 하고
      손을 흔드는 사람은 없습니다. 
      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손은 자연스럽게 흔들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의식적으로 하려다보면 어색해집니다. 
제가 군에 기수단에 있을 때 훈련을 할 때보면
꼭 40명 가운데 한, 두 명씩은 오른발에 오른손을 흔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상시에 걸을 때는 그러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걸음을 의식하고 하려다 보면 이런 어색한 동작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건강한 선행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건강하다는 것은 가장 자연스럽다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오른 편 양이 당연히 한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하듯이
부지중에라도 구제의 손길을 뻗칠 수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중세의 한 랍비는 자선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1000개의 금화를 1사람에게 1번에 주는 것보다는
1000개의 금화를 1000사람에게, 즉 1000번에 걸쳐서 주는 것이 낫다.
`1000개의 금화를 1사람에게 1번에 준다. 이것은 커다란 사건입니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매스컴의 시대에서는 전 공중파를 탈 사건입니다.
이런 행동을 한 사람은 영웅으로 대접받습니다.
이것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는 주는 사람의 우월감과 영웅심리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1000개의 금화를 1000사람에게 나누어 줄 때에는
    사건이 드러나지도 않을뿐더러
    주는 사람도 1사람에게 금화 1개를 주는 일을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그 랍비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마음이 들어있습니다.
남을 돕는 일은 사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많이`가 아니라 `어떻게`가 문제입니다.                 
많이 구제하여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 당당한 것보다
적게 자주 구제하여 하나님 앞에서 미안해하는 마음,
      그 마음을 하나님은 즐겨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구제는 왜 은밀하게 해야 할까요?
4. 은밀한 구제의 가치는 어디에 있습니까?(4절)
4절에 [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우리가 은밀히 구제하여도 그 구제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보상을 바라고 구제해서는 안 되지만,
    구제에는 분명히 보상이 따른다.
시37:25-26절에
[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
잠19:17절 [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
잠11:24-25절
[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
구약성서는 주로 이 땅에서 받을 보상을 말하고,
  신약성서는 주로 내세에 받을 보상을 말한다.
하지만 신약성서도 이 땅의 보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약성경은 이 세상의 보상을 훨씬 능가하는
          하나님 나라의 보상이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거듭  되풀이하여 말씀하십니다.
4절에[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
그것은 우리가 확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눈에 띄지 않게 베푸는 모든 시간과 노력과 사랑,
하나님 아버지의 귀에 속삭이는 모든 탄원들, 그
리고 죄악과 방종과 맞섰던 모든 보이지 않는 내적 투쟁들은
    다 때가 되면 충분히 보상될 것입니다.
마지막 날에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마25:21)라는
        주님의 칭찬만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나의 물질관은 정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5. 나의 물질관을 정립해 봅시다(참조/마6:19-20절) 
마6:19-20절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
이것이 성도의 물질관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소망은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소망이 있는 곳에 마음과 시간과 물질을 거기에 다 투자합니다.
물질을 하늘에 쌓아둘 때에
    하나님께서 나로 선한 청지기로 사용하십니다.

신학교 총장이 기고한 글입니다.
모 일간 신문에
“80대 행상 할머니의 ‘불심’, 대학에 5억 기부”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20대 나이에 부산에 시집 와서 온갖 행상으로  억척스럽게 돈을 모음
그러면서도 “이웃을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각오” 로 살아오다
어느 날 병원에서 유언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친구를 보고
퇴원하는 길로 평생 모은 재산을 좋은 일에 쓰고 싶다는 뜻을
      실행하기 위해서 기관을 물색하던 중
      부산에 있는 동아대를 찾게 됐다고 합니다.
그는 총장과 10분 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5억 원짜리 자기앞 수표 한 장을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는 것을 기부 조건으로 내놓음.
단지 할머니는 “젊은 사람들과 이 사회를 위한 보람된 일에 써 달라”는 것과     
“단지 좋은 일에 돈을 써 주면 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또 한 가지 사건을 이야기 합니다.
불우이웃을 위해 전 재산 270억원을 쾌척한 뒤, 강태원(康泰元·83)씨
“오늘밤에는 잠이 잘 올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광복 후 혼자 월남해 50여년 간 억척스레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그는 작년에도 100억원 상당의 재산을 꽃동네 현도사회복지대학에 기증
그때는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모르게’ 했지만,
이번에는 “나 같은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있었으면…” 하는 생각에서
공개했다고 합니다.
강 씨라고 해서 자식들에게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없었겠는가.
그러나 그는 “자식을 제대로 키우려면 재산을 물려줘서는 안 된다”는
        선친의 가르침을 따랐다고 한다.
자식에게 물려주어야 할, 재산보다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부모로부터 배웠고 자신의 삶을 통해 깨달았다” 고 말합니다.
그 글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 기심이 천심, 불심보다 못해서야
신학총장의 한이 맺힌 기고의 글인 것입니다.

이번에 제가 신문 기사 한 토막을 소개하겠습니다.           
아버지가 죽어 자식들이 장사를 지내고 집을 수리하다가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습니다.
장판을 걷어냈더니 거기에 만원짜리 지폐가 온 방바닥에 깔려 있는데
6천만원이란 거금이었습니다.
아내도 자식들도 아무도 몰랐습니다.
어쨌든 그는 돈 장판에 누워 죽은 것입니다.
이 남자는 밤낮으로 돈이 깔려진 장판 위에 누워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러나 돈위에 누워 돈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하고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었겠습니까?
우리가 사는데 돈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남자는 돈을 다스리지 못하고 돈의 노예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인생은 오직 돈을 모으기에만 급급했지
그 돈을 바르게 쓴다거나
그 돈으로 무언가 보람있고 행복한 일을 꾸미거나 누리지도 못한 것입니다.

이야기 한 김에 한 가지 더 하겠습니다.
미국 Los Angeles에는 매년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신비의 신사 한 분이 꼭 나타난다고 합니다.
그 신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뭐를 하는 사람인지 아무도 모릅니다.
차를 타고 노숙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와서
백 달러짜리 현찰을 수백 명에게 나눠주고 사라져 버립니다.
그 가 누구인지를 알려고 많은 기자들이 노력을 했지만
오늘날 까지 그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모릅니다.
그런 행동이 자기만족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인지
아니면 순수한 이타심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멋진 선행자로 보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멋진 선행자들이 나오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른 물질관 가지고 삽시다.
많은 구제와 항상 기도의 삶을 사는 경건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물질관을 가진
기심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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