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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의 오네시모 (빌 1: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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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할아버지가 동네 시장에서 과일을 사와서 먹어 보니 맛이 없었습니다. 워낙 급하고 까다로운 성격인 그 분은 불같이 화를 내며 당장 가게로 달려갔습니다. 아주 못 먹을 정도는 아니어서 식구들이 말렸으나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뒤에 집으로 돌아오는데, 예상과 달리 환한 얼굴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웃음기라고는 별로 없는 할아버지가 다른 과일까지 한 봉지 더 사들고 오니 놀랄 노릇이었습니다. 이어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식구들은 배꼽을 잡았습니다. 맛없는 과일을 팔았던 그 가게를 찾아가서, "맛없는 과일을 맛있다고 속여서 팔면 되느냐?"라며 야단을 치니 웬만한 사람 같으면 "무슨 엉뚱한 소리냐?"고 시치미를 뗄 터인데 가게 주인 여자가 한참 듣더니 갑자기 밝은 웃음을 지으며 "할아버지! 세상에 순진하기도 하셔라! 장사꾼 말을 그렇게 다 믿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라고 하더랍니다. 그리고 되가져 온 과일을 꺼내 한 입 베어먹더니 한술 더 떴습니다. "내가 먹어봐도 별로 인데 할아버지가 그러시는 것도 당연하겠네요."라고 하면서 어안이 벙벙해진 노인에게 다른 말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얼른 과일을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 아주머니의 웃음과 재치에 할아버지는 기분이 좋아져서 다른 과일을 한 바구니 더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가족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먼저 것이나 나중 것이나 맛의 차이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만족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 그 가게의 단골이 되었습니다. 가게집 주인 여자는 과일만 판 것이 아니라 웃음과 정직을 담아 팔았기에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아 감동을 주기가 쉽지 않습니다. 현대인들의 마음은 강팍과 불신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감동이 어려운 시대입니다. 사람을 감동케 하여 예수 믿게 하고 새 사람을 만드는 일은 중요한 일이지만 어렵습니다.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소명과 사명이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오네시모는 무익한 종이었지만, 사도 바울을 만나 복음으로 거듭난 뒤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인정을 받아 옛 상전 빌레몬에게 보내질 때 영접을 받을 수 있도록 바울의 사랑과 배려를 받았습니다. 짧은 인생 살면서 사도 바울로 인하여 변화된 오네시모처럼 여러분들을 통해서 변화된 여러분의 오네시모를 꼭 만드시기를 축원을 드립니다.

1. 형제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6절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바울은 종의 신분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아니하면서 전과는 다른 신분, 즉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로 오네시모를 대해야 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사랑 받는 형제'로 부르고 있는 데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오네시모는 본래 빌레몬의 종으로서 로마로 도망한 사람입니다. 당시 로마의 노예 제도는 매우 가혹하여 노예는 그 주인이 생사권을 쥐고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도망갔다가 붙잡히면 대부분은 무참히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네시모가 과거에는 노예요, 도망간 범죄한 전과자였으나 지금은 주 안에서 사랑받는 한 형제가 된 오네시모를 동무처럼 대우해 달라는 간곡한 부탁의 글을 빌레몬에게 써 보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주인과 종간의 신분적 차별은 허물어지고 오직 한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떠한 지위와 신분에 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요 한 형제입니다. 모든 조건을 뛰어 넘어 형제가 되는 것입니다.

  미국 타임(Time)지 창간자인 헨리 루스의 부인으로 하원의원과 이탈리아 대사를 지낸 클레어 부츠 루스 여사는 "모든 인물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확실히 맞는 말입니다. 어쩌면 인간들이 아둥바둥하며 애를 쓰는 것도 이 한 줄의 문장을 위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 중 어느 누구도 루스 여사의 말로부터 자유롭기 못합니다. 누가 우리에게 "아무개 그 사람 어떤 사람이지?"라고 물을 때 보통 사람들은 "그 사람! 나쁜 사람이야!" 또는 "그 사람! 보증수표이지! 참 좋은 사람이야!"라고 단 한 문장으로 대답합니다. 열왕기나 역대기를 보면 많은 이스라엘의 왕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왕들의 업적을 한 문장으로 표현합니다. 우상을 척결하고 하나님을 잘 섬겼던 왕은 "다윗의 길로 행했더라"(왕하22:2)라고 하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거역했던 왕들은 "여로보암의 길로 행했더라"(왕상15:34)라고 하며 모든 왕들의 행적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 추문으로 하원의 탄핵 심리 중에 하야한 미국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그 이전까지 칠전팔기의 불굴의 정신으로 세인의 귀감이 되었습니다.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나온 그의 전기는 그를 '남이 추종하기 힘든 용감성을 발휘한 정치가'로 묘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권력을 남용하고, 그로 인해 지울 수 없는 불명예를 안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닉슨은 그의 회고록에서 "모든 인물은 단 한 문장으로 요약된다"라는 루스 여사의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자신이 미합중국을 통치하면서 이룬 공헌은 하나도 기억되지 않고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임기 도중 사임한 미국 최초의 대통령'이란 단 한 문장으로 기억되는 사실이 참으로 곤혹스럽다고 실토했다고 합니다. 이 그릇된 기억을 바꿔보려고 그가 방대한 분량의 자서전을 퍼냈을지라도 '임기 도중 사임한 최초의 대통령'이란 인식을 바꿀 수는 없었습니다.

  형제란 같은 길을 걸어가며, 이해 타산을 초월하여 서로 허물이 없이 동고동락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오네시모의 입장에서 바울의 형제의식을 눈물겹도록 감사해했을 것입니다. 사람을 차별하거나 경멸하면 감동은 결코 없습니다. 오히려 반감이나 악감이 생깁니다. 형제의식을 품을 때 오네시모가 출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한 한 형제입니다. 우월감이나 열등감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나보다 낫게 여깁시다. 형제의식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바울의 마음으로 사랑하여 오네시모를 많이 만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영접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7절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바울은 자신과 오네시모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빌레몬에게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동일하게 오네시모를 영접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것은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행해지는 일반적인 영접입니다. 바울은 로마 교인들에게 서로 영접하라고 권면하였습니다. '영접하는 행위'는 그리스도인들의 의무입니다. 또 하나는, '동역자'로서의 영접입니다. 바울이 빌레몬과의 관계를 '동역자'로 밝히고 나서 오네시모를 자신과 같이 영접하라고 빌레몬에게 권면하는 것은 오네시모를 바울의 동료로서 영접하라는 의미입니다. 오네시모가 바울을 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그리스도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을 감당하는 바울의 동역자로서 영접하기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영접'이란 극진히 맞아 대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20년 만에 돌아온 동생 야곱을 형인 에서가 영접하였습니다(창33:4). 돌아온 탕자를 아버지가 영접하였습니다(눅15:20-23). 예수님은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마10:40)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체들을 영접하는 것은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우리의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합니다. 오네시모를 영접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 청년은 매일 아침 조깅을 하면서 동네를 한 바퀴씩 돌았습니다. 조깅을 하다가 이상한 집을 발견했습니다. 나무로 지은 오래되고 낡은 초라한 아주 작은 집인데 그 집 한가운데는 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문에는 '多不有時'(다불유시)라고 한문으로 적혀 있었습니다. 청년은 자꾸만 그 문자가 무슨 뜻일까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시간은 있지만 많지 않다는 뜻일까? 누가 이렇게 심오한 뜻을 이 문에 적어놓았을까?'라고 생각하며 지나가곤 했습니다. 어느 날 그 청년은 그 집 앞을 지나다가 '이 글을 적은 분은 분명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고매하신 분일 거야. 오늘은 꼭 그 분을 만나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 그 집 문을 두드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기다려 서 있으니, 옆 집 대문에서 웬 런닝셔츠 차림의 할아버지가 나오셨습니다.
  "어이, 청년! 거기서 뭐하는 거야!"라고 물었습니다.
  "아 예, 여기 사시는 분을 좀 만나 뵈려고요"라고 대답하자, "엥! 거기 아무도 안 살아!"라고 할아버지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습니다.
  "저, 사실은 이 한자성어를 적으신 분을 뵈려 했는데…"
  "그거? 그건 내가 적은 거야!"
  "아! 그러세요. 정말 뵙고 싶었어요. 할아버님, 이 집이 대체 어떤 집입니까?"
  "이거 별거 없어. 화장실이야!"
  "네? 화장실이요? 여기가 화장실이라고요? 그럼 이 글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 이거? 참내. 다불유시(W.C)야! 다불유시. 왜 요즘 사람들은 변소도 영어로 말하는지 도대체 모르겠단 말야. 내가 영어를 알아야지."
  이런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황당'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황당한 지식에 무슨 심오한 진리가 있는 것처럼, 알에서 깨어날 때 처음 본 것을 엄마로 착각하며 소녀를 따라다니는 새끼 기러기처럼 좇아 다닌다면 참으로 넌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첫걸음입니다. 나는 어디서나 영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바꿉시다. 이제는 나는 영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시다. 반드시 놀라운 감동과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우리 모두 바울과 빌레몬이 되어서 우리 주위에 '오네시모'를 영접합시다. 그리하여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영접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책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본문 18절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바울은 자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이 오네시모를 영접하기를 호소한 후 오네시모가 도망가면서 빌레몬에게 끼쳤을지도 모를 재산상의 손해에 대한 책임에 말하고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끼친 손해에 대해서는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재산을 가지고 도망갔을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오네시모의 도망으로 인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데에서 손해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도망 자체로 인해서 생겨난 손해를 오네시모의 영적인 아버지로서 회계할 것임을 빌레몬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네시모를 위해 어떠한 경제적인 책임과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돈보다는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바울의 큰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책임은 말뿐만 아니라 물질과 목숨으로 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큰 희생과 사랑으로 우리 모두는 구원과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끝까지 사랑하시고 책임지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습지에서 무리지어 사는 이 코뿔소는 코끼리 다음으로 큰 하마와 크기가 맞먹는 대형 육상동물로 코뼈나 전두골 위에 뿔이 하나 혹은 두 개가 나 있습니다. 그리고 코뿔소는 근시여서 최대시야가 10m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덩치 큰 코뿔소가 질주하는 속도는 시속 50km가 넘습니다. 일단 목표가 정해지면 앞에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을 부수고 전속력으로 치달립니다. 모든 동물들은 자기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두려워하는 표정을 짓습니다. 그러나 코뿔소의 얼굴에서는 두려움이나 걱정의 그림자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도 코뿔소가 마음에 드는 표정을 선택하라고 했다면 여유 만만한 웃음 띤 얼굴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상대를 공격하기 전에 상대를 바라보면서 입가를 살짝 올리며 웃을 수 있다면 성난 얼굴보다 상대를 훨씬 더 강하게 압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명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에는 두려움의 그늘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인 말이지만 "이 친구! 겁대가리가 없구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겁없는 얼굴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속된 표현의 말입니다. 이 얼굴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얼굴입니다. 겁쟁이들은 결코 웃지 못합니다. 나는 두려워하는 자가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습니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겁없는 얼굴로 주저하지 않고, 전속력으로 코뿔소 때처럼 달려나가면 우리의 삶을 방해하는 모든 악한 영들은 우리 앞에서 "걸음아! 날 살려라!"하며 도망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모습의 그리스도인을 보면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교회와 전도와 봉사는 코뿔소처럼 제가 책임지겠다고 고백합시다. 이제는 "제가 잘하겠습니다"라고 기도합시다. 이제 '오네시모'를 돌보는 것과 '오네시모'를 만드는 것에 책임감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깁시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기쁨의 날'을 위해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형제, 영접, 책임의식을 가지고 또 다른 오네시모를 만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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