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는 위로의 공동체입니다.(고후 1:3-11)

  • 잡초 잡초
  • 597
  • 0

첨부 1


교회는 위로의 공동체입니다. 고후1:3-11

저는 지난주간에 강릉교도소에서 온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직접 자필로 정성스럽게 쓴 3장의 장문의 편지였습니다.
편지 사연은 이렇습니다. 올해 4월 9일 사회봉사법 위반으로 구속수감되어 수감중인 한 죄수였습니다. 올해 12월 31일이 출소 예정일이라고 합니다. 수감생활을 하던 중에 제가 쓴 칼럼집 ‘인생리모델링’을 읽고 삶의 큰 위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60개 항목의 칼럼집 내용을 3번을 반복하여 읽으면서 마음의 큰 위로를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은 교도소에서 아버지학교를 하면서 우리 교회 김병대집사님이 칼럼집을 50여권 교도소에 넣어주었는데 그때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중학교 때까지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성경을 읽고 밤을 지새기도 하였는데 사회 속에서 삶에 지쳐서 교회를 떠난 자신의 삶을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하여 믿음을 갖고 성경공부도 하고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고 고백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성경을 한권 넣어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이 편지를 읽으면서 별것아닌 책 한권이 한 사람의 마음과 삶에 위로가 되자 새로운 삶의 도전과변화를 가져다 주는 것을 봅니다.

우리의 삶은 얼마나 위로를 필요로 합니까?
물질적인 고난 앞에서 위로를 필요로 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질병으로 인해서 위로를 필요로 하는 경우도 있고 인간관계에서 오는 상처 때문에 위로를 필요로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스스로의 자신의 한계와 연약함 때문에 위로를 필요로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는 큰 위로의 경험의 사람 바울이 소개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바울은 누구보다도 환난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환난을 당한 것은 어떤 잘못과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복음 때문에 오직 사명을 감당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큰 고난을 경험하고 큰 상처를 받으면서 오히려 마음의 위로를 받고 오히려 큰 위로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위로를 기다리면서 살아가야 합니까?
어떻게 우리는 서로 위로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1. 우리의 위로자는 하나님이십니다.
4절
성도들은 이땅에서 환난을 경험합니다. 그 시련의 환난을 허락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바울은 환난을 많이 받았습니다. 바울은 어느 정도의 환난을 당하였는가 하면 8절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하노니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 그리고 9절에 이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았았으나”라고 합니다.
구체적으로 바울이 받은 환난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바울이 환난을 당한 구체적인 목록들이 고후11장에 소개됩니다.

24절 이하에 보면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번 강의 위험과 당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거짓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분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합니다.

사실 이런 바울의 삶을 보면 인간적으로는 불쌍합니다. 세상적으로 본다면 정말 너무 안된 인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고전4장 13절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라고 합니다. 바울을 보면 많은 사람에게 오히려 구경거리가 되고 미말에 있는 비천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가 보기에는 얼마나 바울의 마음에 상처가 많을 것같고 기죽은 삶을 살 것같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바울같이 주님을 위하여 그렇게 열심히 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바울같이 열심히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헌신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결과적으로 바울의 삶의 현실 속에서 돌아온 결과는 환난의 시련의 상처와 고난뿐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본다면 너무나도 외롭고 불쌍한 사람같이 보여지는 바울입니다.그런데 바울은 나 힘들고 외로롭다라고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통스럽고 분노와 아픔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단지 바울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가끔 노회에 가면 정말 몇집 없는 정선 영월의 오지 시골에서 몇사람 안되는 성도들을 붙들고 힘들게 목회하시는 목사님들을 뵐때가 있습니다. 이미 반백이 넘는 나이이고 어느 새 얼굴에는 주름이 늘고 머리를 희어지고 옷은 남루하고 아무것도 없는 촌노인같은 모습의 목사님들을 볼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의 얼굴에 해맑은 웃음이 있고 그 말 속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교회 속에 보면 인간적으로 보면 사방이 막힌 깊은 구덩이에 빠진 것같은 어려움의 삶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얼굴에 여유와 그 입술에 찬양을 부르면서 마음을 다스리면서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위로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의 바울은 환난 속에서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
바울은 위로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3절을 보십시오. “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라고 합니다. 여기 하나님은 자비의 하나님이시면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사건, 상황에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에게 모든 일의 위로자가 되어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흔히 던지는 질문이 한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과 고난을 애초에 막아주지 않고 허용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부분에 대해서 하나님을 향한 의문을 갖았었습니다. 아마도 오늘 우리 중에도 그런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억할 것은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그분께서 우리가 고통받으실때에 기꺼히 그 경험을 함께 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당하는 그 고통의 자리에서 고통의 아픔과 상함과 눈물흘림을 함께 경험해 주십니다.

본래 위로라는 단어의 원뜻은 ‘부름받고 달려와 곁에 서 계시는 분’입니다. 바로 “파라클레테‘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가 고통당할 때에 위로자 이신 파라클레토스 성령님이 함께 하여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통이 넘칠 수록 넘치는 위로를 경험하게 될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시련을 당하는 우리에게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함께 하여주심으로 우리를 위로하여 주시며 시련을 이기도록 인도하여 주시는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큰 고난 속에서 큰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아프고 상한 시련과 고통 속에서 지금 여기에서 나를 향하여 더욱 위로하시면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엣날 빅토리아 여왕시절입니다.
한 신하의 아내가 자녀를 기다리다 유산을 한후에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죽음을 생각한다는 소식을 여왕이 듣고 친히 그녀를 방문한 일이 있다고 합니다. 여왕의 방문이후 이 여인은 놀랍게 회복되어 삶의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도대체 이 여왕이 찾아와서 무슨 말을 해주었냐고 물었습니다. 이 여인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여왕은 제 손을 잡고 꼭 한마디 말을 하셨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어떤지 내가 알아요“라고 한 말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그 한마디의 말은 바로 과거 여왕도 자기와 같이 유산한 사실을 깨닫게 하여 주는 말이었습니다. 바로 그 여왕도 과거에 유산의 아픔과 상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여인은 자기의 고난이 자기 혼자만의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순간 고난의 아픔은 물러가고 위로와 소망의 마음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하시면서 고난과 상처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먼저 하나님이 위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때 고난 속에서도 위안이 생길 것입니다. 슬픔 속에서도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도 소망이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2. 고난당한 성도 서로가 위로자가 됩니다. 5-6절

여기 바울은 고난이 넘친 것같이 자신들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교회를 “위로”하고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환난을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와 구원을 위함이요 혹 위로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를 위함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과 같은 사역자들의 고난을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그 시련과 고난이 바로 너희의 위로가 되고 너희의 위로가 됨으로 우리와 같이 고난을 견딜 수 있음을 강조하고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위로를 전할때에 고린도교회가 위로의 경험을 통하여 시련을 이길 수 있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분명히 바울을 통해서 인정해야 할 것은 진정한 상처를 경험한 사람만이 남을 돕는 위로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헨리 나우웬은 ‘상처입은 치유자’라고 하는 책에서 우리 자신이 입은 상처로 인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교회 속에서 보면 참 위로를 잘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그런데 그 분들의 공통점은 바로 상처를 많이 받아본 사람들이고 고난을 많이 경험해본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분들은 남을 위로할 때 보면 어떻습니까? 공감을 잘 한다는 것입니다.함께 울어주고 함께 기뻐하여 주는 진정 마음으로 참예한다는 것입니다.그래서 한자어에 보면 ‘동병상련’이라는 한자어가 있습니다. ‘같은 병을 앓는 사람끼리 서로를 불쌍히 여긴다’는 것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한번 허리가 아팠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 정말 밤에 바로누워서 자지도 못하고 제대로 혼자 일어나지도 못하고 며칠을 고생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걸을때에도 허리가 아파서 어정쩡하게 걸으면서 고통스러웠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 허리가 아플때 공교롭게도 박사과정 공부를 하는 타이밍이 걸려서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우리 비행기 좌석이 가장 뒤쪽의 3등석이었는데 그 간격이 얼마나 좁습니까? 너무나 고통스럽게 13시간을 여행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가 교회 속에서 허리아픈 분들을 보면 남의 아픔같이 보이지 않아서 진정으로 위로가 됩니다.

여러분 고난속에 있는 성도를 누가 제일 위로할 수 있는 사람입니까?
바로 고난을 당해본 사람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얼마나 위로를 잘합니까? 바울은 위로의 대가요 상담의 대가입니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가 바로 극심한 고난에 참예한 바가 있엇기에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속에서 위로를 경험하시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 그 위로가 우리 속에서 경험되기 위해서는 환자가 병원을 찾아서 의사에게 어디가 아픈지 내놓고 상처를 보이는 것처럼 우리가 서로 상처와 아픔을 내놓을때 시작됩니다. 그런데 교회 속에서도 그렇습니다. 여러분의 삶 속에 위로의 나눔이 있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여러분 영혼과 삶의 위로와 치유와 회복을 가져다주는 병원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는 오전의 대그룹 예배와 오후의 목장교회 소그룹으로 세워져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특별히 목장교회를 통해서 강조하는 것은 바로 나눔입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고 삶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그 나눔을 통해서 서로 위로를 경험하시기를 바랍니다.

기쁨과 승리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웃을 보고 들으면 나도 그와 같이 기쁨과 승리의 삶을 살아갈 용기를 얻기를 축원합니다. 환난과 시련을 통해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눈물흘리는 이웃을 보면서 우리도 함께 가슴아파하고 눈물흘리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더욱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식적인 나눔이 아니라 함께 더욱 우리의 마음을 서로 표현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그리고 그 마음은 서로의 마음에 보일 수 있도록 투명해야 합니다.마치 깨끗한 물을 보면 마음이 기뻐지듯이 투명한 마음의 사람들을 통한 마음을 접하면 우리는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런 소중한 친구들이 교회 속에서 많아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민감함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고든맥도날드 목사님의 책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때’라는 책이 있습니다.
민감함은 안을 들여다보는 기술입니다. 겉만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말을 해도 그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입니다. 그 귀로 들으면서 그 눈으로 말하면서 그 몸으로 함께 대하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이용해서 그 사람을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입니다. 그 사람에 대한 필요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구약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 쫓김을 당하고 어려움 속에서 큰 위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친구 요나단이었습니다. 그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잘못을 알고 오히려 다윗을 돕고 위로하는 자였습니다. 만약에 친구 요나단의 위로와 도움이 없었다면 다윗은 어쩌면 목숨을 잃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요나단이 다윗을 도우게 되엇을까요? 요나단의 마음에 다윗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의 민감함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20장 17절에 보면 “요나단이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함이었더라”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돕고 위로하는 좋은 마음의 친구가 우리에게는 있습니까? 여러분 그 친구를 사귀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그 친구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속에 이런 좋은 친구들이 많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교회를 통해서 서로 위로하면서 상처와 아픔과 외로움을 극복하여 가시기를 바랍니다.

3. 간구함으로 서로 위로할 수 있습니다.

11절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 합니다.

여기 바울은 자신들을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고 기도 부탁합니다. 고린도교회뿐만 아니라 바울은 교회들마다 기도부탁을 많이 합니다.
바울은 롬15:30에서 로마교회를 향하여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라고 합니다.
에베소교회를 향하여 에베소서6장 19절에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것이니“라고 기도부탁을 합니다.
골로새서 4장 3절에서도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고 합니다.

왜 바울이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교회지도자인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라는 것은 결국는 복음과 교회를 위한 목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교회가 교역자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합니다. 그러면 교역자들의 좋은 은사를 받아서 더욱 좋은 사역을 통하여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그러면 결국 교회가 좋아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셔야 합니다. 교회 일꾼들에게 큰 위로가 필요하고 기도의 지원이 필요합니다.영적으로 가장 외로운 사람들이 목회자들입니다. 어떤 통계에 의하면 목회자들중 약 70%가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한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대학 졸업하고 신대원에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세상친구들을 다 자동적으로 떨어집니다. 그리고 교회 속에 들어와서 사역을 하면서 지도자인 입장에서 함부로 아무개 성도와 너무 가까이할 수 없는 위치상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일 만만한 교제의 대상이 누구입니까? 바로 사모입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잘 안될때에는 마음의 병 우울증들이 걸리고 맙니다.

그런데 그 목회자들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혹 목회자들에게 어떤 분들은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시는 분들도 있고 좋은 책과 또 때로는 물질을 통해서 고맙게 후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때로 그런 섬김이 마음의 위로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섬김은 솔직하게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는 것이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까지는 제가 어디가서 밥을 먹어도 제 돈을 내고 먹어야 부담이 없는 편입니다. 그런데 정말 부담이 없고 마음의 큰 위로가 되는 섬김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대표기도하시는 분들은 반드시 먼저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그것이 얼마나 마귀를 몰아내고 마음을 하나로 묶고 목회자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새벽기도를 할때에도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금요일 심야기도회를 할 때에도 기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미국의 유명한 교회 성장학자 피터 왜그너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난 개인적으로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가장 개발이 덜된 영적 능력의 영역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교회 지도자들을 위한 중보기도일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마치 다 된 것같고 든든하게 서 있는 것같지만 결코 목회자는 해결사가 아니고 메시야도 아닙니다. 기도가 필요한 한 사람인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무엇을 위하여 서로 기도하여 주어야 합니까?
존맥스웰이라고 하는 미국의 유명한 목사님이 쓴 ‘기도동역자’라는 책을 보면 3가지 측면에서 기도해 주라고 합니다.
먼저 개인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겸손과 지헤와 긍정적인 대인관계와 성령의 열매와 건강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가정의 필요를 위해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가정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영적인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규칙적인 기도와 말씀의 시간을 위해 항상 성령충만을 위해 영적전쟁에서 승리하도록 신뢰성을 잃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인들의 필요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전도하고 그들의 상하고 지치고 병든 영혼을 잘 섬기며 교인들의 성장이 되도록 잘 지도하고 평신도들을 사역에 잘 동참하는 훈련을 하며 그들의 질병과 필요를 잘 섬기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교회에 부임하였을때에 한 권사님의 기도가 저에게 너무나 위로가 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이 권사님은 잠깐 사정이 있어서 우리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 가 계신 형편입니다. 제가 그 권사님을 지금도 고마워하는 것은 그 추운 겨울날도 걸어서 15분이상 되는 거리를 가장 먼저 오셔서 추운 교회당 안에서 먼저 불을 밝히고 기도하십니다. 그때에는 제가 사택을 교회 안에 있어서 15분이나 20분전에 나와서 불을 켜놓으려고 일찍 나와보면 불을 켜고 혼자 본당 안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는 내용을 어쩌다 듣게 됩니다. 그런데 그때 부임하여 아직 적응이 되지 않고 여러 가지로 목회가 아직 힘들때인 목회자인 저를 위하여 기도하여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얼마나 마음이 큰 위로가 되었은지 모릅니다. 기도의 후원을 받을때 너무 마음이 기쁩니다. 기도의 후원을 받을때 얼마나 사역의 열정이 불을 붙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 서로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려움을 당하고 고난을 당한 성도들에게 제일 큰 위로가 무엇일까요?
기도하여 주는 것입니다.욥이 환난을 당하여 큰 슬픔에 빠졌을때에 욥의 세명의 친구가 위로한다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일주일동안은 말없이 있다가는 한다는 말이 ‘욥 너가 너무 하나님 앞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렇구나 죄가 없이 이렇게 될수는 없으니 회개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욥이 상처가 되었겠습니까?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저렇게 원인을 말하고 문제를 가르치기 보다는 그의 아픔과 상처와 고통을 위해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특별히 자녀를 위해서 여러분들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가 무엇일까요?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육군 교도소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김태수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고아로 자라다가 군입대를 했는데 중대원들이 고아인 자신을 무시하는 것에 앙심을 품고 어느날 밤 보초시간에 잠자고 있던 중대원들을 향해 총을 난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형언도를 받고 교도소에 수감되어 형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얼마나 난폭한 사람인지 배식을 하러 온 사람이 자기를 이상한 눈으로 본다고 철빗장을 뽑아서 그 사람의 배를 찔러 죽이기까지 하였다는 것입니다 .
그런데 어떤 기회가 되어서 김우영이라는 목사님이 이 죄수를 대면하게 되어서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외로움에 젖어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던 이 사형수는 자신을 진정으로 위로하는 그 목사님의 전도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나 같은 죄인도 예수님을 믿어도 되나요“ 하고 결국 에수님을 믿고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사형이 집행이 되기 전날 독방에서 세례를 받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햇다고 합니다. ‘나에게도 어머니가 있었다면 나를 위해 기도하는 가족이 있었다면 이런 자리에 와 있지 않았을 턴데“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형집행이 있던 시간에 “할말이 있는가?” 교도관이 묻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 목사님 모든 어머니들은 자녀를 위해서 쉬지 말고 꼭 기도주라고 전해주세요.  이 말 한마디 하고 그는 결국 하나님 나라로 갔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자녀들에게 최고의 위로는 우리 부모님들의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자녀들이 망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자녀들이 마음의 힘을 얻고 세상을 용기있게 살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우리 삶에 모든 상처와 아픔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와 성도의 위로를 통해서 채움받으시고 이제는 더욱 기도하면서 위로자의 삶을 우리 모두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