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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택하신, 사랑하신 자처럼 (골 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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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텔레비전 광고 카피에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라는 문구가 있었습니다.
  그게 무엇을 선전하는 광고였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데, 무슨 영양제 선전 아니면 우유 선전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부분의 부모들이 그저 '공부만 잘해다오.'라는 식으로 자녀들에게 요구하던 것과는 달리, 비록 광고이기는 하지만, 아버지로서 자기 아들이 그저 몸 건강하게만 자라준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다고 진심어린 모습으로 말하는 장면이 지금까지도 제게 인상 깊게 남아 있습니다.
  하여튼 세상의 모든 부모들은 각각 자기 자식을 향하여 부모로서 꼭 바라는 소원들이 다 한 가지씩은 있는 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고3 때에는 주일예배에 안 가도 괜찮다. 일류대학에만 붙어다오."라든지, "신앙생활은 하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해도 좋다. 그저 크게 출세만 해다오."라는 따위의 유치한 요구를 하는 부모들도 없잖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모자라서 이루지 못한 욕심을 자기 자식을 통해서 일종의 '대리만족'을 느끼고자하는, 더 솔직히 말해서 자기 자식을 본인의 소원성취를 위한 수단처럼 전락시키는 아주 못난 부모입니다.
  하지만 진짜 부모다운 부모는 오로지 자기 아들딸들이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그리고 그런 후에 가서 그 아들딸들을 키운 부모로서의 보람과 자부심을 얻게 되기 위해서 '내 자식이 이렇게 만큼은 꼭 되어주었으면.'하는 소원들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서도 바로 그와 같은 마음에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바라고 계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라는 말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께로부터 택하심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양자가 된 성도들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그처럼 '천에 하나 만에 하나'로 택하심을 입어서 하나님의 자녀라는 이 아름다운 이름과 고귀한 신분을 얻게 된 성도는, 그렇게 자기를 양자로 삼아주신 하늘 아버지께서 자기 자신을 향하여 원하시는 모습으로 자라나야 마땅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을 가리켜 오늘 본문의 말씀은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이리저리 행동하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택자를 가리켜 "거룩한 자"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택함 받은 성도는 '경건생활'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거룩함을 입은 자'가 되었음을 나타낼 줄 알아야 할 두고 하는 말씀으로서, 나중에 16절과 17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다음 주일에 계속할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자를 가리켜서 "사랑하신 자"라고 부르시면서 그처럼 당신의 사랑을 입은 양자로서 마땅히 나타내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12하반절로부터 15절까지의 말씀에서 명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택하신 자처럼"이라는 말은 하늘 아버지께서도 그 특별히 선택하신 자녀들에게 바라시는 것이 두 가지가 있으며, 성도는 그런 하늘 아버지를 모시게 된 양자답게 바로 그 두 가지 자세를 꼭 지키면서 살아가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오늘 우리는 그 중에서 한 가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택함을 받고서 그 '사랑하신 자'가 된 성도답게 살아야 할 자세를 먼저 상고해보고자 합니다.

  1. 하나님의 택자는 다른 성도와의 사랑의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사랑받은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우선 12절에 보면 "12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성도들이 발휘해야 할 다섯 가지 성품들이 나옵니다.
  "긍휼"이란 어려운 처지에 빠진 남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자비"는 그처럼 불쌍히 여겨지는 대상을 두고 어떻게 도와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리킵니다.
  "겸손"이란 모든 경우에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길 줄 아는, 대인관계의 가장 기본에 해당되는 자세입니다.
  "온유"는 '점잖음(gentleness),' 즉 남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럽고 온화한 것을 가리킵니다.
  "오래 참음" 즉 인내는, 이 문맥에서는 개인적인 어려움을 두고 발휘하는 인내라기보다는, 다른 사람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참을 줄 아는 성품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열거된 다섯 가지들은 모두가 다 대인관계에서 나타나게 되는 성품들이며, 특별히 성도가 다른 성도와 교제할 때 꼭 발휘해야 할 필수품성들에 해당됩니다.

  적어도 택자로서 자기가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입은 자인 줄을 자각하는 성도라면 이 다섯 가지의 성품들을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하며 모든 대인관계에서, 특히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자동적으로 항상 발휘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의 말씀에 "(그런 자답게 되려면) 이런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라고 한 것입니다.
  밖에 나갈 때,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옷 벗고 할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말 같지만, 의관정제야말로 그 어떤 대인관계를 나누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며 설명이 필요 없는 기본자세입니다. 꼭 마찬가지로, 우리 성도들은 항상 이 다섯 가지 의복들부터 먼저 빠짐없이 차려입고 있는 가운데 서로 만나고 교제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목사님, 물론 옳은 말씀입니다. 성도가 당연히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를 항상 발휘하며 서로 교제해야 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설교 듣는 시간 동안만 잠시 기억할 수 있는 일이지, 실제상황에서는 아무래도 쉽게 까먹게 되지 않겠습니까?"라는 문제제기가 나올 수 있습니다. "한두 가지라면 그래도 좀 기억하고 입고 나가고 발휘하려고 노력할 수 있겠지만, 그 다섯 가지나 되는 것을 어떻게 다른 성도와 만날 때마다 일일이 기억하면서 교제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반문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다른 성도를 만난 자리에서 '내가 긍휼해야지, 자비해야지, 겸손해야지, 온유하고 인내해야지.'라고 내내 상기하려고 하면 머릿속이 복잡해서 인사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할 것이고, 같이 식사하면서 또 '내가 이 시간 이 사람 앞에서 말 한 마디나 행동거지 하나하나에도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인내를 발휘해야지.'하면서 한 숟갈 들 때마다 속으로 되뇌어야 한다면 우선 입맛 밥맛부터 다 떨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 다섯 가지 품성들을 한 가지로 묶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긍자겸온인'하고 머리글자로 외울 필요도 없이 간단하게 하나만 기억하고 적용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도가 다른 성도 앞에서 발휘해야 할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이 다섯 가지의 아름다운 덕들을 간단하게 단 하나로 똘똘 뭉쳐버리면 과연 무엇이 될 것 같습니까?

  그것이 바로 이어지는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 보면 "13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했습니다.
  즉 '용서'야말로 12절에 나오는 다섯 가지 대인관계의 덕목들을 하나로 묶어서 간단히 기억하고 발휘할 수 있는 대표적인 덕목,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인내가 한 덩어리로 집약된 종합적인 덕목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혐의가 있거든"이란 말은, '무슨 의심할만한 일이 생기거든'이란 뜻이 아니라, "원망할만한 일이 있거든"이란 뜻입니다.
  즉 다른 성도가 무언가 자기를 기분 나쁘게 하거나 손해 보게 한다든지 함으로써 그 성도를 향하여 원망하는 심정이 생기는 때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경우에 신자는 하나님께 '택함 받은 자답게,' 더욱이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답게' 자기도 남에게 "용서"를 베풀 줄 아는, 아니 당연히 베풀어주어야 할 절호의 기회처럼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용납"이란 말과 "용서"란 말,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두 가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용납'이란 '용서'보다는 좀 더 수동적인 자세의 용서입니다.
  남의 잘못을 두고 그저 조금 이해하고 봐 줄 줄 아는 정도의 마음을 가리키는 말인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깊은 사랑 가진 사람 아니라도, 그저 조금 점잖은 성품, 조금 참아 줄 줄 아는 마음만 있어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앞에 나온 다섯 가지 중에서 마지막 세 가지의 성품들, 즉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정도의 품성들만 있으면 남을 용납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에 비하여 '용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완전히, 깨끗이, 아주 잊어버린 듯이 용서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겸손, 온유, 인내'만 가지고는 좀 힘든 것입니다.
  하지만 12절의 다섯 가지 중에서 처음의 두 가지, 즉 '긍휼과 자비'가 발휘될 때에만은 가능합니다.
  내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오히려 불쌍히 여겨주고, 바로 그런 상대방을 위하여 내 쪽에서 오히려 도와주고자 하는 적극적인 긍휼과 자비가 발휘된다면, 그때는 용납 정도가 아니라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살펴본 내용을 종합해보면, 성도가 남을 용서하게 될 때면, 바로 그 용서라는 한 가지 실천을 통하여 앞의 다섯 가지 대인관계의 덕목들, 즉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 이 모두를 이미 완벽하게 자동적으로 발휘하게 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대인관계의 덕목들의 종합정리요 최고봉과도 같은 용서를 우리가 어떻게 실천해낼 수 있습니까?
  내게 불친절한 사람, 내게 나쁜 말 한 사람, 내게 해로운 짓 한 사람, 내게 손해 준 사람, 현실생활에서 이런 사람들과 부딪히게 될 때 도대체 어떻게 정말로 용서해줄 수 있다는 말이겠습니까?
  실로 '용서'야말로 말이 쉬워서 그렇지 실제로 행하기는 정말 어렵고도 어려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 진정한 용서는 사람이 무슨 성인군자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만 해서 되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자'의 체험이 있는 성도만이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13하반절에서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라고 하신 것 아니겠습니까?
  성도가 서로를 용서할 줄 안다는 것이야말로, 바로 그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죄의 은총을 뜨겁게 체험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며, 진실로 그가 하나님의 사랑하신 자, 즉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택자가 되었음을 명백하게 증거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이런 용서를 베풀 줄 아는 단계를 지나게 되어야 만이, 성도는 다른 성도와의 교제에 있어서 그 다음 최종단계, 즉 사랑과 평안의 단계에 도달할 수 있게 됩니다.
  14절과 15절에 보면 "14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이 구절에서 "온전하게 매는 띠"라는 표현은, 성도교제의 최종단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이 옷을 입을 때에는, 이것저것 걸쳐 입고 제일 마지막에 허리띠를 매어야 옷차림이 완성되었습니다.
  '사랑'은 성도교제에 있어서 그런 최종단계, 최고의 덕인 것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즉 교회 안의 모든 성도들이 이런 진실한 사랑을 서로 나눌 수 있게 되면, 그것은 마치 그 교회 전체가 한 공동체로서 함께 띠를 매는 것과도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 간의 사랑이 진실로 나누어지는 교회는 옷차림이 끝난 온전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사랑의 띠를 함께 매고 있는 한 몸 안에서는 자연히 '평강'이 유지되고 '감사'가 끊임없이 솟아나오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 간의 '사랑'과 교회의 '평강'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3절에 보면 "평안"을 가리켜서도 "매는 줄"이라고, 즉 평강도 사랑이나 마찬가지로 성도교제의 최종단계이며 교회를 한 몸이 되게 만드는 일, 즉 '온전하게 매는 띠'의 단계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도가 성도교제를 완벽하게 하고 있을 때, '사랑'이 그 교제하는 대상에게 밖으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이라고 한다면, '평강'은 그처럼 성도교제하는 자가 스스로 자기 마음속에서 누리게 되는 부산물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랑'과 '평강'이라는 성도교제의 최종단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수적인 과정이 바로 '용서'입니다.
  다른 교인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있고 분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억울한 느낌이 가득 차고 또 속 타기도 하고 때로는 이를 갈 일까지 생기곤 하면, 그런 교제에서는 평강이란 있으려야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원망할만한 일이 있을 때에도 오히려 다른 성도를 용서해줌으로써 '다섯 가지의 옷'들을 다 차려 입고, 거기에다 '사랑의 띠'를 맴으로써 성도교제를 온전히 이룬 성도는, 자기 자신 속에서는 도무지 머리 썩히고 마음 상할 일 없으니 자연히 더할 수 없는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남을 진정으로 용서해본 체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제 아무리 배고픈 사람 구제도 해보고 어려운 사람 위해 기도도 해보았다 하더라도, 진정한 사랑은 아직 발휘해 보지 못한 사람일 뿐입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본문에서 이상과 같이 일련의 성도교제의 덕목들과 단계들을 말할 때 특별히 '용서'에 키포인트를 두면서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택자는 이처럼 '용서'야말로 온전한 성도들 간의 교제에서 발휘되어야 할 많은 덕목들을 하나로 종합해주는 것이며 성도교제의 완성단계에 도달하고자 할 때 반드시 통과해야 할 유일한 길목과도 같은 것임을 똑바로 깨닫고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님 여러분, 여러분은 진정으로 한번 남을 용서해보셨습니까?
  멀리 가기 전에, 우선 내게 가장 가까운 사람, 내 가족, 내 교회 성도 중의 한 명을 진정으로 용서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시간 다 각자 스스로 한번 '용서의 손익계산'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기분 나쁜 일, 억울한 일, 괘씸한 일을 다른 교인에게서 당했을 때, 비록 실제적인 복수는 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원망'으로, '미움'으로 갚는 정도는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다 갚아 버린 경우는 남긴것이라고 해보십시다.
  결과적으로 내 자존심 다 세우고 내 속 후련하게 만들어버렸다면 어쨌든 손해 안 보고 남긴 장사니까, 그렇게 계산해도 되지 않겠습니까? 반면에, 만일 여러분이 그런 기분 나쁜 말 듣고도,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고도, 못된 짓을 당하고도, 그대로 갚지 않고 비록 '용서'는 못되더라도 최소한 '용납'이라도 하고 지나간 것이 있다면, 세상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내가 손해본 것이니까 손실로 계산해보시기 바랍니다.

  그 계산이 어떻게 나오십니까?
  남긴것이 많아서 후련하시고 배부르십니까?
  통쾌하고 푸근하십니까?
  내가 맞은 것보다 저 놈 때려 준 게 더 많으니까 굉장히 이득을 많이 남긴 것처럼 기분이 좋으십니까?

  여러분은 그 '용서의 손익계산'이 반드시 손해로 나와야만 합니다.
  내가 갚지 못한 억울한 일, 내가 되로 받고 말로 되돌려 주지 못한 비난, 내가 아직까지 상대방에게 갚아주지 못한 분통터질 일들이 여러분들에게는 반드시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아니 그저 봐주고 넘겨주는 정도의 용납이 아니라, 상대방이야 어떻게 나오든지 간에 여러분 쪽에서는 깨끗이 잊어주고 아니 오히려 긍휼로써 불쌍히 여겨주고 아니 오히려 자비로써 도와줌으로써, 그 손해 본 한 가지 일을 두고서도 오히려 두 배, 세 배의 손해가 되어 남아 있는 일들이 여러분들의 성도교제에는 반드시 있어야만, 아주 많이 있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사실에 있어서는 그것이 결코 손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 계산서에서 손해처럼 나오는 것들, 불신자들이 보기에는 자존심의 손해, 기분의 손해, 체면의 손해, 금전적인 손해처럼만 보이는 그것들이야말로, 우리가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훨씬 더 귀하고 값비싸고 보배로운 '사랑을 많이 받은 자'인 것을 상대적으로 더욱 뚜렷이 상기시켜주는 숫자입니다.
  그 손해처럼 보이는 쪽의 반대편에는 이미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엄청난 사랑이 그 어떤 손해 처럼 보이는 숫자를 갖다 대어도 도무지 표도 나지 않을 만큼 무한대의 양으로 이미 기입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순간부터 이미 우리는 그 플러스를 받은 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신 자'란 말은 여기서 '하나님의 택하신 자'란 말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되 그냥 보통 사랑, 평균의 사랑이 아니라, 아주 '특별하고도 분에 넘칠 정도로 많은 양의 사랑'(extra special love)을 받은 자인 것을 증명해주는 영수증과도 같은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사실을 얼마나 아름다운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까?
  저는 누구든지 들으면 그 뜻을 금세 깨달을 수 있도록 지극히 쉽게 가르쳐주신 이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에 자질구레한 주석을 다는 자체가 아예 사족이 될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바로 이 시간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저와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신다고 상상하면서 함께 봉독해보고자 합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로 35절에 "21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번 뿐 아니라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 23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처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한대 26그 종이 엎드리어 절하며 가로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32이에 주인이 저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하고 34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35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종의 대차대조표에서 대변(貸邊)과 차변(借邊)을 각각 '일만 데나리온' 대 '백 데나리온'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일만 달란트' 대 '백 데나리온'이라고 하신 것을 유의해보시기 바랍니다.
  이 액수는 예수님께서 실언하신 말씀도 결코 아니며 약간의 과장조차 결코 아닙니다.
  '일 데나리온'이 노동자 일당이니까 대충 10만원이라고 보면, '백 데나리온'은 '일천 만원'이 되는데, 그렇게 계산하면 '일만 달란트'는 '일천 만원'의 60만 배이니까 무려 '육천 억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의 대변과 우리 스스로 남에게 베풀어야 할 용서의 차변의 액수를 이처럼 60만 배라는 엄청난 차이로 비유해주신 것은 어디까지나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백 데나리온'짜리의 용서를 '일흔 번씩 일곱 번' 정도가 아니라 평생토록 매일같이 베풀면서 산다 해도 그 대변과 차변의 계산을 비슷하게라도 맞출 길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제가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여러분께서는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이렇게 용서해보셨습니까?
  자식이 내 앞에서 불효했을 때, 부모가 내 마음을 부당한 일로 섭섭하게 하셨을 때, 아내가 내 자존심을 형편없이 구겨 놓았을 때, 남편이 내게 찬바람 나는 말을 했을 때, 따지지 아니하고, 아니 나 같이 주님께로부터 이미 용서 받은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은 따지고 자시고 할 것이 전혀 없음을 알고, 그냥 깨끗이 용서하고 넘어가본 적이 있습니까?

  교역자가 내 마음에 상처를 주는 실언을 했을 때, 교인이 내 목회에 가시처럼 행동할 때, 곁의 성도가 정말 같은 교인으로서 도무지 못할 짓을 내게 저질렀을 때에, 여러분께서는 '주께서 나를 용서해주신 것'을 기억한다면, 그런 실례나 실수를 용서해주는 것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닫고 가볍게 용납해주신 경우가 있었습니까?

  그런 짓을 당하면 비록 복수나 미움은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원망' 정도는 누구라 해도 마땅히 할 만한 것으로 보이는 경우에도, 바로 그 때,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일만 달란트를 이미 그냥 탕감받은 자'라는 사실을 상기해내고서, 나의 '동관'된, 내게 겨우 '백 데나리온 빚진' 그 성도를 단 한번이라도 완전히 용서해주신 적이 있었습니까?
  아까 그 '용서의 손익계산서' 에서 남은것이 많은 사람은, 그것이 결코 많이 남긴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동관'이 내게 진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주지 않고 악착같이 남겨놓고 그것을 '사랑과 미움의 대차대조표'의 차변에만 계속 모아온, 실로 부끄러운 숫자인 줄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는 그 어떤 마이너스도 이미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받은 플러스에 비하면 도무지 계산의 비교상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 하나님의 사랑하신 자'라는 이 엄청난 칭호와 신분을 신자가 그냥 달고 다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택한 신자들이 좀 기본이 된 사람, 정말 사람다운 사람, 아니 실로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라고 불리기에 부끄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원하시면서 내려주신 이름들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자녀들이 부모의 사랑을 받으면서 형제자매 간에 우애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택자는 같이 '주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은 형제자매'된 성도들과 반드시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나눌 수 있으며, 그 사랑은 필수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우선 '용서'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해야 하나님의 택자가 자기가 평소에 가장 가까운 교회 안의 형제자매들조차 용서하지 못한대서야 어떻게 말이 되겠습니까?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 이 고상한 대인관계의 덕목들을 남을 '용서'해주는 이 종합덕목 한 가지를 통하여 한꺼번에 다 옷 입고 있는 성도, 그 결과 진짜 '사랑의 띠'를 매어 그 아름다운 옷들이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흘러내리거나 벗겨지지 않는 성도, 그래서 진정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자'다운 하늘 아버지의 자녀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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