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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벨의 간증 (히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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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들의 이름보다, 믿음의 사람들의 간증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믿음의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기보다는 위대한 간증을 남긴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천국에 가서 할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들을 찬송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우리가 믿음으로 행한 일을 고백하게 된다(롬14:12). 그때 간증대회 형식으로 열릴게 된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믿는다. 그때 간증거리가 없어, 부끄럽지 않은 성도들이 되시기 바란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로, 아벨의 믿음의 간증이다. 본문의 배경은 (창4장)이다. 아담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 가인은 농사꾼이요, 작은 아들 아벨은 양치는 목자였다. 그들은 하나님께 예배했는데, 하나님께서 아벨의 예배를 받으시고, 가인의 예배는 받지 않으셨다. 왜?

1.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上).

더 낫다는 말은, 양적인 의미가 아니라 질적인 의미다. 우리에게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가 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인간적인 의다. 냄새나는 더러운 의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보다 더 나은 의, 질적으로 전혀 다른 의가 있다. 온전한 의다. 믿음으로 얻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다. 마찬가지로 가인과 아벨은, 질적으로 다른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한마디로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는 제사, 인간의 의를 강조하는 제사였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는 믿음으로 드린 제사였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초점을 맞춘 제사였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다. 그 후에 태어난 아들들이, 가인과 아벨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롬10:17의 말씀대로, 그들은 자기들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들었다. 또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배웠다. 그래서 그들은 똑같은 날,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되었다.

  그런데 각자가 하나님께 드린 제물의 내용이 달랐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기에, 땅의 소산물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반면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다. 그래서 그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언뜻 보기에는 가인의 제사가, 더 풍성하게 보일 수도 있다.

  땅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드리니까, 종류도 많고, 보기에도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이에 비해 아벨은 양의 첫 새끼, 단 하나였다. 그것도 산채로 드리지 않고, 그 기름으로 드렸으니까 양을 잡아 죽여서, 피를 흘려서 하나님께 드렸다. 양의 몸에서 흘린 피가, 제단을 붉게 물들였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자기 임의대로 아무렇게나 제사 드림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규례대로, 제사 드리기 원하신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가인과 아벨에게,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일러주었다.

  제사를 드리는 때와 장소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제물로 무엇을 요구하시는지 자세하게 일러 주었다. 아담 부부는 가인과 아벨에게, 이렇게 가르쳤다고 볼 수 있다. “얘들아, 우리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죄를 짓고 말았다.

  그때 우리는 죄를 가리기 위해,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옷을 만들어, 가리워 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우리 손으로 만든 옷은, 우리 죄를 결코 가릴 수 없었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의 죄를 가리워주시기 위해서, 친히 옷을 만들어 주셨다.

  하나님께서 짐승을 잡으시고,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서, 우리의 수치를 가리워 주셨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가인과 아벨이 자기의 죄를 가리기 위해서는, 스스로 만든 옷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만들어주신 옷을 입어야 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말해주어 자식들이 알게 되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죄를 덮기 위해서는, 인간의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피흘림의 제사가 요구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죄사함을 위해서는 피흘림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가인은, 자기방식대로 제사를 드렸다. 그는 아마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제사를 드렸다. “내가 왜 죄인인가? 나의 부모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으면 지었지, 내가 왜 그 죄를 그대로 물려받아야 한단 말인가? 나는 땀흘리면서 열심히 농사를 지었을 뿐인데… 나는 내 식으로 제사를 드릴 꺼야.”

  물론 성경에 보면, 농산물로 제사를 드리는 소제(민하, ה󰖎󰘁󰗬, 조공, 선물)가 있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감사함으로 드리는 제사다. 가인은 소제를 드렸다. 그러나 먼저 피흘림의 제사를 드리고 난 뒤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피 없는 소제를 먼저 드릴 수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미 이 사실을 분명히 언급했다. (히9:22)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죄사함을 위해서는 반드시 피흘림의 제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인은 이를 무시하고, 자기식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러니까 가인의 제사는 한마디로 불순종의 제사였다. 비신앙적인 제사였다.

  그러나 아벨은 달랐다. 그는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믿음의 제사를 드렸다.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이 양처럼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 양의 피와 기름을 받으시고, 저의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믿음이 아벨에게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기록을 하고 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리고” 아벨은 믿음으로, 더 나은 제사를 드렸다. 가인은 자기 의, 인간의 행위를 강조했지만, 아벨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초점을 맞추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갔다.

2.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中).

가인도 아벨도 똑같은 죄인이기에, 똑같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아벨만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가인은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지만, 가인은 믿음이 없는 제사를 드렸기 때문이다. 이솝우화 중에 “여우와 두루미”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느 날, 여우는 두루미를 초대한다. 맛있는 음식을 장만했으니 와서 먹으라고 했다. 두루미는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하였다. 와서 보니 기가 막혔다.

  납작한 접시에 맛있는 음식을 담아놓고, 부리가 뾰족한 두루미에게 먹으라고 하니 말이다. 여우는 왜 맛있는 것을 먹지 않느냐며, 혼자 맛있게 먹었다. 얼마 후 이번에는, 두루미가 여우를 초대한다. 식사를 내놓는데, 긴 부리가 없으면, 절대로 먹을 수 없는, 길다란 병 모양의 접시이다.

  두루미는 아주 맛있게 먹는데, 여우는 구경만 한다. 음식을 쳐다보기만 하고, 먹지 못하면 고문이다. 저는 닭고기를 먹지 않는데, 초대해서 닭고기만 푸짐하게 내놓는다면, 고문행위가 된다. 영적인 세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열심을 내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법대로 드리지 않으면, 기뻐 받지 않는다. 내 방법대로 드리면, 신념이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자신을 드리는 예배이다(롬12:1).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을 주님께 드려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시51:17).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예배할 때 자신이 드려지는 예배, 자신이 죽는 예배를 말한다. 내 자신이 예수님과 함께 죽는 예배가 되어야, 의인이 드리는 예배가 된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제물을 드릴 때, 예물과 함께, 우리 자신이 믿음으로 드려지는가를 보신다.

  (창4:4-5)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하나님은 예배자가 드리는 헌물과 함께, 예배자 자신을 받으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제물만 열납하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 제물을 함께 받으셨고, 가인의 제물만 받지 않으시고, 가인 자신도 열납하지 않으셨다. 우리 자신이 드려지지 않는 예배는, 올바른 예배가 될 수 없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해 드려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직 한 가지 믿음만을 요구하신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가인의 문제점이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자기 의를 내세우느라,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심을 무엇으로 알 수 있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제물을 받으실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 제물을 사르는 경우를 종종 본다. 대표적인 경우가 엘리야와 바알 선지자들이 대결할 때였다.

  먼저 바알 선지자들이 송아지를 잡았다. 각을 떠서 나무 위에 올려놓고, 바알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들은 칼로, 자기 몸을 상하게 하면서 피를 흘렸지만, 끝내 바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다. 엘리야도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떴다. 나무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주변에 도랑을 팠다. 물을 채웠다. 물을 퍼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쏟아 붓고 난 뒤, 하나님께 기도했다.

  (왕상18:37)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다. 불은 번제물을 태웠다. 하늘에 불이 내려서, 그 제물을 열납해 주셨다.

  하나님께서 가인과 아벨이 보는 눈앞에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아벨의 제물을 열납하셨다. 그것을 보면서 아벨은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을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구나.” 그는 기쁨으로 충만했지만, 가인은 자기 예물이 열납되지 않음을 보면서, 안색이 변할 정도로 화를 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어떠한 심정으로 나아가고 있나요? 가인처럼 인간의 의, 인간의 행위를 가지고 나아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없다. 아벨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믿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면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쁘게 용납해주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의롭다고 해 주신다.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 바란다.

3. 아벨은 믿음으로, 죽었지만 말하고 있다(下).

아벨의 이름이 믿음의 영웅들 가운데, 첫째 자리에 올라있다. 이는 대단한 영광이다. 성경책에 몇 번 언급된 아벨이,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로나 업적으로 보면, 모세나 다윗이 차지할 자리를 아벨이 차지했다. 그러면 왜 아벨이 첫 자리를 차지했나? 그 이유가 무엇인가? 아벨이 믿음의 첫 예배자요, 또한 첫 순교자였기 때문이다. 아벨은 믿음으로 예배했고, 그로 인해 첫 순교자가 됐다.

  아벨의 예배는 믿음의 첫 증인이 되어서, 죽음을 초월하여 생명의 길을 걸어갔다. 아벨의 예배는 구원에 이르는 믿음이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진 예배였다. 아벨은 형 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아벨은 끝나지 않았다. 아벨은 그 믿음으로써,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 말하고 있나?

  (창4:10)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의로운 자의 피, 순교자의 피를 사람들은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선 결코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억하시고 상 주신다. 계6:10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순교자의 피를 갚아주신다.

  아벨은 예배를 잘 드리고 나서 죽었다. (창4:8)을 보면,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형 가인에게 살해당했다. 세상 이야기라면, 아벨의 인생은 실패한 인생이다. 오죽 못났으면,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아벨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죽음, 순교를 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부분은,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죽으면 그만이다”고 말하지만,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히9:27). 아벨의 몸은 죽었지만, 그 육체는 땅속에 묻혀 썩었으나, 그의 신앙은 죽지 않고, 묻히지 않고 썩지 않았다.

  서머나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사도 요한의 제자인, 유명한 폴리갑 감독이 있었는데, 그가 순교를 당한다. 폴리갑은 안 믿는 사람에게도, 존경받는 지도자였다. 폴리갑은 잡혀갔다. 그들은 폴리캅을 회유한다.

  “우리는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하오. 그러나 유대인들이 당신을 고발했기에, 할 수 없이 잡아왔소, 당신이 예수는 나의 주인이 아니며, 로마 황제 시저가 주라고 한마디만 하면 풀어 주겠소” 폴리캅이 이렇게 말한다.

  “86년 간 내가 섬겨 온 주님께서, 언제나 나를 선대하셨는데, 내가 나의 사랑하는 주님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수 없이 사람들이, 폴리캅을 묶어 장작더미 위에 세우고, 화형을 시키겠다고 위협하자, 86세의 노인인 폴리캅이 말한다. 

“불을 지르시오, 이 불은 잠시 있다가 꺼질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의 불이 있음을 기억하라, 이는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의 불이요, 만약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거절하면, 영원한 지옥의 불을 견뎌야 한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영광스럽게 순교했다.

  한국 사람들이 잘못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잘 산다”라는 표현이다. 우리는 흔히 부자를 잘 산다고 한다. 그러나 부자라고 반드시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부자는 부자일 뿐, 부자라고 해서 잘 사는 일은 아니다. 경제적으로 조금 어려운 분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못사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분들 중에도, 잘사는 분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주님께서는 시험을 당했지만, 시험을 잘 견디고 승리한 사람들에게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했다. 육신적으로는 망했어도, 영원히 빛나는 사람, 생명의 면류관을 얻은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결론이다. 어떻게 살았는지 점검해 보자. 이제는 우리가 선택할 차례이다. 가인의 길로 가겠는가? 아니면 아벨의 길로 가겠는가? 순종의 길인가? 불순종의 길인가? 아벨의 길을 걸어감으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믿음으로 살아서,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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