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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호와께서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삼상 30: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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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삼상 30:21-25)

    성경 속에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았던 믿음의 위인도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너무나 신실하였기에 하나님께서도 사도행전 13:22에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마음에 맞다’는 말을 또 다른 우리말 성경에는 ‘마음에 합하다’고 번역해 놓기도 하고, 영어성경 NIV에는 ‘내 심장(가슴)을 따르는’이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 ‘마음에 맞다’는 말보다는 ‘마음에 합하다’라는 말이나 ‘내 심장(가슴)을 따른다’라는 말이 문맥상 더 강한 느낌을 줍니다. 어쨋던 이처럼 다윗 외에 성경에 등장하는 어떤 인물도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극찬을 들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은 성경에 나타나는 인물 중, 유일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고 인정받은 다윗, 그토록 하나님 앞에 신실했던 다윗은 그 신실함이 무색할 정도로 그의 인생은 험난하기 그지없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남다르게 신실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남다른 복을 받고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야만 우리의 보편적인 사고는 충족될 것입니다만, 도저히 ‘복’으로는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화’로만 느껴질 정도로 그의 생명은 늘 위기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위대함, 즉, 하나님을 향한 그의 신실함은 그의 위기의 삶 속에서 잘 드러남을 보게 됩니다. 고난과 혼란의 현장에서도 늘 하나님을 신뢰 하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모습대로 처신함으로서, 그 위기를 극복하고 평안을 창출하는 한 개인으로, 또한 지도자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에서도 이와 같이 하나님 관점으로 일을 처리함으로 공동체에 평화를 불러오는 그의 하나님 중심의 신실하고 지혜로운 처신을 보게 됩니다. 반면, 자신들의 의에, 자신들의 전공(戰功)에 강하게 붙잡혀 연약한 형제들을 긍휼히 여기지 못하고 자신들만의 이익을 챙기는 악한 무리, 즉, 불량배들의 처신을 보게 됩니다. 아울러 우리는 오늘 이 본문을 통해 나타나는 불공정해 보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실 다윗의 처신, 공정해 보이지만 ‘악하다’고 ‘불량하다’고 판단 받을 수밖에 없는 무리들의 처신을 우리들의 처신에 유추해 보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취해야 할 바람직한 삶의 모습을 정립하고, 그렇게 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 오늘 본문 이전에 나타나는 다윗의 상황을 개괄적으로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다윗의 본격적인 고난의 삶은 사울 왕의 시기심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다윗이 사울의 부하로 있을 때, 전쟁에 참여하여 대승하고 돌아오자 백성들이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 만이요”라고 춤추며 노래하였습니다. 이 일은 사울로 하여금 정치에 전념하지 않고, ‘다윗 죽이기’의 인생을 시작하게 했고, 그래서 다윗은 계속적으로 살기등등한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는 고난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울로부터 무고하게 수차례 죽음의 위기를 맞이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사울을 치자’는 부하들의 격렬한 성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이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이라는 명제 하에 추호도 그를 대적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내가 이방 땅 블레셋으로 들어가리라. 그리하면 그가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라”하고, 사울을 피해 함께 있던 사람 600명과 더불어 이방 땅 블레셋으로 들어갔으며, 이 소식을 전해들은 사울은 다윗의 예상대로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다윗이 들어간 땅은 블레셋의 다섯 성읍 중에 하나인 가드 땅이었습니다. 다윗은 그 성읍의 왕 아기스를 찾아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으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라고 간청하여 시글락이라는 땅을 얻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의 사람들과 함께 거주하였습니다.

    시글락에 거주하는 동안에 다윗은 조국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는 일부 족속들을 쳐서 양과 소 나귀 낙타 의복 등을 빼앗아 아기스 왕에게 상납함으로 아기스의 마음도 사고, 조국 이스라엘도 유익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으로부터 전리품을 받을 때 아기스 왕이 “오늘은 누구를 쳤느냐”라고 물으면 다윗은 “이스라엘에 속한 일부 부족을 쳤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서, 아하스 왕으로 하여금 “다윗이 이처럼 자기 백성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자신을 확실하게 신뢰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과 블레셋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미 다윗을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던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블레셋 군대의 소속으로 이 전쟁에 참여할 것을 제안했고, 다윗 역시 그 제안을 정중하게 받아들여 “이 전쟁에서 제가 행하는 것을 보시면 저를 더 확실하게 신뢰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때 다윗이 무슨 속셈으로 블레셋 군사의 입장으로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쳐야하는 전쟁에 참가하기로 쉽게 결정했는지는 모호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괴롭히던 사울을 죽이고 이스라엘에서 권세를 잡을 수 있는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을 피해 이 블레셋 땅까지 왔으며, 블레셋 땅에 거주하던 당시에도 아기스 왕을 속이면서까지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친 애국자입니다. 그런 그가 블레셋 군인의 자격으로 사울 왕이 수장인 조국 이스라엘의 군대를 치리라고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건 다윗은 그 자신과 아기스 왕의 의도와는 달리 이 전쟁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전쟁에 참여한 블레셋의 방백들이 다윗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이르기를 “이는 사울의 부하 다윗이 아닙니까? 그 백성들이 춤추며 노래하여 이르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 만이요 하던 그 다윗 아닙니까? 저가 이 전쟁에 참여하여 우리의 대적으로 돌변할 것 아닙니까?”라고 다윗의 참전을 강력하게 반대하였습니다. 이에 아기스 왕은 “그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내가 그에게서 어떠한 허물도 발견하지 못했다”라고 다윗을 적극 변호했지만 블레셋 방백들의 반대를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아기스 왕은 심히 민망한 마음으로 다윗을 달래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거처인 시글락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한편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여하느라고 다윗 일행이 집을 비운 사이 저들의 거주지 시글락은 아말렉의 침입을 받아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성읍은 불탔고, 아내와 자녀들은 사로잡혀갔습니다. 전쟁 참가를 거부당하고 3일 만에 집으로 돌아온 다윗 일행이 자신의 거주지 시글락의 이 비참한 상황을 접하고 울 기력이 없을 정도로 울었고, 심지어 슬픈 감정이 너무 격해서 무리들이 다윗을 돌로 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힘입어 용기를 얻고, 하나님께 물어 응답받은 대로 아말렉 군대를 추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추격전에서 피곤하여 능히 다윗을 따르지 못하는 자 200명을 브솔 시내란 곳에 머물게 하고, 나머지 400명을 데리고 계속해서 아말렉 군을 추격해 갔습니다. 추격 중에 한 들판에서 아말렉 주인에게 버림받은 한 병든 소년을 만나 그의 기력을 돋운 후, 그의 인도로 대적 아말렉 군들이 머문 곳을 찾아냈습니다. 아말렉 군사들은 크게 약탈함으로 말미암아 먹고 마시며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다윗 일행이 그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니 그들은 혼비백산 모두 도망하고 한 사람도 남은 자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에 다윗 일행은 잡혀갔던 모든 사람들과, 가축들과,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 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찾았습니다.

이제 오늘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다윗 일행이 귀환할 즈음, 이전에 피곤하여 능히 이 추격전에 끝까지 동참하지 못하고 브솔 시내에 머물렀던 사람들이 귀환하는 다윗 일행을 영접하러 나왔고, 다윗 역시 그 백성들에게 문안하였습니다. 이때 다윗과 함께 갔던 자들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찾아온 물건의 분배 방법에 대해 한 제안을 합니다. 이들이 제안한 분배 방법은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 자들에게는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싸움에 나가 힘들게 고생한 사람들과 중도에 주저앉아 편히 쉰 사람들과는 분배에 차별을 기해야 된다는 저들의 제안은 참으로 합리적이며, 공정해 보이며, 객관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제안에는 자신들의 의와 자신들의 전공(戰功)을 주장하는 자세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애써 싸워서 승리했기에 자신들의 수고의 대가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슴지 않고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 자들에게는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고 제안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제안은 하나님의 뜻과는 거리가 먼 악한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그런 제안을 한 사람들을 ‘악한 자와 불량배’라고 명명했습니다.

    이 ‘악한 자와 불량배’들의 제안을 그대로 시행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피곤하여 능히 전쟁에 동참치 못한 연약한 형제를 ‘전쟁에 동참하지 아니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몸뚱아리 하나로만 살아라’고 내모는 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 어떠한 일이 발생할지는 불을 보는 듯 분명합니다. 원망과 시비와 다툼과 혼란으로 공동체 전체가 무너지는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의 의에, 자신의 업적에 관점이 맞추어진 일 처리는 무척이나 합리적이고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보이지만 거기엔 사랑이 없고 긍휼함이 없기에 부정적이며 어두움의 현상이 산출됩니다.

    반면 다윗의 관점은 전적으로 사랑과 긍휼에 기초한 하나님의 관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치러 온 군대를 우리 손에 넘기셨은즉 그가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고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영어성경들에는 “너희가 이같이 못하리라”는 말을 이 문장 맨 앞에 둠으로서 그들의 제안을 강하게 반대하는 다윗의 단호함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안목에서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모든 사람과 가축과 물건들을 빠짐없이 찾아온 것은 저들의 전공(戰功)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였음을 저들에게 강조함으로 저들 속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교만한 전공(戰功)의식을 불식케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라고 명함으로 이것으로 이스라엘의 율례와 규례를 삼았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이 하나님께서 승리케 하신 것임을 분명하게 고백하는 입장임으로, 그렇다면 찾아온 물건들을 저들의 수고나 전공(戰功)에 기준하여 분배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을 모든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일하게 나누어 가지는 것이 마땅함’을 법으로써 분명하게 제정함으로 사랑과 긍휼이 배제되고 자신들의 의와 공력이 주장된 사람의 관점에서의 분배 제안을 무산시킨 것입니다.

    다윗의 견해에 따라 분배하는 자리에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도 불을 보듯이 분명합니다. 이 자리에 감사와 사랑과 용서와 평화와 웃음이 발생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과 긍휼함에 근거한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일 처리는 언뜻 보기에 불공평해 보여도 그곳에는 긍정적이며 빛의 현상이 산출됩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처럼 도로 찾은 물건들을 앞에 두고 ‘악한 자와 불량배’들이 “우리와 함께 가지 않은 자들에게는 우리가 도로 찾은 물건은 무엇이든지 그들에게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데리고 떠나가게 하라”고 제안하는 것과 다윗이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는 견해가 도출되는 것은 오직 상황을 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즉, 악한 자들은 이 전쟁이 자신들의 수고로 인하여 승리했다는 것이며, 다윗은 하나님으로 인하여 이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는 하나님, 우리의 심장 폐부를 살피시는 하나님,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헤아리시는 하나님, 아니 우리의 전 삶을 주관하시는 절대 주권자 하나님, 만유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을, 무엇보다 죄악으로 영 죽은 나를 살리신 하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되어지는 모든 영광을 주님께 돌리는 것이 너무나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겸허하게 주님 앞에 서서 우리의 모습을 살펴보면 내 삶에 ‘내 것이라’ 주장할 것도 ‘내가 이루었다’고 주장할 것이 하나도 없음을 고백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간사하고 연약한 우리는 조금만 성공해도, 조금만 부자가 되어도, 조금만 좋은 일이 있어도 그것이 나의 수고의 결과인 양, 또 그것들이 내 소유인 양 자랑하고 교만한 모습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아프게, 사람을 아프게 하기가 쉽습니다. 마치 패역한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수없이 베풀어졌건만 저들은 그 하나님 역사를 감사하거나 신뢰하지 않고, 또 저들의 패역함을 고치기 위해 수없이 보내진 선지자들의 경고도 듣지 않고, 자신들이 뭔가를 할 수 있는 양 계속 방자하다가 결국은 ‘앗수르’라는 또 ‘바벨론’이라는 회초리를 맞고 마는 말씀이 선지서에 수없이 나옵니다.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정리합니다. 내 의와 내 공로를 주장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 ‘악한 자요 불량자’로서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게 되며, 공동체에 불화, 혼란, 더 심하게는 파괴를 가져옵니다. 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철저하고 겸손하게 믿음으로 고백하는 자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요 누구에게든지 기쁨을, 연약한 자에게는 회복을 주며, 공동체에 화평과 세움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를 곰곰이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삶의 자리가 합리적이고 정확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할 내 의, 내 공로에 묶여 누군가에게 아픔을 주거나 속한 공동체를 혼란시키고 있지나 않는지, 아니면 다소 비합리적이며 정확하지 않는 듯해도 사랑과 긍휼에 기초한 하나님의 관점에 묶여 모든 사람에게 기쁨과 회복을 주고 속한 공동체에 화평과 세움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는지 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후자의 삶, 즉 하나님의 관점에 묶인 삶의 자리를 꾸려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 한사람으로 인해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우리의 직장, 특별히 혼란한 이 민족에, 감사와 사랑과 용서와 평화가 소망과 웃음이 넘쳐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김명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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