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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님의 꿈 (마 9:35-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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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영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는 대서양을 항해하는 배위에 한 청년이 깊은 묵상에 잠겨있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자기조국 영국에서 타락한 국교, 그리고 교회의 부패와 더불어 황폐화 되어가는 나라와 세상이 가슴 아프게 떠올랐습니다. 어느 한 곳도 빛과 희망을 찾아볼 수 없는 그 절망 속에서 새로운 꿈을 위해 신대륙 미국으로 가는 배에 그의 미래를 실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 청년은 깊은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나라는 어떤 나라인가요? 우리 인간이 정말 인간답게 행복하게 사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주님께 기도의 깊은 묵상을 하며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으로 향하는 선상에 그의 마음속에는 다음과 같은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이 청년이 바로 존 윈드롭(John Winthrop)이었습니다. 그는 이 신개척지에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사는 도시를 건설할 마음을 품었습니다. 메사추세츠 샬렘에(salem)도착한 그는 먼저 와있던 영국인을 만났는데 그들은 모진 고생 끝에 그들 중 반은 돌아가고 나머지는 실의에 차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윈드롭은 주님의 말씀으로 다시금 부르짖으며 용기를 주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그는 온전한 도시, 진정 행복과 정의와 기쁨이 있는 도시를 건설하자고 역설하였습니다. 그러기위해서 그 도시에는 두 가지 주님의 명령이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는 자기 몸같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위에 세워진 교회, 언덕위에 도시를 통해서 온 세상에 빛을 발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정말 어떤 나라로 갈 것인가? 아니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하는 고민을 많이 합니다. 역사는 반복이라고 말합니다. 중국과 일본이 구체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며 우리의 역사를 짓밟고 있고 침략의 야욕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백성과 나라의 미래를 위해 세워놓은 정권에 의해서 슬롯머신사건으로 나라를 흔들더니, 신용카드와 도박장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황폐화시키며 이번에는 바다이야기라는 도박게임을 가지고 백성들을 절망케 합니다. 상품권으로 발매된 금액이 30조인데 이것이 두세 번 아니 그 이상을 유통하기 때문에 100조 이상의 돈이 도박게임의 상품권으로 유통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일 년 예산이 200조 가량 된다고 할 때에 나라 돈의 절반이 지금 도박으로 사용되고 이를 통해 가정이 깨어지고, 개인의 삶들이 부서지고 무너지는 일들이 이제 우리 주변에 쉽게 발견되는 흔한 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꿈꾸던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 그런 나라가 이상적이며 우리가 함께 가야할 나라라고 하면서 원칙과 상식을 깨뜨리며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사람들에게 깊게 심어놓고 있습니다. 남과 북의 대결, 남쪽 안에서의 이데올로기의 갈등, 그리고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대립의 양극화는 이제 한국이라는 나라는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가는 힘을 상실하고 또 외세의 거친 흐름 앞에 무기력하게 주저앉아서 외세의 지배를 받고 동족끼리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할 수밖에 없었던 지난날의 한반도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는지 두려움이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외세의 힘 앞에 이익 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중국의 동북공전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역사전체를 왜곡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고, 일본의 독도나 교과서 왜곡 사건, 그리고 북한의 미사일을 핑계로 군사대국으로 나아가는 모습 앞에는 비난이상의 외교력을 나타낼 수가 없는 나라가 되는 것은 아닌가 걱정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북한에 정상회담을 위해 보낸 5억 달러를 빼고도 4조 8천억 원의 수없는 돈을 퍼주면서도 이 한반도에는 어떤 희망의 싹보다는 절망과 배신감의 분노를 상식을 가진 국민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경제는 경제발전의 장애물이 되는 고질적인 노동 운동구조와 회복되기 쉽지 않은 현실적인 가치관의 문제들을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루 자살 38명이라는 자살률의 통계는 세계의 최고수준을 자랑합니다.

더구나 마음만 먹으면 남한을 언제든지 불바다로 만들 미사일과 야포, 특수부대등을 보유하고 오늘도 백성들은 굶주려 죽어 가는대로 군비를 증가하고 전투력을 강화하는 북한에 대해서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 어디까지가 진실이며, 거짓인지 분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 누구를 위해서 세워진 사람들인지 안심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국민은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이 모든 것이 민족을 위한 것이라고, 나라를 위하고 우리의 후손들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기에 더욱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우리나라 어디로 갈 것인가? 아니 어떤 나라가 되어야 하는가를 알기위해서 오늘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일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며 선택해야하는 기로에 서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함께 행복하고 기쁨으로 노래하며 춤추며 살아갈 수 있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이 땅의 아픔과 비극 그리고 고통을 보며 육신을 입고 오시지 않으시면 안 되셨던 그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꿈꾸셨던 것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만들어야 할 나라의 모델이 아닐까요?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할 삶의 모습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 꿈꾸시며 원하셨던 것은 무엇일까요 ?

첫째 하나님나라의 임재입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도록 사모하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보신 인간의 모습은 모든 병에 시달리고, 약해지고 무기력해져서 희망과 기쁨 없이 살아가는 목자 없는 양 같은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가슴 아프게 느끼고 바라보았다고 말씀합니다. 더구나 그런 고통스러운 삶을 살면서도 어디서도 도움 받을 수 없는 저들의 현실을 안타깝게 보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들을 바라보시면서 예수님이 꿈꾸셨던 일들은 바로 하나님나라였습니다.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에 이 땅의 고통 받고 연약한 이들이 진정 복되고 아름다운 인생을 살 수 있음을 아셨습니다. 10장 7절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라고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품으셨던 비전, 바로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가 추구해야할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 임하기를 사모하며 또 그 나라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고 살아야 할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

로마서 14장 17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보다도 정의로운 나라입니다. 인간의 의는 바른 기준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를 이루기위해서 인간은 이 땅에 얼마나 비극과 고통의 대가를 치르고 있습니까? 공산주의의 의를 이루기위해서 사람을 얼마나 많이 죽였고 또 고통가운데 몰아넣었습니까? 가진 자의 의를 이루기위해서 인간은 얼마나 도구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었습니까? 자기들의 의를 찾기 위해서 이 땅에는 싸움과 다툼이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인간의 의가 세워지는 그곳에는 전쟁과 죽음의 소식이 끊어질 날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사모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갖는 가치관을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율법은 바로 시내산에서 주신 십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핵심정신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 사랑과 사람사랑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이 가장 아름답고 공의롭게 적용되는 나라를 말합니다. 즉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품고 공의롭게 시행되는 나라를 말합니다. 시편 85편 10절에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 맞추었으며 라고 되어있습니다. 긍휼과 진리는 반대의 개념입니다. 의와 화평도 마찬가지 모순된 개념입니다. 이 두 개념이 공존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사랑의 정신으로 적용되고 나타나는 나라를 말합니다. 이 땅은 어떤 이데올로기로 이루어진 나라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세계역사를 통해서 검증이 끝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나라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사상은 진정 정의와 행복이 추구될 수없는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론은 결국은 인간이 가진 논리와 기준으로 인간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독재로 갈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동일하게 나누어주고 분배하는 자가 타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간과합니다.

하나님의 의는 가진 자의 것을 빼앗아서 없는 자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모두 똑같아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님은 각각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다양하게 주었지만 동일한 기회가 주어졌고, 또한 노력한 대가의 공정한 보상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자본주의 국가를 이루는 핵심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평강의 나라입니다. 성경에서 평강은 바로 샬롬을 의미합니다. 소극적으로는 전쟁이 없는 상태, 다툼과 갈등이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적극적인 의미로는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참된 조화와 균형이 잡힌 것을 말합니다. 복수보다는 용서와 평강, 착취가 아닌 나눔과 섬김, 증오와 단죄가 아닌 사랑과 미래의 가치가 존중되는 것, 그리고 이기적이 아닌 서로를 살피고 아껴주는 것입니다. 바로 웰빙의 가치관을 가진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있는 곳에 진정한 회복이 있습니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주지 못하는 완전한 조화와 균형으로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는 바로 그러한 나라입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불안과 분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같이 보셨다고 말씀했는데 양은 멀리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찾아오지 못합니다. 양은 자기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습니다. 양은 깨끗하게 보이지만 얼마나 더러운 존재인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의 결핍은 단 한가지로 해결됩니다. 바로 목자만 있으면 양의 모든 부족과 위험과 결핍은 사라지고 해결됩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우리 인생의 목자 되시며 인도자 되시는 나라, 그 나라가 평강의 나라 샬롬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희락의 나라입니다. 희락은 기쁨을 말합니다. 이 기쁨은 어디에서 옵니까? 그것은 은혜로부터 옵니다. 헬라어의 은혜와 감사 기쁨은 건강과 안녕을 뜻하는 헬라어 명사 카르(char)가 어근입니다. 은혜는 카리스(charis), 감사는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 기쁨은 카라(chara)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선포 되는 곳에는 큰 기쁨이 임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천국이 가까워 졌다고 선포되었습니다. 누가복음 2:10절에 천사가 목자들에게 이렇게 소식을 전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바로 이 큰 기쁨은 하나님나라가 임할 때 있었습니다.

주님이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는 곳에 능력이 나타나고 사단이 물러갔습니다. 질병이 치유되었습니다. 누가복음 10:20절에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하시니라.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그곳에 귀신이 물러가는 놀라운 기쁨과 감격뿐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나라의 백성 됨의 더 크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희락은 하나님나라가 선포되는 그곳에 임했습니다. 인간을 속박하고 구속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바로 그때 참된 자유와 기쁨이 있었습니다. 시편 126:1-2에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가득 찼었도다.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그곳에 진정한 자유가 우리에게 넘쳐납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속적이며 가장 주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유가 있을 때에 인간은 진정한 희락을 느끼며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속박과 구속은 인간의 기쁨을 다 빼앗아 가버리고 하나님주신 참된 인간다운 모습을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는 자유의 나라입니다. 갈라디아서 5:1절은 그리스도인의 자유헌장이라고 불려집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로부터 자유케 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자신의 속성이 자유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지으셨을 때에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자유를 주셨을 때 저들이 타락할 것을 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주신 자유를 다시 잃어버렸을 때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이 자유를 다시 찾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진정으로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 자유는 하나님나라의 통치 원칙이기도 합니다. 이 자유는 바로 이 땅에서 가꾸어나가고 간직해야 할 요소입니다.

왜냐하면 이 자유를 잃어버릴 때 인간은 다시 비참해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하는 것을 방지하기위해 빼앗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타락할 것을 아시면서도 허용하신 것은 자유가 얼마나 인간에게 중요하고 소중한 것임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하나님나라가 선포되는 그곳에 참된 희락이 있었습니다. 인간의 상처와 아픔이 치유되는 기쁨이 있었고 두려움과 고통에서 자유하고 놓임 받는 진정한 희락이 넘쳤습니다. 계시록 22: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 이러라.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사모해야 할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진정한 자유가 있는 나라이여야 합니다.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자유를 추구하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사학법 개정을 말씀드린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부 부패한 사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교육하는 일에 있어서 자율성과 자유의 정신이 살아있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귀한 가치를 우리는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사학 법을 제정하고 강조하는 저들은 바로 자유를 위해 희생했던 분들 아닙니까? 그 자유를 위해 살았던 저들이 이제는 자유를 스스로 가치 없게 만드는 일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의 귀중함을 알기에 우리가 타락할 줄 알면서도 자유의지를 주셨고, 타락해서 이 자유를 잃어버렸을 때 자기아들을 죽이면서까지 이 자유를 다시 회복시켜주신 그 주님의 메시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다이야기라는 도박게임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독은 우리를 마비시킵니다. 우리에게서 자유를 앗아가 버리고 어떤 목적에 얽매서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가 있고, 공의가 바로 세워지되 사랑과 자비가 함께 공존하는 이 세상, 인간의 자기의가 아닌 하나님의 공의를 다시 기쁨으로 지켜나가는 나라를 사모해야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진정한 조화와 균형을 통해서 삶의 성장과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나라여야 합니다. 위로하고, 사랑하며 눈에서 눈물이 씻겨 지고, 진정한 평화와 생명이 살아나는 자유민주주의의 가치관을 가진 나라여야 합니다.

자유민주주의가 하나님나라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상으로 하는 그 나라에 가장 근접해 가는 나라입니다. 기회의 제공과 노력의 보상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나라를 사모해야 합니다. 성경에 하나님나라의 비유에서 달란트비유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와서 심판할 때에 동일한 기회와 노력에 대한 공정한 대가가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나 어른이 똑같이 먹고 돈을 갖는 것이 평등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달란트와 그리고 노력의 분량만큼 정당하게 나누어지는 원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법의 시행이 엄격하고 공정하면서도 사랑과 자비가 넘치게 적용되는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나라는 우리주님의 비전이며 꿈입니다. 동시에 우리가 진정으로 궁극적으로 사모하며 나아가야 할 나라입니다. 이 땅에 이 나라가 임하도록 우리에게 사명으로 주어졌습니다. 이 하나님나라가 이루어지는 가정과 교회 그리고 나라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기도하고 사모하여야 합니다.

둘째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꿈을 어떻게 이루어 가셨습니까?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가는 방법을 선택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택하셔서 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가르치고 훈련시키시고 적용하는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삶을 살도록 사명으로 주신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바로 예수님이 선택하신 저 12명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세계를 바꾸는 놀라운 힘과 능력을 공유하고 그것을 적용함으로 인생을 바꾸고 역사를 바꾸고 세계를 바꾸었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에게 바로 하나님나라를 이루기 위한 사명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목자 없는 양 같은 저 백성들에게 이 하나님나라의 선포를 우리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10:1에 예수께서 그의 열두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쫒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니라.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셔서 이일을 맡기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능력을 주셔서 이 일을 가능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제자들을 부르셔서 저들과 함께 하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이루어 가시는지 보여주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제자들을 어떻게 모집하셨습니까? 그리고 부르셔서 이들과 무엇을 하였습니까? 이들과 어떻게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나누었습니까? 무엇보다도 주님은 이 제자들을 선택할 때에 하나님 앞에 깊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함께 동역할 제자들을 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함께 생각하였습니다. 함께 경험했습니다. 함께 느꼈습니다. 마가복음 4:13-14에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하며...

그리고 이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마가복음10:45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선포하시고 잡히시던 전날 밤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섬김의 삶이 무엇인지 보여 주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12명을 선택 하셨을까요? 12명이란 숫자가 갖는 의미를 다양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 속에 12이라는 숫자는 역사 속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통일왕국을 이루었을 때에 12명의 신하를 두어서 통치하였습니다. 소그룹을 연구하는 심리학자들은 소그룹의 인원이 그 모임의 목적을 이루기위해서 가장 효율적인 숫자의 구성원이 바로 8-12명이며 12명을 넘을 경우에는 더 이상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즉 12명이 지속적으로 만나고 의미 있는 관계를 지속하게 될 때에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게 되고, 가치를 공유하게 되어 함께 변화하게 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는 삶의 터닝포인트 즉 분깃점을 만드는 계기는 되지만 진정한 삶의 변화는 바로 소그룹 즉 구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초대교회 역시 각 집에서 12명 정도씩 모여서 함께 교제하며 삶을 나눌 때에 저들의 모임 속에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들을 치유하는 놀라운 능력의 역사로 나타난 것입니다.

남미 콜롬비아의 보고타에 ICM(International Charismatic Mission) 선교교회가 있습니다. 이교회 담임목사였던 쎄자르 카스텔라노스 목사는 전통적인목회를 8년 동안 하면서 너무나 큰 갈등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포기하기직전까지 갔습니다. 참된 교회의 모습은 무엇인가? 왜 현대에는 이런 초대교회의 놀라운 부흥과 변화와 능력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일까? 그는 성경을 보다가 바로 12제자 삼기의 놀라운 원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1990년 그가 처음 시작할 때 70개에 불과했던 셀이 1998년 24000개의 셀로 늘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G-12이야기로 소개된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 대한 주변사람들의 공통적인 평은 바로 이 교회에 가면 사람들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숫자가 주는 의미보다도 우리의 삶이 변하고, 우리의 목표가 변하고, 우리의 삶에 자유함과 생동감 그리고 진정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인 각자가 이 땅에 살면서 12명의 진실한 예수님의 제자를 양육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느 때든지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이것을 사모합니다. 하나님 제가 이 세상에서 진정으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나의 구세주와 구주가 되신 그 주님께서 나에게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게 하셨는데, 나에게 맡겨준 이 사명을 위해 12명의 섬길 분들을 보내주십시오 라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이 교회 교인들은 적어도 자기가 섬기는 사람들 10명이상이 자기처럼 독립해서 12명의 제자들을 만들어 나가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12명을 어떻게 양육합니까? 예수님의 방법을 택합니다. 저들과 함께 보냅니다. 즉 관심과 생각을 함께 나눕니다. 삶을 나눕니다. 울 때 함께 울고 웃을 때 함께 웃습니다. 나아가서 열심히 저들을 섬깁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섬김을 받기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섬기기위해서 왔다고 선포한 것처럼 저들을 섬깁니다. 성경을 가르치거나, 다른 부담을 안게 되면 아무나 할 수 없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훈련을 받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들의 마음을 늘 함께 하며 동행합니다. 진정으로 섬기며 주님의 섬김의 역사를 함께 나누고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할 때 마약중독에 있던 사람들이 마약을 끊습니다. 게릴라들이 말씀을 읽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들이 벌어집니다. 이세상의 구속과 얽매임에 있는 사람들이 자유함을 얻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나라가 선포될 때 사람은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발견하고 돌아갑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게 되어서 돌이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 거룩한 열망을 갖기 시작합니다. 참된 평안과 기쁨을 경험하고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삶의 희열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보고타에 있는 이 교회 교인들에게는 세 가지 분야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먼저 기도의 역사가 일어나며 영적전쟁에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중보기도가 이루어지고 온 교인이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저들이 또한 시간으로 헌신합니다. 이 일들을 위해 자기가 생업에 종사하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희생하며 정성껏 성도들을 섬기고 사랑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 성도들은 자신들의 생애에 세상에서 맛보지 못한 진정한 삶의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성결한 삶을 갈망하며 거룩하게 살기를, 주님의 자녀답게 살기를 간구하고 결단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이러한 운동과 변화는 이웃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 갑니다.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나라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임재가 있는 곳에 일어나는 역사와 기적을 진정으로 사모 하십니까? 내가 거하는 바로 이곳에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해달라는 진정한 열망이 있습니까? 하나님나라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나라는 내 삶의 목표요 의미며 행복 그자체입니다. 생명입니다. 사명입니다. 나의 모든 것 되기 때문입니다.

작은 물질적 풍요 앞에 안식과 기쁨을 누리며 이 삶이 축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까? 직분과 때로는 작은 영적인 충족됨 앞에 영육으로 만족하며 내가 믿고 살고 있는 모습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안주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하나님나라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갈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겠습니까? 직분가지고 자랑할 수 있을까요? 물질이나 자기의 지식 그리고 명예를 가지고 있을까요? 우리 주님처럼 12명을 나에게 맡겨주셔서 저들을 섬기며 사랑하며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이 사역을 감당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주님의 꿈입니다. 하나님나라만이 아니라 바로 버려진 우리를 건지신 주님께서 쓸모없는 우리가 주님의 나라를 위해서 주님처럼 12명의 영혼을 섬기고 사랑하며 기도하고 함께하는 일들을 통해서 진정으로 하나님나라가 임하는 역사를 보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그 기대 앞에 우리는 여전히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영혼이 변하고 사람이 자기의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사모하며 살아가지 않으시겠습니까? 목자 없는 양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주님처럼 목자의 사역을 감당해 달라고 부탁하시고 기대하시는 그 주님의 기대대로 살아가도록 사모하며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이 섬김과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함께 간직하며 선포하고 나아갈 때에 미움이 사랑이 되고, 슬픔이 소망이 되며, 인생의 의미와 기쁨을 회복하며 진정한 인생의 미래를 열어가는 모습보기를 함께 갈망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를 통해서 우리 민족이 치유되고 우리의 역사가 새로워지고 이 땅에 젊은이들에게 참된 생명과 소망을 줄 수 있는 그러한 교회를 꿈꾸지 않으시렵니까?

저는 설교초두에 존 윈드롭의 산위에 있는 동네의 비전을 시작으로 말씀을 열었습니다. 존 윈드롭은 바로 언덕위에 도시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를 위해 평생순례의 길을 걸었습니다. 비록 이 도시가 지속적으로 완벽하고 아름다운 곳은 되지 못했지만 바로 이 도시의 정신은 신대륙을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 속에 바로 빛의 나라를 사모하게 되었고 메사추세츠의 살렘은 바로 윈드롭으로 인해 늘 생동감이 넘쳤습니다. 사회학자들은 바로 윈드롭의 순례의 정신이 오늘 도 미국 저변에 흐르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미국의 밑바닥부터,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놀라운 역사는 바로 한 사람의 비전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미국을 타락과 부패의 위기에서 건져나가며 정신적 영적 힘이 되는 것은 바로 이 한 사람의 비전에서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나라의 비전을 사모하셔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가장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일은 바로 하나님나라를 선포하며 사는 것입니다. 주의 나라가 임하도록 간구하며 그 일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제 구역은 관리하는 구역이 아닙니다. 여러분 한 분 한분이 12명의 섬길 사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영혼을 살리는 주님이 가장 기대하시고 바라보시는 사역으로 살아가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먼 훗날 오늘의 역사를 기록하는 우리의 자녀들과 후손들이 동안교회의 교회다움은 바로 2006년부터 시작되었노라고, 그리고 그때에 이 역사를 이루었던 분들로 기억되는 삶이되기를 소망 합니다

그러기위해서 저는 무엇보다도 여러분자신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정과 우리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꿈을 이루는 통로로 쓰임 받는 바로 그런 교회 말입니다. 나의 변화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 난 이 민족의 가슴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역사를 함께 사모하고 경험하는 일들이 모든 삶의 영역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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