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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권리 포기 (갈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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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시카고 대학병원에서 채플린을 할 때에 저를 일깨운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루 종일 환자를 만나서 상담하고 마칠 때가 되면 채플린 몇 명이 모여 하루의 일을 서로 보고하고 평가합니다. 저 차례가 되어서 오늘 환자를 만나서 상담했던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그때 슈퍼바이저가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수많은 대답 중에 왜 너는 그런 말을 했는가? 수많은 질문 중에 너는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었는가?’ 를 묻습니다.

이 질문은 내가 아무런 의식 없이 무심코 생각하고 대화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은 내가 세상에 많은 질문 중에 왜 그런 질문을 하게 되는지 그리고 세상에 수많은 대답 중에 그런 대답을 하는지 나에게 그 생각과 말의 뿌리가 어디인가를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도 어떤 문제 앞에 각 각 다양한 반응을 보이고, 말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여러분에게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게 하는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들이 하는 다양한 생각과 말의 뿌리는 크게 세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의 욕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수없이 포장하고 객관적인 이유를 이야기하며 정당하게 말하는 것 같아도 그 배경에는 자기가 원하는 것, 자시의 가치관등이 그 말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베드로가 변화산에서 너무 좋고 감격해서 예수님께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살자고 말했던 것은 바로 그 속에 정말 평안과 복된 곳에 머물고 싶은 자기의 생각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둘째, 정확한 말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판단하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백성이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땅에 12정탐꾼들을 보내어서 돌아와서 보고 할 때에 10명의 정탐꾼들은 사실을 이야기했습니다. 정말 젖과 꿀이 흐르는 좋은 땅이지만 그곳에 거하는 사람들을 보니 대단 했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과 우리를 비교해보니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옳은 판단입니다. 이러한 것은 주로 율법이나 도덕, 윤리 같은 내용일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말입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고, 자신의 마음도 그렇게 인정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생각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말에는 항상 자기나 혹은 객관적인 판단과 생각이 다르다는 것 때문에 인간적인 갈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에 제자들이 더러는 세례요한. 예레미야 등입니다 라고 대답한 것은 그냥 사람들이 말하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는 질문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는 대답을 하였는데 이것은 바로 믿음의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때에 이 대답은 너에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아버지에게로 나온 것이다 즉 믿음에서 나온 것 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듣기를 원하시고 보기를 원하시는 말과 생각이 무엇일까요? 바로 믿음의 말과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통해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서 주님은 믿음의 말과 생각이 표현되고 나타나기를 원하시고 이 믿음대로 일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말과 생각은 아무에게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말과 생각을 하는 사람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자기의 권리를 포기한 사람에게서 들어볼 수 있습니다. 나의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원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말과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권리를 포기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자아관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자아관이란 내가 나에 대해서 갖고 있는 마음의 상, 이미지를 말합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자아상은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후 자신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세계에 대한 개념과 태도를 형성해가기 시작합니다. 여기에 자아관이란 바로 이렇게 형성된 우리 자신에 대한 태도를 말합니다. 따라서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느냐는 내가 어떤 경험을 하여왔느냐에 많이 좌우됩니다.

이렇게 형성된 자아관은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따라서 자기자신을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모습이 있는가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없어 하는 모습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자아관의 공통적인 것은 내가 모든 일의 주인이라는 자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평가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하고, 내가 거절하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미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결정합니다.

그런데 권리포기란 내가 나의 주인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나의 모든 것을 결정하고 선택하는 것을 중단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호렙산에서 만났을 때 처음으로 하신말씀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 3:5에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발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신을 벗으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룻기 4:7-8에 보면 신을 벗는다는 것은 ‘당신에게 나의 모든 권리를 양도합니다. 나의 소유권을 포기합니다’ 라는 의미를 갖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데로 룻을 아내로 맞이하려는 보아스가 나오미의 가정에 책임과 의무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그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할 때, 그 사람이 신발을 벗습니다. 그 의미가 바로 나의 소유와 권한을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너가 네 인생의 주인 되어서 무엇이든지 결정하고 선택 하는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기위해서 보내겠다고 말씀하실 때에 모세는 자신의 생각대로 자신을 바라보며 거절했습니다.

첫째, 하나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3:11)
나는 내가 생각해도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못된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출 3:13에 내가 이스라엘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셋째, 나는 해 봐야 안 될 것이 뻔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출애굽기 4:1에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넷째, 나는 부족해야 라고 변명합니다. 출4:10에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자니이다. 다섯째, 하나님 나 말고 다른 사람 찾아보시지요. 출4:13에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모세는 자기가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는 사람을 죽였고 그런 자기를 죽이기 위해 아직도 기다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면서 리더십, 무술, 언어 등 지도자로서 갖추기에 필요한 것을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히브리백성을 위해서 나서서 일을 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애굽 바로 공주의 아들로서 권력과 힘과 지혜를 가지고 나아갔어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며 멸시하므로 할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세가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고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그 자아상을 바꾸시기 위해서 또박또박 모세의 변명에 대답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화를 냅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의 인생의 주인 되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거절하는 네 자아상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이적을 보여주십니다. 결국 모세는 항복합니다. 자기가 판단하는 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모든 결정을 맡기는 복종을 선택합니다. 근본적인 자아관의 변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행세하여서 내가 나를 평가해서, 내 뜻대로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포기하도록 권고하십니다. 이것을 포기할 때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에 대해 확신가지고 살아갈 때 우리의 삶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무엇입니까? 릭워렌 목사님은 자기가 자기주인이 되어서 살아갈 때 인간은 필연적으로 두려움, 좌절, 피곤함, 그리고 실패로 결론지어진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고 고백합니다.바울이 이루었던 믿음의 역사는 바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이며 내 인생을 주관하심을 믿는 그 자아관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생각과 언어를 말하기를 원하십니까? 내가 내 인생의 주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중단하고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그 말씀 앞에 순종할 때 믿음의 역사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둘째, 권리포기란 무엇을 말합니까? 세계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세계관이란 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말합니다. 즉 사물을 인지하는 방식이며 삶에 대한 시각을 말합니다. 성경에서 신을 벗으라고 말씀한 곳은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여호수아가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여리고성을 앞두고 있을 때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 이 두 군데입니다. 여호수아 5:15절에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세상의 세계관은 어떠합니까? 돈이 얼만큼 있는가? 권력이 얼마나 있는가? 성공이 얼마나 사모할 일인가! 등을 생각합니다. 크고 많고 높은 것이 사람들에게 존중과 추구의 대상이 됩니다. 미국 존스 홉킨스 병원 소아과 연구원들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어린이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사했습니다.

30년 전에는 아이들이 무서워하는 순서가 동물 어두운 방에 있는 것, 높은 곳, 낯선 사람, 시끄러운 소리 순이었습니다. 최근에는 부모의 이혼, 핵전쟁, 암에 걸리는 것, 환경오염, 아동폭행 등의 순서였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10년 전에 서울시내 초등학교 5학년을 대상으로 어떻게 살고 싶냐고 물어보았더니 여러 대답 중 에 가장 많은 대답을 한 것이 유명하게 살고 싶다, 부자로 살고 싶다, 편하게 살고 싶다 입니다. 이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런 세상입니다. 즉 돈이 있어야 하고, 권력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배 받는 것 보다는 지배 하는 것이 좋습니다. 대접하는 것보다는 대접받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광야생활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에게 제일 먼저 걱정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가나안땅의 입구에 있는 여리고 성입니다. 그 당시에 전쟁에서 승리하기위해서는 성이 튼튼해야  합니다. 요새처럼 그 위용이 대단합니다. 아무리 보아도 여호수아는 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크고 장대한 이 성은 자신들의 힘으로는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다고 생각 합니다. 그것이 두려움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판단입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군대장관은 여호수아에게 신을 벗으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의미합니까?

지금 너의 눈앞에 보이는 여리고성이 크고 장대하며 이스라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그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무리 크고 놀랍다 할지라도 이미 하나님의 약속이 주어져 있고, 주께서 밟는 땅마다 주신다고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워말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며 나아가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여호수아가 그 다음날부터 한 것이 무엇입니까? 침묵하며 이 성을 매일 한 바퀴씩 돕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날에는 일곱 바퀴를 돕니다. 그리고 나팔을 불고 백성은 소리를 치게 합니다. 이 성이 무너졌습니다. 이스라엘이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계관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바뀐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노예로서 이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지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창과 칼의 힘이 얼마나 큰지 잘 압니다. 인간의 권력이 얼마나 무서운 줄도 압니다. 인간이 이루어놓은 일을 무너뜨리기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런데 그 앞에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성을 돌기만 합니까? 바로 인간의 힘과 능력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곳이라는 믿음의 세계관이 그 마음에 새겨진 것입니다. 자기들이 메뚜기와 같다고 외치며 우리는 저렇게 좋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낙심하고 절망하면서 울었던 이스라엘백성이 아닙니까? 담대하게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말씀을 믿고 행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믿는 자에게 허락하신 곳이며 믿음으로 나갈 때 승리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계관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부갑상선 기능 항진에 의한 각피 석회화증 이란 긴 이름의 희귀병에 걸린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칼슘이 몸안에서 과다 생성되어 축적됨으로 온 몸이 석회처럼 굳어가는 무서운 병입니다. 여덟 살에 다리를 절기 시작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자리에 누워 굳어가는 육신과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에게는 모든 세상이 절망입니다. 희망이 없습니다. 이 세상은 원망의 덩어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을 거부하며 누운 채로 영어와 한문을 익혔습니다. 그리고 한 손으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습니다. 그러기를 30개월 한 권의 책이 나옵니다. 바로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라는 책입니다. 주인공인 박진식씨는 SBS 휴먼드라마에도 소개되었습니다. 그가 처음부터 신앙인이 아니였지만 극한 고통가운데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되었고, 바랄 수없는 것들을 바라게 되었습니다. 그 책에서 박진식씨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오면서 배운 가장 중요한 교훈은 바로 비전과 감사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 인해 세상을 바라본 사람들이 말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는 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지금 이 순간 세상 살아가기가 힘들다고 하여 절망하신분이 있다면 제 이야기를 읽고 부디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저는 꿈꿀 수 만 있어도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참담한 현실에 처해 있을지라도 살아있는 한 꿈을 버리진 마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울지 마십시오....마침내 맞이한 내 안의 신앙이라는 장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아픔으로 깨달은 건 감사였다. 밥을 삼키기 힘겨워졌을 때 단지 음식물을 삼킬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숨쉬기가 힘겨워졌을 때 단지 고른 숨을 쉴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중장애인이 되었을 때 단지 한 손가락, 한 손이라도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가 우러나오고, 온 몸이 중증의 돌인간이 되었을 때 단지 머리와 몸통만 정상이어도 감사하다는 걸 뼈에 새겼다. 하나 덧붙이자면 평형기관 마져 손상되었을 때 나는 어느 생명체에게나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 절절히 깨달았다. 끝으로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여러분 이 세상이 얼마나 힘들고 어렵습니까? 유전무죄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세상의 벽은 너무나 높고 험합니다. 특히 장애인에게 이 세상은 너무나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그러나 세계관이 바뀝니다. 하나님의 관점이 자기 속에 들어올 때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희망과 비전 그리고 감사로 자기의 삶을 믿음으로 정복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노예로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분명히 다릅니다. 나아가서 광야라 할지라도, 비록 여리고성처럼 어렵고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믿음의 걸음으로, 말씀의 순종으로 승리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권리포기는 바로 이 세계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셋째, 권리포기는 무엇을 의미 합니까? 가치관의 변화를 말합니다.

가치관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무엇이 나에게 더 소중하고 중요한가를 판단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말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사막에 가서 금덩어리 하고 물 한 컵 중 선택하라면 여러분은 무엇을 선택할까요. 물론 금덩어리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구출 받을 만한 기약도 없는 사막에서 물을 먹지 못해 생명에 지장을 주는 상태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무엇을 선택할까요? 물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것이 자신의 가치관입니다. 자신에게 더 필요하고 유용한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즉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 당시에 그에게는 로마의 시민권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얻으려고 목숨을 겁니다. 일평생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지식이었습니다. 그리스문명과 문화의 영향을 받은 로마는 학문의 세계를 얼마나 존중했는지 모릅니다. 그에게는 가말리엘문하에서 최선을 다해 공부했습니다. 지식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기는 가치관의 세상 속에서 그는 이 지식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돈이 중요했습니다. 바울의 집은 물질적으로 풍부해서 돈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샀다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습니다.

돈이 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 줄 아십니까? 아무리 사정하고 인간관계로 고개를 숙여도 안 되는 곳에서 돈으로는 얘기가 통한다는 뜻입니다. 돈이라는 것이 무서운 거예요. 돈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서 그가 구체적인 결단 중에 ‘내가 내 인생을 정말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생각했던 이 모든 것을 내가 배설물처럼 여겼다’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내가 신앙 안에서 분명하게 내 가치관을 바로 세워 선택을 해 나갈 때 나에게 새로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며칠 전에 유명잡지편집을 담당하는 이사 한분을 만났습니다. 그분의 말이 광고주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광고주를 부를 때에 광고는 빼고 주님 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얻기 위해서, 유지하기위해서, 더 풍성하게 하기위해서 인간은 모든 선택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려놓을 때 그리고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영접하게 될 때에 모세와 같은 결단이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11:24-26까지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지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의 가치관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먼저 거절할 것을 거절합니다. 자기에게 오는 모든 명예를 거절합니다. 선택할 것을 선택합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선택합니다. 바라볼 것을 바라봅니다. 즉 이 땅의 것이 아니라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모세가 거절한 것은 이 땅에서 너무 소중한 것입니다. 모세가 선택한 것은 이 땅에서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라보는 것은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허상과 같은 것입니다. 

가치관이 바뀔 때 생각이 바뀝니다. 말이 바뀝니다. 믿음의 언어와 믿음의 생각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바울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을 선택하게 됩니다. 전에는 돈이면 무엇이든지, 자신을 즐겁게 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자기가 옳다고 생각되면 무엇이든지 자기마음대로 선택하고 결단하고 말하였지만 이제는 근본적으로 바뀝니다. 바로 믿음의 생각을 품습니다. 믿음의 말이 그 입술에서 나오게 됩니다.

우리의 삶이 내가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 중심이였음을 돌아봅니다. 그리고 바르고 올바른 말을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다 하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이것을 넘어서서 내가 정말 믿음의 생각을 하고, 믿음의 가치관을 가지고, 믿음의 언어를 표현하고, 믿음의 행위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 땅에 썩어질 것을 위해서 선택하지 않습니다. 바로 하나님나라의 백성다운 삶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일본의 파동학자인 에모도 마사로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라는 책에서 물도 사랑에 반응한다고 합니다. 우리가 물을 향해 심한 모욕의 말을 하면 물의 결정체가 흉하게 깨어져 그 모양이 형편없이 변합니다. 그 물에 악마라는 글씨를 써서 붙이면 결정체 가운데가 보기 흉한 구멍이 뚫립니다. 그런데 물을 보고 ‘고맙습니다.’ ‘감사 합니다’ 라고 말하면 물의 결정체는 아름다운 육각형을 띠게 됩니다. 더 나아가 ‘너를 사랑해’라고 말을 하면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로 물의 분자가 변한다고 합니다. 그것을 실험해서 사진으로 다 찍어놓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몸이 70%의 수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언어가 믿음의 언어, 믿음의 생각,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사랑을 선포하며 증거하고 사람들 앞에 축복할 때 바로 그 언어와 생각의 힘이 사람 속에 모든 물을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결정체로 만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좋아한다고 이런 표현하게 되면 우리 몸에 물이 육각형을 이루면서 건강한 몸을 이룬 다는 거예요. 우리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나를 만드시며 내 삶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그 언어와 생각을 품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하나님만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믿음의 말이 아니겠어요.“너 지금 그 성적가지고 뭐 하겠다고 얘기하니?  안 될 거야!”  사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말 듣고 싶은 사람 없습니다.  “아니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너를 향한 계획이 있어. 너는 지금까지 해온 것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남은 일이 더 중요한 일이야, 너의 삶은 의미가 있어, 가치가 있는 거야, 낙심할게 아니야 다시 일어서, 하나님이 너의 인생을 붙들고 있어!” 그런 믿음의 말을 여러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설교 말씀에서 여러분은 무엇을 듣기 원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향한,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고 내 삶을 인도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의 말씀, 소망의 말씀 듣기를 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삶속에 사모하는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을, 내 몸을 내 육신과 내 영을 험담하고 욕하고 비난하고 비평하고 비판하는 그곳에 노출시키지 마세요. 내 몸의 70%가 무너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내 영혼이 병들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모두 믿음의 말을 듣기 원합니다. 낙심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너와 함께하신다고 그리고 하나님이 너를 지금도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다고 하나님이 가장듣기를 원하는 말이면서 오늘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말 그것이 믿음의 언어가 아닐까요? 믿음의 언어가 없으면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여러분 입술 속에 어떤 언어가 나오기를 원합니까? 여러분의 마음에 어떤 마음이 품어지기를 원합니까? 믿음의 언어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먼저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구체적으로 내가 내 인생의 주인 되는 것 내려놓으십시오. 이 세상의 가치관 그것을 내려놓으십시오. 하나님 안에서 더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십시오. 그때에 여러분의 입술 속에, 여러분의 삶속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는 믿음의 역사, 정복의 역사, 신앙의 아름다운 역사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이 역사는 민족을 바꾸고 열방을 바꾸는 능력의 역사가 이루어질 것을 믿습니다.
그 일에 쓰임 받는 사랑하는 주님의 자녀 되기를 축원합니다.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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