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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변화 선언문 (느 10:2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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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호의 『CEO 경영우언』이라는 책에 '솔개의 장수비결'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책의 내용에 의하면 솔개는 최고 약 7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년이 되었을 때, 매우 고통스럽고 중요한 결심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솔개는 약 40년이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효과적으로 잡아챌 수 없게 되고,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며, 깃털도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무거워져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힘들어진다고 합니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는 그대로 죽을 날을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런 갱생 과정을 수행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합니다. 갱생의 길을 선택한 솔개는 먼저 산 정상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짓고 머물며 고통스런 수행을 시작한다고 합니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져 빠지게 만든답니다. 그러면 서서히 새로운 부리가 돋아난답니다. 그런 후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낸답니다.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낸답니다. 이렇게 약 반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여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된다고 합니다.

솔개가 변화하여야 살 수 있듯이 기업도 변화하여야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변화하지 않는 기업은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연탄이 연료가 되지 않고 중앙 난방식으로 난방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데 창업주의 기업이념이 “연탄을 통해 온 국민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계속 연탄 공장을 경영한다면 그 공장을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보는 변했다고 하고 현자는 변하자고 한다]라는 책에서 데이비드 바움은 스위스 시계를 소개합니다. 1960년대에는 스위스가 세계 시계 시장의 90% 가까이 지배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두 명의 스위스 시계 기술자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시계를 발명해 냈답니다. 두 기술자들의 신기술은 스위스에서 전혀 관심을 끌지 못했다고 합니다. 수없이 좌절을 거듭한 결과 그들은 자신들의 신기술을 미국의 인스트루먼트 사와 일본의 세이코 사에 팔아버렸답니다. 20년이 지난 후, 스위스는 시계 시장의 8%만을 점유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는 주장하기를 변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을 바꾸면 결과도 판이하게 달라지고 작은 변화가 큰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빌게이츠의 “생각의 속도”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1980년대의 화두가 품질이었다면 2000년대의 화두는 속도라고 말을 합니다. 미래 세계가 '생각의 속도', 즉 남보다 먼저 정보를 입수해 분석하고 신속하게 이용하는 데에서 비즈니스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말을 합니다. 빌 게이츠는 리처드 맥긴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는 빠른 속도로 대처하지 않으면 몰락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어느 한 기자 인터뷰에서 "당신은 어떻게 뛰어난 두뇌로 세계적인 부자가 될 수 있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답니다. 이 때 빌게이츠는 "저는 유별나게 머리가 똑똑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지혜가 많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저는 변화하고자 하는 마음을 생각으로 옮기고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데 노력했을 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토인비는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 자기만족, 자기도취, 자아 우상화에 빠져 망하게 된다”고 말하였습니다.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되게 되어 있습니다. 과거 1810년대 영국에 몰아 닥친 산업혁명의 초기에 노동자들이 기계화 물결을 반대하고 방직기를 파괴하였습니다.

변화를 거부한「러다이트운동」은 결국 기계문명에 적응하지 못한 근로자는 도태되었다는 교훈을 던져 주었습니다. 유대인들도 선민사상에 사로잡혀 기독교라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탄압함으로써 결국 수난의 민족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헬라제국이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로마제국에 정복된 것은 변화를 수용하지 못해서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이 번영을 누리게 된 것은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라는 새로운 변화를 수용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필리핀은 6.25 때 우리보다 10배 더 잘살았으나 막사이사이가 개혁 도중에 사고로 죽고 마르코스 이후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지금은 우리보다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아르헨티나는 1910, 20년대 세계 10대 강국이었습니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다 공무원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여 3달씩 미루는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일본과 중국이 기독교와 함께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변화를 꾀할 때 당시 성리학에 바탕을 둔 조선의 양반세력들은 평등사상에 바탕을 둔 기독교 정신에 위기의식을 느껴 변화를 거부하고 천주교인들을 '사학죄인'으로 몰아 1만여 명이나 죽이고 쇄국정책을 펼쳐 서양학문이 들어오는 것을 차단하다 결국 개화된 일본에게 변화의 주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인생 살이에 있어서 변화에 적응해야 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면 이 땅의 모든 생명체들은 싫든 좋든 간에 겨울옷을 벗어버리고 변화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계절이 바뀌면 옷을 갈아입어야 하고, 애벌레가 자라면 허물을 벗어야 하고, 병아리가 부화하려면 껍질을 깨어야만 하는 것과 같습니다. 민첩해진 고기를 잡으려면 그물을 바꾸어야만하고, 물의 흐름과 깊이에 따라 낚시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우리도 예수를 믿으면 변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믿지 않은 때의 생각, 믿지 않았을 때의 행동, 믿지 않았을 때의 습관, 믿지 않았을 때의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자신이 불행하고 가정이 불행해 집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우리는 신앙인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되어야 합니다. 변화된 만큼 삶은 편안해지고 변화된 만큼 우리의 인격은 성숙되어지고 변화된 만큼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변화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겠습니까?

1. 변화의 기준을 분명히 하여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제 새 시대가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하여 성벽을 재건하고 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에스라를 통하여 부흥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헌신 선언서, 변화 선언서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 치하에서 독립이 되어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질서로 살기 위하여 헌법을 만든 것처럼 이제 새 시대에 맞는 변화된 삶을 살기 위하여 지도자 84명이 서명한 변화 선언문, 헌신 선언문을 채택합니다. 9장 38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견고한 언약을 세워 인을 칩니다. 우리는 이렇게 살겠다는 헌신 선언문이고 변화 선언문입니다. 10장 1-27절까지는 그 선언문에 싸인한 민족 지도자 84명의 명단이 나오고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선언문의 내용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변화되겠다고 합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변하고자 하는 기준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종 모세에게 주신 하나님의 율법을 좇아 주 여호와의 모든 계명과 규례와 율례를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변화를 원하면 변화의 기준이 분명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도 아직 예수님이 믿어지지 않고 믿는 사람답게 삶과 인생이 변화되지 않습니까? 마음에 평안도 없고 늘 근심과 무기력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생동력있는 신앙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까?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그곳에 변화가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사법 연수원장으로 봉사하고 계시는 손기식 장로님의 간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영접하고 삶이 180도로 달라졌다고 합니다. 그 바쁜 중에서도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엎드려 기도하고 성경 말씀을 꼭 챙겨 읽는다고 합니다.
"20여년 전 지법 판사 재직시절 예수님을 믿기 시작하자 삶이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고 인생의 목적도 확실해졌다"고 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 전에는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았고 도와 달라는 기도는 무능해 보여 싫었다고 합니다. 무슨 큰 죄도 짓지 않은 것 같은데 눈물로 회개하는 교인들을 보면 불만이 거듭 쌓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보혈의 은혜를 깨달으니까 완전히 인생이 180도 변화되었답니다.

장애인을 돕는 밀알 선교단이 있습니다. 세계적인 단체로 발전하였습니다. 이 단체를 만드신 분이 이재서 박사입니다. 그 분은 15세에 두 눈을 잃었습니다. 가족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도 감나무에 목을 몇 차례 매었지만 실패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대학을 가게 되었고 미국에 유학을 하여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교수로 섬기고 있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된 계기를 말씀하는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맹아학교에 들어갔는데 목사님께서 말씀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에게는 네 개의 눈이 있는데 사물을 보는 육안, 지혜를 터득하여 가지는 지안, 마음으로 보는 심안,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영원한 세상을 보는 영안이라고 전했답니다. 그런데 이 네 개의 눈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대부분 한 가지씩은 부족한 시각장애인이라고 말씀하였답니다. 비록 육신의 눈을 잃었어도 나머지 세 개의 눈이 밝으면 건강한 것이라고‥‥ 그 예배 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의 마음은 완전히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난 단지 네 개 중 하나를 잃은거야. 내게는 아직도 세 개의 눈이 더 남아있는거야.' 비전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고 공부했답니다. 자신처럼 장애를 앓는 사람을 돕기 위해 장애 단체를 만들고 세상의 편견 속에서 상처받고, 쓰러지며, 때로는 삶을 포기해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때 말씀을 붙들고 일어섰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인생을 변화시킵니다. 우상 장사의 아들로 평생 살 수 밖에 없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변화되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혈기를 부리며 그릇된 민족주의로 사람을 죽인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을 주어 불렀고 그 말씀 붙들고 모세는 변화된 인생을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바울이 말씀 붙들고 완전히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을 불어 넣어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켜 주어 권세있는 삶을 살게 만들고 상처를 치유해주고 용기과 희망을 주며, 유혹으로부터 이기게 만들어 주고 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의 젖, 떡, 밥, 꿀이라고 표현합니다. 말씀은 우리가 변화될 수 있도록 힘을 줍니다. 영적 영양실조에 걸려서는 안됩니다. 내 말에 거하면 참 제자 된다고 했습니다(요8:31). 너무나 세상의 권위에만 노예가 되지 마십시오. 문화( '모두가 그렇게 하니까' ). 전통( '항상 그렇게 해왔으니까' ). 이성( '논리적이니까' ). 또는 감정( '옳은 일처럼 느껴져서 )에 최종적인 권위를 두며 그것으로 인생을 변화시키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상대적이고 그것들은 우리를 진정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가운데 한 말씀만 붙들어도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에 의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에 의해, 세계 선교에 앞장 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인생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성경에 있는 진리 하나가 인간의 모든 지혜보다 나은 것입니다. 새는 9일 동안 먹지 않고 살 수 있고 개는 20일, 거북은 5백일,뱀은 8백일을 버틴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말씀을 먹지 않으면 영적으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 19편 7-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지키며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사모할 것입니다.”

2. 변화의 방향이 분명해야 합니다.
아무리 빠르게 변화한다해도 방향이 잘 못되면 결국 변화하지 않은 만 못합니다. 방향이 분명하지 않으면 변화가 아니라 변질이 됩니다. 이들의 선언문에는 변화의 방향이 분명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32절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헌금을 바치며(32) 번제단에 쓸 나무와(34) 맏물과 초태생과(36,37) 십일조를 바치겠다고 합니다(37-39).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까? 32절에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33절 하나님의 전의 모든 일을 위하여, 34절 하나님의 전에 드려서, 35절 여호와의 전에 드리기로, 36절 하나님의 전으로 가져다가, 37절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38절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39절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모든 방향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입니다. 모두가 물질에 관계된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포로 생활하기 전에 변화의 방향이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변화의 방향은 돈이었습니다. 무엇을 하던지 돈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맘몬이었습니다. 애굽에서 포로 생활하던 그들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 땅에 들여 보내고 그곳에서 하나님만 섬기며 행복한 삶을 살기 원했지만 그들은 그곳에 가서 바알 신을 섬깁니다. 바알 신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물질과 성입니다. 솔로몬 성전을 지었지만 그곳에서도 반복적으로 바알신을 섬깁니다. 그러다 성전도 무너지고 바벨론에게 망해 버렸습니다.

이제 포로에서 돌아 와 성전을 재건하였고 성벽을 다 복구하였습니다. 이제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짐을 하는 것입니다. 변화 선언문을 만들어 선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전 중심으로 살겠다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질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돌아와 성전도 재건하고 성벽도 다시 완공하였지만 아직도 이것이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시간의 1/7을 주일로 지킴으로 시간의 주인되신 하나님 제일 주의 신앙을 고백하는 것처럼 물질의 1/10을 통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하나님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청지기적 삶을 고백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하나님의 백성을 향하여 오직 죄의 문제를 담당하여 제사를 드리는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해 레위인을 위한 십일조(민18:21-24)를 드려라고 했습니다. 민족 절기 때 감사의 축제용으로 축제의 십일조(신14:23-27)를 드리라고 했습니다. 매 안식년을 기준으로 제 제3년과 6년에는 그것을 축제용으로 사용치 말고 성(城) 중의 고아, 과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을 돌보고 구제하는 데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인데 그 중 9/10를 가져다 쓰라는 것입니다. 1/10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성물인 것으로 알고 손을 대지 않고 최소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쓰임받는 물질로 남겨 놓는 것입니다. 그것으로 질병으로, 홀로되어, 구조적인 가난으로 고통받는 사람에게, 직분상 생업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일에 전무하는 사람에게 주어 함께 더불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경제적 분배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복 구조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움켜쥐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움켜쥐고 싶어했던 모든 것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바벨론에게 멸망하여 가나안 땅을 잃어버리고 집도 농토도 잃었습니다. 그런데 포로에서 해방시켰는데도 이것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합니다.

구약 성경의 맨 마지막 성경인 말라기 3장 7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들을 향하여 진정 복받는 길 나라가 재건되고 부강해지는 길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돌아갑니까? 8절에 보십시오.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고 있는데 그것을 하나님께 돌려 주라는 것입니다. 곧 그것이 무엇입니까?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9절 보세요. 왜 이들이 이렇게 나라가 망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지 못했다는 것입니까?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시험을 해 보라고 합니다. 얼마나 우리 하나님 답답하셨으면 이렇게까지 말씀하시겠어요. 10절 같이 크게 읽어보겠습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 시험을 해 보라고 합니다. 억지헌금, 기분헌금, 말 많은 헌금, 찌꺼기 헌금, 눈치 헌금, 생생 헌금 드리지 말고 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해 보라는 것입니다. 탐심은 우상숭배(골3:5)입니다. 고양이 밥주듯이, 개밥주듯이 헌금 생활하지 말아야 합니다. 펌프질 하듯 헌금 생활하지 말아야 합니다. 풍성한 지하수가 있는데도 가끔 필요할 때만 펌푸질 해 자기만 먹습니다. 옹달샘 헌금 생활을 해야 합니다. 작은 것 같지만 꾸준이 솟아나 나그네의 갈증을 해소해줍니다.

그러면 어떻게 한다는 것입니까?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황충을 금하여 주신다고 했습니다. 토지의 소산을 멸하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의 과실로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해 주신다고 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열방이 너희를 보고 복되다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행복한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복스러운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면 적극적으로는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 주시고(말 3: 10), 소극적으로는 재난이 없어지고(말 3: 11), 대외적으로는 열방이 인정할 만큼 복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말.3: 12).
예수님 말씀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하나님께서는 바울을 통하여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라고 말씀합니다.
변화는 목표가 분명할 때 바르게 되는 것이고 빠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중심, 예배 중심, 교회 중심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십니다.

3. 변화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분명해야 합니다.
무엇을 변화시킬 것인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선 순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들이 가장 먼저 언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30절을 보십시오. 이방인과 자녀들을 결혼시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가정은 모든 출발의 근원입니다. 가정을 변화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무엇입니까? 31절을 보십시오. 안식일을 잘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주일을 성수하겠다는 말입니다. 셋째가 성전을 위하여 각종 헌금을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변화시켜야 할 가정 생활, 교회생활, 경제 생활의 분명한 내용을 선언문에 채택하였습니다.

이제는 세속적인 영향을 따라 살지 않겠다는 분명한 선언입니다. 이방 나라에 살면서 세속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그것을 절단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우리는 변화시켜야 할 분명한 목록이 필요합니다. 한꺼번에 다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 하나 구체적으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언어 생활이 잘 못되었으면 잘못된 언어 생활을 변화시킵니다. 사고의 틀이 잘못되었으면 그 사고의 틀을 변화시킵니다. 늘 부정적이고 소극적이며 비관적인 사고를 가졌으면 그것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핵심 신념이 잘못되었으면 그것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한 번 배신을 당한 것을 가지고 남자는 다 도둑이라는 핵심신념을 가지고 산다면 그 가정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한 번 잘못된 목사님을 만난 것을 가지고 목회자를 비하하는 핵심 신념을 가지고 교회 생활하면 교회 생활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습관이 잘 못되었으면 습관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사람에게는 '윤형본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눈을 가리고 실험을 해 보면 자신은 똑바로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결국은 20미터나 100미터 반경 안에서 빙빙 돈다고 합니다. 잘 변화되지 않습니다. 변해야 편안해지고 내가 변해야 가족이 행복해 진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잘 변하지 않습니다.
정신 의학자 해리스 박사에 의하면 인간은 세 가지 경우에 천성이 변한다고 합니다. 첫째, 현재 상황이 너무 괴로울 때 사람은 변할 수 있고 둘째는 소망이 안보일 때 인간은 변할 수 있으며, 셋째, 유레카 상황(Eureka Stage)에서 인간은 변할 수 있고 합니다. 어느날 자신도 모르게 큰 깨달음이 있을 때 변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는 말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의 은혜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스가랴4:6-10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에서 해방되자 위대한 일을 계획합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며 기도하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을 짓다가 그만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무려 16년이나 중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방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는 되어질 것을 말씀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할 때 태산도 그 앞을 막을 수 없습니다.(7) 스룹바벨의 사역을 가로 막는 세력들,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원수들(에스라4:4-24 5:6-17) 사단의 세력(살후2:4)이 아무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할 때 시작한 일은 기어코 마치고야 맙니다(9) 사람들의 힘은 참 미약합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하면 끝까지 성령께서 마치게 합니다.(8:9-13) 성령의 능력으로 하면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멸시받지 않습니다(10). 힘겨운 세상입니다. 변화되지 않으면 경쟁사회에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세상입니다. 변화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변화되어야 할 목록을 기록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변화는 단계적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변화되지 않았다고 실망할 것 없습니다. 변화되어야 할 항목을 적어 놓고 기도하며 노력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하나씩 하나씩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두 번이나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야곱을 보십시오. 그의 본격적인 변화는 노년에 이루어집니다. 솔로몬을 보십시오. 성전을 짖고 젊은 날 타락합니다. 죽음 직전에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변화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절망할 것이 아니라 연약함을 깨닫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에게 갖가지 은사를 주실 것이고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기지촌 창녀, 동성애자, AIDS환자를 대상으로 목회하는 전우섭 목사님의 간증을 읽으며 많은 감명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버님이 목사님인데 어린 시절, 갈등과 반목으로 분열된 교회에서 우리 가정이 길거리로 내 팽겨 쳐졌을 때 아버님처럼 목사는 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고 합니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싫었고 목양지를 따라 자주 이사 다니는 것이 싫었다고 합니다. 부조리를 변화시키겠다고 10년은 학생 운동 10년은 민중 운동을 했답니다. 열아홉의 총각 나이에 나는 벌써 고아 두 명의 양아버지가 되었답니다. 틈만 나면 빈민촌, 철거촌, 고아원, 입양기관을 찾아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분노하며 장애인, 불우청소년, 농민, 도시빈민들을 위해 살았답니다. 포주에게 잡혀 연탄불에 달구어진 쇠 젓가락으로 온몸에 상처가난 매춘하는 어린 13세의 소녀를 만나게 되었는데 주님으로부터 "너는 이들을 위한 사역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듣고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었답니다. 에이즈 환자들, 매춘녀들, 성전환자, 양성애자, 양성체, 가학-피학 도착증자들 만나 복음을 전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며 그들의 인권을 보호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결국 탈진 상태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정신적으로 회의하게 되고 육체적으로는 탈진상태에 빠져들게 되었답니다. 기득권층의 끝없는 협박, 왜 자신인 이상한 부류와 목회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 아무리 노력해도 가시적 성과가 없는 것 한계 앞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하직인사를 하기 위해 기도원에 갔답니다. 월요일인데 자신이 돌보고 있는 공동체 여성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돈을 모아서 점쟁이를 찾아간다고 연락이 왔답니다. 주일예배 때 자신의 설교를 '아멘'하면서 들었던 그들이 바로 그 다음날 점을 치러 간 것입니다. 아무리 해도 변하지 않는 그들을 보면서 너무 자존심이 상해 "주님, 힘들어서 목회 못해먹겠습니다. 지금 죽는 것이 넉넉하오니 내 생명을 취하십시오!" 기도했답니다. 그 때 눈물이 비 오듯이 쏟아지기 시작했답니다. 갑자기 자신의 죄인된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통회와 회개의 눈물이 쏟아졌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불덩어리 같은 것이 날아오더니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다고 합니다. "네 힘을 빼라. 그리고 너는 가만히 있어라. 네 힘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 자체가 바로 너의 의(義)다. 이제 가만히 기다리면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을 할 수 있게하라. 너의 자아가 강하고, 네 힘으로만 하려고 해서 이곳까지 너를 데려 오는데 3년이나 걸렸다. 이제 내가 너에게 새 힘과 새 능력을 주겠다. 네가 하려고 하는 모든 의는 결국 잘 포장된 인간의 의다. 네가 '나는 아무것도할 수 없는 존재다' 라는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내가 일을 시작할 것이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갑자기 마음에 평화와 기쁨이 넘쳐흐름과 동시에 두려움, 좌절감, 우울, 열등의식 등이 빠른 속도로 소멸되었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니까 사람들이 변화되기 시작했답니다. 자매들이 통회의 눈물을 흘리며 변화되었답니다.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을 닮아 가고자 하는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환상을 보며 꿈과 비전을 품기 시작했답니다. 예수님은 낮고 천한 이 땅에 오셔서 무식한 어부 베드로와 안드레를 만나 변화시켰습니다. 거친 사막에서 세례요한을 만나 변화시켰습니다. 시각장애인 바디매오, 매국노 세리 마태와 삭개오를 만나 변화시켰습니다. 매춘여성 막달라마리아, 문둥병 자, 귀신들린 자를 만나 변화시켰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만났으니 진정한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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