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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음 없음에 (막 4:3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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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길을 가면서 이야기를 나눕니다.“참 하나님의 능력을 대단해 어떻게 조그만 송아지가 저렇게 큰 소가 되고 작은 알에서 어떻게 새가 나올 수 있을까?”듣고 있던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그런데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새들은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고 소들은 엄청 먹어야 되는데 이리 저리 마음대로 다니면서 많이 먹어야 힐 소는 날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를 새는 날아다니게 하셨을까?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하고 하나님의 실수를 말하는 순간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날아가던 새가 똥을 떨어뜨렸습니다. 그러자 왜 소는 날지 못할까를 이야기하던 사람이 무릎을 탁 치면서“아! 왜 하나님께서 소를 날아다니지 못하게 하셨는지 이제 알겠다.”하더랍니다. 작은 새가 똥을 떨어뜨렸기 망정이지 만약에 큰 소가 날아가다가 똥을 떨어뜨렸으면 큰일 날 뻔 했다는 것이지요.

사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께서 계획 없이 만드신 것이 없고, 의미 없이 존재하게 하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시험에 들기도 하면서 살아갑니다.
우리도 가끔씩 하는 생각입니다만‘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시지 않고 저렇게 하셨을까?’하면서 살아갑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왕에 주신 인생을 편안하게 항해하며 살게 하시지 않고 때때로 어려움을 겪게 하고 또 그 어려움으로 인해 넘어지게도 하실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남을 원망도 해보고, 누구에게 책임도 물어보고 심지어는 지극히 불신앙적인 모습으로 하나님을 탓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언제부터 시작 되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처음은 아닙니다. 적어도 우리보다 먼저 살았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이 제자들을 통해서 보여 집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제자들을 모아놓고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내용을 알기 쉽게 비유를 들어가면서 재미있게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사람들이 바닷가로 모여들었습니다. 산상설교에 못지않은 최고의 야외예배였던 것 같습니다. 열두제자들은 무척이나 바빴습니다. 안내하랴 자리 정돈하랴 여러 가지 할일이 많았겠고 이렇게 유명하신 분을 옆에서 모신다는 것이 긍지가 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는 유명인사도 있었을 것이고, 제자들이 잘 아는 동네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배타고 물고기나 잡던 베드로가 출세했구나, 안드레도 한몫하네.’서로 수군거리는 사람들도 있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일이 자랑스럽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몇 시간 동안의 집회가 끝난 후 조금 뒤에 곧 날이 저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우리가 저 편으로 건너가자.”하십니다. 이에 제자들은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기 시작합니다. 얼마쯤 노를 저었을까 잔잔하던 바다에 갑자기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니 파도가 점점 거칠어집니다.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배안이 술렁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바람이 더욱 거세어지자 자신들의 목숨이 위태로워 졌습니다. 위기를 느낀 제자들이 주무시는 주님을 깨워서 도움을 요청했고 주님은 파도를 무섭게 꾸짖으셨고 바다는 고요지면서 다시 평온한 항해를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사건 속에 나타나는 제자들의 모습이 주님께 책망들을 믿음 없는 행동이었고 어쩌면 우리들의 행동과 같았는지 모릅니다. 결국은 믿음의 문제가 숙제로 남는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그 날 제자들의 모습으로 돌아가 봅니다. 우리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오늘 이 제자들이 주님께 믿음이 없다는 책망을 받았는지를 살펴봅시다. 그리고 과연 우리들이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함께 생각하면서 우리의 믿음을 추슬러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오늘 이들이 왜 호수를 건너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러분 오늘 제자들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넌 것은 왜입니까? 사실은 제자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배를 탔습니다. 그리고 호수를 건넙니다. 배를 타고 건너가자고 하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어떻게 보면 단순한 요청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명령일 수도 있고, 왜 건너가자는 이유도 정확히 어디로 가자는 구체적인 말씀도 없지만 여하튼 예수님의 계획이었고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뒤에 5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했던 곳이 거라사 지방이었음이 밝혀집니다만 처음 배를 타고 가자고 할 때는 무작정 가자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어디로 갈 거냐고 묻지도 않았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묻지도 않습니다. 두 말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순종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전에 그들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어깨가 으쓱할 정도로 위대하신 예수님을 모셨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되어 있었고 자기들의 위상도 높아졌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직후에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가자고 하니 이것 저 것 따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위대하신 분이 가자는데 뭐 생각할 게 있습니까? 믿음 같지만 믿음이 아닌 과장된 제자들의 순종이 보이는 부분입니다. 자기에 도취되어서 얼떨결에 순종의 모양이 되어버린 경우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세요. 정말 믿음으로 순종했다면 끝까지 그 주님을 믿는 믿음이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금만 믿음의 마음으로 생각했다면 설마 배를 타고 가자고 하신 분이 자기도 빠져 죽으려고 가자고 하셨겠습니까? 그 분이 같이 타고 계시는데 왜 호들갑입니까? 오늘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순종한다고 나섰으면 끝까지 믿음을 가지고 가야죠. 좀 안된다고 난리고, 좀 어렵다고 원망하고, 좀 힘든 다고 포기해 버리고 이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가만히 보면 제자들처럼 믿음 없이 나선 순종입니다. 즉 내 기분에 들뜨고 내 위신 때문에 나섰던 믿음 없는 돌발적인 순종이었기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이게 제자들의 믿음이고 오늘 우리들의 믿음의 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제자들이 하는 말을 좀 들어 봅시다. 우리가 죽겠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우리를 돌아보지 않고 잠만 자고 있는 것입니까? 하고 항변하고 있습니다. 막말로“당신 능력이 없는 사람이 아니요?”하는 말과 똑 같습니다. 어떻게 들어보면 주님이 잠들었기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다고 항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 주님이 주무시는 것과 풍랑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이 잠드셨기 때문에 그 틈을 타서 풍랑이 일어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들의 원망 속에는 이런 뉘앙스가 묻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 원인을 예수님께로 돌리고 있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함께 있는데 어째서 이런 광풍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설령 아무리 큰 태풍이 몰아쳐도 배가 무사하게 가야지 왜 흔들리느냐 이것입니다. 죄인들만 타고 가는 배라면 빠져 죽을 수도 있다지만 주님이 타고 계신 배라면 이럴 수는 없는 것 아니냐는 항의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들의 항의가 일리가 있나요? 우리도 가끔은 이런 생각에 빠집니다.‘내가 예수 믿는데 왜 사업이 이 꼴이야, 내가 예수 믿는데 시험 치면 당연히 합격해야지, 기도하고 예수 믿는 사람인데 건강해야지 말이야...’지금 제자들이 이 모양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걱정을 할라치면 누가 누구를 걱정해야합니까? 자기들은 눈을 뜨고 현실을 보고 있고 주님은 눈감고 현실조차도 모릅니다. 급하면 눈을 뜬 자기들은 헤엄이라도 치겠지만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사실은 제자들이 주님을 걱정해 줘야 맞지요.“예수님 얼른 일어나십시오. 이렇게 주무시면 위험합니다.”이렇게 깨우며 나와야지요. 무엇보다도 제자들의 큰 실수는 무엇입니까?“우리가 죽게 되었습니다.”라는 말입니다. 우리도 잘하는 말이지요.“죽겠다, 죽고 싶다.”그런데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불신앙적인 말인지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죽는다는 말은 곧 같은 배를 타고 계신 주님이 죽는다는 말입니다. 주님과 같이 죽자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책임하고 불신앙적인 말입니까? 죽겠다는 말 하면 안 됩니다. 아니 우리는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얼마나 제자들을 믿고 있습니까? 믿지 못하는 사람의 배를 타고 어떻게 잠을 잡니까? 남편여러분들 중에 초보운전 부인 운전시켜 놓고 의자 뒤로 젖히고 코골며 잠 잘 남편이 몇이나 됩니까? 이거 쉽지 않거든요. 신뢰가 가지 않으면 절대로 평안히 누워 잠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주님은 제자들을 신뢰하고 있는데 제자들은 우왕좌왕 전혀 주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신중하지 못합니다. 급기야는“아이고, 죽겠다.”하고는 포기하고 맙니다. 37절에 배에 가득하게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다고 하는데 바닷물만이 아니었습니다. 염려와 근심과 불안과 두려움이 함께 밀려들어 온 것입니다.

우리들 또한 인생의 배에 풍랑이 일어 바닷물이 밀려들어 올 때 우리는 불안과 염려와 두려움과 불신앙까지 함께 가득 차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모습으로까지 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배가 조금만 파도에 밀리고 조금만 물이 들어와도 금방 마음의 평강이 무너지고 신앙의 균형이 깨어지는 우리의 모습들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이러한 제자들을 보고 뭐라 하십니까?“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오늘 제자들의 총체적인 문제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믿음 없음이 문제요, 믿음이 적어서 문제요, 믿지 못해서 문제라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주님도 제자들에게 깜빡 속으셨습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자고 했을 때 군 소리 없이 즉각적으로 순종하며 나서는 제자들이 믿음이 있는 줄 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믿음이 어디 있느냐 말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순종하는 척하면서 주님을 속이지 말아야합니다. 얼른 나서고 열심 있는 척하면서 결정적일 때 믿음이 내보여지지 않는 그런 믿음은 오늘 제자들과 다를 바가 없는 과장된 믿음이요, 주님을 속이는 거짓 믿음입니다. 그래서 오늘 주님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을 나무라고 계십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오늘 이 제자들의 근본적인 두려움은 풍랑이 있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두려운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너무 커서 문제가 아니요, 내 현실이 너무 무거워서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두렵고, 힘들고, 아픈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님은 느닷없이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가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쉼 없이 노를 저어야 합니다. 그 노의 생김새는 다르고, 그 배의 크기나 용도는 다소 각각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태운 배의 사공입니다. 그리고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타신 배에도 풍랑은 있고, 우리 인생의 갈릴리에도 종종 광풍은 일고 파도는 칩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건너야만 하는 호수입니다. 이 바다를 건너야 참 쉼이 있고, 참 평안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바다에 나가지 않는 사람은 풍랑을 만날 일이 없습니다. 안전한 곳만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바람이 어떻게 부는지 조차 알지 못하며, 바다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도 모를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신비한 능력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로 파도가 잔잔해지고 바다가 고요해지는 그 신비한 경험은 바다에 나가 서 본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어서 이런 신비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되지 말고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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