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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왕 같은 제사장 (벧전 2: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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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의 작품 중에 「미운오리새끼」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 한 오리새끼가 등장합니다. 그는 유난히 크고 볼품없는 모습으로 다른 오리들에게 왕따를 당합니다. 너무 괴로워서 집을 뛰쳐나가지만 별 수 없습니다. 가는 데마다 구박을 당합니다. 오랜 방황의 시간이 지나고 어느 날 물 속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백조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침내 멋진 날개 짓을 하며 창공을 나는 백조의 삶을 살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신분의식의 중요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아정체감(Self-Identity)의 중요성입니다. 내가 과연 누구인가에 대한 자각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모르면 어리석은 삶을 살며 허송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백조가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채 미운오리새끼로 살아간 세월은 너무 아깝고 억울한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와 비슷한 경우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나는 누구인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되는 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미운오리새끼처럼 허송세월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은 우리에게 성도의 신분에 관해 잘 설명해 줍니다. 아무쪼록 이 말씀을 통해 올바른 신분의식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후회 없는 신앙생활, 그리고 복된 인생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신분의 양면성 : 특권과 의무

  모든 신분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즉, 그 신분에 따르는 특권이 있고, 또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 다닙니다. 하나만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대한민국 국민의 신분을 가지면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여러 가지 혜택이 있습니다. 이따금 주변에서 외국인 근로자들을 보면, 거주 비자를 취득하느라 무척 애를 씁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한국 시민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의무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납세의 의무, 국방의 의무 등 ... 여러 가지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특권만 누리고 의무를 수행하지 않으면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한 마디로 ‘얌체’죠. 비난 받아 마땅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누리는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감당할 의무(책임, 사명 등 ...)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특권만 누리려 한다면 얌체 신앙, 절름발이 신앙, 미성숙한 신앙, 유치한 신앙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르는 복음송 중에 이런 노래가 있죠.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 ” 노랫말도 좋고 곡조도 쉬운데다 서로를 격려하며 부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애창하는 노래입니다. 그런데 2절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은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 ”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해 주는 일도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특권과 의무가 각각 무엇인지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그리스도인의 특권 : 왕 같은 제사장의 특권

  본문 9절~10절을 보면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표현하는 칭호 중 네 가지가 나옵니다.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그리고 소유된 백성입니다.
  ‘택하신 족속’이라 함은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가 하나님께 선택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죽을 인생, 지옥 갈 인생이 구원받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현재 지구 상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65억인데 그 중 나 하나는 모래사장의 무수한 모래 중에 한 알에 불과합니다. 그런 나를 하나님이 특별히 기억하시고 선택하셨다는 사실은 감격 그 자체입니다.

  ‘거룩한 나라’는 세상에서 구별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본래 ‘구별’의 의미가 있습니다. 악한 세상에 뒤섞여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소유된 백성’이란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값을 치르고 사심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가 엄청난 축복입니다. 물건도 그 소유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간디가 쓰던 안경을 전 세계인에게 경매를 한다면 얼마나 큰 액수로 낙찰이 되겠습니까? 물건 자체야 고물이죠. 그러나 간디의 소유였기에 가치가 있는 겁니다. 우리도 하찮은 존재일지 모르지만 창조주 하나님, 만유의 주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기에 존귀한 존재가 된 겁니다. 그러기에 또한 하나님이 절대 보호하십니다. 사43:1~2 보면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지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 ” 말3:17에서는 우리를 가리켜 ‘특별한 소유’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들을 아낌 같이’ 아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네 가지 칭호 중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것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왕 같은 존재라는 것은 당당하고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은 존귀한 모습을 가리킵니다. 제사장은 구약 시대에 일반 백성과 구별된 신분의 소유자였습니다. 일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지만, 제사장은 달랐습니다. 물론 짐승의 피를 제물로 갖고 나아갔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전에는 성소와 지성소가 있었습니다. 성소(聖所)는 거룩한 장소라는 뜻으로 일반 제사장들이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지극히 거룩한 장소라는 뜻으로 대제사장만 백성을 대표해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것도 1년에 딱 한번 대속죄일에만 출입할 수 있었습니다.

  지성소는 하나님이 인간을 만나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장소입니다.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두꺼운 휘장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이 휘장을 지나 지성소의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속죄의 피를 가지고 나아갑니다. 지성소가 얼마나 두려운 곳인지 대제사장도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출애굽기 28장 보면 대제사장의 복장이 설명되어 있는데, 옷자락에 금방울을 여럿 달아놓습니다. 그 이유는 지성소에 들어가 제사를 드릴 때 밖에서 대기하는 사람들이 대제사장의 움직임을 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만일 제사에 실패하면 즉사하는 겁니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대제사장의 몸에 끈을 묶어 놓습니다. 금방울 소리가 멈추고 아무 소리가 나지 않으면 죽은 겁니다. 그러면 지성소에 아무도 들어 갈 수 없으므로 끈을 잡아당겨서 끌어내야 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데가 바로 지성소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못 박혀 운명하시던 그 마지막 순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 27: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 ”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쫙 찢어진 것입니다. 그때는 유월절이라 제사장들이 성소에서 한창 일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휘장이 찢어졌으나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목숨의 위협까지 느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해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예수님 외에 중보자가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그러니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누구나 제사장 같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당당히 나아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가리켜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 교리라고 부릅니다. 마틴 루터에 1517년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었는데, 중교개혁 정신 중 중요한 하나가 바로 만인제사장 교리입니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는 사제들을 일반 신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중보자로 여겼습니다. 고해성사, 사제들의 성경해석권 독점 등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만인제사장 교리를 지지합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의 제사장적 특권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앞에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다음의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예배의 특권 :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아무나 예배드릴 게 아닙니다. 아무리 찬송을 하고 헌금을 해도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벧전2:5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  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제사장으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이 만나 주십니다. 

  ② 기도의 특권 :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으로 하나님 앞에 자유로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히4:16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  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때를 따라 돕는 은혜’라는 말은 언제든지 수시로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은혜를 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요일5;14~15에서도 이러한 기도의 특권을 언급합니다. 요일5:14~15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답답하고 힘들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축복입니까?

  ③ 은혜의 특권 :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와 인도의 축복 받습니다. 요즘 북한의 핵 실험으로 뒤숭숭합니다. 그래서 신문을 보면 우리 한국도 핵 무장을 해야 되는 게 아니냐는 반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죠. 그래서 차선책으로 미국 같은 핵 무장 국가로부터 핵전력의 도움을 받아야 된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 것을 가리켜 ‘핵 우산’에 들어간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그보다 더 강력한 보호를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우산’ 아래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면 세상의 어떤 위험에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요일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으로 악한 마귀가 건드리지도 못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의무 : 왕 같은 제사장의 의무

  제사장의 신분에는 특권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의무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  분, 특권층이란 말을 아시죠? 그 말은 보통 좋지 않은 뜻으로 쓰입니다. 왜 그런가요? 많 은 사람들이 높은 지위를 통해 온갖 특권을 누리지만, 그에 걸맞은 의무를 제대로 감당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특권층이란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나 많은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무 감당하는 것을 기피한다면 특권층이란 비난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리고 의무를 감당하지 않는 신앙은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습니다.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제사장이란 말은 라틴어로 ‘폰티펙스’(Pontifex) 입니다. 이 말은 ‘다리를 놓는 사람’(Bridge-Builder)이란 뜻입니다. 즉, 하나님과 다른 사람의 중간 역할을 하는 사람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감당해야 될까요?

  ① 도고(禱告) 기도의 의무 : 앞서 말한 기도의 특권은 나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그  러나 기도는 나만을 위해 하는 게 아닙니다. 이웃을 위해서, 남을 위해서도 해야 됩니다.  이처럼 남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가리켜 ‘도고’라고 합니다.(딤전2:1)
  이런 기도를 통해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위해서도 큰일  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와 국가, 심지어 세계를 위해서도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찬송가 405장 「나같은 죄인 살리신」(Amazing Grace)의 작시자 존 뉴우톤의 어머니  의 기도는 놀라운 역사를 이룬 것으로 유명합니다. 존 뉴우톤은 15세에 홀어머니를 두고 가출합니다. 그는 노예상에 들어가 일을 합니다. 나중에는 노예선 선장까지 됩니다. 그가 노예선에 흑인들을 태워 아메리카로 갈 때의 일입니다. 뜻하지 않게 풍랑을 만나 배가 난파됩니다. 해변에 홀로 밀려온 그는 신비로운 체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결국 회심하게 됩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의 결과입니다. 아들이 가출한 후 그 어머니가 아픈 가슴을 안고 얼마나 기도했겠습니까? 그는 그 후 노예상을 청산했고 목사가 됩니다. 그가 유럽 각지를 돌며 지성인들에게 호소했을 때 회개의 역사가 나타나며 부도덕한 노예상 행위를 금하게 됩니다. 그런 움직임이 아메리카로 흘러들어갔고 결국 흑인 노예 해방 운동의 결정적인 단초가 됩니다. 그러니까 링컨도 위대하지만, 그 뿌리를 캐보면 존 뉴우톤의 어머니의 기도가 나옵니다. 도고의 기도는 이렇게 강력한 것입니다. 
  요즘 나라가 몹시 어려운데,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나라와 민족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민족의 제사장입니다. 더 나아가 세계 만민이 구원받도록 기도해야 됩니다. 우리는 만민의 제사장입니다.

  ② 복음 전도의 의무 : 9절에 보면,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으로 어떤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합니까? 하나님의 덕을 선전할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선전 요원입니다. 고후5:20은 이런 모습을 가리켜 ‘그리스도를 대신한 사신’(Ambassadors for Christ)이라 말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이 왜 구약 시대 내내, 그리고 오늘날까지 시련의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제사장의 의무를 감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출19:6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언약을 체결합니다. 그때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특권인 동시에 이방인과 하나님 사이에 중간 역할을 감당할 의무를 포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왜곡된 선민의식에 매몰되어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런 잘못 때문에 구약 시대 내내, 심지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시련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복음 전도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먼저 입술로 증거하고, 더 나아가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먼저 믿는 성도들의 삶이 세상 사람들에게 걸림돌이 되면 안 됩니다. 이 시대에 우리 주변에서 예수 이름을 못 들은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입니다. 물론 우리가 선한 행위로 구원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후 성화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할 때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생명축제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전도대상자를 선정하셨습니까? 아직 제출하지 않으신 분들은 지금이라도 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초청장을 보내십시오. 당일에 꼭 인도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겁니다.  예비된 영혼을 구원해 주실 겁니다. 이런 행사를 하면 어떤 분들은 또 하는구나 하면서 그냥 지나갑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이런 행사를 남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 일도 아닙니다. 그 이전에 여러분 한 분 한 분의 제사장적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새생명축제는 우리 각자가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도와주는 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자신의 일이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부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복음전도의 의무를 잘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전도하는 일은 아주 시급합니다. 어느 교수님의 간증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은 수업 시간에 지혜롭게 복음을 증거하는 분입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관심을 보였고 개인적으로 찾아왔답니다. 그래서 복음을 제시해 주었고 마침내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답니다. 그 학생은 프랑스 유학을 갈 계획으로 현지에 가서 교수도 만나보고 돌아와 막 준비를 해서 유학을 떠나려고 하는데, 그만 뇌졸중으로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천국에 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임종 직전까지 평안한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불신 부모님에게 천국을 증거하였고, 그는 비록 떠났지만 부모님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겁니다. 얼마나 아슬아슬합니까? 비록 그 학생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래도 복음이 전해졌기에 천만다행이었던 겁니다.

  그렇습니다! 전도는 정말 시급합니다. 나에게 기회가 또 다시 주어질지 보장하지 못합니다. 내가 매일 만나는 그 사람에게 기회가 또 다시 주어질지 보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당장, 즉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후회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망들을 수 있습니다.

  문득 제 친구 두 사람이 기억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가려고 할 때 어머니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말을 듣지 않자 제 친구를 보내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제게 전도한 적이 없었는데, 뒤늦게 와서 무엇이 답답해서 목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답답해서 목사가 되나요? 하나님이 부르시니까 하는 것이죠. 지금은 섭섭한 감정이 사라졌지만 그때는 얼마나 황당하던지! 다른 한 친구는 제가 퇴박을 주었지만 여러 번 전도했습니다. 결국 그 친구 덕분에 제가 이렇게 서서 설교하고 있는 겁니다. 생각할 때마다 고마운 친구입니다. 우리는 후일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존재가 되겠습니까? 정말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특권을 풍성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의무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라도 미운 오리 새끼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백조처럼 살아갈 존재입니다. 아무쪼록 특권과 동시에 의무도 잘 감당함으로 왕 같은 제사장이란 신분에 걸맞은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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