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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마 10:40 ~ 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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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마음 한구석에는 늘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밤늦게 어머니를 찾아 간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사람이 마음먹은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머니가 하신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 누구에게나 이기주의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하나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은 여기서 제외 시켜야만 합니다.
인간은 왜 갈수록 자신이 생각한 대로 행하지 못하는가 그 첫째 이유는 인간들의 끝없는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은 상대적 격하감 내지는 상대적 빈곤감 때문일 것입니다.

말 타면 종을 두고 싶다는 옛말이 있는 가하면 마당 빌리더니 안방 차지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이렇게 인간에게는 만족의 적정한 선이 없습니다. 어떤 물건을 사놓고 느꼈던 처음 기대와 흥분은 몇 시간 후에는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비싼 물건을 살 때 죄의식을 느끼는 것이 아닌지 모릅니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부존효과나 소유효과 마저도 철저히 이기적인 데로 적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하찮은 것도 행동화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이 동반할 때 만아 믿음이 될 수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고 행함이 없는 믿음은 결국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람이 그 행하는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행함으로 인하여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은 불변의 진리입니다.
오늘 주어진 본문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의인의 상이 있다고 했고 아무리 작은 선행일지라도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상급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복음의 사역자들을 공궤하고 영접하는 자에게 약속된 것입니다.

Ⅰ. 예수 그리스도 전도자들의 특징입니다.

1) 신적인 소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선택한 제자들입니다. 마가복음 3장 14절에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라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6장 13절에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 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 가운데 직접 선택한 자들입니다.

2) 권능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절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병"은 영적인 죄의 병을 말하고 "약한 것"은 육신의 질병을 말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능력과 권세를 받은 자들입니다.

3) 복음전파의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6-7절에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임하였다는 말입니다. 그 하늘나라는 곧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천국 복음은 곧 예수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4) 평안을 비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12절에 "또 그 집에 들어가면서 평안하기를 빌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평안을 비는 자들입니다.

5) 사명수행에 따르는 고난과 박해가 불가피한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22절에 "또 너희가 내 이름을 인하여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사명을 감당하려고 하면 핍박과 고난이 따라옵니다.

6) 목숨까지도 바치는 희생을 각오하는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8-39절에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자들입니다. 십자가를 따르는 일에 있어서는 죽기를 각오하는 자들입니다. 진리문제에 있어서는 타협이나 물러설 줄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Ⅱ.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를 영접하는 자의 태도입니다.

1) 하나님을 영접하는 마음으로 전도자를 영접해야 합니다.
본문 10장 40절에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본문에는 "영접"이라는 말이 6번이나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영접"이라는 말은 정중하게 환영하고 붙잡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히 여기고 정중하게 접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도자들은 선지자로 나타나기도 하고 의인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세상이 알아주지 아니하는 소자로 나타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보냄을 받은 자를 영접하는 것은 보낸 자를 영접하는 것과 같다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 10장 16절에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 나를 저버리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저버리는 것이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2) 전도자를 인정하고 귀히 여기는 것이 영접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2-13절에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라고 했습니다.
전도자들은 영혼을 위해 해산하는 수고를 하는 자들입니다(갈 4:19).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자들입니다(딤전 5:17). 이러한 차원에서 전도자를 귀히 여겨야 합니다.

3) 전도자를 존경하는 것이 영접입니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에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4) 전도자가 기쁨으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 영접입니다.
히브리서 13장 17절에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5) 전도자의 설교를 잘 받아 행하는 것이 영접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말씀으로 받음을 감사했습니다.
전도자가 전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서 믿을 때 그 말씀이 믿는 자 속에 역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각자 각자의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전도자의 메세지를 잘 받는 성도야말로 진실로 전도자를 영접하는 자입니다.

6) 전도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는 것이 영접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6절에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에 대하여 뱅겔(Bengel), 알포드(Alford)같은 신학자는 '물질'이라고 했고, 메이어(Meyer)는 '도덕적인 선'이라고 했고, 렌돌(Rendal)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고 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에서 물질을 빼어 놓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일꾼들에게 물질로 도울 것을 성경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1절에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전도자 바울에게 물질적인 교제를 했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빌립보 교회가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빌 4:15-19).
모든 좋은 것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필요한 것을 공급하는 일입니다. 인간적으로 가족같이(히 2:14), 어려운 고난도 같이 하는(벧전 4:13) 관계입니다. 무엇보다 전도자와 신령한 교제를 같이 하는 것이 영접하는 것입니다.

7) 전도자와 모든 고난을 함께 하는 것이 영접입니다.
로마서 16장 4절에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 2장 21-22절에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Ⅲ.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를 영접한 자의 축복입니다.

본문 10장 41-42절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선지자, 의인, 소자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에 대한 별칭입니다.

1) 선지자의 상이 있습니다.
선지자를 단순히 인간적인 동정이나 연민의 차원에서 떠나 하나님의 사자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선지자의 상'이란 선지자의 지위에 합당한 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르밧의 여성도는 진리의 사람 엘리야를 공궤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결과 엘리야의 말대로 통에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에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그 집에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죽었는데 엘리야가 살려 주었습니다(왕상 17:8-24).
수넴에 사는 여인과 그의 남편은 진리의 종 엘리사를 위하여 집을 짓고 침상과 촛대와 의자와 책상을 진설했습니다. 이미 남편은 늙고 자식이 없던 그 여인은 늙은 남편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열왕기하 4장 16-17절에 "엘리사가 가로되 돐이 되면 네가 아들을 안으리라 여인이 가로되 아니로소이다 내 주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의 계집종을 속이지 마옵소서 하니라 여인이 과연 잉태하여 돐이 돌아오매 엘리사의 말한대로 아들을 낳았더라"고 했습니다.

2) 의인의 상이 있습니다.
'의인'은 하나님의 뜻을 말로만 전하는 자가 아니라 신행이 일치하는 자를 가리킵니다. 결국 의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들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전도자의 설교를 듣고 그대로 수용하고 순종하고 따르는 신행일치의 축복이 바로 의인의 상급입니다.

3) 전도자와 같은 격에 해당하는 상입니다.
선지자, 의인, 소자 같은 전도자들이 상을 받을 때 그를 영접한 사람도 같이 상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선교사를 보낼 때 물질로 지원한 자도 선교사와 같은 상이 있다는 말입니다. 가든지 보내든지(Go and Sand)할 때 가는 자나 보내는 자나 다같이 상급이 있다는 말입니다.

4) 결코 없어지거나 무시당할 수 없는 상입니다.
본문 10장 42절에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고 했습니다.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상급을 기록하고 관리하는 자가 주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의 행한 일이 기록되어서 그를 따라 다니기 때문입니다(계 14:13, 20:12).

5)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 상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 권세가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힘이 됩니다.

6) 금세와 내세에 약속 있는 상입니다.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0년 기독교의 역사는 피의 역사였습니다. 장차 기독교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피 흘리는 역사가 계속될 것입니다. 세상 역사의 구심점을 이루고 중앙통을 가르는 기독교 역사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피로 값 주고 사신 주님의 몸된 교회와 함께 하는 자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기독교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들과 함께 고난의 잔을 나누는 성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정확하게 진행 되어가고 있습니다.
선지자를 핍박하던 구약시대나, 예수님 당시에나, 초대교회 300년의 기나긴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은 주의 성도들을 통하여 당신의 종들을 위로하셨습니다. 중세의 로마 카톨릭의 횡포 속에서도 주의 종들과 생명적 유대를 함께 하는 숨은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의 숨 막히는 음해공작 속에서도 목숨을 담보로 하는 동맹자들이 있었습니다.

일제 강점기 36년은 일제가 기독교 말살정책을 강행했던 역사입니다. 진리의 종들은 신사참배에 항거하면서 모진 고난을 감수해야만 했습니다. 이 살풍경한 시기에 진리의 종들과 함께 고난에 동참했던 주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유물주의 공산주의자들의 횡포 앞에서도 진리의 종들은 언제나 주의 백성들의 뜨거운 영접을 통하여 복음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실 때 섬김을 받으려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것입니다. 그 섬김은 바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희생의 제물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백성을 섬기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의 섬김은 하나님이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는 주와 교회를 섬기는 것이지 성도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섬김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자신을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종들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그들과 함께 하십시오.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강구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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