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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드로의 환상 (행 1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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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은혜가 언제나 놀랍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역사하심이 얼마나 철저하신지요? 조금도 빈틈이 없으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면 언제나 감사한 것뿐입니다.
이방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이루기 위해 베드로로 하여금 욥바에 머물게 하신 하나님은 때를 맞춰 베드로로 하여금 기도케 하셨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 근처에 이르렀을 때 마침 시간은 낮 12시쁨이었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 12시에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를 받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 지붕으로 올라가 기도하던 베드로는 마침 배고픈 것을 느끼고 뭘 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도를 마치는 참이었고 사람들은 때를 따라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이 베드로를 찾으셨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빈틈없이 일을 하시는지 생각해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고 그런 하나님께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때로는 내게 안 좋은 일인 것처럼 보이던 것 까지도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기 위한 계획이었음을 우리가 뒤늦게 깨달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살펴보는바 적절한 상황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하나님이 앞에 자기를 내세워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베드로는 지금 기도를 마치며 마침 배가 고파서 무엇 좀 먹었으면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환상을 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환상만이 하나님이 우리를 깨우쳐 주시는 전부는 아닙니다. 여러 가지 모양과 방법으로 깨우쳐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지금은 기도를 마치려는 베드로에게 가장 적절한 방법인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네 모퉁이가 묶여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갖가지 네 발 달린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파충류와 날짐승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에게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그것들을 잡아먹어라.” 이에 대해 베드로는 “주님,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지금까지 먹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베드로는 유대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다짐한 사람들입니다. 특히 북쪽 이스라엘이 망하고 다시 남쪽 유대가 망하고 난 뒤 포로가 되어 바벨론까지 끌려갔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는 백성들입니다. 그런 어려움 끝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것인 줄을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해서 구체적인 실천지침까지 만들어 놓고 이를 지켜오고 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께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해서 너희가 먹지 말라고 했던 것들은 철저히 금하고 있었던 저들 아닙니까?

베드로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성령 안에서 능력으로 사역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모세를 통해서 주셨던 말씀들을 지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부정하니 도무지 먹지 말라고 하셨던 바로 그 짐승들을 보여 주시면서 먹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베드로가 펄쩍 뛸 수밖에요.

그러나 돌이켜 보면 그렇다고 베드로가 항상 의롭게만 살았던 사람입니까? 베드로는 지금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지 않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라고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셨던 것을 얼마나 지키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비록 예루살렘을 떠나 성도들을 돌아보는 가운데 욥바까지 와 있다고는 하나 예루살렘에 스데반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대환난이 닥친 상황에서도 결코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는 분명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가서 내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 이전을 생각해 본다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까지 고백하며 “이제부터는 너를 베드로라 부르리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고난을 말씀하시는 주님 앞에 “그리 마옵소서. 이는 아니 될 말씀입니다”하며 자기 생각을 내세우다가 예수님께 핀잔을 듣기도 했던 베드로가 아닙니까? 아니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고난을 말씀하실 때도 저 역시 야고보 요한과 마찬가지로 한 자리 차지할 생각으로 다투던 자가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나를 위해 기도하라 또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신신당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졸며 자기만 했던 저가 아닙니까? 그러다가 예수님이 붙잡히시던 순간 얼떨결에 칼을 휘두르다가 애꿎은 말고의 귀나 떨어뜨려 놓고는 예수님께 또 다시 핀잔을 들었던 저가 아닙니까? 아니 예수님이 잡히시고 난 다음에는 큰 소리는 혼자 다 쳤던 저가 계집종의 말에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맹세하고 저주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 베드로가 부정한 것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지금 큰 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겸손으로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의롭다고, 나는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어긴 적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도 “나는 참으로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해 내겠습니까?” 하며 탄식하지를 않습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로가 아니고서는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 베드로는 “주님,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저는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지금까지 먹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주여 그것을 먹으라고 하시는 데는 그만한 뜻이 있을 줄 압니다. 종이 부족해서 그 뜻을 미쳐 깨닫지 못하오니 깨우쳐 주옵소서”라고 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나의 의를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따라서 언제든지 주님 앞에 엎드릴 적마다 “죄인된 나를 구원하여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쓰러지고 넘어지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붙잡아 바로 세워 주옵소서.” 간구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구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속된 우리를 의롭게 하여 주셨습니다.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합니다. 물론 잠시는 안 먹고 버틸 수도 있겠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먹지 않고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근데 먹는 것도 그렇습니다. 남들 다 먹는 것도 도무지 먹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걸 어떻게 먹어 하는데 그걸 또 맛있다고 먹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먹고는 싶은데 건강 때문에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먹고는 싶으나 돈이 없어서 먹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계율 때문에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가운데 회교권에서 온 사람들은 하나같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들의 율법으로는 돼지고기는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아닌 다음에야 먹는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우리에게는 먹을 자유도 있고 먹지 않을 자유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결코 먹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바로 우상의 제물입니다. 왜냐하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은 곧 우상에게 소속되는 것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지금까지 먹은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구약 성경에 그런 것들은 먹어서는 안 된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된 것이다’라고 하지 마라.”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우리들 자신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가운데 깨끗하다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의로운 사람이 있는가 하여 찾아보았더니 한 사람도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의인은 없다니 한 사람도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은 하나 같이 감히 하나님 앞에 설 수도 없는 죄인들입니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심판받아 영원한 지옥불 속으로 던져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주십니다. 내가 죽어야 할 죄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음으로 대신 갚아 주시고 이제부터는 너희는 종이 아닌 친구라고 말씀하여 주십니다. 아니 우리 가운데 오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입을 열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그런데 여전히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라고만 하고 있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은 나를 깨끗하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겨 주셨습니다. 내가 깨끗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깨끗하다고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된 나를 자녀 삼아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라는 고백이 항상 우리들 가운데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게는 연약함과 부족함뿐입니다. 바르게 살고자 하고 말씀대로 살고자 하지만 여전히 어두움 속에 헤매고 다닐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나도 모르게 죄악의 깊은 늪 속으로 빠져들 때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울 사도와 같은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는 곤고한 자입니다. 하나님 나는 연약한 자입니다. 내 혼자 힘으로는 견딜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오니 나를 붙잡아 주시고 나를 깨우쳐 주시고 나를 바로 세워 주옵소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내 안에 있는 모든 죄와 허물로부터 나를 건져 주옵소서” 고백하며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주님께서 뭐라고 우리를 위로해 주십니까? “내가 이미 너를 깨끗케 하였느니라.”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따라 날마다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누구도 판단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사랑으로 다가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갖가지 네 발 달린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파충류와 날짐승들이 들어 있는 것을 보여 주시면서 “베드로야, 일어나 그것들을 잡아먹어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침 배가 고파서 무언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베드로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속되거나 부정한 것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주님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아니 도대체 하나님께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술 더 떠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된 것이다’라고 하지 마라.”
그것도 같은 환상을 거듭해서 세 번이나 하나님이 보여주시면서 동일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의지가 아주 확고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도대체 하나님께서는 왜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까?
물론 그 뒤에 나오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만나면서 의문이 풀렸습니다만 그러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시는 뜻을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있습니까? 물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사람마다 보는 생각이 있고 살아가는 방식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 이런 삶의 방식과 생각의 차이에서 판단하는 경우도 있지만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을 나쁘다고 비판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분명 그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어찌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을 수가 있냔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 사람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의롭게 여겨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은 부정하다고 말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하나님보다 우선한다는 뜻입니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살아오지를 않았습니까? 그래서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었던 자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주셨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내 대신 내 죄값을 치루기 위해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깨끗케 하였다.”고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스스로 주님 앞에 엎드릴 적에는 “주님 나는 부정한 자입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고백하며 엎드리지만 그렇다고 해서 “맞습니다. 주님, 아무개는 부정한 자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우리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도 너도 우리 모두를 다 죄 가운데서 건져 구원하시면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붙잡아주고 계십니다. 이 시간도 주님은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연약한 나, 연약한 너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함께 계시는 주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나를 위해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깨닫는다면 우리 역시 이 사랑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주는 것이요 가려주는 것이요 감싸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사랑 때문에 오늘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이요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을 가지고 우리 역시 주님처럼 다른 사람을 찾아주어야 하는 것이고 연약해서 쓰러지고 넘어지는 자들을 위해서 끊임없이 기도해주며 붙들어 주어야 하고 바로 세워나가도록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죄 가운데 헤매며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이 사랑을 알지 못하고 죽음의 늪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에 우리의 온 힘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을 주위로 돌리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족 가운데 우리 이웃 가운데 아직도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여 여전히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에게 예수를 전해줌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로 인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연약해서 쓰러지고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빠져든 사람들을 이 사랑의 빛으로 인도해 내고 이끌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된 것이다’라고 하지 마라.”
이 말씀을 기억하여 사랑 안에서 살아가며 서로를 세워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나는 때로 혼자 버려져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 때가 있습니다. 왜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하며 깊은 좌절에 빠질 때도 있습니다. 지금도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이 너무도 힘들어서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은 그런 분도 계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그런 나를 여전히 사랑하고 계시고 여전히 내 안에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은 어디 멀리 떠나 계신 분이 아닙니다. 여전히 내 안에 계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은 “주님 정말 주님이 내게는 필요합니다. 주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연약하여 쓰러지고 넘어지는 나를 도와주세요.” 하고 부르기만 하면 이미 내가 너와 함께 하고 있다고 하시면서 나를 위로해 주시고 새 힘이 넘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간구하던 엘리사에게 먹을 것을 준비해 주시면서 먹고 일어나 힘을 내라고 하시던 주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도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십니다.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그 주님의 힘으로 일어서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어떤 말씀을 주시든지 “주님,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라고 대드는 자가 아니라 “아멘, 순종하겠습니다.”하고 따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요, 주님이 깨끗다 하신 나, 주님이 깨끗다 하신 너를 결코 속되다 하지 마시고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 안으시며 주님의 따뜻한 품안에 함께 안길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홍인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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