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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는 기도공동체입니다 (마 26:3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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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기도공동체입니다

믿음 생활하면서 우리가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인가?
바로 기도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의 체험이 있을 때 산신앙을 갖을 수 있습니다.기도의 체험이 있을 때 능력의 신앙을 갖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무리 아는 것이 많아도 기도의 체험이 없으면 신앙의 힘이 없고 능력이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기도없는 신앙 생활,기도없는 봉사생활,기도없는 삶이 실패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어떻게 기도합니까?
우리는 기도를 “방패"로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과거에 아시는 어떤 분은 이럴때 기도합니다. 특별히 금식하고 철야기도할때가 언제인가 하면 자녀가 술을 먹고 사람을 때려서 영창에 갈 지경이 되었을 때입니다. 또 시집간 딸이 서로 부부싸움을 하고 이혼하겠다고 난리칠때입니다. 그래서 그 권사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면 벌써 저는 마음이 심란합니다. “아이구 권사님 집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그래서 물어보면 거의가 그렇습니다. 물론 이런 기도도 의미가 있고 안하는 것보다는 낳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주님이 가르치는 기도는 그런 차원의 기도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기도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사역의 전반부에 제자들에게 기도를 많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기도를 가르치시는데서 그치지 않고 본인이 직접 기도하심으로 기도의 본을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서 40일간 금식기도함으로 고독한 삶이 시작되었습니다.이제 3년간의 사역을 마치는 시간을 앞에두시고 겟세마네동산에서 기도함으로 마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산에 오르기 전 어제 저녁에는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벌였습니다.자신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나누어주시고 자신의 피를 상징하는 포도즙을 나누어주시면서 이미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겟세마네동산에 올라서 최후를 기도하시면서 자신의 사명을 마감하시는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겟세마네기도는 우리에게 기도의 좋은 본을 보여줍니다.
겟세마네기도를 보면 우리 주님은 혼자 기도하시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시고 제자들이 함께 기도하시기를 소원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제자중에 3명의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 기도합니다. 베드로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12명중에서 왜 3명마나 데리고 기도하러 갔을까요? 그래도 12명중에서 주님이 가장 신뢰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도 이 3명은 함께 기도할 것을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미 공생애 사역 중에 우리 주님은 변화산에서 기도할때에도 이 제자들 3명을 데리고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시간도 우리주님이 먼저 소원하시는 것은 바로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교회는 기도공동체입니다. 주님은 두 세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기도하는 그곳에 역사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그 사람을 지금 찾고 계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시간 저와 여러분들이 함께 기도하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시기를 소원하십니다.
과연 우리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함께 기도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사명을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동산에서 최후에 드린 기도의 내용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첫째기도 39절에 나옵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둘째기도 42절에 나옵니다.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
왜 예수님이 기도하십니까? 바로 하나님의 맡기신 뜻과 사명을 순종하기 위해 기도하십니다.“아버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소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가 자신에게 맡기신 사명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기를 소원하고 순종하기를 힘씁니다.
그러나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주님이시기 때문에 마음에 고통에 대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38절에 주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감정대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기도를 통해서 나의 뜻을 버리고 주님의 뜻을 이루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기도합니다.“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먼저 우리가 나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뜻은 세상에서 영광일 수 있지만  주님의 뜻은 고난일 수 있습니다. 나의 뜻대로 영광을 얻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기 이전에 그 고난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뜻은 빵을 구하는 것이지만 주님의 뜻은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의 뜻을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해가 되지 않고 순종하기 힘든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스데반은 주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자의 모범입니다.
스데반은 담대하게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저희가 이 스데반의 말을 듣고 마음이 찔림이 오자 이를 갈고 스데반을 공격하게 됩니다.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성밖으로 내칩니다. 그리고
행7장 59절에 보면 우리와 같은 성정의 스데반의 최후의 모습이 소개됩니다.
돌에 맞아 죽으면서 기도합니다.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기도합니다.그뿐만이 아니라 60절에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여러분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기도할 때 어떻게 죽음을 기도할 수 있습니까? 주여 살려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용서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까? 분노와 원망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자녀들이 기도하는 것은 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성령충만한 스데반을 그냥 죽도록 허용하셨을까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순교를 기점으로 결국 예루살렘교회들이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사마리아와 다른 지방으로 퍼져 나가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복음이 왕성하게 증거되는 기회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스데반이 죽은 것은 헛된 죽음이 아니라 바로 주님의 사명인 복음을 증거하는 선교의 불씨가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님 앞에 먼저 기도해야 할 제목이 무엇입니까? 사명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맡기신 최대의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십자가를 증거하는 사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십자가의 사명을 주셨듯이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세상에 보내실 때 십자가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사명이라면 우리는 그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입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가장 우리에게 원하시는 그 뜻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그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에 우리 주님의 가장 소원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의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복음 이 십자가를 위해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 고난과 순종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날마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서 끝까지 온전히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저희 교회는 이제 11월 한달동안 새벽마다 함께 새벽을 깨우면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를 소원합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할 제목은 바로 이 십자가의 사명을 우리가 순종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를 위해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심으로 죄와 사망과 마귀에서 구원한 그 복음을 필요로 하는 주님의 사람들에게 이제 우리가 증거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뜻 그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서 여러분 함께 기도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한 영혼 한영혼을 위해 먼저 전도하기보다 먼저 힘써야 할 것은 바로 기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전도해야 합니다.

엄호섭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엘림전도편지 선교원 원장입니다. 그분은 주한미대사관 무역관 부관장직을 그만두고 복음의 빚진자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전도편지선교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분은 한 영혼을 위하여 천번의 기도와 백번의 만남을 통해서 주님께서 인도하는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전도 대상자를 위해 천번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당신은 전도 대상자를 위해 백번의 만남을 이루려 힘쓰고 있는가?”
“당신은 전도 대상자를 위해 5년간 전도 편지를 쓸 수 있는가?”
여러분 이런 주님의 일이 인간의 의지로 순종할 수 있습니까?
주님의 일은 결코 사람의 뜻과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습니다. 기도할 때 할 수 있습니다. 기도할 때 순종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면 오직 성령의 힘이 우리를 돕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를 돕습니다. 식어진 우리의 마음의 사명을 다시 깨우고 불붙이면서 기도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 41절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성경은 “시험”이 있을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여기 시험이란 말은 영어로 “템테이션” 즉 유혹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유혹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욕심의 죄성을 갖고 있기에 유혹을 받습니다. 약1:13-14 “ 사람이 시험을 받을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합니다
여기 ‘욕심’은 무엇일까? 바로 옛사람의 본능입니다. 식욕,성욕,명예욕,인정의 욕심등 모두에게는 이 욕구 이 본능이 있습니다.그러므로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구에 이끌려 미혹됨이니’라고가 됩니다. 여기 ‘이끌림’은 낚시,미끼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옛사람 본능의 욕구의 미혹에 빨려들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언제일까요? 바로 우리가 자만할 때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바울은 선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노아가 본능적인 욕구에 넘어졌습니다.
120년 동안이나 배를 지으면서 믿음으로 승리했던 노아입니다. 노아의 믿음으로 인해서 홍수의 심판 속에서도 그 가족 8명이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포도주를 마시면서 하체를 벌거벗은채  모두 드러내는 수치스러운 모습으로 실수하였습니다. 그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홍수심판에서 구원받고 모든 것이 자만할때였습니다. 그가 120년동안 기도할 때 믿음이 있을때에는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홍수가 끝나고 이제 모든 것이 안정이되고 형통하게 되자 노아는 자만에 빠졌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이것은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하여 본능적인 욕구에 따라 결국 간음함으로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 때가 언제입니까? 바로 이스라엘 왕으로서 자만에 빠져 있을때였습니다. 젊은날 다윗은 사울로 인해서 고난받고 어려울때에는 날마다 기도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왕의 자리에서 모든 것이 이제 안정이 되고 형통할 때 그는 기도에 깨어있지 못하였던 것같습니다.

오늘 본문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황은 어떻습니까? 특히 베드로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보다는 섣부른 자만심에 가득차 있었습니다. 이미 마태복음 26장에서  베드로는 주님을 향하여 33절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합니다. 여기 베드로는 ’ 다 주를 버릴찌라도 ‘라고 ”나는 “ 그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자신에 대하여 자만하는 태도입니까? 그때 주님이 자만에 차있는 베드로에게 말씀합니다. “네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예언하셨습니다.

신앙 생활은 자신감으로 하는 것 적극성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신앙생활은 말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말이 앞서고 자신감이 앞서고 적극성이 앞설때 유혹에 빠지시 쉽습니다.왜냐하면 바로 이런 기도없는 적극성과 자심감들은 자신을 하나님에게 두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나의 이름이 드러나고 나의 명성이 높임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런 자만에 빠진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고 이용합니다. 마귀는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이렇게 속삭입니다. “너는 할 수 있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내가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오직 우리는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같이 어런 유혹에 가장 많이 빠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성공 중에 있는 분이거나 성공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교회 속에서 가장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할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목사님들이십니다. 장로님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은 선줄로 생각할 위험이 제일 크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는 것으로 내가 마치 신앙의 대가인것처럼 착가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베드로 사도를 보십시오. “주님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주님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잘 아는 자요 주님을 위해서 많은 일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스스로 자만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좀 더 많이 알고 많이 깨달았습니까? 그것은 주님의 전적인 은혜일뿐입니다.
그리고 누가 교회에서 기도로 가장 깨어 있어야 할 사람입니까?
양육과 훈련을 통해서 많이 아는 자들입니다. 좀 안다는 것으로 내가 나를 지켜갈 수 있다고 자부할 위험이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의 입장도 3년전도 훈련받았고 나름대로 기적과 이사도 많이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주님의 수제자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훈련받을수록 더 큰 위치에 있을수록 유혹도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 유혹이 무엇입니까? 내가 안다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없이도 주님없이도 내가 할 수 있다는 내가 하나님이 되는 것입니다.기도의 댓가를 치르지 않고 나의 힘으로 하려고 합니다. 기도의 댓가를 치르지 않고 상식적인 나의 수준에서 하려고 합니다. 가령 기도없는 베드로의 경우 주님이 다음날 군병들에게 잡히게 되자 자기 방법대로 칼을 앞세워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주님을 위한 충성이요 그것이 주님을 위하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베드로의 실패 바로 베드로의 자만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서 “깨어 기도하라”말씀합니다.
여기 깨어라는 말은 무엇을 깨라는 말입니까?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라고 합니다.다른 성경에서는 ”깨라“는 말을 ”정신을 차리고“라고 합니다. 여러분 누가 기도할 수 있습니까? 정신을 차린 사람만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도하는 사람은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반대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정신을 차리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영혼이 죽어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살아있는 정신이 있는 사람은 그 예민함으로 그 살아있는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날마다 항상 깨어서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 중의 가장 큰 특징이 한가지 있습니다.
쉽게 마음이 요동치지 않고 자기를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마음이 나누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일심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한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마음이 복잡합니다. 마음이 쉽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쉽게 결정이 흔들립니다. 기도하면 한가지에 집중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에 마음이 담대하게 됩니다. 모든 것에 참을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요즘 주변을 보면 너무 사람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자신의 삶도 흔들립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가정도 흔들립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교회생활도 흔들립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직장도 흔들립니다. 왜 그렇습니까? 깨어서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다변화된 삶 속에서 먼저 깨어서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어지는 삶의 모든 기회가 유혹을 넘어서서 승리의 기회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육체를 쳐서 복종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39절 주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셨다“
누가복음22:44절 보십시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히5:7 “그는 육체에 계실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엇느니라”

여기 주님은 기도의 노동을 하셨습니다. 애쓰고 힘쓰며 땀흘리면서 기도 드렸습니다.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셨습니다.간절하게 온 몸을 통해서 기도에 최선을 다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지금 함께 기도하는 제자들은 어떤 모습입니까? 수제자 3명은 지금 잠을 자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반복하여 권면합니다. 38“나와 함께 깨어있으라” 40절 “한시동안도 깨어 잇을 수 없더냐” 주님께서 안따갑게 여기면서 제자들을 깨우시는 것을 봅니다. 제자들은 간절한 기도의 모습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반복하여 깨워도 계속하여 잠에 빠져버렸습니다.
우리는 모두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이 육신은 잠을 자야 하고 먹어야 하고 기본적인 욕구들이 채워져야 합니다.
우리들은 기본적으로  연약한 육신의 지배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가장 기도하기 어려울때가 언제입니까? 육체적으로 피곤할 때입니다.
오늘 본문의 제자들도 피곤하였습니다.
이미 저녁부터 예수님과 같이 식사하고 시간을 보내었고 이미 한밤중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피곤함으로 인한 수면의 본능 앞에 무너졌습니다. 육체적으로 피곤하면 신앙도 활기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약한 육신 때문에 기도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십니다. 그러나 육신이 약할 때 그것으로 기도하지 않는 합리화를 찾아서는 안됩니다.육체의 잠이 오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쳐서 기도하셔야 합니다. 내가 잠자고 싶을때 자고 먹고 싶을때 먹고 쉬고 싶을때 쉬고 놀고 싶을때 놀고 그것은 본능대로 사는 짐승의 삶입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들입니다. 때로 잠자고 싶어고 때로 먹고 싶어도 때로 놀고 싶어도 절제하고 주님아래 복종할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기도의 삶에 최대의 육신의 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게으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영적 생활에서 기도 뿐만 아니라 모든 하나님과의 관계는 성실이 요구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부지런함으로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정도 신앙 생활하면서 우리 속에 자만과 함께 오는 아주 못된 죄성이 바로 게으름입니다.
김남준 목사님의 '게으름‘이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게으름의 발전에 3단계가 있다고 합니다.
게으름의 1단계는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 답은 간단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힘이 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힘들어서 귀찮아서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게으름은 바로 우주와 사고의 중심에 누가 있는가하면 바로 내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절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수 없다고 정의를 내립니다.
게으름의 2단계는 의무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요 자기 사랑은 자기 중심적인 죄성에 근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신자로서 하나님을 향한 기본적인 의무인 예배나 기도하는 것을 소홀히 합니다. 소홀하게 하다가 결국는 그만두는 경우가 있습니다.
게으름의 3단계는 정욕입니다.
게으른 사람은 소극적으로 편안한 삶을 즐기기 원하고 이것이 발전되면 적극적인 목표가 생기는데 바로 쾌락을 즐기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의 속에는 인간적인 윣힌의 욕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게으른 사람은 갈라디아서 5장에 소개되는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런 게으른 사람은 정욕에 사로잡혀서 결국 은혜의 통치아래 살지 못하고 결국 죄의 종이 돼서 마귀의 종이되어서 부끄러운 구원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까지 우리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무엇입니까?

자기의 몸을 쳐서 땀흘리는 영성의 모습이었습니다. 게으름의 욕구를 쳐서 꺽고 최선을 다하며 값진댓가를 지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도 마찬가지엿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영적 선배들이 모습이 그랬습니다.
서울에 가면 세계적으로 새벽기도로 유명한 명성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의 새벽특별기도회시간에는 전체성도의 90%가 참석한다고 합니다. 어린 학생들의 참여율이 80%이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9천명 중에서 80%이상이 개근한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도 11월 특별새벽기도회시간에 어린이주일학교학생들도 참여시키려고 합니다. 왜 서울 어린이들은 하는데 강원도 어린들은 못합니까? 어려서부터 새벽기도를 훈련하면 좋습니다. 이런 새벽기도회가 있으면 교역자와 준비위원은 교회 내에서 집회 기간 중에 기간 합숙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멀리있는 성도들의 경우에는 교회 가까운 곳에 여관을 잡아놓고 새벽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상식 밖의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김삼환 목사님은 신앙을 이렇게 분류합니다. 우선 ‘성막의 뜰신앙’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일 낮 예배만 참석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니까 주일 낮 신앙은 성막 뜰만 발고 돌아가는 신앙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성소신앙이 잇습니다. 이 사람은 주일 낮 과 밤 수요일날 나오는 신앙입니다. 셋째 가장 큰 지성소신앙이 있습니다 . 이 사람은 매일 새벽에 자기의 몸을 쳐서 주님께 기도하면서 헌신하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교회는 매일 새벽에 어린이와 어른 합해서 9천명이 매일 새벽에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깨워지고 함께 깨우고 함께 육체를 쳐서 부지런하여 기도하기를 함께 힘쓰면서 교회의 문화가 된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목사님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직장일이 너무바쁘고 힘이 들어서 새벽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렇게 말하는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는 우리는 새벽기도를 하면 잠을 더 오래자지 못하는데서 오는 육체의 피곤함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는 중요한 한가지 진리가 잇습니다. 주님께 나와서 기도하면 위에서 주님이 주시는 새힘이 있습니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독수리가 날개치며 위로 올라감같은 새힘을 주십니다.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않고 걸어가도 피곤치 않는 새힘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육체를 쳐서 복종하면서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할 것은 이 일을 우리가 혼자 하면 힘들지만 함께 하면 덜 힘들고 즐겁습니다. 축제가 됩니다.

여러분 .교회는 기도공동체입니다.주님도 제자들과 함께 기도하셨습니다. 초대교회도 함께 모여서 기도했습니다.특별히 우리 교회가 더욱 함께 모여 기도하는 기도공동체로 날마다 건강하게 세워져 가시기를 바랍니다. 새벽마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는 무리가 더해지기를 소원합니다. 그래서 모든 미혹을 이기고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주님이 주시는 새힘과 응답을 받아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박춘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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