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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올바른 기도자세 (마 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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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도 축구 국가대표팀 차범근 감독의 공개기도의 신앙 표출에 대해
도올 김용옥 교수가 공개적으로 일간지에 문제제기를 했습니다.
내용은 - 예수님은
“ 너희가 기도할 때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했는데 말끝마다 매 행동마다 주님의 은총을 들먹이는 그대의 행태는
    기독교신앙의 실천이 아니요,
    한국기독교의 병페적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 비난했습니다.
여기에 대해 차범근 감독은
“ 그러잖아도 월드컵 최종예선이 끝나면 한가한 시간에
  한번쯤 나의 신앙문제를 설명해야겠다고 마음먹어 섰는데오늘
김용옥 교수의 글을 읽고 바로 이 글을 쓰게 됐다.” 하면서
국가대표팀 감독- 무조건 잘 싸워서 이기는 게 모든 국민의 바람이다.
그 기대와 희망을 고스란히 해결하고 충족시켜줘야 하는 게 바로 이 자리다.
나는 대범하지도 못하고 보잘 것 없는 인물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경기를 앞두고 숨이 막히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나의 그릇이다.그때마다 나는 엎드려 기도한다.
어린아이가 부모님 손을 잡고 가다가 무섭거나 겁이 나면
  그 손을 더 꼭 쥐는 것처럼
  지금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의 손을 꼭 쥐고 도저히 놓을 수 없는 심정이다.
그래서 나는 늘 기도한다.그러나 경기 전 벤치에 앉아 기도할 때나
    경기가 끝난 후 하나님께 감사할 때나
한 번도 김교수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요란스러운 몸짓을 보이기 위해 그래본 적은 없다.
내가 인터뷰에서 ‘주님께 감사한다.’ 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지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루터의 예화가 기억났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교회 지붕에 마귀 떼들이 기왓장을 날리며 극성 난리를 부립니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 들어가 봤더니
    교인들이 통성으로 기도하며 부르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교회 앞을 지나가다보니
    그 교회 지붕에 마귀 떼들이 모조리 낮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교회 안에 들어가 보았더니                   
    그 교회 교인들 역시 졸고 앉아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성도가 기도하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사람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나팔을 불지 말라`고 명하신  예수님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구제와 마찬가지로 기도도 중요한 경건 행위였습니다.
경건의 외적 표식이 구제라면
            기도는 경건의 내적표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올바른 기도의 가르침에 은혜 받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그럼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1.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참조/마7:7-8절)
기도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라고 합니다.
즉 살아있는 성도의 표징입니다.
먼저 호흡이 있어야 단전호흡이니 복식호흡이 필요하지
            죽은 사람 붙들고 무슨 호흡방식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 믿고 나면 제일먼저 필수적인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입니다. 하나님과 영적대화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기도를 통해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면,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기를 원하시며,
      기도를 통해 우리에게 더 풍성한 은혜를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나는 죽지 않으려고 숨을 쉰다.
          기도도 마찬가지이다`고 말했습니다.
          영적으로 죽지 않으려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살전5:17절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골4:2절에
[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 고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할 것을 강조합니다. 마7:7절에
[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
일단 구해야 주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약4:2절에  [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더라도 믿음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마21:22절 [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

하버드 의과대학의 소아정신과 교수였던 `로버트 콜리스` 박사는
사회적으로 불리한 조건과 열악한 환경 속에 태어나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생활상을 조사했습니다.
피부색깔, 경제적 능력, 교육수준, 문화적 소외, 결손 가정 등,
좋지 않은 환경적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조사했는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비 지향적(非指向的)인 사람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소원이 없고 목표가 없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회적으로 도태되고 소외되면서
    자신의 환경만 탓하더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그러한 불우한 환경 속에서도 훌륭한 인물이 나오는데
그들의 특징은 불우한 환경이기 때문에
    벗어나기 위하여 남다른 소원과 목표지향적인 삶을 살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환경과 여건이 불리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목표지향적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 사람 - 반드시 성공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교회,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기도가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기도를 하긴 하는데 기도의 자세가 바르지 못하면
    그 기도는 도리어 신앙의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특히 오늘 본문말씀에서 예수님은
      외식하는 기도에 대해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2. 외식하는 자의 기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5절)
5절 [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 하느니라 ] 
‘또’ 하는 말은 앞에 구제할 때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거리에서 나팔 부는 것과 같이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지 말라고 합니다.

주님은 기도에 대해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하십니다.
즉 잘못된 기도와 올바른 기도입니다.
잘못된 기도란?
기도를 받으실 하나님보다 기도하는 자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주님은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외식하는 자들이란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즉 종교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마음을 쏟아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높이고 들어내려고 회당에서도 가장 눈에 뜨이는 곳에서 기도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회당에서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왜 큰 거리 어귀에서 기도하였는가? 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매일 세 번, 아침 9시(제3시), 12시(제6시), 오후 3시(제9시)에         
의무적으로 기도하였으며,
        기도할 때에 성전의 지성소를 바라보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정해진 시간에 기도하려면,
    어쩔 수 없이 바깥에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밖에서 선 채로 기도드리는 것은 그 당시 널리 퍼진 관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거리에서 기도하는 행위 자체를 비판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비판하는 것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즉 사람의 칭찬을 들으려고 기도하는 행위입니다.
집안에서, 골방에서 은밀히 기도할 수 있는데도,
      당시 굳이 바깥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더욱이 큰거리 어귀에서 남보란 듯이,
    손을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기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공개적으로 과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 사람들의 칭찬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합니다.
이처럼 그들의 경건 행위에는 교만이 숨어 있습니다.

외식하는 기도에 대해 구약에 좋은 예표적 일이 있습니다.
출30장을 보면
하나님의 제단에 사용될 거룩한 관유를 만드는 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관유는 향유라고도 하는 거룩한 기름으로
    하나님이 계시는 회막과 언약궤,
    그리고 번제단과 제사에 쓰이는 기구에 바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32절을 보면 `사람의 몸에 붓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하나님의 성막과 제단에 바를 기름을 
    자기 몸에 바르려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출 30:37-38절을 보면 향 만드는 법을 설명하고 있는 데,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 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고 경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당시에도 하나님께 드릴 향을 만들며
        자기가 맡으려고 만드는 사람이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이 향은 성경적으로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계 5:8절에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합니다.
즉 하나님께 드릴 향을 자기가 맡으려고 만드는 사람은 기도를 드리되
  `자기를 위하여, 자기가 맡으려고` 기도하는 사람을 지칭함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는 유한한 인간이
    거룩하시고 무전능하신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면서까지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는
    교만한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인 데,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 바리새인들은 기도를 하지 않았거나
  경건한 종교 생활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기도하고
    신앙생활의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를 하면서까지
자기를 높이고 자기를 의롭게 보이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주님이 그들을 책망하신 것입니다.
기도를 하되 잘못된 기도 길에 들어서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 올바른 기도란 어떤 기도일까요?
3.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올바른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6절)
먼저 주님은 기도할 때의 자세, 접근방법을 말씀하십니다.
6절에 [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
이렇게 주님은 두 가지 형태의 기도로
    두 가지 부류의 기도하는 사람 을 구분하고 계신다.그 하나는,
기도는 하나님에게 드리지만
      그 행태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려는
      외식하는 자 입니다.다른 하나는 네 골방에 들어가 사람들로 부터 철저히 차단된 상태에서
[은밀한-krupto- 중에 계시는] 즉, 보이지 않게, 감추어져 계시는,
          비밀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완전히 일대일의 관계, 그 어떤 것도 중간에 개입할 수 없는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만들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는 [사람들] 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에게만] 보이려고 하는 참 신앙입니다.
보통사람이 사람들의 평가를 거부하기는 아주 어렵습니다.
그것은 이 땅위에서의 명예이기 때문입니다.
속여서 라도 얻기를 원할 만큼 매력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보통사람이 사람들의 평가를 외면하고 골방에 들어가
        하나님만을 향하기도 어렵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보이지 않게 계시는 분에게 기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 두 가지 행태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그
래서 주께서는 [진실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에게 기도하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본 사람만이 아는 비밀이 그 안에 있습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한다 해서 
이 말을 사람이 많은 곳에서 기도하면 안 되거나,
      기도 모임에 가서도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나 기도해야 하고, 또한 모일 때마다 기도해야 합니다.
특히 교회의 기도모임은 교회의 생명이요 본질입니다.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는 모여서 기도함으로 존재하고 성장해 왔습니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기도는 혼자서 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방해가 되는 것을 배제하라는 의미입니다.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말은
나와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는 것을 방해할
    외부적인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골방기도입니다.

왜? 이렇게 골방 기도를 하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미국을 방문 중이던 한 목사님이 전화를 걸 일이 생겼습니다.
공중전화 박스로 들어간 목사님은                     
그 전화박스가 우리나라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날이 어두워지던 때라 전화번호부에서 번호를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천장에 전등이 있었지만 어떻게 불을 켜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전화번호를 찾으려고 계속 애를 쓰고 있는데
지나가던 한 사람이 그 상황을 보고는
`불을 켜시려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사람이 문을 닫자 놀랍게도 공중전화 박스 안이 불빛으로 환해졌습니다.
그는 곧 전화번호를 찾아 통화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깨닫게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려면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
      그래야만이 성령의 조명이 비춰와 밝히 알 수 잇다는 것.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기도를 하기 위해
          바쁜 세상을 차단하기 위해 `문을 닫아야만` 합니다.
우리가 아버지께로 향하여 마음을 열 때에 그분의 지혜의 빛을 받게 됩니다.
우리 주님도 종종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하나님 아버지와 단둘이 지내시며 힘을 얻고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요1서5:14절에
[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 하신 말씀을 믿습니다.
그러나 `불을 켜기 위해서는`
    먼저 `문을 닫아야` 한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기도의 잘못된 자세는 무엇입니까?
4. 기도하는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기도의 잘못된 자세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7절)
잘못된 기도의 두 번째 모양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것`입니다.
7절 [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아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
중언부언이란 말은
        원어로 <밭타로 게세테>로 주문식 기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안 믿는 이방인들의 기도가 다 그런 기도입니다.
탑을 빙글 빙글 돌면서 뜻을 생각지도 않고 주문만 외웁니다.불교의 염불은 곡조를 달아 외우고 있습니다.
그래서 염불하고 있네 하면 뜻은
    생각지도 않고 소리만 읊조리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이 실리지 않고 소리만 내는 말이 중언부언입니다.
마하반야 바라밀다 심경 - 관자제보살 행심반야 바라밀다시
남묘호렌게쿄 - 창가학회
훔치훔치 태을천 상원군 훔리치야도래 훔리함리사파하,  - 증산도
글세요, 이런 주문이 정신 집중은 될는지 모르지만 진정한 기도는 아니지요.
우리 교회 안에도 이런 중언부언식 기도, 찬송을 많이 합니다.     
예배 중에 사도 신경 또는 주기도문을 고백하는데
  사실은 완전 주문식으로 후딱 해 치웁니다. 
기도문을 소리 내어도 내용은 생각도 않고 암기만 할뿐입니다.
입술 언어가 아닌 마음의 언어가 되려면
    그 고백 내용을 생각하면서 해야 됩니다.
주님은 이런 중언부언 식 입술 기도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언부언이란 ?
    아무 기대 없이 특히 목적도 없이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삼각산 기도원에서 열심히 기도 하다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믿음이 얼마나 충만한지 시험하고 싶어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극히 적은 믿음이 있다면
        이산을 명하여 바다에 빠지라고 하면
        그대로 될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밖으로 나와서 삼각산을 향하여
`삼각산아,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서해 바다에 빠져라.`
그런데 아무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기도원에 들어가서 주님께 기도 하면서 여쭈어 봤습니다.
`어찌하여 말씀대로 안 이루어집니까?`
이에 주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삼각산을 서해 바다에 빠쳐서 뭐하려고?`
이렇게 믿습니다~! 라고 하지만
    뭘 믿는지 모르면서 믿습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
    바로 중언부언 기도입니다.

그럼 은밀한 중에 계신 우리 아버지
즉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5.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8절)
우리가 기도하면서 알아야 할 일은
    우리의 기도가 우리의 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란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구하는 바를 알려 드리기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8절에 [ 그러므로 저희를 본 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미 알고 계시는 것을
    무엇 때문에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이스라엘에 <나르 엘 무가타>라는 강이 있는데,             
다볼 산에서 발원하여 갈멜산의 북쪽 에스드렐론 평원을 거쳐
  지중해로 37km정도 흘러들어가는 강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학살의 강’이란 뜻입니다.
‘나르 엘 무가타’라는 강은 바로 ‘기손강’입니다.
이 기손강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갈멜산의 승리 이후에 엘리야는
      ‘여호와가 참 하나님임’을 백성들에게 증명하였고
      모든 백성이 엘리야 앞에 무릎 꿇고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는 신앙고백을 들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일어난 놀라운 이적으로 말미암아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악이 그들에게서 제거되었고.
    이제 하나님이 외적으로 축복하실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일로 그들이 개혁되었음을 은혜로이 인정하시고서
          그들에 대한 채찍을 거두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일의 순서이다.
    무서운 불 뒤에는 반가운 비가 내립니다.
    그런데 비가 내린다는 약속을 받았지만 비는 내리지 않았습니다.
하나의 과정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것도 주겠고 저것도 풀어주겠으며,
      이런 복 저런 복을 다 주마”하고 약속하신 후에
약속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얻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하며, 그것도 열정적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겔36:36절에[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 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지키시고 비를 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엘리야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또한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엘리야의 기도를 보면서 기도 응답의 놀라운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것을 예정하셨다면
그와 동시에 우리의 구하는 기도도
    그 예정하신 하나님의 뜻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엡3:20절에
[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 ]
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마음으로 구하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1849년 미국 동부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쏟아져 나온 그 해를   
    ‘황금의 해’라고 부릅니다.
어떤 청년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캘리포니아의 금광을 사서
  열심히 채굴했지만 금이 나오질 않자 금광을 팔았습니다.
그런데 새로 인수한 사람이 1m쯤 파고들어 가자 노다지가 터져 나왔습니다.
금광을 판 청년은 여기서 황금보다 귀한 교훈을 얻었습니다.
최후의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1m 철학’으로 모든 일에 임했습니다.
그는 보험회사 영업사원으로 들어가 1m 철학을 실천했습니다.
고객을 대할 때마다 내가 여기서 포기하면
    이때까지 기울인 모든 수고가 헛되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최선을 다해 보험 가입을 성사시켰습니다.
1m 철학이 결국 그를 거부로 만들었습니다.
기도에도 1m 철학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사람들은 1m를 남겨놓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끝까지 믿고 기다리는 사람은 응답을 받습니다.
올바른 기도로 기도의 응답받는 교우들 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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