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종교개혁]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 (고전 16:15-16)

  • 잡초 잡초
  • 1230
  • 0

첨부 1


에르마 봄벡이라는 칼럼니스트가 어느 날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다가 한 어린아이가 온 교회당을 웃으면서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전혀 소리를 지르거나 뛰어다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웃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아이의 어머니가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쉿! 웃지 말라니깐!"하며 주위 사람에게 드릴 정도로 큰 소리로 야단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녀석아! 여기는 예수님이 계시는 교회란 말야. 그렇게 크게 웃으면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아!"라며 엄마는 아이를 붙잡아 옆에 앉게 했습니다. 그러자 아이의 눈물이 그 상기된 볼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엄마가 울고 있는 아이를 보고 "그게 더 낫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던지 그 아이의 엄마는 다시 찬송을 웃으면서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장례식에 다녀온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지어야만 신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르마는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감정인 웃음을 잃어버리고 경시하기까지 하는 오늘날 현대교회의 아픈 모습을 보고 가슴 아파하며 이 글을 쓴 것 같습니다.

  분위기는 모든 것을 좌우합니다. 환경이나 조경이나 인테리어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분위기는 어떠하십니까? 어떤 색깔입니까? 우리 교회와 예배 분위기는 장례식장? 아니면 잔칫집과 같습니까? 분위기에 따라서 편안할 수도,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다시는 오고 싶지 않을 수도, 꼭 오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함께 오고 싶고, 예배드리고 싶고, 섬기고 싶고, 평생을 같이 하고 싶은 교회로 만들어 봅시다. 그래서 하나님과 모든 교인들이 행복해하는 하나님의 집이 되도록 협력합시다. 사람들과는 관계없는 하나님만의 집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특정한 누구누구의 교회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모범적인 스데바나의 집안 사람들처럼 함께 하나님을 더욱 잘 섬김으로 사람을 살리고 구원하는 우리 교회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1. 믿음의 집

  본문 15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스데바나의 회심은 바울이 아덴에 복음을 전했을 때 이루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스데바나 혼자만 믿음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전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은혜와 축복입니다. 스데바나의 신앙과 인격과 지도력이 돋보이는 장면입니다. 본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가족들에게 영향력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집'에 해당되는 헬라어 '오이키안'은 '가족들' 뿐만 아니라 '노예들'까지도 포함됩니다. 따라서 스데바나가 아덴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에 아가야로 돌아와 그의 가족들과 노예들에게 복음을 증거하여 모두를 믿음의 사람과 가정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스데바나는 요란하거나 거창하지는 않지만 조용하면서도 알차고 착실하게 빛과 소금의 사명을 잘 감당하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복음의 향기와 열매가 가득한 사람입니다. 어디서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믿음의 멘토와 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무신론자가 입에 거품을 문 채 기독교를 공격하며 반박하는 연설을 하고 있었습니다. 연설이 끝난 후 한 기독교인이 반쯤 먹다만 오렌지를 들고 단상으로 올라가서 그 연설자에게 "이 오렌지가 단 오렌지입니까? 신 오렌지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여보시오. 맛도 보지 않고 어떻게 그걸 압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기독교인은 "여보시오. 당신은 기독교를 맛도 보지 않고 어떻게 틀렸다느니 나쁘다느니 말할 수가 있단 말이요?"라고 물었더니 대답을 못하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남이 모르는 기쁨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함이 전혀 없는 왕의 신분이라 할지라도, 출세하여 거액의 연봉을 손에 쥐었다 할지라도,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어 인기를 얻었다 할지라도, 오늘 매력적인 이성으로부터 황홀한 사랑의 프로포즈를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인생이라면 결코 그 행복감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이 아니라면 그 기쁨의 수명은 매우 짧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환자가 병원 침대에 누워 겨우 산소 마스크로 생명을 연명하듯 생명의 능력을 상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은혜의 힘을 공급받지 않고 사명의 멍에를 몸으로 때우며 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인데 소위 '영적 노가다 신자'들입니다. 기쁨이 없이 짐을 지게 하는 것은 '노가다 신자'를 양산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영적 노가다 신자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피곤한 짐을 지는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기쁨으로 희생하기보다는 희생당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희생과 수고를 알아주는 이가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며 기쁨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여 풍성한 생명의 능력을 힘입고, 기쁨으로 짐을 지고 충성하며 마귀를 압박해 갈 때 마귀는 기가 죽어 항복하고 떠나는 것입니다. 생명이 가득할 때 믿음의 기적은 가능하게 됩니다. 숯덩이에게는 불덩이가 될 소망이 있고 흙덩이에게는 돌덩이가 될 소망이 있는 것처럼, 성령 안에서 소망을 품을 때 인생역전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스데바나처럼 삶 속에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여 가족과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하고 예수 믿고 싶어하도록 뜨거운 감동을 주는 삶을 삽시다. 스데바나 집안 사람들은 믿음이 충만한 집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집이 스데바나의 집처럼 믿음이 충만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2. 섬김의 집

  본문 15절 "형제들아 스데바나의 집은 곧 아가야의 첫 열매요 또 성도 섬기기로 작정한 줄을 너희가 아는지라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스데바나의 집은 성도를 섬기는 집입니다. 바울이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스데바나의 가족들이 어떤 종류의 봉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학자들이 견해에 따르면 병든 자나 가난한 자를 도왔고 자기 집을 예배 장소로 내어놓았다고 합니다. 또한 스데바나가 예루살렘 성도들을 돕는 일에 많은 헌금으로 섬겼다고 합니다. '성도 섬기기로 작정'하였다고 하였는데 헬라어 '에탘산 헤아우투스'는 '스스로를 준비시켰다'라는 의미로 스데바나의 가정이 자발적이고도 헌신적으로 섬겼음을 보여줍니다. 의무나 직분에 의한 섬김이 아닌 섬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쁨의 섬김이었습니다. 자발적인 섬김은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와 자신의 기쁨이 됩니다. 섬기는 가정을 하나님이 축복하십니다. 섬기는 사람과 후손들을 하나님이 책임지시고 창대케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잘 섬겼을 때 영육간에 거부가 되어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고 최고의 선물 이삭을 허락하셨습니다. 섬김은 하늘 나라의 면류관이고 나와 후손의 축복의 도구이며 수지 맞은 투자인 것입니다.

  사람의 속을 뚫어 보는 불가사의한 눈은 예수님께 못 말리는 낙관론을 불어넣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죄가 전혀 없는 예수님이 어찌 부랑자, 거짓말쟁이, 겁쟁이, 사기꾼과 어울리실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세상에 미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낡은 것이 새 것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타락한 자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겸손해질 수 있습니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약한 자는 강해질 수 있습니다. 버림받은 자는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처럼 우리도 영적 변화를 목표로 불신자들과 친분을 쌓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진심으로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인해, 영적 수준을 따지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어리석은 말과 부적절한 행동 너머를 보셨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람들의 삶 속에 일어날 변화를 꿈꾸셨습니다. 그분은 두려움과 죄의 벽을 뚫고 들어가 사람을 포용하고 사랑하셨으며 그들을 잠재력의 극한까지 끌어올리셨습니다.

  하나님은 믿고 그분께 맡기기만 하면 우리가 받은 모든 불공평한 일을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업상 거래에서 상대에게 속아 많은 돈을 날렸습니까? 누군가 헛소문을 퍼뜨리는 바람에 직장에서 승진의 기회를 잃었습니까? 정말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습니까? 이런 경험들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깁니다. 매우 슬프고 힘들 것입니다. 복수할 방법을 찾는 것이 너무도 당연합니다. 주위에서 그렇게 하라고 부추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은 전혀 다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히10:30). 우리가 일일이 모든 사람을 찾아다니며 원수를 갚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변호사가 되시니 우리가 나설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 맡기면 그분이 우리 대신 싸워 주십니다. 우리가 문제를 맡기면 하나님은 그분의 방식으로 해결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다. 우리는 다만 사랑하고 섬기면 됩니다.

  '있을 때 잘해'라는 노래는 모두를 불행하게 합니다. '있을 때 잘하겠습니다'라고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교회, 가족, 이웃, 모든 사람들에게 잘해야 합니다. 내가 잘 하면 모두가 잘 하고 행복해 집니다. 문제는 남이 아닌 나입니다. '잘 해'가 아닌 '잘 하겠습니다'로 변해야 합니다. 스데바나 가정이 섬기는 집이 되었을 때 더 복을 받았습니다. 싸움이 가득한 섬김이 없는 세상이지만 우리 모두 스데바나의 가정처럼 섬김으로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3. 복종의 집

  본문 16절 "이같은 자들과 또 함께 일하며 수고하는 모든 자에게 복종하라"

  스데바나의 가족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순종을 본받아 자신들을 낮춰 교회와 성도를 섬기기에 힘쓰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서신의 끝 부분에서 복종하라고 권면하는 것은 고린도 교인들이 나이나 경험이 비슷한 사람들을 존경하는 일을 천성적으로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복종하는 것도 기도하고 배워야 합니다. 눈물과 땀을 흘리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복종은 고귀한 은혜와 축복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의 복종치 못하는 결점은 바울 서신보다 약 35년 늦게 보내어진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 서신에도 나타납니다. 반항하는 사람과 가정은 반드시 불행해 집니다. 고라와 그의 후손과 추종자들이 저주를 받아 땅속에 묻혀 버렸습니다. 땅이 그들을 삼켜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순종하고 복종하는 성도와 후손들은 하나님이 풍성케 하시고 높여 주십니다. 스스로를 낮추면 하나님이 높여 주시지만 스스로를 높이면 하나님이 낮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고 은혜를 받으면 복종하는 집이 됩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크고 다양한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연기자가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실수 때문에 다시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감독은 'NG' 사인을 줍니다. 'NG'는 'No Good'의 약칭입니다. 우리는 연기자의 적나라한 실수를 실제 방송보다 더 실감나게 보면서 폭소를 터트리며 즐거워합니다. 왜 시청자들은 'NG'에 이렇게 열광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실수가 없는 완벽한 연기자보다는 때로는 실수도 하는 연기자가 훨씬 인간적으로 보여지고 친근감을 느끼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연기자가 자주 'NG'를 낸다면 감독 입장에서는 짜증나는 일이겠지만, 'NG' 때문에 긴장 속에서 연기하던 연기자나 스텝들이나 감독까지도 웃으면서 촬영장의 피로를 풀고, 쉬는 시간을 갖게 돼서 더 좋은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자기 고향을 떠날 때부터 사라가 아이를 낳을 가능성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자기 조카를 양자로 삼을 생각으로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에 롯과 갈라서게 되자 아브라함은 자기 하인들 가운데서 가장 신실한 사람인 '엘리에셀'이라는 종을 자기 후계자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사라가 자기 몸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어서 아브라함과 동침하게 합니다. 사라의 몸종이었던 하갈이 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 불렀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사라를 통해서 아이를 낳는다는 생각은 포기했었기에 몸종에게서 난 아들인 이스마엘이라도 후계자로 삼을 생각을 했음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자기에게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면 아브라함처럼 하갈을 통해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나 하갈에게서 낳은 아들은 약속의 아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백세 때, 즉 자기에게 아무 능력이 없다고 할 때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내게 아무 것도 없다고 고백할 때 하나님의 은총의 전용차선 곧 시온의 대로를 지나갈 수 있습니다. 기다림에 지쳐 자기 능력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로 인해서 지금도 지구촌에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주신 아들 이삭으로 인하여 평강의 왕이신 예수가 오셨습니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인내하고 복종하면 반드시 최상의 축복을 주십니다. 스데바나의 집처럼 복종하여 칭찬과 면류관을 받으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사랑하는 번동가족 여러분!
  오늘은 종교개혁주일입니다. 여러분의 집은 믿음과 섬김과 복종 가운데 무엇이 부족합니까? 기도하고 노력해서 이 시대에 스데바나의 집처럼 존귀한 성도와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정호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