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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교개혁] 숭고한 신앙의 발자취 (골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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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
          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
          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
          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오늘은 489주년을 맞는 종교개혁 주일입니다. 종교개혁은 1517년 당시 중세 기독교가 너무 제도화, 형식화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신앙개혁운동입니다. 종교의 힘은 영성에서, 순수성에서, 오직 믿음에서 나옵니다. 그런데 종교가 세속화되어 힘을 잃게 되면 그 종교는 무의미해져서 세상을 구원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 종교는 그 사회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신앙이 세속화 되는 이유가 오늘 읽은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신앙은 위의 것을 추구하고 생각하고 뜻을 구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편안해지고 넉넉해지면 땅의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이 세속화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당시 수도사였던 마틴 루터가 세속화되어 가는 종교의 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안타까워하시는 부분이 숭고해야 할 믿음이 이렇게 무력화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 여러 곳에서 경고하셨습니다. “네 믿음이 뜨겁든지 차든지 하라, 도끼가 나무 뿌리위에 놓였으니 회개하라, 네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오늘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신앙모습을 한번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국내에·있는·순교지를 순례하였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에도 이런 훌륭한 순교성지가 있는 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이제는 해외로만 가지 말고 국내의 순교성지를 순례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전남 신안군 증동리 교회

전남 신안군 증도에 있는 증동리교회는 1935년에 문준경 여전도사님이 개척을 하였습니다. 그 여전도사님은 처녀 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딴 여자와 살림을 차리고 나가는 바람에 혼자서 시부모를 공양하였습니다. 그 후 시부모가 사망하자 친정집으로 가던 중 이성봉 목사님의 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회심하고 소명을 받고 신학교에 입학하게 됩니다. 졸업 후에 먼저 증도에 있는 남편이 살고 있는 동네에 첫 개척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그리고 14개 읍면에 10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게 됩니다. 그렇게 신안 앞 바다를 왕래하느라 1년에 고무신 9켤레씩을 사서 신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6,25가 터지고 공산군이 목포를 거쳐 신안 앞 바다 증동리까지 들어 왔습니다. 그때 이 전도사님이 공산 프락치들에게 붙잡혀 신자들 15명과 함께 백사장으로 포승줄로 묶인 채 끌려가 곤봉과 죽창과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고 합니다. 그때 문준경 전도사는 "나는 죽어도 좋으니 저 성도들은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너는 반동의 새끼를 많이 낳는 씨암탉”이라면서 총구를 입에 넣고 쏴서 죽여 증동리 백사장에 버렸는데 1주일동안 방치해 놓았습니다. 그 후 누군가가 임시로 모래 속에 묻어두었다가 1년 후 1951. 2. 2날 장례식을 치르는데 김구 이래로 최대의 장례행렬이 끊어지지 않고 따랐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는 “참 위대하다”는 생각입니다. 한 여인의 믿음이 그렇게 견고해서 지금 신안 앞 바다 섬에 교회가 100여개가 세워져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믿음의 씨앗입니까. 또 하나는 “그때 남편이 바람을 잘 피웠다”하는 생각도 듭니다. 역시 하나님은 과연 합동해서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때 그 남편이 바람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살았으면 가정살림 하느라고 그런 신앙의 역사를 일으켰겠습니까. 때로 사탄도 하나님의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안군 임자도의 진리교회

진리교회도·1930년 3월에·문준경 전도사께서 개척한·교회입니다. 그·교회는 모두·48명이 순교한 교회입니다. 그·순교한·신자들은·모두·문전도사에게 신앙을 배운 신자들입니다. 그중·이판일 장로라는·분은 동생, 형제, 자식 등 모두·14명이 한날·한시에 순교를 하였고 교회 신자를·포함해서 그날·모두 48명이 순교를`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을 죽인 곳은 동네에서 2Km 떨어진 외딴 곳이었는데 모두 그곳으로 끌고 가 본인들에게 자기가 묻힐 구덩이를 파게 한 후 대창으로 찔러 한구덩이에 30명씩 묻었다고·합니다. 그때·이판일이라는 장로는 죽기 전에·마지막으로 기도하고 죽겠다고·하고 “이 악한 사람들을 예수의 피로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니까 곤봉으로 머리를 쳐서 죽였다고·합니다. 그 사람들이·누군가·하면 모두 공산군이 완장을 채워준 동네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사람들이 얼마나·악랄한지·그·일대에서·3천여 명이나·죽였다고·합니다. 사람들을·바다로 데려가 목에 돌을·달아 바다에 버렸는데·바다에서 악취가 진동했다고 했다고·합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악랄합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신앙의 힘이 이렇게 위대합니다. 그때 한 가족 14명이 순교한 이판일 장로의 아들이 후에 커서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6,25가 끝난 후 그 아들이 나서서 자기 아버지와 가족들을 무참하게 죽인 공산군에게 이용당한 난동자들을 용서하자고 설득해서 용서합니다. 그리고 지금은 한 교회에서 가해자와 피해자 가족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판일 장로의 후손 중에 4명의 목사가 탄생하고 두 명의 선교사가 탄생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힘입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것 같은데 신앙 안에서는 가능합니다.

정읍의 두암교회

정읍에 있는 두암교회는 6,25때 23명이 공산군에게 순교당한 교회입니다. 새벽 3시에 공산군이 동네에 처 들어와 칼과 대창과 몽둥이로 사람들을 죽였다고 합니다. 그 살인자들도 인민군에게 이용당한 같은 동네사람들이었는데 집에 불을 질러 태워 죽이고 새벽기도 하던 중 뒤에서 칼로 찔러 학살당한 사람도 있는데 그 이유가 그 교회에 미국의 선교사가 다녀가는 것을 보고 예수 믿었다고 죽였다고 합니다.

그 순교자 중에는 윤임례 집사가 있었는데 이 분은 군산 중동교회에서 목회하시던 김용은 목사님 모친입니다. 이 분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칼로 찌르고 찢고 목을 쳐서 죽였다고 합니다. 잔인하기로는 일제보다 공산군이 훨씬 더 잔인합니다. 그때 4살 먹은 어린 아들 김성곤은 칼과 몽둥이로 죽였고 김정두 집사의 가족 12명중 1살짜리 아이까지 죽였습니다. 임화두 집사의 가족은 5명이 순교했고 김용술이라는 학생회장은 항문에 말뚝을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그때 순교한 23명의 나이는 1살, 3살, 4살, 5살, 8살, 10살, 12살, 14살, 16살, 19살, 32살, 38살 등이었는데 모두 죽창과 총과 칼과 돌과 몽둥이로 죽였다고 합니다. 오늘 데모할 때 죽창을 들고 나오는 것을 보면 그래서 섬뜩한 것입니다. 오늘도 죽창을 들고 나오는 데모대들은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알리고 보여주려고 일부러 죽창을 만들어 들고 나올 것입니다.

그때 윤임례 집사 가족은 한 가족 6명과 친척 16명 등 23명이 그날 한꺼번에 순교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들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현재 23명이 목회자가 탄생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가해자들 후손들은 복을 받았겠습니까. 그래서 거의 병사했고 정신지체자가 되고 이혼자로 40이 넘었는데도 결혼 못한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다행히도 그때 피해를 당한 순교자 가족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났고 그때 가해자들 가족들은 아직도 고향에 남아서 신앙생활하고 있는데 오늘은 가해자들을 다 용서해서 가해자들 후손들이 추모식 예배 때는 모두 참석하고 있다고 합니다.

삼례 하리교회

삼례에 있는 하리교회는 1950년 4월 16일에 개척되어서 56주년이 된 교회입니다. 6,25가 일어나기 두 달 전에 임광호라는 전도사가 그 교회에 부임을 합니다. 부임 후 지역의 청년들을 모아 가르치고 훈련했는데 그것이 6,25전에 일찍 자리 잡은 좌익세력의 눈 밖에 나게 됩니다. 그리고 6,25후에는 교회건축을 위해서 일하던 임전도사를 경찰서로 끌고 가 온갖 말로 회유할 때 마다 “당신도 예수 믿으라, 그래야 구원받는다”고 전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동네 사람들과 임전도사를 와리독산으로 끌고 가 죽이는데 “이놈은 총알도 아까우니 몽둥이와 곡괭이로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돌과 곡괭이로 때려 죽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해 7월 20일 홀로된 사모가 혼자 교회를 지키면서 유복자였던 아이를 낳습니다. 그 아이가 지금 커서 성남에 있는 은행동교회에서 목회하는데 임창희 목사라는 분입니다.

그 후 교회가 표류하다가 12년 후에 문형은 집사라는 분이 전도사님이 유고상태라 혼자 교회건축을 하다가 건축비가 모자라자 예수병원을 찾아가“눈을 빼서 팔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그 제안을 당시 한국에 와 있던 마두원이라는 미국선교사가 ”교회 건축비가 부족해서 내 눈을 빼서라도 헌금하고 싶다“는 말을 듣고 미국 각지에 소개하여 헌금을 받아 교회를 짓게 되었는데 그 교회가 삼례에 있는 하리교회입니다. 그때 순교한 임전도사님의 아들이 지금 목회자이고 눈을 빼서라도 헌금하고 싶다고 말했던 문형은 집사의 아들 문 사무엘도 오늘 목사가 되어 전주에서 목회하고 있습니다. 참 감동적입니다. 

강경교회

강경교회는 1918년에 개척된 교회입니다. 1919년에 영국의 토마스 선교사가 그곳에 성결교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와 교회를 방문하였습니다. 그때 일본인들이 찾아와 그 선교사를 구타합니다. 그 사건이 마침내 영국과 일본의 외교전으로 비화되었는데 결국 영국이 이김으로 일본으로부터 배상금을 받아 그 돈으로 지은 교회가 오늘의 강경교회입니다. 1924년 10월 11일은 일제 강점기 때 “신사 참배의 날”로 지정된 날이었습니다. 그때 그 강경교회에 다니던 강경초등학교 교사인 김복희 교사가 (옛날 중앙초교) 초등학생들 57명을 데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교회 창립 6년 만에 뜻밖의 강력한 신앙저항운동이 시골교회에서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앙저항운동이 일어나게 된 데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부여 규암지역에 1916년에 개척된 대선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에 파송되어 목회하던 백신영 여전도사가 당시 항일운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1919년에 만세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D day까지 정했습니다. 그런데 식육점에서 일하는 사람의 밀고로 탄로되어 백전도사는 개성으로 피신하였고 그곳에서 또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결사대장으로 활동하다고 또 발각되어 대구형무소로 끌려가 복역을 합니다. 그리고 출소한 후에 강경교회로 부임해서 어린이 전도에 중점을 두고 부흥시키던 중 그 밑에서 신앙훈련을 받던 김복희라는 교사가 1924년 10월 11일 날 신사참배의 날에 아이들 52명을 데리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신앙저항운동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그 사건이 한국 최초의 신사참배 거부운동이었습니다. 그 사건으로 김복희 교사는 면직되었고 어린 초등생들은 퇴학 처분을 받습니다. 이 일로 일제의 신사참배 운동은 10년간 후퇴하게 되었다고 1925년 3월 18일~19일자 동아일보 사설에서 밝혔습니다.

그리고 해방 후 동네사람들은 식육점에서 일하던 사람이 밀고 했다는 것을 알고 “세상에 이런 나쁜 놈이 있느냐“ 면서 모두 일어나 죽이려고 했을 때 일본인들이 그를 일본으로 피신시켰는데 그 사람이 일본에 가서 와세다 대학을 졸업합니다. 해방 후 한국에서는 인재 한사람이 귀할 때인지라 이승만대통령이 그의 전력을 알았지만 그를 발탁해서 서울세관장에 임명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출세는 했지만 평생을 괴로워하면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죽기 전에 당시 밀고했던 대선교회로 가서 김기웅 목사를 찾아가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때 그 원로목사님은 그에게 안수해 주고 용서하고 후에 그가 죽었을 때 장례식까지 치러주었다고 합니다.

충남 병촌교회

병촌교회는 1935년에 개척된 교회입니다. 그 동네에도 공산군들이 들어와 예수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을 새끼로 엮어 끌고 가서 자기 구덩이를 파게하고 그 구덩이에 집어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힘없는 노인들은 그냥 구덩이에 던져 죽이고 젊은이들은 몸에 상처를 내고 눈을 빼고 뼈를 부러트려 구덩이에 넣어 죽였다고 합니다. 그때 한 교회 한동네에 살던 66명이 한꺼번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때 죽은 사람들 나이는 1살, 2살, 5살, 7살, 8살, 11살, 12살, 30살, 31살, 33살, 45살, 61살, 68살 등 성경의 권수대로 남자가 27명 여자가 39명으로 모두 66명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때 우제학 집사라는 분은 부모, 부인, 아이들, 형제 등 11명이 한날에 순교했는데 그들을 죽인 사람들도 동네 건달들이었습니다. 6,25가 끝난 후 그 가해자들을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인데 그런데 주님도 용서하셨는데 우리도 용서하자 하고 피해자들이 그들을 용서해서 지금도 한동네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들의 자손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참 기독교의 정신은 오묘합니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으로 해 냈습니다.

철원교회 박봉진 목사

이 분은 일제 때 고문당해서 순교한 목사 1호입니다. 이 분은 평택에서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는데 1932년 이성봉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고 소명을 확인하고 43세에 신학교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41년 5월에 철원교회에 파송 받아 부임합니다. 박봉진 목사는 신사참배를 고집스럽게 거부하다가 1943년 5월 철원경찰서에 구속되어 3개월간 무서운 고문을 받는데 온갖 말로 회유할 때마다 “하나님 외에 참 신이 없으며 천황도 결국 심판을 받는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니 감옥에서 살아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순교자에게는 이렇게 한결같은 고집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교하는 것입니다. 

이 박봉진 목사도 끝까지 고집해서 몸이 만신창이가 되어 감옥에서 죽어 갔습니다. 그러니까 고문을 포기한 경찰이 그를 데려가라고 집에 통고해서 집으로 돌아온 박목사는 6일 만에 1943년 8월 15일 날 광복절도 보지 못하고 “이 헛된 세상 오래 살면 뭣하나 나는 지금 천국에 간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성결교단의 첫 번째 순교자가 되었는데 그 목사님의 자손들이 모두 8남매였는데 그중 장로가 5명 권사가 3명이 탄생하였습니다. 이상이 3일 동안 순례한 순교지에 얽힌 사연들입니다. 지금까지 들으시고 여러분은 무엇을 느끼십니까. 여기서 몇 가지 메시지를 받게 됩니다.

하나는 “숭고한 신앙”입니다.

신앙이 이렇게 숭고할 수가 없습니다. 순교자들에게는 순교직전에 언제나 빠져나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그런데 순교자들은 한결같이 그 순간 용감하게 신앙의 지조를 굳게 지킵니다. 그래서 순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순교자들을 보면 대부분 직분도 없었고 갓 세례 받은 분들이었고 학습교인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엄청난 수난을 당하면서도 그 어설펐을 신앙으로 확신 있게 신앙을 고백하고 한결같이 죽어갔습니다.

또 하나는 “순교자들의 자손은 한결같이 복을 받는다”는 점입니다.  막 10:

29절을 보면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서 백배나 보상을 받고 박해를 겸하여 받은 사람은 내세에서 영생을 받지 못하는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희생한 사람은 하나님이 당연히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당연히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게 됩니다. 그래서 순교자들의 자손들은 한결같이 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가해자들의 후손들은 세월이 많이 지나갔지만 지금 무슨 심정으로 살아갈 것입니까. 아마도 그 옛날 가룟 유다의 자손들처럼 그렇게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세 번째는 “순교의 자리에서 위대한 사랑이 발휘되었다는 점”입니다. 내 부모를 죽이고 내 형제를 죽인 것은 동네의 공산당에게 이용당한 반동분자들이었습니다. 병촌교회는 16세대 66명이 죽었고 정읍의 두암교회 윤임례 집사의 경우는 가족이 6명, 친척이 16명 모두 22명이 그렇게 순교했고 임자도의 진리교회는 두 가족 13명이 한꺼번에 그렇게 순교했습니다. 그런데 그 수난의 시대가 끝나고 공산군이 물러간 다음 그때 가해자들은 죽을 목숨이었을 것입니다. 그때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보복하지 않고 그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참 예수의 복음은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살아서 역사하는 사랑의 복음인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

오늘 신앙이 문제가 되는 것은 자꾸만 땅의 것을 생각하고 땅에 집중하고 살아서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자꾸만 퇴색하고 오염되고 세속화되고 순결성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신앙에서 용기가 없어지고 힘이 없어지고 신앙고백이 자꾸만 흐려지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은 거창한 것이 아니고 숭고한 신앙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세상이 자꾸만 세속화 되고 물질화 되어가니까 신앙인들도 땅의 것에 집착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 신앙은 힘을 잃게 되고 영적 깊이를 잃게 됩니다. 그 신앙이 바로 세속화된 신앙이고 형식화 된 생명력을 잃은 신앙인 것입니다. 그래서 중세 기독교가 마침내 내부로부터 외부로부터 개혁의 압력을 받고 수모를 당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오늘 종교개혁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한번 되새겨 보고 순교자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땅에 집착하고 형식화 된 신앙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생명력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신앙은 생명력을 잃은 형식적인 신앙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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