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흥하는 교회 (행 9:31)

  • 잡초 잡초
  • 252
  • 0

첨부 1


부흥하는 교회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모퉁이 돌 선교회 대표인 이삭 목사님은 그의 어렸을 적 꿈은 간첩이 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007 영화 같이 스릴이 있고 긴장이 있는 첩보 영화를 좋아하고 그런 책들을 많이 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복음의 간첩이 되게 하셔서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수 없는 공산권과 회교권에 복음을 들고 몰래 들어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복음의 밀수꾼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옛날 소련에도, 중국에도, 그리고 철의 장막 북한에도 들어갑니다. 그 일을 당당하는 헌신된 일꾼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책을 몰래 가지고 들어가다가 발각되어 매를 맞고 피를 흘리기도 하고 잡혀서 순교하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우리가 평안히 먹고 쉬고 잠잘 때에도 쉬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때로는 생명의 위험을 느끼는 복음의 일꾼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선교는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불꽃이 없는 불은 불이 아니고 뜨거움이 없는 열은 열이 아닌 것처럼 선교가 없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고 영혼 구원의 열정이 없는 신자는 성령 받은 신자가 아닙니다. 
  선교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그의 최후 명령은 우리의 최초의 관심사입니다. <His last command is our forist concern>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이루어야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부흥입니다. 부흥되지 않으면 선교를 할 수도 없고 선교가 확장되지도 않습니다. 교회 부흥이 목적은 아니지만 부흥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유는 선교하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에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교회가 부흥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부흥일까요?
 
1. 무엇이 부흥입니까?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고 수가 많아지는 것이 부흥입니다. 평안하고 든든히 서가는 것이 질적 부흥이라면 수가 많아지는 것은 양적 부흥입니다. 질적 부흥이 이루어져야 수적 부흥이 이루어집니다. 
  평안한 교회가 부흥합니다. 싸우고 다투는 교회, 화목이 깨진 교회는 질적으로든 숫적으로든 부흥하지 않습니다. 갈 5:15절의 말씀을 보면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라고 했습니다. 각자의 마음에 평안이 없으니까 물고 먹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여러분 마음에 평안이 있습니까?
  마음의 평안이 깨진 사람은 마음에 상처가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42:11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라고 했습니다.
  인간의 불안의 출처가 얼굴이나 손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있다고 했습니다. '속'은 영혼입니다. 속에 있는 것이 영혼이라면 근심, 불안, 염려의 시발점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편하면 얼굴도 편해지고 말도 편해지고 행동도 편해지고 생활도 편해진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기분전환을 위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집을 떠나 산으로 바다로 들로 나갑니다. 그러나 산이나 바다가 기분을 바꿔 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글에 있는 간증을 하나 소개합니다. 
  사업에 망한 사업가가 절망에 빠져있었습니다. 심한 우울증으로 고생하고 있던 어느 날 의사가 집에만 있지 말고 기분전환을 위해 산에도 가보고 툭 터진 바닷바람도 쏘여 보라고 했습니다. 의사의 말을 따라 했습니다. 어느 날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올라갈 땐 몰랐는데 정상에 올라가 밑을 내려다보니 고공공포증과 함께 나무며 바위들이 일제히 소리를 질러댑니다. "뛰어 내려라, 뛰어 내려라."
  그는 겁이 덜컥 나 부들부들 떨며 산을 내려왔습니다. 며칠 후 부산으로 내려가 바닷가를 찾았습니다. 밀려왔다 밀려나가는 바닷물이 장관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닷물 소리가 갑자기 "들어오너라, 들어오너라."고 소리를 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 바다를 떠났습니다.
  어느 날 교회를 찾아 갔습니다.
  그 날 설교 제목은 "길은 있습니다."였고, 설교 후 부른 찬송은 "낭패와 실망 당한 뒤에 예수께로 나옵니다. 십자가 은혜 받으려고 주께로 옵니다. 슬프던 마음 위로 받고 이생의 풍파 잔잔하며 영광의 찬송 부르려고 주께로 옵니다."라는 찬송이었습니다.
  산꼭대기에서 떨어져 죽어라. 바다에 뛰어내려 죽어라. 너는 살 가치도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것은 사탄의 소리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은 길이 있다 고통을 피하고 슬픔을 이기고 낭패와 실망을 벗어날 길이 있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날 그 남자는 예수를 만났습니다. 실컷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웃으며 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절은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로 시작됩니다.
  근심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근심이 커져서 믿음을 파괴하고 인생을 파괴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는 사람은 평안을 위해서 일합니다. 그리고 평안한 교회를 만듭니다. 마음의 평안이 교회의 평안을 만들어냅니다.
  우리 교회는 평안한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양정인의 3대 가치 중에 첫 번째가 화목입니다. 각자의 마음에 평안이 인간 관계를 화목하게 합니다. 내 마음의 평안이 서로 서로의 관계를 화목하게 만듭니다. 
 
  2. 부흥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1)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는 전적으로 성령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본문의 31절에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 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령이 위로하여 교회가 부흥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위로”라는 말은 “후원”이라는 말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난 하주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여도 성령이 후원하지 않으면 되는 일이 없습니다. 특히 교회의 부흥은 더욱 그렇습니다. 본문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성령의 후원으로 부흥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성령이 위로하고 후원해주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영적인것이기 때문에 성령과 아주 밀접하게 관계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지원을 받아야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성령의 후원을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전도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사람의 마음이 열리지 않습니다. 전도자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이 역사하셔야 사람의 마음이 열리고 복음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의 인치시는 역사라고 합니다. 딛3:5절에 보면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구원받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리고 고전 12:3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라고 했습니다. 즉 성령이 역사하여야 전도의 문이 열리고 성령의 후원을 받아야 구원의 열매가 맺히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후원하면 성장하는 교회 부흥하는 교회가 됩니다.
  왜냐면 교회의 생명력은 성령에 있기 때문입니다.  열 두 명으로 시작한 예루살렘 교회가 수 만명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 성장학을 연구하는 맥가브란 박사는 교회 성장 요소 세 가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첫째는 생물학적인 성장이 있습니다. 교인들이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것을 말합니다.
  둘째는 이전 성장입니다. 다른 곳에서 이사 해오는 교인들 때문에 부흥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는 회심 성장 또는 전도성장입니다. 불신자를 전도해서 교회가 성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회심 성장의 비율이 높아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에는 양 적인 면과 질적인 면이 있습니다. 양적인 부흥에는 성장이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질적 성장에는 성숙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생명력으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숙하여야 합니다. 그러한 교회가 부흥하는 교회입니다.
 
  2) 목사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교회의 부흥에 목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목사는 교회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합니까?
  첫째는 제사장적 역할이 있습니다. 
  제사장적 역할은 도고와 중보의 역할입니다. 도고와 중보의 역할은 축복의 역할입니다. 레위기 21:5절과 신명기 10:8에 보면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자라고 말하였습니다. 목사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목사의 축복을 받고 영, 육간에 복을 받아 윤택한 삶을 살게 됩니다. 
  민수기 6:22-27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축도문이 나옵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사장적인 역할입니다.
  목사는 축복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목사의 축복을 받는 자를 하나님은 복 주십니다. 목사는 자신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자기가 회계할 자인것 처럼 하며 합니다.<히13:17> 

  둘째는 지도자적인 역할을 해야 합니다.
  목사는 양떼를 이끌고 나아가는 리더의 역할을 해야 합니다. 사람을 주님께 인도하여 가는 것이 목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목표를 갖습니다. 비전을 봄니다. 그리고 목사의 시계는 성도들의 시계보다 5분 빨리갑니다. 성도들의 발걸음 보다 한 발짝 앞서갑니다. 목사의 시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비난하기도 합니다. 목사의 발걸음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목사의 발걸음은 주님이 앞서가신 그 길을 따르고자 함이며, 목사의 그 눈길은 주님이 주시하는 그곳을 바라봅니다.

  3) 성도들의 헌신이 필요 합니다. 
  아무리 목회자가 뛰어나고 성령이 후원하여도 그것만 가지고는 교회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목사와 성도 성령의 관계성 속에서 부흥하고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성장하려고 하면 성령의 후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지만 목사의 역할과 성도의 역할이 잘 조화되어야 합니다.

  교인 각자의 역할은 주를 경외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 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성도가 모이는 것은 주를 경외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의 사욕을 쫓아 모이는 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경외란 말은 두렵고 떨림으로 온 맘을 다해 섬기는 것이고 섬김은 헌신입니다.
  성도의 각자가 주를 경외하여 눈물어린 헌신의 역할을 다할 때 교회는 부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눈물 나는 헌신은 교회 발전의 원동력입니다. 성령은 헌신하는 교인과 함께 일하십니다.

  60년대 말 전라남도 어느 시골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에 순덕이라는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는 지은지가 오래 되어 너무 낡아서 비만 오면 대야를 바쳐야 했습니다. 교인들은 새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 기도하고 건축 헌금을 시작하였습니다. 온 성도가 정성껏 헌금을 했으나 예배당을 완공하기 까지는 턱없이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수건을 머리에 쓰고 나온 성도가 있었습니다. 성미 급한 여 집사 한분이 순덕이가 쓴 머리의 수건을 벗겨 버렸습니다.
  순덕이의 머리는 박박 머리였습니다.
  바칠만한 돈이 없던 순덕이는 머리를 잘라서 팔아 건축헌금을 드린 것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안 성도들이 그날 예배 시간에 모두 울었습니다. 모든 교인들이 순덕의 헌신에 감동되어 적극적으로 헌금하였고 교회는 건축되고 헌당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성장에 있어서 성도들의 최선을 다한 눈물어린 헌신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많은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선의 것을 원하십니다. 최고의 것보다 힘을 다한 최선을 원하십니다.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카터가 해군 장교로 있을 때 제독 하이만 리카비가 그에게 “귀관은 사관학교에서 공부를 몇등했는가?” 라고 물었습니다. 카터가 “820명중에서 59등 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제독은 “귀관은 어찌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라고 되 물었습니다. 그때 카터는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느냐는 제독의 말에 충격을 받아 무슨 일에 든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미국의 물러난 대통령들 중에서 가장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알려저 있습니다.
  엽전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최고여서가 아니라 최선이었기 때문입니다. 최고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나니나와 삽비라처럼 하나님을 속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만홀이 여김을 받지 않으시고 속지도 아니하십니다.
  묵묵하게 말없이 헌신하는 성도, 그들을 모두가 하나님의 필요에 응답하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필요에 응답하는 성도가 됩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주실 것입니다. 선교는 주님의 요청이며 주님의 필요입니다. 주님이 있으라하신 자리에 우뚝 섭시다. 그리고 주님의 필요에 응답합시다. 그러면 부흥하는 교회가 됩니다. 복 받는 가정이 됩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성령의 후원을 받는 교회입니다.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고 수가 늘어납니다.
  목사는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성도는 최선을 다해 헌신합니다.  아 멘 
  (박재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