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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고전 13:5; 눅 15: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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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고전 13:5; 눅 15:20-32

지난 주엔 쉽게 열 받는 것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한번 열 받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두고두고 가슴에 깊이 묻어두는 심리적 현상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공동번역은 이를 '앙심을 품는다'고 표현했습니다. 원어의 뜻을 잘 살린 아주 적절한 번역이라고 생각됩니다.

한국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앙심을 품는 것은 소인배들이나 하는 아주 쩨쩨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화통한 인간이란 점을 보여주려고 애씁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앙심을 품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꼭꼭 틀어 박혀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안전한 것이 아니란 점입니다. 앙심을 품고 살면 우리의 인식여부와 관계없이 쉽게 열 받는 것처럼 나 자신의 삶과 모든 사회적 관계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앙심을 품고 사는 것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주는 놀라운 능력이 사랑에 있음을 노래합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우리도 바울과 함께 기쁘고 행복하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러려면 먼저 앙심을 품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 그 파괴적인 결과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1. 앙심을 품는다는 것은 정당한 과거사 정리와는 다릅니다

앙심을 품는다는 말은 원문에 세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동사는 '로기조마이'인데 문자적 의미는 '목록을 작성한다' 혹은 '계산한다'는 뜻입니다. 동사의 목적어는 정관사와 형용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형용사에 해당하는 단어는 '카코스'인데 '유해한, 악한, 무례한, 질 나쁜, 해로운, 파괴적인, 치명적인' 등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앙심을 품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나에게 저지른 악한 짓들을 마음속에 기록하고 점수를 계산해놓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앙심을 품는다는 것을 불의한 과거사를 정당하게 정리하는 노력과 혼돈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악한 과거사를 조목조목 지적하시면서 확실하게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무척 애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나타나셔서 분명히 물으셨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행 9;4)?' 사도들도 예루살렘에서 성령충만하여 설교할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과거의 불의에 대하여 명백하게 꾸짖었습니다(행 2:36-38). '그러므로 이스라엘 온 집안은 확실히 알아두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 '형제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호소하였습니다. 이에 베드로는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의 용서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라고 답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본인이나 다른 사람의 과거사를 정의롭게 정리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앙심을 품는다는 것은 정당한 과거사 정리와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두 가지 점에서 다릅니다. 첫째, 앙심을 품는 것에는 과거에 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이나 그룹에게 고통을 주고 싶어하는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정당한 과거사 정리에는 그런 욕구가 없습니다. 다만 잘잘못을 잘 가려냄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고 자신이나 공동체가 다시 똑 같이 잘못된 길을 걸어가지 않도록 예방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을 뿐입니다. 둘째, 앙심을 품는 것에는 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을 공적으로 매장시켜 다시는 활개치지 못하도록 그의 기를 확실하게 꺾고 싶어하는 욕구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정당한 과거사 정리에는 그가 과거의 악한 짓을 회개함으로 깨끗이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힘차게 출발하도록 돕고자 하는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아직도 한국교회와 사회가 불의한 과거사를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참 슬픈 일입니다. 한편에선 앙심을 품고 과거사 정리를 하겠다는 이들이 있고 다른 한편에선 정당한 과거사 정리까지 앙심을 품고 하는 일이라고 무조건 거부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디 한국교회와 사회가 더욱 성숙해져서 앙심은 버리고 과거사 정리는 잘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런데 앙심 품는 것을 포기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2. 앙심을 품으면 은밀한 달콤함을 즐길 수 있습니다

루이스 스메디스는 그 달콤함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앙심을 품고 있는 동안, 자신이 적어도 악한 짓을 행한 그 사람보다는 도덕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강렬한 본능 중에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도덕적 우월감을 누릴 순 없습니다. 그를 뒷받침해줄 만한 객관적 증거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기록된 타자의 악한 짓들이야말로 그런 역할을 하기에 딱 적당합니다. 내가 억울하게 당했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그 사람보다 고상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란 확신을 강화시킬 수 있습니다. 즐거운 일입니다.

둘째, 복수하고 싶은 마음과 계획을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 역시 인간의 강한 본능 중에 하나입니다. 복수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습니다. 가장 고상해 보이는 복수는 내게 악한 짓을 행한 사람을 마음에서 지워버리고 교제를 단절하는 걸 겁니다. 그래도 복수는 어쨌든 도덕적으로 정서적으로 늘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복수를 정당화할 만한 강력한 근거가 필요합니다. 내 마음에 기록된 악한 짓이 바로 그런 근거의 역할을 합니다. 과거의 악한 사건을 다시 생생하게 기억해낼 수 있는 만큼 복수에 대한 도덕적 정서적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즐거운 일입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악한 짓이 내 안에 새겨놓은 상처를 어루만지면서 왜곡된 쾌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종의 피학대증과 유사한 병적 쾌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이상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의 불안전한 모습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자기를 한편으론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역설적으로 학대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타자의 악한 짓이 남겨 논 아픈 상처를 어루만질 때, 그런 충동이 부분적으로 해소되는 만족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단번에 인격적으로 완전해 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함정에 종종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은밀한 달콤함을 즐기며 지속적으로 앙심을 품고 살아갈 때 자기 자신도 파괴되고 인간관계도 깨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말입니다.

3. 앙심을 품으면 자신과 인간관계가 무너집니다

앙심을 품고 살면 자기가 파괴되어 갑니다.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 여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문유정에서 바로 그런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열 다섯 살에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울며 엄마에게 호소하지만 엄마는 오히려 '계집애가 어떻게 꼬리를 쳤기에'라고 오히려 책임을 딸에게 전가합니다. 그 이유는 그 사촌오빠의 아버지 손에 자기 남편 그러니까 유정이 아버지의 사업의 성패가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잔인한 짓입니다. 그 악한 짓을 마음에 선명하게 기록한 채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유정이의 삶은 점점 파괴되어 갑니다. 3 번이나 자살을 시도합니다. 뜻 밖에 사형수 윤수를 만나면서 앙심을 털어 내는 용서의 힘을 얻게 되죠. 비로소 그의 삶에 환한 빛이 비쳐오게 됩니다.
 
또한 앙심을 품고 살면 인간관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앙심을 품는다는 것은 악한 짓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짓을 한 사람에게 분명히 초점을 맞추기 때문입니다. 악한 짓을 한 사람을 영원한 원수로 만듭니다. 그를 향하여 마음을 열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나타난 큰아들이 바로 그런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항의합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30)'. 논리적으로 다 맞는 말입니다.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옳다고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논리의 한계가 있습니다. 첫째 아들의 논리는 동생에 대한 앙심과 원한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형은 앙심 때문에 동생이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 재산을 날려 버린 못된 아들이라는 점 외에 그 어떤 상황과 요소도 고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가 모든 걸 다 말아먹고 이제는 정신을 차렸다는 점, 회개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 돌아왔다는 점, 아버지가 그를 측은히 여겨 사랑으로 받아들였다는 점, 심지어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재산과 소유를 이미 큰아들의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얼마나 중요한 사실입니까? 그러나 이 중요한 요소들이 큰아들의 논리적 사고에 비집고 들어 올 작은 틈조차 없었습니다.

앙심을 품고 있는 동안 사람은 이렇게 정신적인 면에서 불구자가 됩니다. 아무리 악한 짓을 한 사람일지라도 그에게 의외로 고상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앙심을 품으면 그 다른 면을 포착할 수 있는 넉넉한 시선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 악한 짓 속에 그 사람을 묶어 버립니다. 한번 눈 밖에 난 사람과 관계를 회복하기 좀처럼 어려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앙심을 품고 사는 고통스러운 삶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아가페 사랑만이 그 해답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합니다.

4.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게 하는 능력입니다

아가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에로스 사랑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에로스는 참 좋은 것이지만 일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에로스의 한계는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매우 열정적으로 헌신적으로 대할 수 있지만 그것마저도 결국은 자기욕구충족의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에로스는 상대가 아무리 소중한 존재일지라도 나의 욕구충족을 거스르는 순간 그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이 거부당할 때 에로스는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에로스 사랑은 상처를 끌어안은 채, 미움과 증오 그리고 마침내 차가운 무관심으로 변모하게 됩니다.

앙심을 품는 것도 에로스가 한계 지점에 도달했다는 표시 중에 하나입니다. 앙심을 품는 가장 근원적 이유는 내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함입니다. 본문의 큰아들에게로 다시 돌아가 봅시다. 그는 분명히 자신과 동생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라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그토록 성실하게 섬기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번도 어기지 않은 근본이유는 결국 자기만족에 있었음을 그대로 들어내는 대목입니다. 에로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가 진정으로 아버지를 사랑했다면 그는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에로스의 한계에 갇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우월성을 확실하게 증명해줄 수 있는 동생의 악한 짓을 그는 결코 놓칠 수도 잊을 수도 없었습니다. 마음에 꼭꼭 기록해두고 앙심을 품었습니다.
 
에로스의 한계 안에 머물러 있는 사람에겐 남의 악한 짓에 대한 기억만큼 든든한 무기가 없습니다. 인간 치고 도덕적으로 완벽한 존재가 없습니다. 누구나 크고 작은 허물이 있기 마련입니다. 자신의 도덕적 우월성이 가져다주는 자기만족감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상대적 비교우위를 차지하는 길 밖에 없습니다. 상대방의 악한 짓을 많이 기억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비교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그만큼 쉬어집니다. 그러니 어찌 상대방의 잘못과 악한 짓을 깨끗하게 잊어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심지어 부부사이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한참 싸우다 화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부부싸움 후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피차 잘못한 점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지점에 도달하게 됩니다. 둘 중에 하나가 화해의 제스처를 슬쩍 보냅니다. 그러나 문제는 화해의 과정에서 그래도 자기가 도덕적으로 상대방보다 더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합니다. 내가 용서받아야할 잘못보다 내가 용서해 주어야할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거죠. 피차 그런 마음이 부딪힙니다. 그러다 보면 화해의 문턱에 들어 섰다가도 다시 획 돌아서게 됩니다.

아가페 사랑은 바로 그런 비교우위에 서고 싶어하는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는 능력입니다. 아가페 사랑을 경험하면 누군가와 비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깊은 자기 만족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진심으로 고백하게 됩니다(시 23:1). 이는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 그 자체 때문에 아무런 부족함도 느끼지 않는 자기만족과 충족의 상태를 말합니다. 가난과 죽음 그리고 원수들도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어떤 삶의 형편에서도 자신의 잔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넘치는 행복을 맛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만족과 행복을 위해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것을 바라거나 구하고 싶은 욕망이 없습니다. 이는 진실로 너무나 아름답고 순수하고 위대한 고백입니다. 이것이 모든 문제해결의 시발점입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이처럼 부패하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런 고백을 진실로 드릴 수 있는 사람이 그 만큼 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에로스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경험하게 됩니다.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니라 진실로 상대방을 위해서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의 우월성을 증명하기 위해 남과 비교하려는 충동에서 자유로워집니다. 자연스럽게 다른 사람의 악을 앙심을 품고 기억하는 습관에서 해방되기 시작합니다. 상대방이 회개하기 전에 먼저 용서를 베풉니다. 다른 사람의 악을 굳이 기억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 사람이 그 악을 회개하고 죄 용서함 받음으로 새 삶을 출발할 수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악에 대한 기억이 앙심으로 발전하도록 놔두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아버지는 아가페 사랑의 육화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돌아온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의 순서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로부터 어떤 회개의 말도 듣기 전에 그를 측은히 여기고 그에게 진한 사랑을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달려가서 목을 안아주고 입을 맞춥니다. 그가 회개의 고백을 하자 채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제일 좋은 입혀주고 손에 가락지를 끼어주고 발에 새 신발을 신겨줍니다. 큰 축하연을 베풀게 합니다. 여기에 큰아들과 아버지의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작은아들에게 직접적으로 가장 큰 상처를 입은 당사자는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가 당한 만큼 아들이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만으로 충분했고 너무나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이는 아버지가 작은아들의 악한 짓을 앙심을 품고 기억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에게 중요한 것은 아들이 새롭게 만들어갈 미래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가페 사랑의 놀라운 힘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아버지처럼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을 늘 새롭게 만나는 길 외에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죄를 깨닫기도 전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롬 5:6-10). 하나님은 미가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를 적나라하게 들쳐 내셨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발로 밟아 깊은 바다에 던져 버리셨다는 것입니다(미 7:19). 주님께서 우리에게 회개를 요청하시는 것은 결코 우리의 악을 앙심을 품고 기억해서가 아닙니다. 용서의 조건도 아닙니다. 주님이 이미 베푸신 용서를 가슴을 열고 받아들여 새 삶을 살아가라는 호소입니다. 이 아가페 사랑을 믿음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일 때 비로소 앙심을 품는데서 해방될 수 있는 놀라운 사랑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로 우리 모두 그런 사람으로 성장해가면서 바울처럼 사랑을 예찬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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