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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시 50:23; 행 14: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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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시 50:23; 행 14:11-18

한 기자가 이준익 감독에게 '관객들이 「라디오 스타」를 보면 뭘 느끼길 바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행복이죠. 이 영화는 단순히 가수와 매니저의 관계를 그린 영화가 아니에요. 작은 가치를 소중히 여기게 되면 행복해지기 쉽다는 걸 말하고 싶었어요. 저는 늘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아침에 커피 한잔을 마셔도 밤하늘에 뜬 별만 봐도 행복해요. 관객들이 이 영화를 통해 그런 작은 가치의 소중함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행복은 절대 멀리 있는 게 아니에요'.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주는 인터뷰입니다. 목사인 저에게 부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작은 것에 행복을 느끼면서 살 수 있을까요? 이 감독은 작은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있다고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작은 것 하나 하나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함께 묵상하면서 그런 마음을 새롭게 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은 감사의 마음을 제사로 받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정말 원하는 것이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적인 것이라는 점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내면보다 외면을 강조하는 잘못된 경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외면은 눈만 멀지 않으면 누구나 확연하게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내면세계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여다봐야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또 외적인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내적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훨씬 더 어렵죠. 물론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게으름에 빠지면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도 아주 싫어집니다. 그러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상대적으로 훨씬 더 어렵습니다. 무거운 것을 옮기는 일은 별 준비가 필요 없습니다. 잠깐 힘을 쓰면 됩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려고 해보십시오. 쉽게 안 나옵니다. 외부에서 강력한 충격이 오거나 온 마음을 쏟아 한참 집중을 해야 합니다. 감정이입을 잘하는 사람이 사랑받고 존경받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또 몸은 움직여도 마음은 안 움직이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진정으로 움직이면 몸을 안 움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그만큼 더 어려운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을 섬길 때도 내면을 움직이기보다는 외적인 것에 치중할 위험성이 상존합니다.

오늘 시편 50편이 바로 그 점을 짚고 있습니다. 시편 50편은 아삽의 시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의'라는 표현이 꼭 저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아삽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시편을 묵상하면 그 뜻을 좀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아삽은 다윗이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성으로 모셔올 때, 놋 심벌즈를 치는 역할을 했습니다(대하 15:19). 이어 여호와의 법궤 앞에서 섬기는 찬양대의 책임자로 임명을 받습니다(대하 16:4-5). 아삽의 자손들은 대대로 하나님의 성전에서 노래하는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귀환해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기 위하여 기초를 놓을 때도 아삽 자손 148명이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아삽과 그 후손은 성전에서 찬양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제사를 드리기를 간절히 원했을 것입니다.

본 시편은 그러한 아삽의 관심사를 잘 대변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바친 제물을 두고 탓하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꼬박 꼬박 하나님에게 제물을 잘 바쳤기 때문입니다(시 50:8). 문제는 하나님이 제물 자체에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이 아니시다는 데 있는 거죠. 설사 하나님이 우리처럼 배고플 때가 있다고 합시다. 그래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수소 고기나 숫염소 피를 달라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온 누리와 거기 가득한 생물이 모두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참 제사는 '감사하는 마음'이라고 분명하게 밝히십니다(14). '감사하는 마음을 제물로 바치는 자, 나를 높이 받드는 자이니, 올바르게 사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리라(25)'. 시인이 구약성전제사 무용론을 펼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구약성전제사는 일종의 그림자로서 여전히 유효합니다. 하나님은 감사의 마음을 담을 그릇으로 제사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그 그릇만 달랑 드리고 정작 중요한 내용인 감사의 마음을 생략한 것입니다. 손님을 식사에 초대해놓고는 본 차이나 같은 고귀한 그릇만 상에 잔득 펼쳐놓고 정작 음식은 담아드리지 않는 것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제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구약 백성처럼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지만 한 차원 승화된 의미의 제사를 드려야할 본분이 있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에만 자신의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몸을 바치되 마치 제단 위의 불꽃에 온 몸을 사르듯 부분적으로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몽땅 드리는 것입니다. 겉모양으로는 여전히 살아있지만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내면의 자아가 철저히 죽은 삶입니다. 이런 상태의 삶을 바울은 산 제물이라고 묘사합니다.

이 때 역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감사의 마음입니다. 감사한 마음의 부재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자아가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그런 자아를 안은 채 아무리 헌신을 한들 그것은 결국 자기 성취를 위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에 감사한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은 내면의 자아까지 온전히 산 제물로 하나님께 기꺼이 드릴 수 있습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그는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선 더 이상 이 땅에서 바랄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 당장 죽어 그리스도 곁으로 가는 것이 제일 좋다고 한 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에게 감사의 마음을 늘 유지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그 점에서 추수감사절은 매우 의미 있는 절기입니다. 언덕교회는 참 소중한 교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별 광고도 하지 않는데 사람들이 끊임없이 언덕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지 않습니까? 주님께서도 늘 흥미로운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실 겁니다. 어떻게 그 기대에 부응할 수 있을까요? 언덕의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깊은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감사한 마음을 회복하려면 우리가 받은 복을 늘 세어 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잘 세려면 아주 미세한 것 같지 볼 수 있는 현미경 같은 눈이 있어야 합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까지도 끌어다 볼 수 있는 망원렌즈 같은 눈이 필요합니다. 기도응답으로 그런 눈이 열리면 감사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가를 발견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편 22:1을 보면 시인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어찌하여 그리 멀리 계셔서, 살려 달라고 울부짖는 나의 간구를 듣지 아니하십니까?'라고 절규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뒤에 시편 23편의 놀라운 고백이 이어집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여기에 놀라운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결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펫 같이 인생에서 성공한 사람만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아닙니다. 아니 그런 사람도 하나님을 잘 모르면 이런 고백을 드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눈만 열리면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가까운 사람을 잃은 사람도, 결혼을 못한 사람도, 치명적인 병에 걸린 사람도, 삶의 다양한 경쟁에 뒤쳐진 사람도 '내 잔이 넘친다'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고백을 기대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결코 불가능하거나 잔인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고통을 통해 나에게 가깝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면 됩니다. 어떻게 그런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시편 22편의 절규처럼 주님께 있는 그대로 나아가 호소하면 됩니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야기를 한 가지 더하고 싶네요. 사형수 윤수는 윤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것 딱 한가지가 있네요. 무슨 말이든지 제가 들으면 무덤까지 가져갈 수는 있습니다'. 어느 날 윤정은 윤수에게 면회를 가 자기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었던 너무나 쓰리고 아픈 과거를 털어놓습니다. 사촌오빠에게 강간을 당한 일, 집안 사정 때문에 이를 무마하려고 오히려 자기를 야단쳤던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분노로 말미암아 자살을 시도했던 일들을 말입니다. 그 후 윤정의 삶에는 한 줄기 빛이 비쳐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모든 고통과 슬픔을 털어놓으십시오. 주님은 반드시 여러분 곁에 가까이 다가오셔서 위로와 사랑의 빛을 여러분의 가슴에 살포시 비쳐 주실 것입니다. 그 때 시인처럼 여러분의 가슴과 입에서 감사와 만족의 노래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자기 잔이 얼마나 작은 잔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잔이 태평양처럼 크다고 생각해보십시오. 한강 물이 내 잔 위에 쏟아 부어진다고 한들 잔이 넘친다는 생각이 들까요? 어림도 없지요. 그러나 내 잔이 청계천 같다고 여겨보십시오. 잔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넘침을 경험할 것입니다. 저도 제 정신을 차리면 '복을 아예 뒤집어쓰고 사는 사람이네'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마음으로 목회를 하면 그렇게 행복하고 재미있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은 그 많은 감사할 복 중에 추수감사절에 걸 맞는 한가지만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2. 하나님께서 자연을 통해 주시는 복을 감사합시다

오늘 읽어드린 사도행전 말씀은 자연을 통해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를 잘 깨달으려면 하나님 대신 인간을 숭상하려는 마음부터 극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태어날 때부터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을 고쳐줍니다. 이에 깊은 감동을 받은 군중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신의 현현으로 착각합니다. 바나바를 제우스로, 바울을 헤르메스라고 불렀습니다. 심지어 제우스 신당 제사장은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가지고 와서 군중과 함께 두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했습니다.

황당해 보이지만 사실 현대인들에게도 그런 성향이 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기가 얼마나 더 쉽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인들도 종종 눈에 안 보이시는 하나님을 대체할 수 있는 눈에 보이는 존재를 열망하게 됩니다. 물론 오늘날 특정 이단을 제외하면 그리스도인들 중에 특정인을 노골적으로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를 하나님의 위치에 올려놓고 섬기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언덕교회는 다행히도 그 점에서 상당히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덕교회가 그런 위험성에 전혀 노출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모든 교회는 하나님대신 인간을 섬기고 싶어하는 욕구와 충동에 빠지지 않도록 꾸준히 노력을 기울여야합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을 신으로 섬기고자하는 군중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합니다. 옷을 찢고 군중들에게 뛰어 들어갑니다. 자신들은 결코 신이 아니고 그들과 똑 같은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변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가를 전하며 그 분에게 돌아갈 것을 강력히 권유합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전하는 하나님을 루스드라 군중들 뿐 아니라 우리도 늘 새롭게 기억하고 그 분께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하나님은 첫째,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살아 계신 하나님이십니다(행 14:15). 하나님은 자연계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우리는 물질주의와 소비주의가 만연하고 있는 세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시장에 끝없이 쏟아지는 최신상품을 소비해야만 삶의 행복과 만족을 누릴 수 있다는 신념을 강요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런 대중문화의 흐름 속에서 모든 자연계는 인간의 행복을 증진하기 위한 산업화의 수단에 지나지 않습니다. 자연계를 바라보며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전혀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우리 시대의 이런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가서는 안됩니다. 힘차게 헤엄을 쳐서 거슬러 올라가든지 아니면 과감하게 빠져 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모든 자연계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의 시선을 돌려야 합니다. 지난 주 화요일 예수제자훈련을 마치고 본 건물 문을 나섰습니다. 그 때 한 분이 밤하늘을 가리키더니 '저기에 하나님의 손톱이 있네'라고 하더라고요. 그게 무엇이었을까요? 추석을 지나 한 쪽이 막 사라지기 시작한 예쁜 달이었습니다. 가만 보니까 정말 손톱같이 생겼더라고요. 달에서 하나님의 손톱을 발견하는 눈과 마음은 참 복되고 은혜롭습니다. 이기준 감독은 밤하늘에 뜬 별만 봐도 행복하다고 했는데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밤하늘에 뜬 별만 봐도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분께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둘째, 하나님은 하늘에서 비를 내려주시고, 철을 따라 열매를 맺게 하시고, 먹을 거리를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기쁨으로 가득 채워주시는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이러한 하나님을 우리에게 반복적으로 가르쳐 줍니다. 전도서 저자는 인생을 깊이 묵상해본 결과를 이렇게 전해줍니다. '사람에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자기가 하는 수고에서 스스로 보람을 느끼는 것,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알고 보니, 이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그분께서 주시지 않고서야, 누가 먹을 수 있으며, 누가 즐길 수 있겠는가(전 2:24-25)?'

예수님도 이 사실을 늘 묵상하셨음이 틀림없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 대하여 걱정하기 쉬운 군중들을 어떻게 위로하십니까? 예수님은 들판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꽃을 바라보며 만난 하나님을 전해주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 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않으냐'(마 6:26).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들을 입히시지 않겠느냐(마 6:28-30)? 또한 예수님은 하늘과 땅을 바라보며 마음에 새긴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전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 5:45)'.

해와 비는 인간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해와 비가 없다면 농부가 아무리 노력한들 생명체를 키울 수가 없지요. 물론 농부의 수고는 정말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얼마 전 몇몇 성도님들과 함께 조래원 집사님이 잘 아는 백운에 있는 아름다운 과수원에 들러 좋은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무농약으로 사과와 배를 키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죠. 그리고 정성스레 가꾼 열매들이 얼마나 싱싱하고 달콤한지도 경험했습니다. 이제 다른 과일은 맛있게 먹기 힘들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 정도입니다. 그 때 과수원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여기는 기온 차가 매우 심합니다. 낮에는 햇빛을 잘 받아 따끈따끈하고 저녁만 되면 금방 추워지죠. 그래야 과일의 당도가 올라갑니다'. 과일의 당도는 철저히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단 과일을 먹으면서 우리는 농부의 수고를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은 과학을 통해 화려한 물질문명은 발전시키면서 중요한 것 한 가지를 상실했습니다. 자연 구석구석에 깃들여 있는 하나님의 위대하고 아름다운 손길을 볼 줄 아는 눈과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노릇입니다. 자연을 우연의 산물로 보는 것처럼 비합리적이고 우매한 일이 없습니다. 인간의 교만이 낳은 불행한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죽고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은 살아 계신 창조주임을 온 천하에 선포하셨습니다. 이제 이 믿음으로 자연을 통해 인간에게 놀라운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늘 감사의 제사를 드리며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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