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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약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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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에 세워진 몇 개의 교회가 있는데 그 중에 서울 장안에 있던 한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는 백정의 직업을 가진 한 사람이 출석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분은 백정이라는 비록 천한 직업을 가졌지만 열심히 봉사하고 예수님을 잘 믿었습니다.
  때가 되어서 그 교회가 장로 선거를 하게 되었고, 이 백정 교인이 장로 후보가 되었습니다. 또한 공교롭게도 그 지역에서 유명한 양반 교인도 장로 후보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선거를 치루었는데 그만 양반 교인은 떨어지고 백정 교인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장로가 되어 임직을 하고 나니, 양반 교인들이 그냥 있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저 천한 백정 놈에게 장로님이라고 부를 수 있느냐, 우린 못하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양반 되는 분들이 의논을 해서 교회를 나가 또 하나의 다른 교회를 세웠다고 합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양반들이 세운 교회는 별로 부흥을 하지 못했는데 천민들만이 남겨져 있던 그 교회는 크게 부흥을 하였다고 합니다.”

  양반과 천민의 신분의 차별이 있던 시대의 웃지 못할 이야기라고 치부 할 수도 있지만 오늘 우리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현대의 교회는 이런 문제가 없을까요? 오늘 우리의 교회에는 사람들을 외적인 신분이나 어떤 이유로 차별하는 경우가 없을까요? 그 사람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지식의 유무, 재물이 많고 적음에 따라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우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닐 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 야고보 사도는 성경을 통해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권면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한 가지 예를 드는데 “만일 너희 회당에 손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방문했다고 치자”라고 합니다. 이 금가락지를 낀다는 것은 사회 저명인사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는 것은 고관대작이나 아주 재물이 많은 부유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나가서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리 오라고 하며, 가장 좋은 자리에 그를 앉힌다면, 동시에 그 회당에 아주 가난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누추한 사람이 방문을 했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도 쓰지 않고 앉고 싶은데 아무데나 땅바닥에 앉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이렇게 불친절하게 대한다면 어찌 그것이 하나님의 교회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 범죄 하는 일이라고 오늘 야고보 사도는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고백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믿음이라는 귀한 유산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믿음의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오늘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아멘.

  우리에게 믿음이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을 외모로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 때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기 전 믿음이 없을 때는 세상적인 기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에서야 돈 많은 사람이 최고고, 잘난 사람이 최고고, 많이 배운 사람이 존경 받고, 어디가도 좋은 차 탄 사람이 대접 받지 않습니까?

  어떤 분의 이야기입니다. 누구하고 만나려고 호텔을 갔는데 마침 자기 차가 공장에 들어가서 직원차인 소형차를 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호텔보이가 나와서 쳐다보지도 않더라는 겁니다. 주차 안내도 해주지 않았답니다. 그 다음에 좋은 자기 차를 타고 갔더니 호텔 보이가 달려 나와서 90도 인사를 하고 문을 열어주고 주차까지 대신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아! 호텔 오려면 좋은 차를 타고 와야 되는 구나! 했답니다.
  여러분, 이것이 세속적이고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모를 때는 그 기준으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차별하지 아니한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야고보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 성숙한 인격을 가진 믿음의 사람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이고 자매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혹시 우리 마음 속에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심정적으로 좀 더 부유하고 좀 더 학식있고 사회적인 이름이 있는 유명한 사람이 이 교회를 찾아온다고 할 때 여러분은 좀 더 반갑게 나가서 웃으면서 맞이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별로 알아줄 사람도 없고 누추하고 허름한 옷을 입고 이 교회를 찾아올 때 우리는 그저 또 한 사람이 왔구나! 이렇게 무감각하고 냉담하게 맞이하는 일은 없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교회의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이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뭘까요?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그의 학식이나 지식이나 그의 어떤 가정적인 환경이나 그의 지역적인 배경이나 이런 조건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서는 안 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똑같이 대우하셨습니다.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무엘상 16장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어린 다윗을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려고 이새의 집을 방문했을 때 그 일곱 아들을 쭉 지나가게 합니다. 막내 다윗은 양치는 목동이기 때문에 들에 나가 있고 제일 큰 장자인 엘리얍을 보니까 키도 크고 눈이 부리부리하고 이 사람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 같았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입니까?”, 하나님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무엘 16장 7절에 말씀하기를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기를 그의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을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 외형이나 어떤 조건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의 속사람 중심을 보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외형적인 조건으로 판단하거나 취하는 법이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우리가 고대 사회에서나 초대교회 때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아주 극심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사도 하지 아니하고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베드로에게 와서 깨지게 됩니다. 베드로가 시몬의 집에 거할 때에 그가 다락에 올라가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서 보자기 하나가 내려오는데 그 보자기 안에는 아주 부정한 짐승의 고기들이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먹으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깜짝 놀라서 “내가 이렇게 부정한 것을 어떻게 먹어요? 못먹습니다.” 했더니,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깨끗하게 했으니 걱정하지 말고 먹어라.” 하나님은 세 번이나 동일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이방인 백부장인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의 거쳐하는 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우리 백부장께서 베드로 사도를 모셔오라고 했습니다. 우리 집에 심방 오셔서 말씀전해주시고 기도도 해주십시오.”라고 전했습니다.

  그때서야 베드로는 깨닫게 되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백부장 집에 가서 그를 축복하고 말씀을 증거 할 때에 온 가족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놀라운 성령의 은혜가 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경험한 베드로는 사도행정 10장 34절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각 나라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유대인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알았더니 비록 이방인 중에서라도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받고 용납하는 것은 내가 오늘 깨달았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가 왜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서는 안 될까요? 그의 영혼의 가치 때문입니다.

  사람의 외형적인 조건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생김도 다르고 부모도 다르고 출신 환경도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사람이 평가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그의 영혼의 가치 속에 있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존귀한 자입니다. 옆 사람에게 말해 줄까요? “당신과 나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존귀합니다. 부모가 잘 생겼으면 자식도 잘생길 수 있습니다. 부모가 대머리면 자식도 대머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 가치 있고 존귀합니다.

  또한 우리는 왜 존귀합니까? 가능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보실 때 현재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의 미래를 보시는 겁니다. 지금은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그를 부르셔서 은혜를 주시면 그가 거듭남을 경험하고 앞으로 어떤 하나님의 선한 도구로 쓰임 받을까 그것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시몬을 베드로로 부르십니다. 원래 그의 이름은 시몬입니다. 갈대란 뜻입니다. 그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은 그에게 베드로라는 반석이라는 뜻의 듬직한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너는 반석 같은 인물이 되어야 된다!” 예수님은 가능성을 미리 보시고 그를 존귀히 여기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볼 때에도 지금으로만 보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를 들어 사용하실 때 그가 이룰 놀라운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가 볼 수 있어야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기 19장 15절에 보니,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치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호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찌며”라고 했습니다.

  가난한 자라고 해서 편을 들어주면 안 됩니다. 부잣집 아이하고 가난한 집 아이하고 싸웠습니다. 그러면 부잣집 아이만 혼내고, 가난한 집 아이를 끌어안으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또 세력 있는 자라고 해서 그를 두호하지도 말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은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 모두에게 공정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구의 편도 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잠언 14장 31절에 보니,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 형제가 좀 가난하고 볼품없다고 그를 학대하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 속에서 사람들을 차별하고 판단하고 어떤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지고 대한다면 그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멸하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모두를 귀하게 여기시되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해서는 안 될 이유는 우리는 은혜로 선택받았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읽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찌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아멘.
  하나님의 선택 때문입니다. 우리가 처음 부름 받을 때 우리는 참 별 볼일 없는 사람입니다. 때론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도 있겠고 가난한 사람도 있겠지만, 초대교회 교인들을 보면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국에도 초기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먼저 전파되었습니다. 그분들이 마음이 열려 있으니까요. 또한 어린 아이들에게, 노인들에게, 여인들에게 먼저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초대 교회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가난한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셨고 믿음에 부유한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저 약속의 천국의 기업을 그들에게 예비해 주셨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세 전에 하나님이 택하셨다고 에베소서 1장에 말씀하시는데,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조건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잘나서, 잘생겨서, 공로가 많아서, 업적이 많아서,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불러 주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도 우리가 정직한 일을 많이 해서, 착하게 살아서, 구제를 많이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닙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신 그 공로와 은혜 때문에 우리가 선택받고 부름 받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 내가 교회의 직분자가 된 것, 내가 교회의 목사가 되어 설교하는 것,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주위 사람들을 대할 때 은혜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아... 저 분도 저렇게 실수하고 어려워하는데...다 내 모습을 보는 것 같구나. 나도 이렇게 부족한 모습으로 여기 서있는데 저 분도 오직 은혜로 살면 큰 사람이 될 수 있겠구나’하는 마음으로 보셔야 합니다. ‘어떻게 저런 실수를 하고 어떻게 저런 잘못을 저지르지?’하는 마음으로 보시면 안 됩니다. 내가 입은 은혜처럼 그에게도 임할 은혜! 우리는 은혜의 시각으로 그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부르심 받을 때 어떤 모습이었는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건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초대 교회 교인들도 다 그들이 어려움 당할 때 부름 받은 것입니다. 사도들도 보십시오. 베드로, 야고보, 요한은 갈릴리에 어부 출신들입니다. 어부라는 직업은 그 당시에 가장 천한 직업에 속했을 것입니다. 또한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는 세관에서 일하던 세리였습니다. 세리는 그 당시에 자기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매국노처럼 그렇게 멸시받는 사람들이었지 않습니까? 이렇게 연약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은혜로 위대한 사도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의 은혜로 부르심 받았다면 우리도 우리 형제와 이웃들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 사람을 볼 때 그의 모습 그대로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아 저럴 수도 있겠구나. 저 사람을 보니까 우리 인간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네. 나도 저렇게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불러 주셨는데, 저 형제도 저런 실수를 거쳐서 이제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나게 된다면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날 수 있겠지.’하는 소망을 가지고 격려하고 기도해 줄 수 있어야지 비난하거나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사랑의 명령 때문입니다.

  8절과 9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청하리라.” 아멘.

  오늘 성경에 보니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법을 최고의 법이라고 말합니다. 이 최고의 법이 뭐냐. 원어로 보면 왕의 법입니다, 왕의 법. 이 로마 시대 때 이것이 기록되었기 때문에 로마의 법은 로마 황제가 한 마디 선포하면 그것이 최고 상위법입니다. 그 법을 능가할 법이 없고, 누구도 그 법을 어길 수 없습니다. 바로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사랑의 법, 이것은 바로 최고의 법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선생님, 가장 최고 되는 법이 무엇입니까? 최고되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리고 동시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 두 가지 법은 공존하는 법입니다. 둘이면서 하나인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찌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그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느냐 하는 것은 그가 형제를 어느만큼 사랑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남을 깔보고 우습게 알고 무시하는 사람이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법, 그것은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법입니다.

  레위기 19장 18절에서도 하나님은 이 계명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만약 모든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 법을 어기면 여러분은 모든 율법을 다 어긴 것과 똑같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10절에 보면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의 거침은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범죄 하는 것이라고 엄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그를 하나님의 귀한 존재로 차별 없이 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됩니다.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것은 긍휼을 베푸는 겁니다.

  성경 13절은 말씀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아멘.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때문에 우리가 멸망에 던져지지 않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를 법대로 심판하신다면 여기 살아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교회에서 회의시간이었다고 합니다. 회의에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논쟁이 벌어지니까 한 회원이 손을 들고 벌떡 일어나서 이야기 합니다. “목사님, 우리 법대로 합시다. 법대로!” 그 때 그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형제님, 만약 법대로 한다면 당신과 나는 여기 살아남아 있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법대로 한다면, 네 눈이 범죄 하면 눈을 뽑아서 없애고, 네 팔이 범죄하면 팔을 잘라 버려야지, 법대로 처리해서 여기 남아 있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그래서 우리는 은혜의 법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긍휼의 법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음을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는 너희도 긍휼이 여김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산상수훈의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18장에 보면,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의 얘기가 나옵니다. 어느 왕이 회계장부를 정리하다 보니까 한 종이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지금으로 계산하면 계산이 안 되는 몇 천억의 돈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갚을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도 이 왕이 선한 분이기 에 그 갚을 능력이 없는 걸 보고 빚을 다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사람의 기분은 날아갈 듯 했습니다. 그 좋은 기분으로 대문을 나서다가 길에서 자기 친구 하나를 만났습니다. 그 친구는 자기한테 백 데나리온을 꾼 사람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몇 백 만원쯤 되겠지요. 곧장 친구의 멱살을 잡고 법정으로 끌고 가서 그를 감옥에 가둬 버렸습니다. 얼마나 매정한 사람입니까?  인정머리라곤 하나도 없는 겁니다. 친구들이 보고 왕에게 가서 고했더니 왕이 분노해서 그 종을 다시 불러다가 일만 달란트를 다 갚기 전까지는 네가 감옥에서 나올 수 없다고 선언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오늘 우리를 향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너희가 형제에게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면 나도 너희에게 긍휼을 베풀 수 없노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무엇이라 말합니까?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긍휼이 없는 심판이 우리에게 닥쳐진다면 우리가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긍휼은 심판을 이깁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면 하나님께서도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때 늘 그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고 했습니다. 내가 형제의 죄를 덮어줄 때 하나님도 내 허물을 용서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깊이 생각해 볼 문제가 있습니다. 지난 가을 노회 때 구로동에서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운영하는 김해성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인 한사람이 필리핀에 관광을 갔는데, 공항에 내리자마자 필리핀 사람들이 달려와서는 “저... 저 놈, 한국 놈이라고!”소리지르며 쫓아와서 막 두들겨 패더랍니다. 왜 때리냐고 항변해도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경찰이 달려와서 뜯어 말렸습니다. 경찰이 자초지종을 물으니 필리핀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한국에 가서 노동자로 일했는데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핍박하고 폭행하고 임금도 안주고 못살게 굴었는지, 지옥같이 살다가 왔답니다. 필리핀에 돌아 왔지만 한국인만 보면 복수하고 싶다고 얘기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던 이 필리핀 경찰이 감동을 받아서 결국 같이 한국 사람을 때리더랍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필리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결국 공항에서 추방당하고 말았답니다. 한국 정부에 항의해도 소용없었습니다. 참 무서운 이야기입니다. 물론 특별한 예이겠지만, 우리가 우리나라에 와있는 외국인들에게 어떻게 대우하냐에 따라서 우리가 외국에 나가서도 어떤 대우를 받느냐가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제시대 때, 얼마나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까? 우리 민족도 먹을 것이 없어서 하와이로, 러시아로 이주하고, 저 중국 땅에 가서 나그네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던 우리가 우리나라에 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그렇게 학대하고 멸시한다면 얼마나 잘못된 일입니까? 긍휼 없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차별은 위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뜻이 아닙니다. 아무리 좋은 의미도 차별은 하나님이 반대하시는 것입니다. 교회 안이든 교회 밖이든 어떠한 차별이라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한 동시에 특별대우도 없습니다. 직분자든 평신도든 누구나 동등한 것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차별을 두어선 안됩니다. 차별은 늘 위험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사고가 나서 세 명의 흑인이 다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지나가던 차가 구급차를 불러줬습니다. 구급차가 오긴 왔는데 그 구급차 기사는 이 흑인 세 사람을 보더니 내 신조는 흑인을 내 차에 안 태우는 거라면서 그냥 가 버렸습니다. 다른 차를 가까스로 불러서 태우고 병원에 후송해 갔더니, 병원의 백인 의사가 딱 보더니 내 신조는 흑인을 치료하지 않는 거라며 진료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또 겨우겨우 흑인들이 치료받을 수 있는 병원에 갔더니 이미 두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이 간신히 숨을 유지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간의 잘못된 차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고 죽어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전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전도 대상자를 정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을 차별하지 마십시오. 그가 누구이든지,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병든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어린아이든, 대상을 제한하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이 와야 우리 교회에 어울리는데라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그가 누구든지. 그 영혼은 다 소중한 겁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들을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형제의 영혼이 가치 있기 때문에, 그도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바로 그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셨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차별 없이 그들을 교회로 초청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함께 예배드리고 함께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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