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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민족을 구원한 에스더의 결단 (에 4: 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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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7월 말 리투아니아 공화국에 주둔하고 있었던 스케아라 치우너란 일본인 총영사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아주 놀라운 광경을 목도하게 됩니다. 영사관 밖에 수많은 유대인 무리가 줄을 서 있었던 것입니다.
  연유를 알아보니, 나치의 핍박을 피해서 폴란드로부터 망명해 온 유대인들이 러시아, 일본을 거쳐서 카리브해로 가려고 비자 발급을 받기 위해서 줄을 서 있었던 것입니다.

  이 심각한 문제를 접수하고 총영사는 일본 정부에 전문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많은 유대인들이 일본을 통과할 비자를 발급받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일본 정부로부터 온 대답은 거절이었습니다. 총영사는 고민을 거듭하다가 또 한번 전문을 보내 사정을 했습니다. “이 많은 사람들을 그냥 두면 나치에 의해서 학살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일본 정부로부터 날아온 답신은 역시나 안된다는 회신이었습니다.

  스케아라 치우너란 총영사는 이 문제를 갖고 고민하며 기도합니다. 그는 일본의 미신을 믿었었지만 얼마 전에 기독교로 개종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냥 있을 수 있나, 내 신앙양심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됩니다. 그는 40대의 장래가 촉망되는 외교관이었지만, 나라의 명령을 어기고 그 유대인들에게 비자 발급 작업을 해 주기 시작합니다. 29일 동안 그 일에 전념을 해서 6000명의 비자를 발급해 주었습니다. 그 많은 유대인들이 그 비자 덕분에 러시아를 거쳐서 일본을 통과해서 카리브해로 나가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곧 이어서 본국으로 송환되어 지위를 박탈당하고 평범하고 가난한 삶을 살게 됩니다. 누가 물었답니다. “당신이 한 일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습니까?” “후회하지 않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후회란 없습니다. 생명을 구하는 고귀한 일에 동참할 수 있었다는 것만 해도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그는 이후 1985년, 이스라엘의 최고 훈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준다든가, 낙심과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소망을 줄 수 있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살하려고 했는데 나를 만나 생각을 바꾸고, ‘자살’을 ‘살자’란 말로 바꾸고 용기있게 인생을 극복해나갔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었겠습니까?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가장 귀한 일입니다. 아무리 급해도 119차, 생명을 싣고 나아가는, 건지는 그 차가 우선입니다.

  구약의 많은 인물들 중에서도 모세를 존귀히 여기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이백만을 이끌고 홍해를 건너 가나안 땅까지 나아갔습니다. 그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 모세는 귀중하게 쓰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도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복된 생애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에스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바벨론 제국이 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그 페르시아 제국 시대 때 이스라엘에서 포로로 끌려온 한 아름다운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부모도 없었습니다. 사촌 오빠 모르드개에 의해서 양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외모도 아름다울뿐더러 마음씨도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심도 돈독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이 페르시아에 아하수에르 왕의 부인인 왓스디가 왕의 명령에 불순종해서 폐위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왕비를 선택하는데 바로 이 에스더가 간택을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 불쌍한 포로 소녀가 아하수에르 왕의 부인이 되어서 왕궁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사촌오빠 모르드개는 수문장의 직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늘 왕궁을 출입하는 사람들을 돌보고 검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나라에 하만이라는 재상이 있었는데 그가 왕 다음 가는 권력자였습니다. 그가 늘 성문을 출입하는데, 이 모르드개라는 수문장은 자기에게 인사를 크게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예의를 갖춰 목례는 하지만 엎드려 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아니, 이 건방진 놈이 있나.’ 그가 누군지 알아보니 마침 유대인이었습니다. ‘아, 유대인 모르드개구나. 내가 이 유대인을 그냥 둘 수 없지...’하고 음모를 꾸미게 됩니다.

  사실 이 하만을 소개할 때 아각 사람 하만이라고 하는데, 아각 사람이란 얘기는 아말렉 출신이라는 얘기입니다. 성경에 보면 아말렉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아말렉 족속은 사단의 대명사로 쓰입니다. 이 하만은 유대인들을 다 전멸시키기 위해서 왕에게 나아가서 날조된 이야기를 고해 바칩니다. 왕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지 않은 한 민족이 있는데 바로 유대민족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들을 다 멸할 수 있도록 허락 해 주십시오. 만약 그들을 제거할 수 있다면 왕의 창고에 은 일만 달란트를 드려서 왕에게 부요함을 드리겠습니다.”하고 아룁니다.

  왕은 진상을 소상히 알아보지도 않고 이 하만 재상의 말만 듣고 유대인들을 몇 날 몇 일에 죽이라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자, 이제 큰 일 났습니다.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모여서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문을 듣고 에스더 왕비가 모르드개에게 사람을 보내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자초지종이 이러했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 왕비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또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수산궁에서 내린 조서 초본을 하닥에게 주어 에스더에게 뵈어 알게 하고 또 저에게 부탁하여 왕에게 나아가서 그 앞에서 자기의 민족을 위하여 간절히 구하라 하니” 아멘. 

  위기에 빠진 유대민족을 구원해 달라고, 왕에게 나아가서 구명 운동을 벌여달라는 얘기입니다. 이에 에스더는 난색을 표합니다. 그녀의 답신은 “당신도 알지 않습니까? 우리 이 페르시아 제국의 법은 왕이 부르지 않으면 나갈 수 없습니다. 부르지 않는데 나아갔다간 곧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왕비도 예외가 아니지 않습니까?” 아마도 경호법에 따라서 외부인은 허락 없이는 왕에게 나아갈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왕에게 나아갔다가 왕이 혹 금홀을 내어주면 구원을 받지만, 금홀을 내어주지 않으면 즉시로 죽임을 당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왕이 처음과 같은 사랑이 식어서 그런지, 아님 국사에 바빠서 그런지 자기를 부르지 않은지가 30일이 넘었다는 것입니다.

  머뭇거리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는 다시 편지를 보냅니다. “너는 왕궁에 있으니 홀로 면하려고 생각지 말라. 네가 만약 잠잠히 있으면 우리 유대인은 다른데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할 것이다. 네가 왕비를 얻은 것은 바로 이 때를 위함이 아니겠느냐”하면서 간절히 에스더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에스더는 그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며 고민하다가 드디어 결단했습니다. “궁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3일 동안 밤낮으로 기도해주십시오. 나도 기도하고 왕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규례를 어기고 나아갈 것입니다. 죽으면 죽을 것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죽으면 죽으리라!”

  에스더는 자기 민족을 구원하기 위한 비장한 각오를 하고 왕 앞에 기도하고 나아갑니다.  두 번이나 왕을 초청했고 잔치를 벌였습니다. 하만 재상을 거기에 초청했습니다. 그 와중 에 왕이 하만 재상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만의 음모가 다 드러나게 됩니다. 결국 하만은 자기를 미워하는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려고 했던 장대 끝에 자기가 매달려 죽임을 당하고, 하만의 열 아들이 다 죽임을 당하며 유대인들은 그 날 구원을 받고 축제의 날로 지킵니다. 그것이 바로 부림절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 한 민족을 구원하는 일은 너무나 귀한 일입니다. 오늘 에스더의 결단이 없었다면 어찌 유대 민족이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우리는 이 아름다운 본문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나만 안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말합니다. 너만 홀로 왕궁에 있다고, 이 화를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언젠가는 네가 유대인이란 신분도 발각날 것이고, 그렇다면 너도 안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그 말은 틀립니다. 사촌이 잘 되어야 나도 잘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 되어야 나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옆에 계신 분께 얘기해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잘 되어야 나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이 아니라 기뻐해야 합니다. 땅 사면 보통 부자가 아니거든요. 남이 잘 되야 나도 잘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잘 되어야 우리 모임이 잘될 수 있습니다. 가족이 잘 되고 직장이 잘 되야 내가 잘 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교회가 잘 되야 나도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요 각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나와 남을 엄격히 구분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유기체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자기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에는 3無가 있다고 합니다. 무관심, 무책임, 무감동입니다. 사람들은 남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무관심합니다. 남이 죽든 말든 나랑 상관이 없습니다. 책임감이 없습니다. 가정이야 어찌 되었든 상관 없습니다. 나만 잘되면 된다는 무책임이 팽배합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잘 감동받지 않습니다. 무감동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이웃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면 이것은 이기주의의 출발인 것입니다. 나만 잘되면 되고, 내 가족만 안전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나만 잘된다고 가능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옆집에서 불 나면 바람타고 우리 집까지 불이 타오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전염병에 걸리면 나도 전염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다 잘해야 합니다. 나만 홀로 안전하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하나 예수 믿고 구원받으면 되는 거지, 남이야 구원받든 말든 무슨 상관 있어?”하고 생각하십니까? 특별 새벽 집회를 하든지, 초청 잔치를 하든지 맘대로 하라고 나랑은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깊은 이기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좋은 직장 다니고, 좋은 대학 나왔고, 나 구원받았으니 내 가족 행복하면 되었지 남이야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어?’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각이 아닙니다. 우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질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배 고픈 노인이 길을 지나가다가 주머니에 동전 한 푼이 없어서 빵집에서 빵을 하나 슬쩍 했다가 고발당했습니다. 법정에 서게 되었는데 판사가 노인의 얘길 들어보니 너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남의 것을 훔쳤으니 절도죄에 해당했습니다. 그래서 50불의 벌금형에 처했습니다. 그리곤 판사는 일어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 노인이 먹을 것이 없어 남의 빵을 훔쳤다면 그것은 이 사람만의 잘못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굶어죽어가는 이웃이 있음에도 우린 배불렀습니다. 헐벗은 이웃이 있음에도 우린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입니다. 저도 책임이 있습니다. 이 분의 벌금 50불 중 20불은 제가 내겠습니다. 내 책임입니다.” 그리고는 판사의 모자를 벗어서 참석한 온 배심원들에게 돌렸습니다. 그 분들도 다 거기에 벌금을 냈습니다. 그 돈이 약 200불이 되었습니다. 그 중 50불은 벌금을 내고 나머지 150불은 이 노인이 마음껏 식사할 수 있도록 선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이웃에게 무관심 한 것,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마지막 심판에서, 내가 병들었을 때 네가 나를 찾아왔고, 내가 감옥에 있을 때 나를 돌보았고 내가 목마를 때 네가 먹을 것을 주었다고 했습니다. 제자들은 의아해서 “아니 언제 제가 주님께 그렇게 했습니까?”하고 반문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가장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라”

  사랑하는 여러분, 나와 남을 너무 엄격히 구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불행 하다면 나만 행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남을 배려할 수 있는 공동 운명체임을 의식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 이 본문 속에서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않을 때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읽습니다.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아멘.

  에스더는 왕비라는 높은 직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기 동족이 어려움 당하면 당연히 그들을 도와야 합니다. 왕에게 나아가서 구명 운동을 벌여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네가 만약 잠잠히 있다면, 말이 없다면 유대인은 다른 데로부터 구원을 받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집은 멸망할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다하지 않을 때 거기에는 심판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명령이 무엇입니까? 복음 전파의 명령입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너희는 말씀을 전파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을 제자를 삼으라”고 했습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우리에게 전도의 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전도의 명령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될 일을 다 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주님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7장에 보면, 북이스라엘이 이 아람에 의해서 포위를 당하고 성이 완전히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몇 달 동안 그 포위가 지속되니까 양식이 떨어져서 서로 아이들을 잡아먹는 그런 비참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성 밖에 있던 네 명의 문둥병자가 굶어죽을 바에는 아람 진영에라도 가 보자해서 적진에 가봤더니 마침 그들이 다 도망가 버리고 먹을 것이 쌓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실컷 먹었습니다. 실컷 먹다보니까 성 안에 굶주려 가는 사람들이 생각났습니다. 이제 문둥병자들은 말합니다.

  “우리의 소위가 선하지 못하도다. 오늘날은 아름다운 소식이 있는 날이어늘 우리가 잠잠히 있도다. 만일 밝은 아침까지 기다리면 벌이 우리에게 미칠지니 이제 떠나 왕궁에 가서 고하자”고 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새벽 미명에 왕궁에 가서 여기 양식이 싸여 있다고 적진은 물러갔다고 그들은 기쁜 소식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잠잠히 있다면 벌이 우리에게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에스겔서 3장 10절에 보니,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네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울지라”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네가 만약 깨우치지 않아서 그들이 죄 값에 죽는다면 그 피 값을 바로 네게서 찾겠다는 것입니다.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자기 죄 때문에 죽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당연히 복음을 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하지 않는다면 그 책임을 나에게서 찾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옆집의 이웃이 만약 이 땅에 살다가 예수님을 모른 채 죽었다면 예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예수님이 물으실 겁니다. “아무개야, 너는 왜 나를 믿지 않고 이렇게 지옥에 가려고 왔느냐?” “우리 앞 집에 영신교회 나가는 권사님이 한분 계시는데 나한테 한 번도 전도를 안 했습니다. 어쩌다 지나가는 빈말로 했지만 그것은 진실한 말이 아니고 그 때 고지서 때문에 한번 싸우고는 말도 안합니다.”하고 대답했다고 칩시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그 책임을 누구에게 찾겠습니까. 앞 집 권사님한테 찾을 것입니다. 세 든 그 사람의 주인한테 찾는 것입니다. 당연히 복음을 전해야 할 위치에 있으면서도 내가 그 복음을 전하지 아니했다면 그 책임이 바로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말하기를,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부득불 할 일이라. 내가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화가 임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자리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
  여러분 죄가 무엇입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서 어려움 당할 때, 레지스탕스 저항 운동을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갈 즈음에 한 젊은이가 그들에게 붙들려서 사형대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젊은이는 말합니다. 자기는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나치에게 협조한 적도 없고, 총을 들고 싸운 적도 없는데 왜 나를 죽이려고 하냐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고 항변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젊은이가 이 사람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피 흘리고 죽어가고 있는데, 당신은 아무것도 안했다니요. 그것이 바로 당신이 죽어야 할 이유입니다.”

  아무것도 안 한 것, 그것이 죄입니다. 사랑의 반대가 무엇인지 아시지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 아닙니다. 무관심입니다. 무관심. 복음을 전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웃에게 무관심했다면 그것이 바로 가장 큰 죄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해야 될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복음을 전해야 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가장 큰 죄인 것입니다. 해야 될 일을 하지 않을 때 심판이 있습니다.

  세 번째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있다면 희생이 없이는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에스더 왕비는 이 이야기를 듣고는 고민하다가 결단합니다. “내가 왕 앞에 기도하고 나아갈 것입니다. 죽으면 죽을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읽습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대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아멘.

  에스더는 이제 홀로 안전하게 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내어 던졌습니다. 생명을 내어놓고 왕에게 나아갈 것이라고 죽을 각오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말을 우리가 경청합니다. 에스더는 죽기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하고 왕 앞에 나아갈 때 자기 민족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일, 가치 있는 일은 희생이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예배드립니다만 이 예배당을 위해서 많은 분들이 희생하셨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매일 출근하다시피 수고하신 분들이 있고, 자기의 귀한 재물을 건축물로 드려서 이 벽돌을 쌓아가게 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또 이 일을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하신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이 아름다운 예배당이 여기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의 희생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저와 여러분이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이 십자가에서 부끄러움을 당하시고 수치를 당하시고 피를 흘리시고 죽으셨기 때문에 오늘 저와 여러분이 구원의 축복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영국의 유명한 캠브리지 대학 출신에, 지식인이고 스포츠 스타인 씨티 스터드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분은 대학 졸업 후에 보장된 출세 길을 버리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프리카 밀림 지역으로 선교사로 떠나기를 다짐했습니다. 누가 와서 묻습니다. “당신같이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 왜 그런 어려운 일을 하려고 하십니까? 정말 그 희생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때 스터드는 이렇게 말했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참으로 희생당하셨다면 내가 그분을 위해서 희생하는 이것이 무슨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이 나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놓은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희생이 없이는 위대한 열매가 맺어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이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내고, 물질을 투자 하십시오. 점심도 함께 드시고 선물도 준비하세요. 그런 희생 없이 어찌 한 영혼을 구원 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돌아보면, 괜히 불필요한 모임에 갔다가 시간 낭비하고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병원에 돈 갖다 주기도 하고, 남의 차를 받아서 비용을 물어줄 때도 있지 않습니까? 아들이 사고를 쳐서 그 사고를 수습하느라고 돈을 쓸 때도 있잖아요. 물론 그것도 필요한 돈이지요. 그러나 정말 영혼을 구하는 일에 우리의 돈을 투자 할 수 있다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여러분들이 이번 초청 잔치에 만원, 이 만원 쓰시기 바랍니다. 여유가 있는 분들은 5만원, 10만원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기억하십니다.
  희생 없이는 열매가 일을 수 없습니다. 그 정도의 희생과 그 정도의 헌신으로 영혼들이 구원 받을 수 있다면 이것 처럼 위대한 투자가 어디 있을 까요? 전 여러분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서 여러분 자신을 드릴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만사를 해결하는 길은 기도 밖에 없습니다.

  오늘 에스더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먼저 에스더가 왕에게 편지를 쓸 수도 있겠지요. 왕이시여 당신을 꼭 만나야 되겠으니 나를 불러달라고, 아니면 왕이 볼 수 있는 창문 앞에 가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왔다 갔다 하다가 왕의 눈에 띌 수 도 있겠지요. 그러나 에스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했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우리 인생의 위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해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힘이고 능력이고 파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전도할 때도 가장 주요한 무기가 있다면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인생의 위기 가운데 있을 때, 벼랑 끝에 있을 때 먼저 기도의 무릎을 꿇으셔야 합니다.

  어제 우리 교회에서 등산 선교회가 멀리 등산을 갔습니다. 누군가가 저의 집사람을 유혹해서 거기 가는 바람에 제가 저녁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목사님들하고 저녁을 먹으려고 했더니 부목사님도 두 분 밖에 없어서 교인들 전화 심방하느라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저녁을 사준대도 싫다고, 도저히 시간을 못내겠다고 해서 혼자 가서 저녁을 먹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교회 앞에 교인이 운영하는 집이 있어서 4000원짜리 스파게티를 먹었습니다. 그 여주인이 이렇게 묻습니다. “목사님, 제가 하나님 앞에 떼를 쓰면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까요? 간절히 구하면 하나님이 뭔가 해결해 주실까요?"
  제가 뭐라고 대답할까 하다가, "예! 성경에도 부르짖으라 그러면 응답하신다고 했잖아요.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응답하실꺼예요.“라는 대답을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누가 복음 18장에 나오는 어느 과부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한 한 과부가 있었는데 뇌물만 좋아하는 불의한 재판장이 해결을 안 해줍니다. 과부가 아침, 저녁으로 가서 내 원한을 풀어 달라고 재판관을 괴롭힙니다. 불의한 재판장도 결국은 이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결론이 무었입니까? 누가복음 18장 7절에 보니, “하물며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불의한 재판장도 그러할찐데 선하신 하나님이 어찌 너의 부르짖음을 외면 하시겠느냐”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위기를 당할 때 주님 앞에 먼저 부르짖어 기도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할 것이다. 너희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찾을것이고 얻을 것이요 문이 열릴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김소월의 “초혼” 시를 소개하곤 합니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 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허무한 이름이지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은 결코 허무한 이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부를 때 마다 응답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이름을 부르면 거기에 치유가 있고 구원이 있고 문제 해결의 길이 있습니다.

  오늘 에스더는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전 민족이 몰살당하는 위험한 위기 앞에서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고, 결국 그는 응답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은 이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누리고 있는 모든 축복들, 특권들, 여러분의 은사와 재물과 시간과 가정과 직장이 모두 이 때를 위해서 준비된 것이 아닐까요? 바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여러분의 모든 특권들을 사용하라고 그 자리에 세워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것이 아마 가장 가치 있는 일일 것입니다.

  제가 종종 소개하는 황수관 박사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그는 고등학교 교사였습니다. 그러다가 대학원 졸업하고, 박사과정 마치고, 대구 지역의 어느 조그만 대학에 무명의 교수로 있었습니다.
  한 날은 춘천에서 교수 세미나가 있어서 참석하고 기차를 타고 오는데, 옆에 연로한 한 점잖은 신사가 앉아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 분에게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자기 교회 전도지를 꺼내서 “예수 믿으라”고 전도를 열심히 했습니다.
  노인 신사가 한 동안 듣더니 빙그레 웃으면서 “선생님을 보니 참 제가 부끄럽습니다. 사실은 저도 예수 믿는 사람인데 전 남에게 전도를 해 본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의 용기가 너무 부럽습니다.”하고 말을 건네더랍니다. 그러면서 서로 통성명도 하고 대화하는 중에 서로가 교수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뜻밖의 제안을 했는데, “마침 우리 연세대학교에서 교수 한 명을 구하고 있는데 선생님의 전공하고 똑같으니까 우리 학교에 한번 원서를 내 보시죠. 제가 힘 닿는 대로 도와 드리겠습니다.”하더랍니다. 이래서 이 무명의 지방대학교 교수가 연세대학교에 원서를 냈는데 당당히 합격했다는 것입니다. 출세한 것입니다. 지금은 더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CF 한번 찍으면 일억입니다. 일년동안 벌어도 우리는 일억을 못 버는 데 십분 동안 CF 한 장 찍어 일억을 번답니다. 국회의원은 안 나왔으면 더 좋았을 뻔 했는데, 나왔다 떨어지셨고 지금은 장로님이 되셨습니다. 원래는 권사님이셨는데 그렇게 소원하셨던 장로님이 되었다고 참으로 좋아하신답니다. 여러분, 지방 대학의 무명의 교수가 열심히 복음을 증거하다 보니,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유가 있으면 전도를 하겠지만 나도 먹고 살기 힘들고, 직장도 어렵고, 내 사업도 어려운데 전도할 새가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 여유가 있어야 하죠.”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마태복음 6장에 보니, “너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면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워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전도하십시오. 직장에서, 이웃에게, 시장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도 책임지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다니엘서 3장에서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하는 자는 궁창에 별과 같이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 올 것입니다. 시간을 투자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인생을 연장시켜주실 것입니다. 전도하는데 한달을 썼다면 아마도 5년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실 것입니다. 전도하는데 물질을 투자했다면 하나님이 그 이상으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전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셔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는 우리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영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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