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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자기 은혜를 아는 사람 (마 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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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복잡해지고 살아가는 것이 어려운 현대인에게 가장 근본적이고 원초적인 병이 바로<우울증>과<열등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우울증>이라는 병은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이랍니다. 약으로도 수술로도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랍니다. 이 우울증이 무서운 것은 자기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더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심한 우울증의 결론은 자기가 죽던지 아니면 남을 죽이던지 거기까지 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울증은 정신적으로 이미 자살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만큼 무서운 것입니다. <정신적 만성 자살 상태>가 우울증이라고 할 만큼 아주 무서운 것입니다.

또 하나는<열등감>입니다. 이 열등감의 시작은 어디입니까? 끝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 평가하는 이 비교의식에서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문제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스스로 자기를 불행하다고 비하시켜서 열등한 자신을 만들어 버립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형태로 어떻게 나타나느냐하면 현실 속에서 주어진 은혜를 생각해야 되고, 내가 처한 처지 속에서 절대적 은혜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기 자신이 입은 은혜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자기 존재도 잊어버립니다. 거기서 정신적인 무서운 질병, 고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현대인은 누구나 이<우울증과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누구나 열등감을 가지고 살고 조금의 우울증세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처럼 어려운 때는 남과 비교해서 남이 나보다 더 잘 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남이 잘 되면 상대적으로 내가 못된 것 같아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내가 어려움을 겪을 때는 그도 같이 겪었으면 좋겠고, 나에게 불행이 오면 그에게도 같은 불행이 왔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유능하고 우수한 상대방을 이기기 위해서 정당한 경쟁이 아닌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압도하고 지배하고 음해하려는 이른바<가인 콤플렉스>가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자신에 대한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문제 이 비교하는 중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일어나고 그리고 중요한 결론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결론의 핵심은 자신에 대한 문제를 볼 때는 주님과 나와의 문제로 볼 때가 가장 공평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불공평 하게 보입니다. 우리들의 중요한 문제는 어느 잣대로 세상을 보느냐? 어떤 시각에서 나 자신을 평가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분명히 깨달아야 할 바는 다른 사람에 대한 것과 나 자신에 대한 것을 내 시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중요하게 여기고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참으로 필요함을 알아야합니다.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를 내 기준에서 비교하기 시작하면 어느 사이에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잃어버리고 원망하게 됩니다. 어느 사이에 신앙에서 가장 경계해야할 원망과 불평으로 바꾸어지고 맙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을 보면 기회라고 하는 것은 평등하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미 기회를 잃어버린 자라 할지라도 한번쯤은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은 주인의 큰 뜻이며 큰 긍휼입니다. 여러분 기회는 누구에게나 이미 공평하게 주어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포도 과수원을 경영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포도가 많이 열려서 마지막에 익을 때가 되면 일조량이 중요한 가름이 된다고 합니다. 햇빛을 몇 시간 더 받느냐에 따라서 당도가 달라진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될 수 있으면 햇빛을 많이 받아가지고 당도가 높도록 기다려야 되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뒤에 우기가 따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곧 비가 오는 계절이 온단 말입니다. 만일에 조금 더 기다리다가 그대로 비바람이 몰아치면 그 해 포도 농사는 다 망치는 겁니다. 그래서 문제가 뭐냐 하면 일찍 포도를 따자니 당도가 낮아서 상품이 안 되겠고 좀 기다렸다가 따자니 언제 비가 닥칠지 몰라서 다 망치겠고 초조하게 기다리다가 포도를 딴다 할 때는 그야말로 온 동네가 다 동원되어서 포도를 따야 됩니다. 일손이 있는 대로 필요한 것이지요. 오늘 본문에도 주인이 다급하게 아침이 일찍, 오전9시에, 그리고 12시에도 오후3시에도 심지어는 저녁5시에도 거리에 나서서 일꾼을 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래서입니다. 마지막 5시에 포도원에 들어간 사람은 1시간 밖에는 일하지 못했습니다. 한 시간밖에 없는 그 사람에게도 일 좀 해달라고 합니다. 그 까짓 한 시간이 아니라 한 시간도 소중하니까 내 포도원에 가서 일을 좀 해달라고 재촉합니다.

새벽에 일찍 나간 사람이나, 저녁 늦게 나간 사람에게나 현재라는 시간에서 공평하게 일이 주어집니다. 여러분, 젊은 사람이라고 기회가 많고 늙은이라고 기회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새벽에 나간 사람을 젊은이라고 합시다. 5시에 나간 사람은 이제 끝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입니다. 그러나 기회는 공평하게 주어집니다. 현재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공평한 것입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나 젊은 사람이나 건강한 사람이나 병든 사람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현재라고 하는 입장에서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한 데나리온을 주마.” 하고 공평한 약속을 했습니다. 똑 같은 기회와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는 이것이 주인의 입장이고 하나님의 입장입니다.

자 그런데 이제 문제가 있습니다. 일이 끝난 다음에 품꾼들을 불러서 품값을 당석에서 줍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주었다는 겁니다. 1시간 밖에 일안했는데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그 다음사람도 한 데나리온, 그 다음 사람도 한 데나리온, 아침부터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합니까? 10절에‘저 사람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었으니까 적어도 우리에게는 서너 개 주겠지.’하고 기대했는데 역시 한 데나리온만 줍니다. 여기서 원망을 합니다. 사실 원망할 만하죠.“하루 종일 일한 사람과 잠깐 밖에는 일하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똑같은가!”불 공평한거죠.

우리들도 충분히 그들의 불평과 원망이 공감 가는 부분입니다. 자,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냉정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볼 게 있습니다. 일찍 온 사람과 늦게 온 사람을 비교하면서가 아니라 주인과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원망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인과 내가 애당초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지 않습니까? 주인과의 관계에서 보면 일거리가 없었으면 굶을 뻔했는데 하루일 잘하고 품삯도 받았다는 것만을 가지고도 감지덕지 한 것이거든요. 그런데 내 마음에 불만이 생기고 불평이 일어나는 것은 왜입니까?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이 대우받는 것이 마음에 안 들어서 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니까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심리학 이론 중에<교류분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인간상을 네 가지로 분류해서 생각합니다. 첫째는 자신에 대해서는 긍정적이고, 남에게 대해서는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감은 있는데 남을 멸시하는 교만도 있습니다. 자신에 대한 문제는 다 긍정적이고 남은 항상 부정적으로 보는 이 평가기준 때문에 늘 불행합니다. 또 하나는 자신에 대해서는 부정적이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남을 부러워하며 남의 처지가 좋아 보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자식은 잘된 것 같고 내 자식은 잘못된 것 같고 심지어는  남의 남편은 훨씬 좋게 보이고 내 남편은‘어이구 지지리 복도 없지 어쩌다 저런 게 걸렸나?’이렇게 생각한답니다. 항상 내 것은 나쁘고 남의 것만 좋아 불평입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자기에게 대해서도 부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한마디로 염세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세상 다 망한 것처럼 비관적이고 모든 게 부정적이고 불평과 원망거리로 밖에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에 대해서도 긍정적이고, 남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나 자신도 행복하고 남도 행복하게 봅니다. 남을 부러워 할 것도 없고 더불어 행복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본문에 두고두고 생각해야 할 귀중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인의 말입니다.“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무슨 말입니까?“네가 받은 것이 은혜라고 왜 생각을 못하느냐? 내가 너를 부르지 않았다면 너는 하루 종일 장터에서 놀고 공쳤을 거 아니냐? 내가 너를 불렀기에 하루 일했고 또 품값도 받는 것 아니냐? 네 것, 그것이 많던 적던 내가 본래 너와 약속한 것 아니냐? 너와 나와의 약속이 한 데나리온이다. 이것은 정당하게 받은 것이다. 합당하게 받은 것이요 또 은혜롭게 받은 것이다.”얼마나 중요한 얘깁니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절대적 은혜 다시 한번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이 더 받든 덜 받든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재밌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누가 유머를 이야기하면 듣는 사람들의 반응이 나라별로 다르답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벌써 생각이 많아서 말하기 전에 웃는답니다. 영국 사람들은 말을 다 듣고 나서 웃고요, 독일 사람들은 다음날 웃는답니다. 한국 사람들은 다른 사람 웃는 것 보고 웃는다고 합니다. 뜻을 알고 웃는 게 아니에요. 남이 웃으니까 따라 웃는 겁니다. 웃는 일 하나만도 이렇습니다. 내가 웃고 내가 기뻐해야지 다른 사람 따라 웃는다는 건 너무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오직 은혜로 내가 있게 하시고 잃어버린 기회도 꾸짖지 아니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우리에게 주시며 오늘도 말씀하십니다.“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오늘 본문의 주인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너무 감사한 일이 일을 했으니 돈을 주는 게 아니고요, 돈을 주기 위해서 일을 시킨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마지막 한 시간 그것마저 얻지 못했더라면 어떻게 될 뻔 했습니까? 우리들이 잃어버린 기회, 우리들로는 만회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고 또 새로운 은혜를 베푸십니다. 현재라고 하는 시점에서 누구둔지 주어진 기회는 공평합니다. 과거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오늘 내가 오늘 얼마나 절대적 은혜에 감사하면서 사느냐가 문제입니다.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내가 사는 이 현시점, 이 현실 이대로가 내게 주신 가장 큰 은혜요,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 역사 합니다. 이 기회를 통해서 역사 합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도바울은 늘 간직하고 있는 신앙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은혜, 내게 향하신 경륜, 내게 주신 사명, 그 속에 사도바울의 모습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가 뭡니까? 그것을 소중히 여기십시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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