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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적 성공자의 자세 (창 3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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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600명이 죽은 유명한 나치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있습니다. [빅 프랭크]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정신과 의사로서 많은 고난을 겪은 후에 인생에는 세 가지 중심적인 가치가 있다고 말하면서 그 가치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첫 번째는<경험적 가치>라고 했습니다. 누가 한 어떤 경험일지라도 그 경험은 소중히 여겨주어야 하며 그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창조적인 가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성공적인 일도 있고 실패하는 일도 있지만 그 어떤 일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새로운 일을 창조해 내는 창조적인 가치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가 중요한데 그것은<태도적인 가치>라고 했습니다. 그는 이런 예를 말합니다. 가령 누군가가 불치병에 걸렸다고 합시다. 병 걸려서 죽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할 것도 없고, 어떻게 하면 고칠까 몸부림 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죽는다고 하는 사건 앞에서 이제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내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태도 적 가치, 이 세 번째<태도 적 가치>가 참으로 귀하다고 역설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만약에 불치의 병에 걸렸다면 이런 태도를 가질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사람을 우리는<주도적인 인간>이라고 말하는데 이<주도적>이라는 말은<성공한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이라는 베스트셀러를 쓴[스티븐 코비]가 그 책에서 강조하는 특징입니다. 성경 잠4장23절의“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앙적인 주도적 마음가짐이 성공의 원칙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주도적이라는 말을 잘 생각해 보면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환경을 탓하지도 않고, 환경을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성공적인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현실이라고 하는 환경을 언제나 최선의 기회로 삼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원망하지 않습니다. 내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도 않습니다. 환경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와 자세가 그 인생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요셉이라는 사람을 봅니다. 그는 신앙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대표자입니다. 그의 성공을 단지 애굽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강대국의 총리대신이 되었다고 해서가 아닙니다.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는 신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자기 자신 앞에 신실한 사람이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를 믿어주었고, 진실을 믿어주었고, 그 능력을 믿어주었습니다. 좀더 나아가서는 그는 자기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신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일하게 하고, 다른 사람까지도 능력 있게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비록 현실적으로 육신적인 노예였지만 정신적으로는 주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주목해야합니다. 요셉이 어렸을 적에는 많은 형제들 가운데 유달리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가 노예로 팔려간 다음에는 많은 노예 중에서도 특별히 인정을 받고, 많은 사람에게 신임과 존경을 받고, 오늘 성경말씀대로 가정 총무가 되었습니다.“아무 것도 관계하지 말고 네 맘대로 해라.”고 모든 것을 내 맡길 만큼 신임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가 하면 죄수가 되었을 때마저도 같은 동료 죄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왕 앞에 섰을 때에 전적으로 왕의 은총을 입었던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그가 가진 인격, 인품, 그것 자체가 이미 성공입니다. 정말 환경과 관계없이 살았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바뀌든 그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진실했고 끝까지 성실했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정말 요셉이 성공적인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요셉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가 과거의 노예가 되질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지난날을 생각해보면 가슴을 칠 노릇입니다. 형이 동생을 팔아먹었습니다. 그것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노예로 한번 팔리면 일생 노예입니다. 그 자손도 노예입니다. 차라리 죽이는 게 났지 그 비참한 노예로 동생을 팔아먹었습니다. 친형들이 동생을 노예로 팔았는데 이렇게 팔려간 요셉입니다. 그 한을 생각한다면 억울하고 분해서 아마 정신병이 돼 죽거나 가슴이 터져서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과거로부터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요, 한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한을 가지고 사는 민족이라고 합니다. 한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어려운 고비를 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한풀이에 남은 일생을 다 바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은 한입니다. 그것으로 지나가야지 이제 그 한을 풀어 보겠다고 거기다가 운명을 건다면 또 하나의 비참한 인생을 시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지난날의 억울한 것도 억울하지만 이제 또다시 소중한 현재와 미래를 그 과거에 바쳐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과거 때문에 현재를 망치고 미래를 망쳐야 되겠습니까? 오늘 요셉이 훌륭한 점이 그것입니다. 그 억울한 한을 품고도 자유 했습니다. 막말로 하자면 잘해도 노예고 못해도 노예고 노예로 살다 노예로 죽을 것인데 진실할 건 뭐 있고 충성할 건 뭐 있습니까? 모든 노예가 그랬듯이 요셉도 이런 생각 속에 하루하루를 살수도 있었거든요. 새삼스럽게 도덕성을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아무 소망도 없는 노예생활 속에서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도 진실하게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는 분명 노예입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는 노예입니다. 노예는 노예인데 우등생 노예입니다. 진실하게, 정직하게 살아서 주인의 신임을 받는 노예입니다. 노예이면서 주인 되려고 바득바득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내가 노예로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루아침에 무엇을 뒤바꿔놓으려고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에 있어서 우등생이 되어야 되겠다고 생각해 보셨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현실을 가장 귀한 기회로 사용해서 현실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인생의 우등생이 되는 길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매사에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입니다. 고치기 힘든 망할 병입니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원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우등생이 되면 됩니다. 아버지로서, 며느리로서, 가난한 대로, 현실 속에서 최고의우수한 사람으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더욱 중요한 것은 요셉이 하나님의 사랑에 정체의식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했습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는 경건하게 신앙인의 정체의식을 분명히 하고 거기다가 운명을 걸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신앙이 있어야합니다. 무슨 불만이나 원망이 생기거들랑 생각해 보십시오. ‘이게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해야 할 불평인가?’,‘내가 정말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면 얼른 정신 차리십시오. 나도 망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살든 죽든 진실할 것이요 성실할 것이라는 요셉의 이러한 삶의 모습이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삶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자세히 보면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시고 보디발의 집에 복을 내렸다 그랬습니다. 3절에 보니까 보디발이 그것을 압니다.‘우리 집의 형통이 저 사람 때문이구나. 저 하나님을 섬기는 요셉으로 인해서 우리 집이 복을 받는구나.’보디발이 알게 됩니다. 그로부터 요셉은 복의 근원이 됐습니다.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확신을 주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요.“저 사람같이 살려면 내가 하나님을 안 믿고 만다.”그런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순간순간 신앙인으로서의 내 삶의 위치를 확인해야합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독일의 철학자[임마누엘 칸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언제나 세 가지 질문에 도전을 받고, 이에 응답하면서 살아가야한다.”고 하면서 그 첫 번째는<무엇을 알 수 있느냐?>라는 질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식에 대한 도전입니다. 꼭 알아야 할 것은 알아야하지만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아서 불행해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이 많은 지식의 세계에서 꼭 알아야 할 것을 알 때,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 때, 꼭 알지 말아야 할 것을 알 때에 따라서 그 운명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강한 도덕성을 말합니다. 반드시 행해야 할 일을 많이 해야 하는데 하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만 잔득해놓고 후회하고 뉘우치는 사람처럼 비참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차피 다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로 꼭해야할 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나가는 사람에게 지혜와 성공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는<무엇을 소망하고 있느냐?>에 대한 질문입니다. 내가 행하는 현실이 무엇을 바라보고 하느냐는 것입니다. 특히 신앙인이라고 하는 우리들은 이 질문에 민감해야합니다. 신앙인으로서의 내 생각, 내 행동이 미래적 의미를 지닌 것이냐,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이냐를 생각해 보라는 말이지요. 이 질문에 바른 응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바른 인간으로 살아가는 길이요, 바른 신앙인의 자세라고 합니다.

중국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군자가 가지는 수치>가 있다고 합니다. 흔히 말하기를<군자오치(君子五恥)>라 하여 군자의 다섯 가지 부끄러움이 있는데, 첫째는 예의를 갖추지 못하면 군자로서의 수치요, 두 번째는 마음속에 성의가 없는 것이 수치랍니다. 무엇을 하든지 누구를 대하든지 성의가 없이 형식적인 것은 군자로서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내실이 없는 것은 군자의 수치라 했습니다. 겉보기만 뻔지르르하고 실속이 없는 것 또한 군자로서는 할 바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자신의 역량을 모르는 것이 군자의 부끄러움이라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도 모르고, 할 수도 없으면서 할 수 있는 것처럼 큰소리치고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므로 군자는 자기 자신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다섯 번째는 일을 끝까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수치라 했습니다. 시작했으면 끝을 내야죠. 시작은 하고 마지막을 잘 마치지 못하면 군자답지 못한 부끄러움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정리해서 요셉의 삶을 보면 오늘 요셉은 정말 부끄러움이 없는 군자처럼 신앙의 사람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요셉의 삶은 한 마디로 시작도 좋았고 과정도 좋았지만 마지막은 더더욱 좋았던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요셉이 보여주는 신앙적 성공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의 바른 길이 무엇인지를 말해 줍니다. 그의 성공의 길은 신앙적 성실함이었습니다. 신임 받는 인격이요, 주도적 인격이요, 그리고 결국 복의 근원이 됐습니다.
신앙적 성공자의 삶은 우리 모두의 갈 길입니다. 요셉의 신앙적 자세가<성공적인 신앙>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의 자세이기를 바랍니다. (김철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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