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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흐리고 쇠하지 않는 능력 (신 34: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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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 일백이십 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 하였더라” (신 34:7)

  인생의 삶은 얼마나 오래 사느냐에 있다기 보다는 얼마나 바르고 가치 있게 사느냐에 있습니다. 삶의 가치는 양에 있다기보다는 질에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33년의 짧은 생을 사셨지만 인류를 구원하시는 가장 가치 있는 삶을 사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에 인생은 양적인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질적인 것이 더 중요함을 보게 됩니다. 
  우리 자신은 어떤 삶을 추구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오래 살기를 원하십니까? 삶의 길이보다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하고 고민해 보았습니까? 가치 있는 삶을 살기를 우선시하고 있습니까?
  양적인 인생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죽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가치 있는 질적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죽음의 두려움을 뛰어넘는 것을 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해방시켜 40년간의 광야 길을 인도하여 가나안 접경가지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가나안 정복의 역사를 여호수아에게 물려주고 120년의 생을 마치고는 벧브올 맞은편 모압땅에 묻혔습니다. 그의 삶은 정말로 위대하며 가치 있는 생이었습니다.
  신명기 저자는 이러한 모세의 인생의 위대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모세의 삶을 평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위하여 30일을 애곡했다(8절)고 했고, 모세 이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했다(10절)고 했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모세로 하여금 120년의 인생의 위대한 삶을 살게 한 동력이 무엇인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모세가 죽을 때에 나이 일백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했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7절)는 말씀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눈이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과 기력이 쇠하지 아니했다는 것은 가치 있고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능력입니다. 눈이 흐려지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은 육체적 건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눈이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은 지혜와 판단력의 능력이 흐려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은 의욕이나 용기, 결단력 추진력과 같은 능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 모세의 흐리고 쇠하지 않는 능력은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입니까?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신명기 저자는 “그 후에는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 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는 자요”(신 34:10)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대면하였다는 것은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살듯이 아주 가깝고 친밀하게 살았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경험적으로 영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 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라”(사 40:31)고 했습니다.
  얼굴을 대하듯 하나님과 함께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살아가는 사람은 실망하거나 지치거나 피곤하지 않는 능력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서 살았습니다. 바울은 그의 후계자 디모데에게 “내 아들아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라”(딤후 2:1)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아름답고 복된 삶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일반은혜와 특별은혜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일반은혜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피조 되는 그 순간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받는 은혜입니다. 햇빛이나 공기나 물이나 그 외의 모든 것들이 생존할 수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피조 되는 그 순간부터 은혜로 공급되는 것입니다. 일반은혜는 은혜를 받아드리는 수납자가 원하든 원치 않든 받아드려질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햇빛을 주시는데 빛을 받지 아니하는 피조물이 없고, 비를 주시는데 그 수분을 섭취하는 피조물이 없고 적당한 온도를 주시는데 그 기온을 받아드리지 않는 피조물이 없듯이 일반은혜는 일방적으로 부어주시는 것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이 이 일반적인 은혜를 받아드리고 응답할 때에 반듯이 그 은혜에 대한 결과가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흙 속에 묻힌 씨앗은 수분을 은혜로 받습니다. 햇빛을 은혜로 받습니다. 땅속에 있는 여러 가지 자양분을 은혜로 받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을 은혜로 받아드린 그 응답의 결과가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싹이 돋아나고 잎이 피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아름다운 축복으로 나타납니다. 색깔의 조화와 열매의 결실을 바라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감동을 줍니다. 감사를 줍니다. 은혜에 대한 응답의 결과는 기쁨과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응답할 때에 그곳에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란 원어적 의미대로 은혜에 응답함으로 ‘아름다움’, ‘조화’, ‘기쁨’, ‘감사’, ‘축복’이라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피조물들이, 특히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의 역사입니다. 피조물 중, 특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마귀의 유혹에 빠져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떠나 마귀를 쫓고 죄의 지배아래 사는 죄인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타락한 인간의 역사에는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하지 못함으로 은혜의 결과인 아름다움과 감사와 축복의 역사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드리지 못하는 인생이 되었다는 것은 불행입니다. 곧 은혜의 반대 현상인 죽음과 저주와 멸망의 역사만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응답할 수 없는 은혜를 떠난 인간은 피조물의 세계로 하여금 은혜에 반응하지 못하게 하는 역사를 만들기까지 하는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은혜는 죄의 지배아래 있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방법의 은혜입니다. 바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구속의 제물로 삼으심으로 주시는 용서와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 특별하신 은혜에 믿고 응답함으로 구원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특별은혜에 응답하므로 일반은혜에도 응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특별한 은혜가 인간들에게 응답되도록 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이것은 특별한 은혜를 인간들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수단이자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특별은혜에 응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 안에서 죄의 지배로부터 구원받는 것입니다. 특별은혜에 응답하는 사람은 일반은혜를 누리는 행복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이 될 때에 흐리거나 쇠하지 않는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은혜 안에 사는 능력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유와 겸손으로

  일반적으로 우리는 모세에 대하여 강하고 거칠고 강한 다혈질의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과 온유한 사람입니다. 
  민수기 12장 3절에서는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기의 부족함을 인식하며 사는 겸손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름에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입니다”(출 4:10)고 했습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는 겸손함 그 속에서 나오는 온유함은 하나님의 능력을 더하게 하기에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는 인생이 되게 합니다.
  노자는 상창이란 스승에게 도를 배웠다. 상창이 죽을 때가 임박해서 노자의 최후의 가르침을 청하자 상창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가 빠지면 혀가 남는다. 알겠느냐?” 그 뜻은 이빨처럼 강한 고집, 남을 씹듯이 다른 사람을 누르려고 하고 지배하려는 이빨 같은 날카로움은 빠져 사라지나, 혀 같은 겸손함과 온유함은 오래 남는다는 것이다. 
  온유와 겸손은 우리로 건강하게 할 뿐 아니라 우리의 지혜와 판단력을 흐리지 않게 하고 우리의 능력을 쇠하게 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사명에 신실할 때에

  신명기 저자는 모세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신 34:11-12)고 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 떨기나무 숲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내 백성이 애굽에서 당하는 고통의 소리를 내가 들었다. 이제 내가 너로 바로에게 보내 내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젖과 굴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이르도록 하겠다”(출 3:1-10)
  이후 모세는 이 하나님의 사명을 위해 신실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명에 신실한 사람에게 건강은 물론이거니와 지혜와 판단력이 흐리지 않게 하시고 사명을 이루도록 용기와 능력을 주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대하여 신실하게 삶으로 그는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는 인생을 살았던 것입니다.

  세기의 문호 ‘셰익스피어“는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① 태어날 때부터 위대한 사람 ② 노력해서 위인이 된 사람  ③ 위대한 사람이 되도록 강요당한 사람입니다. 
  사명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강요당한 부름입니다. 이 사명의 명령에 신실한 사람은 눈이 흐리지 않는 지혜와 판단력을 가지고 살며 기력이 쇠하지 않는 결단과 용기 추진력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토요일(2006년 10월 28일) 오전 5시쯤 서울 남산공원 팔각정 옆에서 27세와 30세와 36세의 사람들이 극약을 먹고 동반자살 했습니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팔각정에서 20∼30m떨어진 윗몸일으키기 운동기구에 한명씩 누운 자세로 발견됐고 주변에는 음료수 빈병과 극약이든 플라스틱 병과 유서가 놓여있었다. 유서에서 이들은 “여기모인 사람은 생을 마감하기 위해 만난 이유밖에 없으며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맹세한다. 사인을 밝히려는 부검을 원치 않는다”는 내용과 함께 그들의 이름 및 서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인생에 사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삶의 허무성에 빠짐과 함께 생을 포기하는 극단적 형태를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봅니다. 사명을 가지지 못하거나 사명을 잃어버린 사람은 생의 무의미성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사명을 깨닫고 그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삶이 흐리거나 쇠하지 않는 능력으로 적극적이고 창조적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신실한 성도가 되어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지혜와 판단의 눈을 더욱 밝게 하고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쇠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김성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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