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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 (요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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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보면 누구나 한번은 부딪히는 답답함이 있습니다. 그 답답함은 시간이 지나면 부담이 되고 또 그 부담은 점점 무거워져서 어느 날은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믿음을 포기해야겠다는 위기감으로 닥쳐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을까? 과연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삶은 가능할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많은 노력을 하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보려고 애쓰다가 넘어지고 넘어지면 또 일어나서 애를 쓰보고, 그 때마다 잘 해 보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합니다. 그런 삶을 반복하다 지치면, “내가 이런 삶을 평생 반복하며 살아야 하나?” 낙심하면서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어, 그저 힘껏 최선을 다해 노력할 뿐이야. 하나님도 아시겠지.”, 그러면서 자기도 모르게 그런 삶에 익숙해져 버리고, 나중에는 그것이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삶이라고 체념하게 됩니다.

물론 그 때에도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천국에 갈 것도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인으로 고백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경건생활도 하며 은혜에 목말라 합니다. 겉으로 보면 별 문제가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기쁨과 만족이 점점 사라져 가게 됩니다.

제게도 역시 그런 날이 있었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있던 어느 날, 이대로 주님 앞에 선다면 어떻게 할까? 를 생각했습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든지 “~척하며” 살 수 있었지만, 주님 앞에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이 두려워졌습니다.
앞으로 제 삶이 얼마나 남았느냐 보다는 지나온 세월을 너무 많이 허송했다는 것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제부터는 정직한 삶을 살아야지.” 였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속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지만 남은 시간만이라도 진짜 목사, 진짜 설교자,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다가 주님 앞에 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내가 살고 있는 삶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이 따로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러자 제 안에서 깊은 탄식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남은 시간만이라도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 맛보고 싶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준비해 두신 그 풍성한 삶이 있다면 단 하루라도 그 삶을 살고 싶습니다.” 고 기도드렸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 엘리야, 바울과 베드로가 살았던 놀랍고 풍성한 삶이 있었습니다. 그런 삶이야말로 제가 진정으로 살고 싶어 했던 삶이었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분명히 나와 있는 삶인데, 왜 지금 그 삶을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대가에게만 주어진 것일까요?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어쩌면 그런 능력 있고 풍성한 삶을 사는 것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너무나 힘들기 때문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랬다고 아예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풍성한 삶을 살았던 비결은 그들이 가진 능력 때문이었습니까? 아니면 위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능력 때문이었습니까? 만약 자신의 능력에서 나온 삶이라면 제 생각이 옳습니다. “내게는 그런 능력이 없으니까 그런 삶을 포기해야지.” 그게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그런 삶을 살게 되었다면, 우리에게도 희망이 생기지 않습니까?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위대한 능력의 소유자가 아니라 위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본질상 우리와 똑같은 인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살 수 없는 초자연적인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그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내게도 임한다면, 나도 그와 똑같은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그 풍성한 삶을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든지 살기를 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원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삶을 살도록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것은 유한한 인간의 능력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사는 삶입니다. 죄에 대한 싸움에서 이길 수도 있고 질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영원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삶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준비해 두신 삶입니다.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가장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반드시 그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여러분, 죽어서 천국 가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주신 그 놀랍고 풍성한 삶을 누려야 합니다. 만약 그 삶을 살아보지 못한 채 주님 앞에 선다면, 나를 위해 생명을 바친 주님은 얼마나 원통하시고 또 우리는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여러분, 지금의 삶에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이보다 더 풍성한 삶, 지금보다 더 영광스런 삶이 있습니다. 그 삶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어떻게 지금 여기에서 만족하고 머물러 하십니까?

이 시간 우리에게 깊은 영적 탄식이 터져 나오기를 바랍니다. “주님, 저는 지금 제 삶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이런 상태를 반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이 준비해 놓으신 그 풍성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누리게 하시고 그 삶에 증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그 삶은 어떤 삶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로 그 삶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고 찾았던, 아브람과 다윗이 살았고 베드로와 바울이 살았던 삶, 아니 그보다 예수님 자신이 보여 주셨던 그 영광스러운 삶을, 이제 우리 모두가 살 수 있도록 주님은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포도나무와 가지의 그림으로 보여주셨습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습니다. 가지라는 존재는 포도를 맺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가지가 포도를 맺지 않는 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자녀다운 삶을 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포도나무 가지에는 포도가 열리듯이,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자녀다운 삶, 즉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은 가지가 어떻게 열매를 맺는지를 잘 생각해 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포도밭에서 가지들이 저마다 열매를 만드느라고 낑낑대는 소리를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가지는 제힘으로 열매를 만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열매가 열립니까? 그냥 나무에 붙어 있으면 나무로부터 영양분이 공급되어 저절로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는 열매를 만드는 존재가 아니라 열매를 맺는 존재일 뿐입니다.

가지가 열매를 맺느냐 맺지 못하느냐는 단 하나에 달려있습니다. 나무에 붙어 있으면 맺고 붙어 있지 않으면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를 맺듯이, 하나님의 자녀가 자녀다운 삶을 사는 것도 똑같습니다.
나무는 예수님이고 가지는 우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가지이면서도 내 힘으로 내 능력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보려고 낑낑대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약 가지가 제힘으로 노력해서 열매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열매가 아니라 모조품입니다.
장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코 먹을 수는 없습니다. 핵심은 이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내가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하면 살 수 있는 삶이 결코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내 힘과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일을 만들 수 있었다”고 반문할지 모르나, 그것은 다 모조품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 보려고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목사답게 장로답게 성도답게 한번 살아보려고 얼마나 애를 썼습니까?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목사였고 장로였고 성도였지만, 진짜 열매가 가지고 있는 예수의 향기, 예수의 맛은 나지 않았습니다.

왜요? 가짜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 힘과 내 노력으로 만든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향기가 없습니다. 맛이 없습니다. 향기가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온갖 더러운 악취가 나고, 맛이 아니라 내 속에 있는 온갖 악독이 들어 있을 뿐입니다.

왜 우리는 포도를 만들려고 그렇게 노력 했는데 가시와 엉겅퀴를 만들게 되었을까요?
이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열매 맺는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비유의 핵심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4절)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에게 붙어서 예수의 생명, 예수의 능력을 받아 열매를 맺습니다.
그래서 그 열매에는 예수의 향기와 맛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붙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과 능력을 자기로부터 공급받으니 열매인 것 같으나 거기에는 악취와 악독이 가득 들어있는 것입니다.

열매의 법칙은 단순하고 쉽습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입니다.
예수의 생명이 흐르고 예수의 능력이 쓰여 졌다면 반드시 예수의 열매가 나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처럼 보이나, 시간이 지날수록 악취와 악독이 새어나온 다면, 내 욕심, 내 능력이 들어갔다는 증거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했던 것은 방법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가지이면 예수 나무에 붙어있어야 하는데, 자꾸 예수에서 떨어져 나와 자기 혼자, 제 힘으로 끙끙대며 열매를 맺으려 하니, 하 세월이 지나도 그 가지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가지는 열매를 맺진 못해도 만들 어는 냅니다. 가짜이지만 말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삶의 방식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자기 인생의 자원과 능력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불신자들의 방식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삶을, 가치 있고 고상한 삶이라고 생각하고, 누구를 믿고 의존하는 삶을 아주 수치스럽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것은 존재는 바뀌었는데 삶의 방식은 예전 그대로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 의존의 삶인데 불신자들은 절대 독립의 삶입니다. 그런데 삶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 왜 그렇게 어려울까요?

첫째 영적 관성의 법칙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관성의 법칙이란 오랫동안 한 방향으로 가던 물체가 방향을 바꾸면, 즉시 바꾸지 못하고 잠시 동안 예전의 방향으로 가다가 바뀌는 현상 아닙니까?

영적 차원에서는 그 현상이 더욱 심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 관성 때문에 몇 년이 지나고 또 평생을 지나도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예수를 처음 믿으면 누구나 이 혼란에 직면하게 됩니다. 태어나서 수 십 년 동안 살던 방식이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꾸어지겠습니까?

그러나 관성에 끌려 갈 때라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 내가 또 옛날 방식에 끌려가고 있구나. 나는 존재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자기 힘과 능력에 의지하던 것을 포기하고 즉시 예수님의 생명과 능력을 의지하는 삶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둘째는 사탄의 속임수 때문입니다. 사탄은 원래 그 속에 진리가 없습니다. 사탄이 입을 열면 전부가 거짓말입니다. 사탄은 사기꾼입니다. 마술사들이 상자 속에 미녀를 넣고 칼로 상자를 자릅니다. 우리 생각에는 분명히 미녀도 피를 흘리며 둘로 갈라졌을 것 같은데, 나중에 상자를 합치면 미녀가 멀쩡한 채로 나옵니다. 그럴 수가 있습니까? 마술사가 우리의 보는 눈을 속인 것입니다. 바로 사탄은 그렇게 우리를 속입니다.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신 것을 바꾸어 놓지는 못합니다.
요한복음 20:28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우리를 속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면 조금 더 노력해야 돼, 아직도 나쁜 습관을 끊지 못했잖아.” 또는 “너는 참 뻔뻔스럽다, 어떻게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니?”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지금 사탄은 누구를 속이고 있습니까? 예,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를 속이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는 말씀대로 살았기 때문에 그 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즉시 성령으로 태어나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존재는 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지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숭이가 지능이 높아 사람 흉내를 잘 낸다고 사람이라고 부릅니까? 또 갓난아이가 똥오줌을 못 가린다고 너는 원숭이보다 못하니 사람이 덜 됐다고 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갓난아기라도 태어나는 즉시 사람입니다. 왜요? 존재는 출생으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6에 주님은 “육으로 낳은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낳은 것은 영이라” 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낳아졌기 때문에 영의 자녀, 곧 하나님의 자녀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하나님의 자녀로 되어가는 중이야” 라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그런 괴물은 절대 존재하지 않습니다.

거짓의 아비요 사기꾼의 원조인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정체성을 헷갈리게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모님 속을 상하게 해 드리면, 어머님이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너 자꾸 말 안 들으면 청다리 밑에 있는 진짜 네 엄마한테 확 갖다 줘버린다!” 처음에는 안믿었는데 어머니와 누님들이 하도 진지하게 애기하고 온갖 거짓 증거들을 들이대니까 나중에는 진짜인줄 믿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정말 바보스러운 것은 왕! 하고 울면서 “나 우리 엄마 찾아 갈래” 하고 집을 나간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어리면 사탄이 그렇게 가지고 놉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지금도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로서 마땅히 누려야할 권세와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사는 것입니다.

출생은 신분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리고 신분은 삶의 방식을 바꾸어 놓습니다. 정체성에 혼란이 오면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합니다. 사탄이 우리의 정체성을 헷갈리게 하는 목적은 삶의 방식을 바꾸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아직도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죄를 이길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 항상 패배적인 자세를 취하게 됩니다. “나는 안돼, 못 이겨.” 그래서 죄 짓는 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그저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 하나님이 봐주시겠지 라고 타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의인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야” 라고 확실하게 정체성을 붙잡으면, 삶의 방식도 바꾸게 됩니다. 그러다 정체성을 놓치면 또 아무렇게나 살게 됩니다. 언제나 의식 무의식 속에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리라는 정체성이 확실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안에 계시다”고 하셨습니다. 가지가 나무에 항상 붙어있듯이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사셨습니다.

그것이 가지의 삶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일분일초도 떨어져 살아서는 안됩니다. 항상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항상 함께 사는 그 사람의 행복이 얼마나 큰지 여러분 아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살아야 할 삶의 방식을 그렇게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할 수 없는 큰일이나 어려운 일을 만나면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면서도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작고 사소한 일에는 내 맘대로 합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은 가지인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을 의지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도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가지에게는 더 이상 자기 일이 없습니다.

세수하고 이 닦는 일도, 설거지하고 청소하는 일도 예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주님, 제가 세수하려고 하는데요, 그동안 저는 이렇게 세수해 왔는데, 주님이 제 얼굴을 씻기신다면 어떻게 하실까요? 이제 바로 그 일을 저를 통해 주님이 해 주세요. 저는 순종하겠습니다.”
여러분 이해가 되십니까? 주님이 내 얼굴을 씻기실 수 있도록 내 몸을 주님께 빌려 드리는 것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면 세수하는 일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 될까요? 세수하는 일조차도 내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남편으로서 아내를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예수님이 아내에게 무슨 일을 해 주기를 원하시는지 여쭈어 보고, 그 일을 하시도록 내 몸을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화를 내고 싶은 상황이 생겼습니다. 그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 이런 상황에서 제 아내에게 어떻게 하려고 하십니까? 그 일을 저를 통해 해 주십시오.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러면 나를 통해서 주님의 인격이 나타나고 주님의 일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원과 내 능력을 의지하던 삶을 멈추십시오. 그 방식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스도인의 삶은 살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은 내 일을 아예 없애 버리셨습니다. 가지는 더 이상 자기 일이 없습니다. 가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포도나무의 일입니다. 나무의 생명, 나무의 능력으로 나무의 일이 가지를 통해 나타날 뿐입니다.

최근에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항상 트러블을 일으키는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주님, 제 능력과 제 식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저를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 제 딸에게 주님이 하기 원하시는 일을 저를 통해 해 주세요. 주님이 저를 어떻게 사용하시든지 제가 순종하겠습니다.” 그 때 나를 통해서 주님이 친히 그 딸을 만져 주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내 힘으로 하려고 끙끙대며 애쓰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기 위해 내가 무슨 일을 해 드릴까?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무슨 일을 해 드리는 것과, 주님이 나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시도록 나를 맡기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것이 가지의 삶입니까?

마지막으로 한 가지 예를 들고 마치겠습니다. 무선으로 된 가전제품들은 대개 자체 안에 충전할 수 있는 장치가 붙어있습니다. 면도기를 사용하다 밧데리가 다 되면 작동이 멈춥니다. 그러면 전원에 꽂아 충전을 시켜야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무선 면도기같이 자체에 충전기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열심히 노력하다가 탈진하면 그 때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하며 매달립니다. 그러나 영적 충전을 받고나면 다시 자기 힘으로 열심히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갑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무선 면도기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플러그 인 상태로 살아야 합니다. 무선 그리스도인은 늘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이 실패와 승리를 반복하며 살지만. 플러그 인 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에게 접속되어 있기 때문에 그 무한한 생명과 능력을 공급받아 날마다 풍성한 삶을 살아갑니다.

여러분은 무선 그리스도인입니까? 플러그 인 된 그리스도인 입니까?
(권영국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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