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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뢰 (출 3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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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뜨거운 날씨를 넘기시느라 다들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열대야 현상으로 인해 힘든 밤을 넘기느라 고생 하셨습니다. 이제는 태풍으로 인한 많은 비로 더위도 눈에 띄게 물러갔고, 밤낮으로 제법 써늘해졌습니다.  이처럼 뜨거운 날씨는 시간이 가면 수그러들지만, 우리 속에 있는 내일에 대한 걱정과 불안은 시간이 갈수록 그 수가 많아지고, 그 농도가 진해지는 것만 같습니다. 거의 확실한 사실은 우리 중 아무도 이점에 관하여 자유로운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저 집은 아무런 걱정거리가 없을 것 같아 보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반드시 속을 태우고 마음을 끓이는 걱정이 있습니다.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 옆 지체에게 물어보십시오. 다들 웃고 있지만 속 쓰리는 분들이 한 두 분이 아닙니다.  목사로서 최근에 접하게 되는 성도들의 상황을 잠시만 봐도 이 같은 사실은 분명합니다.

[홀로서기를 하겠다고 집을 나간 철없는 아들의 모습이 걱정이고, 친구와 학교생활에 힘들어하는 자녀들의 앞날이 염려됩니다. 적당한 직장을 구하지 못해 하루하루 쫒기며 초췌해져가는 남편의 삶이 불안합니다. 끝이 보이질 않는 질병과 재발에 대한 두려움에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의학적 시술을 통해 생명잉태의 간절한 기다림도 확실한 보장이 없어 사모하는 맘으로 기다리는 성도도 우리 중엔 있습니다. 어떤 분은 자기의 남아있는 모든 힘을 짜내어 마지막으로 다시 시작하는 불안한 모험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이 모습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습니다.]

목사라고 다를 것이 없습니다. 많은 어른신들 앞에선 죄송한 말씀이지만 올해 들어 저의 삶에 변화가 생긴 게 있습니다. 작년까지는 제 생애 끝이 보이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올해 들어서는 제 삶의 끝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르막일 땐 보이지 않던 저편 끝이 정점을 지나 내리막에 들어서니 보이는 것입니다. 저편 끝이 보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전에 비해 시간이 훨씬 빨리 날아가는 것이 마음이 급해 지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마음은 급해지는데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속도는 빨라지고 저를 떠미는데, 어디를 향해, 무엇을 가지고 달려야 할지 붙잡을 확실한 게 없습니다. 불확실한 내일에 대한 불안이 제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한결 같이 불안한 것은 내일에 대해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 확신할 수 없습니다. 확신할 수 없으니 불안하고 두려운 것입니다.  만약에 내일에 대하여 어떤 모양으로든 확신 할 수만 있다면 우리들이 불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 속에 있는 거의 모든 두려움과 걱정은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 때문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안

본문 속에서 우린 걷잡을 수 없는 불안 앞에 떨고 서 있는 무리들을 만납니다. 이들이 불안해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은 그 이유를 말합니다.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출32:1),

자신들의 지도자 모세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40일전에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돌판들을 받기위해 산에 올랐습니다.(신9:9). 올라가긴 했는데 내려오질 않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내려오지 않습니다. 물도 떡도 없는 사람이 40일이 지났는데도 내려오질 않습니다. 죽지 않았다면 이럴 리 없습니다. 이들의 기다림은 이미 한계를 넘으셨습니다. 이들에게 있어서 모세는 죽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위대한 지도자 모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모세가 이들에게 어떤 존재입니까?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어가는 것 밖에 몰랐던 이들에게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 그 이상입니다. 전부였습니다. 노예란 운명의 사슬을 끊어 주었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향해 눈을 뜨게 해주었습니다. 모세의 지도를 따라 출애굽 하였고,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를 통해 양식이 주어졌고, 먹을 물이 생겼고, 모세와 함께 싸우면 전쟁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들의 길이고 양식이고 승리입니다. 모세로 인해 이들의 어제가 있었고, 오늘이 있고, 또한 내일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내일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모세의 사라짐과 함께 이들의 내일도 사라졌습니다. 이후로 어디로, 어떻게, 누구를 따라야 할지 걱정입니다. 양식과 물과 전쟁뿐 아니라, 다가올 내일의 모든 것들이 불확실합니다.  내일에 대한 확신이 사라질 때 사람은 누구나 불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들의 모습 속에서 알 수 없는 내일에 대한 불안에 두려워 떨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2. 해결 방식

금송아지

자신들을 덮쳐오는 내일에 대한 불안을 해결하기 위해 이들이 내 놓은 답이 무엇입니까?  무리들이 모여서 아론에게 몰려가서 말합니다.

“자,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어 주시오.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낸 이 모세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소식이 없소.”(현대인)

무리들의 욕구는 격렬했습니다. 아론도 거스릴 수 없을 만큼 크고, 거칠었습니다. 그만큼이나 스스로가 불안하고 두려웠다는 것입니다. 기어코 금 고리를 모아 녹여 송아지 우상의 금 신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리곤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이것이 너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너의 신이다!”

그제서야 불안은 잦아들고 안도하며 축제를 즐기며 먹고 마시며 일어나 뛰어 놉니다.(6절)

스스로 빚어 만든 송아지 신상을 보고서야 안도하는 이들의 심리가 무엇입니까? 무언가 볼 수 있는 것이 있어야겠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있어야 마음 편하고 불안하지 않으며,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겠다는 심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대로 산에 오르기 전 이들은 자기 눈으로 우뢰와 번개와 나팔소리와 산의 연기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친히 보았던 자들입니다.(출19:22)  그럼에도  40일도 넘기지 못한 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모세와 더불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든 금송아지를 향해  “보라, 이것이 너를 이집트에서 인도해 낸 너의 신이다! 보라, 이것이 장차 너를 인도할 신이다!  이것이 너의 내일의 확실한 보증이다!”외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어떻습니까? 이 모습이 그저 한심스럽고 못나 보이시기만 합니까? 혹시 이들의 모습 속에 우리의 모습이 있진 않나요? 이 시간 정직하게 하나님을 신앙하는 우리의 태도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불안한 인생

알 수 없는 내일이 불안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별 일을 다 합니다. 점쟁이를 찾아갑니다. 사주팔자를 보기도 합니다. 과학자들이 위성을 발사하기 전에, 새 차를 사고 나면, 장사를 시작하기 전엔 어김없이 행복한 돼지머리가 지폐를 물고는 웃고 있습니다. 고사를 지내는 거죠.

불안함이 사람을 이렇게 미련하게 만듭니다.  오늘의 운세를 떨리는 마음으로 보게 하고, 뻘건 색깔의 부적을 집 곳곳에 붙이고, 또 소중하게 지니고 다닙니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는 인생을 옭아매는 마귀의 장난입니다.

예수 점쟁이

물론 우리 중에는 보란 듯이 이런 일에 참여하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참 속상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성도도 사람인지라 이런 불안한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예수 점쟁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찾아가는 성도가 혹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몸에 조금만 이상이 있어도, 아이들과, 남편, 직장과 사업에 관계된 일만 있으면 찾아갑니다. 복채가 헌금으로 둔갑하고, 점이 예언이란 가면을 쓰고, 사당이 기도처란 이름으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대나무의 방울과 깃발을 대신해 십자가만 걸었지 완전히 점쟁이들이 하는 짓과 똑같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점쟁이들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이런 곳을 드나드는 것을 당장 멈추십시오. 한두 번, 아니 서너 번, 그 이상으로 희한하게 맞을 수 있습니다. 신통력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단도 광명한 천사로 자신을 위장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렇게 손에 잡히는 것, 보이는 것, 확실한 것을 탐욕스럽게  좋아하며 쫓아가다가는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아도 이게 하나님이라고 뛰놀며 섬기게 될 것입니다.

기도

지금의 가진 돈으로는 불안하니 좀 더 많은 돈이면 확실해 질까요? 좀 더 나은 성적과 등수면 아이들의 내일을 확신하게 해 줍니까?  어떤 직장이면 안심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만큼의 의학기술이면 두려워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백세 정도의 보장을 해주는 약이면 두렵지 않겠습니까? 내일의 계획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떤 확실한 보증을 쥐어 주시면 평안하시겠습니까? 

알 수 없는 내일의 불안 속에서 우리 대부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무엇인가 확실한 것을 기다립니다. 그게 무엇이든 확실한 것을  손에 쥐어 알게 해 주시길 기도하며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가라면 가고, 하라면 하겠습니다. 그전에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될 것인지, 예상되는 어려움에는 어떻게 도우시고, 채워주실 것인지에 관하여 확실한 것을 주십시오!” 라고 구하고 또 구하게 합니다.

3. 신뢰의 길  -테레사 수녀와의 대화

한 믿음의 순례자가 테레사 수녀를 찾아갔습니다. 인사를 나누고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진지하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시는 확실한 답이 필요합니다. 제가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한 답을 들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그러자 그녀가 대답합니다.

“아니오, 저는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실한 답이야 말로 당신이 붙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확실한 답이란 내게 있어 본 적이 없습니다. 내게 늘 있는 것은 신뢰입니다. 그러니 당신도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확실한 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믿음의 선배들의 길속엔 확실한 답이란 있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들에겐 오로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믿음의 길은 신뢰의 길이지 확실한 대답이 있는 길이 아닙니다.

항변

이스라엘 백성들이라고 왜 할 말이 없었을까요?

‘하나님! 왜 우리에게만 책망하시는 것입니까? 미리 40일쯤 걸린다고 미리 말씀해 주셨다면 불안해하지도 않을 것이고 나아가 이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저희들이라고 걱정하지 않고 물어보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을 섬기지 않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저희들에겐 송아지처럼 뭔가 확실한 것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지난번 르비딤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 물이 어디쯤 있을 것이고, 이렇게 저렇게 공급해 줄 테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미리 말씀해 주시면 우리가 왜 모세를 향해 돌을 들고, 하나님을 시험하며 다투었겠습니까? 앞으로 여정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말씀 좀 해 주시고, 예상되는 위험 앞에서 불안해하지 않도록 계획을 미리 확실하게 공지해 주세요.’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역대하20:20 개역)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에게는 인자하심 두르리로다.(시편32:10 개역) 
‘...너희는 돌아와서 말없이 나를 신뢰하라. 그러면 너희가 구원을 받고 힘을 얻을 것이다.’(이사야30:15 현대인)

신뢰의 길

확실한 것을 붙잡으려 애쓰는 우리를 향해 하나님은 일관되게 신뢰의 길을 걸으라 하십니다. 광야 40년 동안 매일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 매일 매일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 하라 하십니다. 내일의 여정에 관하여 하나님은 미리 설명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어디로 이끌든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따르도록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내일에 대한 확신이 만나와 물, 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내일의 확실한 보장이 됨을 배워야 했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향해 발을 내디딜 수 있는 것은 그곳에 물이 있다는 확실함 때문이 아니라, 이끄시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 때문이어야 했습니다. 이점에서 이들은 성공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들과는 달리 아브라함의 신뢰는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잡기 위해 칼을 든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요셉은 감옥에서조차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가졌습니다. 사자굴 앞에서도, 풀무불 앞에서도 다니엘과 세 친구들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너머에 대하여 한마디 말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저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성도들에겐 확실한 것이란 없습니다. 단지, 확실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분 자신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신뢰가 있을 뿐입니다.

브래넌 매닝은 그의 책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확실한 답을 탐하다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험을 없애려 한다. 우리 앞에 펼쳐진 미지의 길에 대한 두려움이 아버지의 선하신 역사와 제한 없는 사랑에 대한 어린아이 같은 신뢰를 무너뜨린다.”

4. 신뢰의 길을 걷기 위하여.

어떻게 알 수 없는 내일의 불안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어떻게 확실함을 향한 인간적인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해 어린아이 같은 순전한 신뢰의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① 하나님의 소명(목적)을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여러 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언약으로 맹세하셨습니다.(출13:11,5 ; 23:23; 3:8; 6:4) 그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요셉을 지나 이들에게도 주어졌습니다. 이들을 강대한 나라, 열방의 빛이 되는 나라, 하나님의 구원을 만방에 전파하는 나라가 되게 하실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이었고 이들의 사명입니다. 지금 광야를 지나가고 있는 이유입니다. 목적 없는 걸음이 아니었습니다. 여기 광야가 끝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사명과 목적이 펼쳐질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거쳐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이 같은 목적과 사명을 붙들지 않으니 당장의 어려움 앞에서 헷갈리고 불안해 집니다. 당장 물이 없다고 원망하고, 지금 먹을 게 없다고 불평하고, 일마다 때마다 끝인 것처럼, 죽는다고 소리치며 하나님을 대적한 것입니다.

자신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사명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일의 사명을 마음에 두지 않기에 오늘의 어려움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나의 내일이 왜 불안합니까?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붙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을 통해 반드시 이루시고야 할 하나님의 목적을 사명으로 붙들어야 합니다. 이 사명을 붙들면 신뢰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지금 나를 힘들게 하는 어떤 불안과 두려움도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걸음을 멈추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붙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중 그 누구도 목적 없이, 사명 없이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반드시 목적이 있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붙드는 것이 내일의 불안에서도 신뢰의 길을 걸을 수 있는 비결입니다. 

(질병)

우리를 불안케 것들 중에 대표적인것 하나가 중한 질병입니다. 본인도 힘이 들지만 가족도 못지않게 불안합니다. 심각한 질병 앞에서도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도는 결코 병으로 인해 죽기 때문에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감당할 사명이 다하면 죽는 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사라지면 삶도 끝납니다. 하나님의 사명을 붙들고, 그 사명을 쫓으며 사는 자는 사명이 있는 한 죽는 법이 없습니다.

병원에는 5년 생존율 이란 것이 있습니다. 환자가 앞으로 5년 동안 생존해 있을 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수치에 따라 남은 기간을 예상합니다. 대개가 비슷하게 맞아 갑니다. 그러나 성도에겐 또 다른 생존율이 있습니다. 사명 생존률 입니다. 이 생존율의 특징은 언제나 100%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신 사명을 쫓아 사는 성도의 생존율은 언제나 100%입니다.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는 한 성도의 삶은 10% 미만의 5년 생존률에도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해야겠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하게 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 때문에 병이 나아야 하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지 오래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입니까? 재발되지 않을까 불안해하며 병에서 벗어나지 못해 산다면 참 허무한 일입니다. 나의 삶을 통해 감당해야할 하나님의 사명을 붙들지 못한다면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자신의 사명을 찾고 붙들게 되면 병의 치유와는 상관없이 그 심령 속에 평안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내 속에 심겨놓으신 하나님의 소명은 질병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질병은 사명을 이기지 못합니다. 사명이 질병을 이깁니다. 내 삶을 향한 하나님의 소명을 알고, 사명을 붙드는 성도는 병에서 자유합니다. 이 자유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이같은 원리는 우리를 불안케 만드는 모든 것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자녀와 남편들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은 지금의 방황과 진통으로 허물어지지지 않습니다. 직장과 생업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오늘의 불경기와 내일의 불확실함으로 망가지지 않습니다.

“지금의 모습이 우리의 끝이고 전부라면, 절망해도, 원망해도, 포기하고, 실망하여 하나님을 떠나가더라도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모습이 끝이 아니라면 말이 달라집니다. 잠시 거쳐야하는 과정이라면 그래서는 안 됩니다. 사명을 감당키 위한 훈련의 시간이라면 낙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끝을 아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다시 일어나, 사명을 붙들고 살아 갈수 있는 용기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을 붙들 때 흔들림 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② 오늘 하루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의 원칙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들었던 것은 하루하루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만나도 매일 매일 내려 주셨고, 광야의 여정도 매일 매일 인도하셨지 일주일 혹은 한 달의 계획을 앞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원칙은 ‘한번에 한걸음씩!’이지만, 그들은 ‘한번에 끝까지!’라는 확실함의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 번에 한걸음씩의 원칙이 신뢰하는 자에겐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지만 신뢰하지 못하는 자에겐 여간 불편하고 불안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약속은 받았지만 예상에 벗어나는 오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지 못했습니다. 내일의 사명을 보았지만 자신들의 기대와 충돌되는 오늘의 섭리를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길이 험하다고 원망하고, 고기가 없다고 다투고, 입맛이 없다고 불평합니다. 감사와는 거리가 먼 백성이었습니다.

감사

하나님의 사명을 붙들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성도의 삶의 특징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신뢰하는 삶의 특징인 동시에 신뢰의 걸음을 더욱 견고케 해줍니다. 오늘의 감사는 내일의 감사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들의 신뢰가 진정한 것인지를 확증하는 것이 오늘의 감사입니다.

오늘의 인도하심에 감사하지 않는 것은 내일의 인도하심에 대한 불신이고 거부입니다. 오늘과 오늘이 모여서 내일이 되고, 미래가 되고, 삶이되고 사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때론 이해되지 않는 오늘의 아픔이 있고, 예상하지 못한 고통스런  환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오늘과 오늘을 관통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함으로 반응해 보십시오. 이 감사야 말로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신뢰의 확증입니다.

공중 나는 새

오늘의 삶에 감사하라는 말씀이 두 손 놓고 감상에 젖어 감사의 노래만 부르고 있으란 말씀은 아닙니다. 내일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고 오늘에 감사하라는 것은 무기력한 삶을 감사란 포장으로 덮으라는 것도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 하시면서 공중 나는 새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

공중 나는 새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린 저 하늘의 새들이 심지도 거두지고 모아들이지도 않음에도 하나님이 먹이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끔 새들이 하루종이 공중을 날면서 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 종일 바람을 가르며 즐기고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새들은 놀고 있는 게 아닙니다. 먹이를 구하기 위해 치열한 날개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우리의 상상 이상의 엄청난 수고를 합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노력합니다. 그러나 결코 내일을 염려하진 않습니다. 오늘의 수고에 최선을 다하면서 내일의 삶에 대하여 조금의 염려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새들에게서 배워야 하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의 삶에 최선을 다하면서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일은 또 내일의 은혜를 하나님께서 주실 것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오늘을 감사한다는 것은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오늘 최선을 다한다는 것입니다.

결론: 신뢰의 길

내일에 대한 불안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은 어떤 확실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가실 사명을 붙들 때에 오늘의 고통과 어려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인도하심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야 합니다. 감사하는 자의 삶의 태도는 오늘에 최선을 다하면서 내일을 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같은 말씀을 주님은 한 구절의 말씀에 담아 놓으셨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것이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실 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 사명을 쫒아 사는 삶과 연결되어져야 합니다. 사명 없이 먹고 사는 일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명 없이 건강하게, 부유하게, 걱정 없이, 똑똑하게 사는 것은 성도인 우리가 추구하는 삶이 아닙니다.

내 삶을 통해 이루어 가실 하나님의 사명을 붙들고 오늘의 불안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오늘의 병과 굶주림과 어려움에 놀라지 마십시오. 공중 나는 새처럼 내일을 염려하지 말고 오늘의 삶에 감사함으로 최선을 다하십시오. 채우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있을 뿐입니다. 사명을 붙드는 삶, 감사의 삶을 통해 흔들림 없는 신뢰의 길을 힘 있게 걸어가는 복된 주의 백성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문성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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