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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혼의 닻 같은 소망으로 인내합시다 (히 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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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뭍 닻과 닻 같은 말은 발음이 비슷하면서 다른 뜻을 가집니다.
닻은 고정식 끌림식 이동고정식 등이 있으나 여기서는 움직이지 아니하는 닻을 말하고 있습니다.
  닻은 배를 움직이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한다는 점에서 소망에 자주 비유됩니다. 닻이 바람과 풍랑에서 배를 제자리에 머물게 하듯이 소망은 세상의 풍파와 유혹으로부터 성도들을 자기 위치에서 떠나지 않게 하며 신앙을 지키게 하기 때문입니다.

소망을 영혼의 닻에 비유한 것은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현 세상은 험난한 바다 같고, 영혼은 그 위에 띄워진 배 같고, 영혼의 소망은 그 배의 닻과 같습니다.  '닻'은 항구에 들어온 배를 고정시키기 위해 줄에 매어 물에 던져두는 기구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 닻은 바다 밑에 내려가는 것인데, 영적 닻이신 그리스도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견주고 있습니다.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천을 말합니다(출 26:33). '휘장 안'은 지성소로, 거기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 들어가 하나님과 교제하며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이 휘장을 뚫고 지성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뿐입니다. 대제사장이 이 휘장 안에 들어가는 것은 속죄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일년에 일 차 들어가는 것은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입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속죄 제물이 필요했으며 이 속죄 제물을 통해 모든 백성의 죄를 속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속죄 제물로 자기 몸을 드림으로써 인류의 죄를 속하였다는 말입니다(히 7:27).

예수께서는 대제사장과 제물로서 휘장 안에 들어가신 것입니다(롬 3:25). 그는 대제사장으로 그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베드로는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벧전 1:18, 19)고 했습니다.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악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용서를 비는 일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제사장들과는 달리 그 크신 사랑으로 자신의 몸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시어 단번에 우리 모든 사람의 죄악을 사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민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편에 앉아 계신다는 것은 우리의 소망에 대한 강력한 확증입니다. 때문에 우리 영혼의 닻은 튼튼하고 견고합니다.

  예수께서 휘장 안에 들어가신 사건은 예수 혼자만의 단독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는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신 분입니다(히 2:17).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히 2:11). 예수는 우리 형제요 대표자이십니다.
바울에 의하면 우리는 그 안에 있는 그는 우리 안에 계십니다(갈 2:20). 그리스도와 그 백성 간에는 '하나 됨'이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휘장 안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곧 성도 된 우리가 휘장 안에 들어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19, 20).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떠한 때에든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과 죄 사함을 입기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습니다(히 4:16). 그러므로 이미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 나라를 확보한 자들이요 때때로 일어나는 신앙의 실패를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감으로 능히 회복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예수께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셨습니다. 이는 레위 계열을 따르지 않고서도 어떻게 예수께서 대제사장직을 가질 수 있으셨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멜기세덱은 족보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는 난 날에 관한 기록도 없고 죽은 날에 관한 기록도 없습니다. 그는 아브라함과 동시대의 사람으로 레위 족속이 제사장직을 맡기 이전부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창 14:18; 히 7:1)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대제사장이 되셨다는 것은 예수께서 족보와는 전혀 상관없이 대제사장이 되셨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 저자를 통하여 장차 임할 그리스도에게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영원한 제사장의 직분이 있음을 예언하셨습니다(시 110:4).
예수는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는 우리의 연약함과 범죄함을 위해 변호해 주시는 대언자이십니다(요일 2:1). 그의 직분은 영원히 갈리지 아니하고 그 간구의 권능은 절대적이어서 그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능히 구원에 이릅니다(히 7:24, 25). 이러한 대제사장 직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러한 유일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직분에 관하여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행 4:12)고 했습니다. 예수만이 우리의 유일한 생명 길입니다(요 14:6).

  휘장 안은 또한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요 하나님을 대면하는 곳입니다. 곧 하늘나라를 상징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휘장 안으로 들어가셨다는 것은 그가 영광의 나라로 승리의 입성을 하셨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히 12:2)습니다.
곧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깨뜨리심으로써 인류에게는 구원과 소망을, 자기에게는 지극히 높은 보좌와 영광을 가져왔습니다( 빌 2:5-11).

성도가 갖는 소망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후에 들어가신 천국에 우리도 그와 같이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곳은 눈물이나 슬픔이나 근심이 없습니다. 언제나 기쁨만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소망은 성도들로 하여금 세상의 풍파와 유혹에서 견디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망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맹세에 의한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맹세에 의한 약속이 있기에 이 거칠고 황야 같은 세상을 살면서 우리 육신의 안일을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의가 오기도 하고 자녀들을 보호하시고 필요한 것들을 공급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미덥지 않게 여겨지는 경우가 생기기도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몇 번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럴 경우에는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여러 인물들에게 보여 주신 주님의 신실성을 의뢰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13절).
맹세는 약속의 순전함을 나타내는 증거가 됩니다.
중요한 약속을 할 경우 무엇인가 보다 나은 것을 걸고 약속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는 말과 같이 보다 나은 무엇을 두고 맹세함으로써 약속의 확실함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어떤 약속이나 계약을 체결할 때에도 이러한 관습이 존재했습니다. 개인사이나 부족 사이에서 계약을 체결할 때 보통 하늘이나 절대자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맺으실 때 이러한 관례를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보다 더 존귀하고 높은 존재가 없었기에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셨던 것입니다.
이 맹세는 바로 약속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주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약속은 반드시 준행된다는 사실을 인치는 행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리라고 선언하신 후에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확증하셨습니다. 만일 그 약속이 이행되지 않을 경우에 하나님의 존귀와 명예가 엉망이 될 것은 뻔한 이치임에도 인간들과 한 약속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보증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주의 이름으로 보증된 새 언약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깊이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주어진 그 많은 축복과 위로의 약속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과 하신 계약 체결의 주체자로서 자기 선언의 진실성과 약속의 순전함을 나타내기 위해 '스스로 계신 자', 곧 하나님 이름의 권위를 두고 언약 체결을 보증하십니다. 이것은 언약 백성에 대해 최상의 증거가 되며, 하나님께서는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분이시므로 어떠한 변경도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맹세는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실성과 성취성을 강조합니다.

인간은 생명을 걸어도 근본적으로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무능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어떠한 맹세든지 지킬 수 있는 능력의 신이십니다. 그는 신실하고, 거짓이 없으시고, 식언치 않으시고, 변함없으신 이 세상에서 유일한 인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 성취를 맹세로 다짐하셨습니다.
성도들이 얻으려고 노력하는 '앞에 있는 소망'이란 예수로 말미암아 약속된 구원의 복으로서 하나님께서 맹세로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굳건한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영원한 뜻 가운데 이미 정해진 것으로 불변의 성격을 가집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축복의 언약은 성급하게 서둘러서 이루어질 일도 아니며, 늦추어진다고 해서 중도에 포기될 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그의 뜻은 일치되는 것으로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서 이미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결코 변경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약과 성취의 성격을 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맹세하였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알고 계획하신 것이기 때문에 변경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십니다.

약속하신 내용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가 진정으로 복 주시는 자들을 계속하여 복주실 것이며, 그들을 완전한 복에 이르게 하실 때까지 책임져 주시겠다는 굳은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대상을 아브라함 개인의 차원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메시아적 차원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이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모든 자들에게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어 성도 된 우리 모두는 약속을 기업으로 받은 자들이므로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을 소망으로 삼아 구원을 바라보고 최종 목적지에 도달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곧 피조물을 걸어 맹세하지 않으시고 하나님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의 표현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맹세가 우리에게는 큰 기쁨과 소망이 됩니다. 아브라함의 끈질긴 인내가 마침내 그에게 유익한 결과를 초래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하나님께서 맹세로 보증하신 약속은 그 약속이 성취되기를 인내로써 기다리는 성도들에게만 유익이 됩니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신앙과 영혼을 위협하며 시험할 때가 너무 잦습니다. 이렇게 시험과 박해, 그리고 죽음 등이 위협하는 세상에서 소망을 간직하며 그 어려움을 감당하는 데 사람이나 세상이 주는 위로는 너무도 약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두고 맹세하심으로써 우리로 강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로 흔들리지 아니하고 소망만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맹세로 보증된 약속은, 우리가 여러 가지 고난과 핍박을 이겨 나갈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굳은 약속의 보증을 믿고 성령의 안위를 받아 승리하는 자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나 재물보다 하나님의 맹세를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맹세에 대한 확고한 신뢰는 우리를 커다란 기쁨과 소망으로 인도합니다. 내세의 하나님의 통치 아래서 뿐만 아니라 현세와 공중 권세 잡은 자의 통치 아래서도 평안과 기쁨을 소유하게 합니다. 우리의 간청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스스로 우리를 구원하고 보호하고 복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므로 이는 우리의 부족함과는 상관없이 반드시 성취되며 따라서 이러한 사실로 인해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두려워 않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약속의 구체적인 내용은 그 후손이 큰 나라를 이루리라는 것과(창 12:2; 17:5, 6), 나아가 그의 후손에게 메시아가 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내용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불리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다윗에게 주셨던 약속도 마찬가지로 그에게 곤란을 초래하는 부분은 하나도 없었습니다(삼하 7:8-16).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려는 다윗의 마음을 가상히 여기신 하나님은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그와 항상 동행하며 존귀케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름을 존귀케 하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단순히 다윗의 명성만을 높여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는 그의 존재와 그에게 속한 후손을 존귀하게 만들어 주신 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용맹과 지략, 업적 등으로 심히 유명해져서 당시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따라서 그를 향한 예언 은 당대에 성취되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그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어 졌습니다.

다윗을 존귀자로 삼을 것을 약속하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모든 대적으로부터 지켜 주시며 다윗의 통치 아래 안정과 번영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하신 언약대로 다윗의 시대에 이스라엘을 든든케 하셨습니다. 다윗의 휘하에서 안전한 근거지를 획득한 이스라엘은 계속되는 전투로 더 이상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은 이제 그들의 것이 되었으며, 전쟁만 벌이던 생활을 청산하고 여러 가지 제도 속에서 국민성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생활은 말할 것도 없고 문화와 사상도 많은 발전을 이룩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찾아가셔서 눈동자처럼 지켜 주셨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일순간도 우리에게서 눈을 떼지 아니하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 실현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다윗 왕과 그의 후손들을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들이 혹 범죄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징계를 내릴지언정 버리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일점일획이라도 버려지지 않듯, 다윗과의 언약은 메시야 왕국에서 완전히 성취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약속들의 궁극적인 성취입니다(눅1:31-33).

오늘날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도 오로지 선한 것들뿐입니다. 언제든지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이 그러하고, 슬프거나 곤란을 당할 때에 위로를 주시겠다는 약속이 그러합니다. 극단적으로 표현해서 밑질 것이 하나도 없는 내용뿐입니다. 이렇게 선한 내용들뿐인 주님의 약속은, 또 그 약속에 주님의 이름으로 병행된 보증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우리들이 주님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는 존재인가를 드러내 줍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결코 악한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15절).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서 약속을 받았다고 했는데 이는 실상 그의 인내와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설명한 것입니다.

  약속을 받은 사람이 취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가 인내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자기 몸에서 날 후손을 얻으리라는 약속을 받은 후 수 십년이 지나서 그 약속이 성취되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다윗도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후 당분간 사울의 칼을 피해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가 되어야 약속을 이루십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스스로의 성장을 도모하면서 깊은 인내를 갖고 주님을 의뢰해야만 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실상 그의 눈으로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일의 성취를 확신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의 확신에 대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하셨습니다.

이처럼 약속을 받은 성도는 주님의 능력과 신성을 믿고 신뢰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끝까지 확신을 갖는 자들은 그 기다리는 동안에 더 많은 주님의 위로와 화평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이루어지는 약속의 성취는 더욱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거친 바다에 깊은 밤, 배는 닻 하나에 의지하여 떠내려가지 않고 파손되지 않게 정박하려면, 닻을 내리는 방법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는데 닻을 내리는 방법으로는 좋은 장소에 닻을 내려야 합니다. 바위가 많은 곳은 닻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안 되고, 질척질척한 진흙 속에도 안 좋습니다. 제일 좋은 곳은 닻이 좀 파들어 가며 가라앉는 진흙이 섞인 모래땅입니다. 또한 물깊이의 6,7배 길이의 사슬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사슬이 수저 지면을 따라 길게 늘어져, 그 마찰로 인해 닻이 안정됨으로 여간한 바람에 배가 흔들리고 떠내려가도 사슬의 마찰력으로 저지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닻도 소망을 하나님께 단단히 두고 오래도록 내려 신앙의 닻을 오래 보유하고 있어야 합니다. 인생의 항로에서 최종의 영원한 항구로 무사히 우리를 인도하여 지켜주실 인생의 닻이며 인생의 항해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의 노를 온전히 맡겨야 합니다.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시편 107편 28절-3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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