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영적인 위기를 극복한 교회 : 섬김 영광의 날 (행 6:1~7)

  • 잡초 잡초
  • 309
  • 0

첨부 1


영적인 위기를 극복한 교회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5:41-6:7)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는 한 가지 사실은 교회의 영적 위기가 결코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땅에 서는 순간부터 부단히 계속되어 왔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각자 자기의 이익만을 위하여 신앙을 갖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공동체적인 성격을 읽지 못하는 우리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교회생활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영혼과 올바른 삶은 언제나 교회 공동체의 ‘덕’(德)과 관계 되어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는 몇 차례의 중대한 영적인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교회를 근본적으로 위협해 왔던 것은 외부로부터의 핍박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 자체의 변질이었습니다. 이러한 영적인 위기는 오늘날에도 동일한 유형으로 우리 시대의 교회들에게 다가옵니다. 우리는 교회가 이러한 영적인 위기를 만날 때 마다 사실은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붙드심이 없이는 교회가 한 순간도 교회다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은 개인의 성화의 지평에서 깨닫게 되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영적인 위기를 겪었던 초대교회의 모습에 대한 성찰은 오늘날 유사한 도전에 직면하는 우리에게 지혜를 줍니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는가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I. 본문의 배경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본문에서 언급된 초대교회의 위기 상황은 사도행전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교회의 위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첫째로, 본문에서 다루고 있는 초대교회의 위기가 다른 경우와는 달리 겉으로는 위기인 것처럼 드러나지 않은 채 다가 온 내적인 위기이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지금 우리들의 공동체가 이러한 위기에 상당히 노출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오순절의 성령이 강림한 교회는 그 후, 커다란 능력과 담대함으로 핍박의 살벌함이 가득한 예루살렘 거리에 그리스도인들을 쏟아놓았습니다.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의 신실성을 인 치듯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이적과 표적들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가슴 벅차는 구원의 감격이 거리마다 교회마다 물결처럼 일렁이었습니다. 몇 차례의 중대한 위협과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4장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이 제사장과 장로들로부터 소환을 받아 문초를 당하기도 했고, 5장에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는 범죄를 저지르므로 시체가 되어 들것에 실려 나가기도 했습니다. 또 같은 5장에서는 사도들이 모두 사로 잡혀서 옥에 갇히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보살핌은 환경을 능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본문은 5장의 이러한 정황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모두 투옥되었으나 천사의 기적적인 구출로 다시 성전에 서서 백성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보다 못한 대제사장과 사두개파의 사람들은 다시 사도들을 잡아서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을 전파하지 말라고 협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게 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쉬지 않고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 하니라”(행 5:42). 이같이 고난 받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은 많은 결실을 가져왔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 졌는데…” 여기서 “제자”라는 표현이 처음 나타나는데 이것은 열두 사도들 이외에 신앙을 고백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킵니다.

II. 부흥 속에 찾아 온 영적인 위기

초대교회가 사회를 구제하는 일 가운데 가장 중요시 하는 것들 중 하나는 과부들과 고아를 돌보는 일이었습니다.(약 1:27). 아마도 이 과부들의 일용할 양식들을 교회에서 직접 공급해 주었던 것 같습니다. 교인들이 늘어나자 자연히 교회가 돌보아야 하는 과부들의 수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헬라파 유대인들이고, 또 한 부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것은 인종에 의한 구분이 아니었습니다. 같은 유대인이지만 그들 중에는 이미 본토를 떠나 당시 공용어였던 헬라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본토에 살면서도 이미 익숙해져버린 헬라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들로서 아람어화한 히브리어를 말하는 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교회가 고의적으로 그랬을 리는 없겠지만, 이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음에 있어서 헬라파 과부들은 뭔가 불만스러운 소외의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히브리파 과부들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묘사되고 있는 서로 물건을 통용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과는 대조가 되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과부들을 위해 물질로 도움을 주는 일에 아마도 열두 사도들이 직접 관여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대교회에 있어서 구제는 이와 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서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과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여 주셨습니다.(눅 7:13, 요 14:18).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구제가 더욱 중요한 교회의 일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초대교회에 중대한 영적 위기를 가져왔습니다. 이해와 사랑으로 가득 차 있던 교회에 원망과 불평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성령 강림 사건 이후로 그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하여 바쳤던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행 4:32).

여기서 우리는 가장 신앙적인 일도 분명한 영적인 원리 속에서 바르게 다루어지지 않으면 교회의 영성에 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시 예루살렘 공동체는 표면상으로는 큰 부흥을 이루게 되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교회의 영적인 위기는 아주 은밀하게 다가왔습니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말입니다. 사도들은 성령에 붙잡힌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곧 명민한 영적인 시각으로 그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영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어느 시대이든지 교회가 어떠한 위기를 만날 때, 거기서 벗어나는 것은 이러한 영적 통찰로부터 시작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지혜를 힘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안목으로써 교회의 영성을 위협하는 도전들을 올바로 살피고, 또한 간절한 열망으로 기도함으로써 교회는 이러한 위기를 통하여 오히려 더욱 슬기롭게 되고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열두 사도들이 모였습니다. 열심히 구제함에도 원망과 불평의 소리가 그치지 않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택한 것은 보다 공정하고 효과적인 구제 방안에 대한 토의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불평하는 헬라파 과부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설득할 책임자를 지명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그런 목적으로 모인 가운데 영적인 반성을 한 후 다시 여러 교인들 앞에 나타납니다.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행 6:2). 그러나 사도들의 이 같은 진술은 몇 가지 점에서 상당한 의문을 갖게 합니다.

첫째로, 이 과부들을 공궤하는 일의 중요성을 외면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과부들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베푸셨고, 그들의 비참함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목회적 관심의 주된 대상이었습니다. 더욱이 초대 교회에서는 과부들을 돌아보는 그 자체가 경건임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곡히 권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약 1:27). 제자들은 초대교회에서 이토록 강조되어왔던 이 과부 구제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사도들은 마치 말씀 전하는 것과 과부를 구제하는 일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흑백 논리와 같은 것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사도들이 언급한 “말씀을 제쳐 놓고…”라는 진술에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점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사도들이 성경말씀은 전하지 않고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겨를도 없이 과부들을 구제하기 위해 이러 저리 바쁘게 뛰어다니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니 말입니다. 본문의 “공궤를 일삼다”는 헬라어로 “디아코네인 트라페자이스‘(διακονειν τραπεζαις)입니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식탁을 차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앞치마를 두르고 음식을 나르는 사도들의 모습을 상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대교회와 제자들의 사역의 정황들에 대해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한다면 이러한 상상은 엉뚱한 비약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은 성령 강림 이후로 그리스도의 복음에 매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들에 대한 불붙는 열정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많아진 교세의 성장도 그들이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 하니라”(행 5:42). 이렇듯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 복음을 위한 열망에 사로 잡혔던 제자들이 신자의 수가 늘어나자 그들의 식탁을 공궤하기 위해 말씀을 제쳐 놓았다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발언인 것입니다.

III. 위기의 원인: 그릇된 사역의 질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은 부끄러운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 놓고…” 그들은 매일 복음을 전하러 나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에서는 정규적인 예배도 드려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다른 제자들도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과는 상관없이 복음을 전파하였고, 말씀으로 성도들을 가르쳤을 것입니다. 적어도 외관적으로 교회는 어떠한 위기에 직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사역과 교회의 영적인 상태에 대한 그들의 평가는 “우리는 말씀을 제쳐 놓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된 ‘말씀’은 크게 두 가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의미는 교회에서 전파되는 복음의 말씀이었고, 또 한 가지 의미는 교회 안에서 가르쳐지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제쳐 놓았다는 사도들의 자기반성은 후자 쪽에 무게가 실린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은 과부들을 구제하면서도 여전히 예수의 이름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공궤하는 일에 사도들이 관여하면서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교육되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거의 못 느낄 정도로 교회는 예전과 거의 같았습니다. 외면적으로는 여전히 말씀 중심의 교회였습니다. 말씀을 듣기 위하여 모이는 집회가 줄어든 것도 아니고, 전도계획이 중대한 차질을 맞게 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들은 교회와 자신들의 사역에 대해 뼈아픈 반성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제쳐 놓고…”

A. 말씀을 떠나는 회중들

초대교회 공동체는 외견상 여전히 말씀 중심의 공동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갈리기 시작하였습니다. 교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해도 마음은 불평등한 구제로 말미암아 원망과 불평이 깃들게 되었습니다. 처음 사랑과 이해는 간 곳이 없고 예리한 이해관계에 대한 의식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말씀에서 떠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은 사도들대로 힘을 다해서 말씀을 전하고 예와 다름없이 그들의 교훈을 가르치지만 그들의 마음은 과부들을 구제하는 복잡한 일에 마음이 분산되었습니다. 작은 이익에 마음이 빼앗겨 버린 교인들, 그러한 마음의 분쟁과 나뉨 속에서 말씀을 봉사하는 사도들, 모두에게 어려운 순간들이 다가왔습니다.

혹시 이 예루살렘 교회의 위기가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매주일 설교는 행해지지만 마음은 사소한 이해관계와 지체들과의 견해의 작은 차이들로 말미암아 말씀하시는 하나님에게서 떠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든 것을 올바르게 한다는 미명하에, 또는 교회를 더 잘 섬기는 길이라는 이름 아래 그렇게 하고 있지만, 그것은 이미 그대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 진리의 말씀에 대한 싫증으로 말미암아 미끄러지는 자신들의 침륜에 빠진 영적 상태에 대한 비겁한 변명에 불과합니다. 올바르게 행동한다면서 자신은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의 문이 막혀 버린 사람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 없이 일하면서 지체들과 수없이 부딪히면서 성령을 슬프게 하는 지체들, 그들의 변론하는 지혜와 열심이 어찌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 여러분들 중 다수의 관심은 이미 예배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불경건한 것들과 세상적인 생각들로 빼앗긴 마음,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 것도 기대하지 않는 마음, 자신의 영혼의 곤고함의 원인을 자신 안에서 찾는 진실한 참회의 마음도 없이 드리는 습관적인 예배 참석, 상습화된 예배 시간에의 지각, 예배에는 참석해도 설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몸에 배인 태만함과 습관적인 졸음, 예배 속에서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고양되어야 할 기대보다는 예배가 끝나는 시간에 더욱 더 관심을 갖는 부주의함이 있지 않습니까? 이것이 바로 “말씀을 제쳐 놓은” 삶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설교자인 내가 어떻게 하면,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을까요? 강철같이 굳은 얼굴, 핏기 없는 뺨, 늘어진 어깨, 푹 숙인 고개로 예배드리던 그대들이 어떻게 하면 깨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정말 예배 가운데 온전히 한 마음이 되어 본 적이 언제입니까? 하나님 앞에 성령을 거스르기로 작정한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이 되어서, 진실함으로 하나님 앞에 자기를 드리며 참회의 기도와 기쁨의 찬송으로 하나 되어서, 마음으로 서로를 깊이 용납함으로 예배가 생애적인 축제가 된 때가 언제입니까? 무엇으로 그대들의 마음을 녹일 수 있을까요? 매시간 눈물로 그대들의 마음에 성경의 진리를 아로새겨도 여러분 마음은 무관심의 바람과 함께 지워지니, 이제 무엇으로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 줄 수 있을까요? 변하지 않는 영혼들을 향해 외치는 설교자의 마음은 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옥입니다. 한 설교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설교는 토혈의 노래입니다. 나는 매 순간 회중을 향하여 피를 내어 뿜습니다. 내게 소원이 있다면 그 피를 먹물 삼아 저들의 마음에 진리를 새기는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도록......”

B. 마음과 말씀의 능력

하나님의 말씀은 티끌 같은 겨자씨로 새들이 깃드는 아름드리나무로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은 오직 말씀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마음을 기울이는 심령들에게만 해당되는 능력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고 그분을 향해 기울여지지 않는 한 말씀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말씀의 능력은 여러분과는 관계없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은 향상될지 모르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는 여전히 가난함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길가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기억해 보십시오. 돌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상기해 보십시오. 가시떨기에 뿌려졌던 말씀의 씨앗을 회상해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의 씨앗, 그것은 작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들에게 먹혀 버렸습니다. 아무런 힘도 없이 나온 싹이 말라버렸습니다.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설교는 있으나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는 현장을 좀처럼 경험하지 못합니다. 성경공부는 있으나 모임 속에서 말씀은 제쳐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있고 그분의 말씀에 심령을 기울이는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이 우리에게 없습니다. 나는 이 말씀 앞에서 평생토록 회개하며 살아야할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의 가난하고 힘이 없는 교회를 위해서 사람들은 많은 문제들을 지적하고 여러 이야기들을 논의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은 삶을 회개하고 그분 앞에 정직히 치료받지 않는다면 공동체적으로 교회는 영적으로 병든 몸으로 남을 것이며, 개인적으로 우리 모든 사람들은 온전한 신자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IV. 위기의 해결: 일꾼을 세우심

이 같은 영적인 위기에 대한 사도들의 처방은 분명히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행 6:3,4).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의 일꾼들을 세우시는 데 있어서 최소한 세 가지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A. 목회자를 돕게 함

첫째로, 그들은 목회자를 돕기 위하여 선택된 사람이었습니다. 교회의 일꾼은 목회자에게 위임된 목회 사역을 원만히 수행하도록 돕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꾼들의 직분은 하나님께로 부여 받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목회자의 부르심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직접적인 부르심이고, 세워지는 일꾼들의 부르심은 목회자의 소명을 따라서 세워진 교회 안에서 주어지는 간접적인 부르심이라는 점에서 목회자의 부르심과는 다릅니다.(민 12:6-8, 엡 4:11). 즉 목회자의 소명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교회의 일꾼들의 소명은 교인들의 의사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모두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나 그 둘은 권위와 내용면에서 결코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진리에서 이탈하지 않는 한 교회의 일꾼들의 정체는 하나님을 섬기는 목회자를 돕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인들은 자신들이 이렇게 투표를 통해서 선출이 되고 나면 무슨 큰 감투를 쓴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신이 목회자와 교회의 무슨 권력이나 나누어 갖게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는 모두 지난 시대 우리나라의 반장 선출 문화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정당한 성경의 정신을 따르는 의식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말합니다.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3절). 이것이 권력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까? 교회에는 권력이 없습니다. 섬기고 봉사할 권한이 있으니 그것이 무슨 세상적인 권력이라는 말입니까?

여기서 과부들을 구제하는 일도 원래는 사도들에게 위탁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교회로 참으로 교회되게 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했고, 사도들은 더욱 중요한 일에 헌신하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맡긴 것”입니다. 교인들의 동의하에 사도들로부터 “빼앗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목회자에게 맡겨졌습니다.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첫 번째 목회자로 부르시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해 두십시오. “내 양을 치라”(요 21:16). 이 당부의 말씀을 구체화하기 위하여, 교회는 일꾼들을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를 도우려는 성심과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면 이러한 일꾼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분쟁과 다툼을 보십시오. 목회자와 불신자의 다툼이 아닙니다. 회심하지도 않은 채 형식적으로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들과의 다툼이 아닙니다.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과의 다툼입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에게도 그러하듯이, 목회자에게도 자신의 교회는 모든 것입니다. 한 목회자가 고뇌 속에서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할 때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처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날 동안의 고통이 있고난 후, 그 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발견한 때입니다. 그는 견딜 수 있는 한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상처와 고통은 대부분 교회를 대적하는 불신자들이 아니라 교회에서 세워진 일꾼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고통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더 큰 목적을 위하여 목회자의 마음으로 목회자처럼 일하고, 목회자를 도울 사람들을 뽑는 것입니다.

B. 말씀에 전념하게 함

둘째로, 목회자로 말씀에 전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목회자에게 참으로 인간으로서 도저히 갖추기 어려운 자질들을 골고루 요구합니다. 뛰어난 행정 능력, 경제와 금융에 대한 이해, 경영체로서의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을 만한 지도력,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을 통합해 낼 수 있는 화합의 인격, 그러면서도 우유부단하지 않은 탁월한 결단력과 추진력, 그러면서도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는 인격적인 세심함, 성도들의 삶의 전 영역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아무리 일해도 쉴 필요가 없는 황소 같은 체력, 무엇이든지 주는 대로 먹고 소화 시킬 수 있는 소화능력, 그러면서도 배는 나오지 않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성도들과 쾌활하게 친구처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지식에 있어서만큼은 모르는 것이 없이 박식하여야 하고, 현재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목회자보다는 이미 공부를 많이 한 목회자이기를 원합니다. 자신들은 회복된 영혼으로 산 날보다는 영적인 침체 빠져서 지내는 날이 더 많을 지라도 자신의 목회자는 이미 그러한 연약함과는 결별한 사람들이기를 원합니다. 고색창연한 경건의 품위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현대의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할 줄 아는 폭넓은 아량을 동시에 갖추기를 원합니다. 이 모든 것을 갖춘 목회자는 세상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이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할지라도 그가 말씀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가 가진 자질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 사역에 전무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살리는 길입니다. 초대교회가 교회를 섬길 일꾼을 뽑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뽑혀지는 일꾼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을 듣는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행 6:3). 성령의 은혜가 메마른 사람, 지혜가 부족하여 아집과 독선에 흐르는 사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착한 마음이 없이 이웃에게 칭찬 대신 비난을 받는 사람들이어서는 안 되었습니다.

C. 기도에 전념하게 하심

셋째로, 목회자로 하여금 기도에 마음을 쏟게 하기 위함입니다. 과부들을 구제하는 사건을 통하여 경험하게 된 교회의 영적인 위기는 적어도 사도들이 외형적으로 말씀을 전파하지 않거나, 또는 그분의 교훈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위협받는 영성을 재건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면서 고백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4절).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한 가지 사실에 주목하게 됩니다. 사도들이 교회의 봉사를 위해서 일곱 집사를 선택한 것은 “말씀을 제쳐”두지 않고 말씀으로 온전히 봉사하기 위함이었는데, 막상 일곱 집사를 선택하고 난 다음에는 사도들의 말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말씀을 전하는 것 외에 한 가지가 더 추가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히려 말씀의 봉사 보다 먼저 해야 하는 것으로 등장합니다. 그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진술은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념하는 것과 마음을 쏟아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기도의 교제를 상실한 목회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 올 리가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쏟지 않는 목회자의 마음에서 신령한 기도가 우러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목회자의 기도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그가 누구이든지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옵니다. 교회에 다가온 영적인 위기 앞에서 사도들은 반성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이 구제하는 일로 인하여 분산되고, 과부들의 불평과 원망으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아무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그들의 기도의 세계에 그 영향이 마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교회의 목회자였던 고(故) 로이드 존즈(D. Martyn Lloyd-Jones) 목사는 “설교와 기도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설교는 언제나 쉽지만, 기도는 항상 어렵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가 죽은 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설교에 관하여 박사학위논문을 썼습니다. 그리고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부인인 베다니 여사에게 자신들의 논문을 전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논문을 읽고 소감을 말해 달라는 그 중 어떤 사람에게 그녀는 말했습니다. “논문에는 빠져 있었지만, 제 남편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목회자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피 뿌리며 죽어간 선지자들과 신약에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며 순교한 사도들의 후예입니다. 선지자의 가장 중요한 직무는 두 가지였으니 하나는 자기 백성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말씀을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사도들이 직면한 교회의 영적인 위기 앞에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자신들이 전념하여야 할 두 가지 의무, 곧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일은 새롭게 고안한 그들의 것이 아니라,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의 전통 안에 있던 자신들의 고유한 직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에 다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꾼들은 목회자의 마음을 보호해 주기 위하여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입니다. 목회자로 하여금 하나님께만 마음을 바치며 기도할 수 있도록 위임 받은 일들을 잘 섬겨야 합니다. 목회자가 교회로 마음이 상하여 기도할 수 없게 해서는 뽑힌 일꾼들이 하나님께 받을 칭찬은 없습니다. 목회는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탐구도, 성도들을 위한 기도도, 자신을 끊임없이 쳐서 복종시킴으로 예수의 흔적을 지니게 하는 성화도, 탁월한 안목으로 교회의 나아갈 바를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도 모두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마음은 목회사역을 위한 옹달샘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 담겨야 할 샘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회자로 기도에 전념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대들의 의무입니다.

V. 위기의 결말: 말씀의 부흥

초대교회가 이처럼 큰 영적인 위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교회가 위기를 극복하는 올바른 하나님의 방법을 택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간파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선택이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사도들과 백성들이 함께 기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방법임을 인정한 데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 같은 올바른 선택을 했어도 성도들이 따라 주지 않았더라면 교회의 위기는 한층 더 심각한 양상으로 오래 머물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도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4절). 이에 대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의 반응에 대해 성경은 말합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5절).

교회가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성도들의 분별력 있고 성숙한 반응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교회에 몸담은 그리스도인들의 올바른 반응은 교회로 하여금 영적인 위기를 넘어가게 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오늘 어두운 영적인 위기 속에서 흔들리던 예루살렘교회가 승리의 함성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을 보십시오. 영적인 위기를 극복한 이 교회의 형편에 대해 성경은 증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 이러한 진술은 우리에게 진정한 부흥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인위적으로 성장지향적인 오늘날의 세속적인 부흥과는 다른 그 무엇을 보여줍니다. 오늘날에도 부흥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이 부흥 여부를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시금석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합니다. “제자들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이 도에 복종하니라”(7절). 적어도 여기에는 부흥 여부를 가름하는 두 가지 시금석이 제시됩니다. 첫째는 진정한 회심입니다. 여기서 언급된 ‘제자’는 ‘회심함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던 무리들’입니다. 그들은 분명한 회심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행 2:41). 그들에게 있어서 가장 넓은 의미의 제자가 되는 것은 적어도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회개함, 세례 받음, 죄 사함을 받음, 성령을 받음”이 그것이었습니다.(행 2:38). 둘째는, 잘못된 사상과 교훈을 따르던 사람들을 굴복시키는 십자가의 도(道)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과 함께 역사 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흥의 본질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자신의 영적인 도전 앞에 바르게 반응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을 택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말씀의 흥왕함을 주셨고, 급기야 사도들을 핍박하던 허다한 제사장들까지도 그리스도인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이 영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이 친히 하신 일이었습니다. 사도들의 예리한 영적 통찰력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의 성숙한 신앙적인 반응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을 전하는 것에 전무하리라” 이 고백 속에서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나눔의 시간

1. 예루살렘교회의 영적인 위기는 원인이 무엇이었습니까? 죄가 아닌 무질서를 통해서도 교회에 영적인 위기가 올 수 있음에 대하여 숙고해 봅시다.
2. 목회자의 소명과 교회에서 세우는 일꾼의 소명의 같은 점과 다른 점에 대하여 말해 봅시다.
3. 목회자로 하여금 말씀에 전념하게 하기 위하여 교회와 성도들이 어떤 일로 도울 수 있을지 본문의 가르침을 따라 각자의 의견을 말해 봅시다.
4. 교회 안에서 어떤 일들이 목회자가 기도에 전념하는 데 방해로 작용하고 있을지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그 해결 방안에 대해서도 이야기 해 봅시다.
5. 부흥의 진정성을 판가름하는 두 가지 시금석은 무엇인지 말해 보십시오. 그리고 전정한 부흥이 왜 말씀의 부흥일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서 나누어봅시다.
(김남준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