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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생의 갈림길에서(10) : 핍박과 시련을 만날 때 (단 6: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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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갈림길에서 10 (단 6:1-10)

I. 본문 배경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생의 갈림길들의 대부분은 세상을 살아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일반 섭리 속에서 당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만나게 된 두려움, 그분을 등짐으로써 당하게 된 궁핍과 침체들, 질병으로 인한 절망, 그리고 회심치 못한 자녀로 말미암은 고통 등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이 읽은 본문 말씀은 자신의 어떠한 허물이나 죄악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신앙의 직접적인 핍박이라는 점에 있어서 앞에서 살펴본 수많은 생의 갈림길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은 이스라엘 포로기에 선지자로 활동한 다니엘의 신앙의 한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바벨론이 이스라엘을 정복한 후,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가 되어 그곳으로 끌려갔습니다. 그 가운데 다니엘도 포함되었으니 그는 귀족집안의 사람인 듯 하며, 지식과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을 이어 메대의 다리오 왕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은 메대의 다리오 왕시대의 일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때에도 그는 여전히 메대의 총리로서 왕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한 나라가 멸망하고 또 다른 나라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이러한 관직을 유지하고 있는 그의 모습은 그가 일꾼으로서의 자격이 얼마나 출중하였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를 마음이 민첩하고 충성스러운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민첩하고 영리했던 그는 열왕들의 총애를 입게 되었고, 본국의 관리들은 당연히 그를 시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 흠이 없었던 터라 저들은 한 계책을 내놓게 되었는데, 이는 유대인으로서 율법을 따라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그를 죽일 수 있는 계략이었습니다. 삼심 일을 정하여 왕 외에 그 누구에게든지 절을 할 경우 사자 굴에 쳐 넣겠다는 금령이 그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생명이 걸린 신앙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II. 신앙의 위기가 찾아올 때.

우리나라만큼 완벽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나라는 전 세계 어디를 뒤져봐도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주신 축복 중 하나가 그분을 자유롭게 믿을 수 있도록 온전한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목에 칼이 겨누어진 상태에서 신앙의 정절 지켜야하는 위협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러한 생사의 길에 서 있었습니다. 어떤 타협이나 절충의 여지가 전혀 없는 상황에 말입니다. 신앙을 버리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다니엘과는 달리 우리는 자유로운 신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깨어있는 영적 눈으로 보면 우리도 순간순간 이런 갈림길에 서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때보다 더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믿음과 배교의 사이가 불분명하고, 형식적인 신앙과 죽음을 불사하는 견고한 신앙의 경계가 없는 이 시대에 우리의 모습을 분명히 살펴봐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신앙을 순수하게 지킬 것인가, 어떻게 하면 이 예수의 생명을 내 속에 드러내며 살 것인가를 생각하는 대신, 이 신앙으로 내가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내 인생살이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에 집중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진리를 위해 죽는다는 살아있는 신앙의 절개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한때 하나님을 사랑하던 자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급격히 변해 가는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 세상과 하나님을 선택하라는 갈림길에서 반복적으로 세상을 선택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일은 아닐까요? 복음은 수많은 사람들이 흘린 피로 인해 우리에게까지 전수되었습니다. 그렇게까지 지켜왔던 그 정신이 우리에게도 남아 있습니까? 이 말씀은 수많은 핍박과 환란 속에서도 순전하게 보존되어 왔고,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그 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신앙의 자유를 누리면 누릴수록 이 신앙이 위태로울 수도 있음을 알아서 힘을 다해 이 믿음을 지키도록 애써야 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정신은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변하지 말아야 할 정신입니다. 우리의 삶에 다니엘과 같은 방식의 환란이 실제적으로 찾아오지는 않겠지만 배교와 믿음. 하나님과 세상, 둘 중에 하나를 따를 것을 노골적으로 강요 당하는 인생의 갈림길에는 끊임없이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마다 어떻게 하시렵니까?

III. 핍박과 시련 앞에서

이러한 핍박 속에서 그가 취한 행동은 세 가지였습니다. 뜻을 정하고, 하나님을 선택하였으며, 변함없이 기도하는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A. 뜻을 정함

다니엘은 왕의 조서에 이미 어인이 찍힌 것도 알고 있었고, 왕 자신도 그 법률을 어떻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신에게 그 일이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전에 하던 그대로 행하게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처음 포로로 끌려왔을 때 이와 유사한 시련을 맞이한 적이 있습니다. 왕을 섬길 인재를 등용하는 가운데 제공되었던 왕의 진미를 거절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 음식은 율법에서 금한 음식이었을 수도 있고, 이방신을 위한 제물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패배국의 포로에 불과했던 다니엘은 부귀와 영화를 거머쥘 수 있는 이 좋은 기회를 버리고 자신의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단호하게 뜻을 세웁니다. 그러나 지극히 부드러움 속에서 그것을 완곡하게 거절함으로써 자기를 지켜나간 지혜로운 자였습니다. 뜻을 세우는 일은 단호하고 굳건했으나 그 뜻을 전달하는 일은 지혜롭고 부드러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시련을 축복의 기회로 바꾼 그가 또 한 번의 시련을 만나게 되었는데, 이는 생사를 건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그는 뜻을 세웁니다. 사람들은 흔히 핍박과 시련을 만나게 되면 두려움과 공포를 휩싸일 때가 많습니다. 박해하는 자는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힘으로 다가오고 우리는 그 위협 앞에서 신앙을 저버리는 부끄러운 행동을 할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 위기와 위협 앞에서 뜻을 세우고 담대히 맞서게 되면 그 환란은 생각보다 힘없이 무너져 내립니다. 천안문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세상 사람들도 강인한 신념으로 값진 일들을 이루어낼 때가 많은데 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 얼마나 뜻을 세우는 것이 중요하겠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신앙을 저버리면서까지 일을 하지 않으리라는 결단, 어떠한 일을 당하든지 이 신앙을 따라 죽겠노라는 정신, 헛된 세상의 행복을 위해 이 신앙을 바꾸지 않겠다는 신앙 제일주의 정신을 향해 뜻을 세우는 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표지판이 되어야 합니다. 이 신앙을 축으로 삼아 환경에 떠밀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많은 사람들은 신앙이 아닌 자신의 생각과 형편을 삶의 중심축으로 삼습니다. 이러한 자는 물결치듯 언제나 떠밀려 다니는 신앙인이 될 것입니다.

이 일은 다니엘 한 사람에게만 국한 된 문제가 아니라 그와 함께 끌려온 모든 유대 민족에 대한 대대적인 핍박을 예고한 사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는 하나님만을 선택하기로 뜻을 세웠습니다. 유혹과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담대하게 그 길을 걷는 자는 이 신앙을 파수하기로 결단하고 뜻을 정한 사람의 몫입니다. 그렇지 않은 자는 하나님이 결코 붙들어 주시지 않습니다. 그는 이런 상황 속에서 뜻을 정하였습니다. 하나님 중심주의의 신앙을 버리지 않겠노라고 말입니다.

지난 한 주간 저는 미국 집회를 인도하고 돌아왔습니다. 작년 집회 때에는 그냥 구경이나 한 번 하자는 마음으로 온 성도들도 많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말씀을 통해 은혜를 받겠다고 처음부터 뜻을 세우고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중에는 먼 곳에서 오랫동안 차를 몰고 온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설교를 하였는데도 너무나 다른 반응들이 나왔습니다. 왜 그럴까요? 왜 그들은 생애적으로 하나님을 만났을까요? 뜻을 정하였기 때문입니다. 뜻을 정하고 말씀을 듣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뜻을 정한 자는 정해진 그곳으로 은혜가 흘러들어가게 되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은혜가 흘러들어가야 할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서 무엇을 할 것입니까? 뜻을 정하지 않았다는 말은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증거 할 뿐만 아니라 그렇게 부어주시는 은혜를 어디에 사용할지도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들에게 결코 은혜를 부어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뜻을 세우고 마음을 정한 사람에게만 물 붓듯 은혜를 부어주시며, 그분의 커다란 역사를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 속에서 뜻을 정하는 것과 그렇지 않는 것은 엄청난 영향력과 결과를 낳습니다. 뜻을 정하고 드리는 기도와 마음 없이 드리는 기도, 뜻을 정하고 드리는 예배와 아무 기대 없이 드리는 예배, 뜻을 정하고 묵상하는 말씀과 습관적으로 읽는 말씀은 틀립니다. 뜻을 세우고 마음을 거기에 붓는 기도와 예배와 삶은 주님이 마음 졸이시며 들으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혹시 뜻을 정하지 못하고 있기에 하나님의 은혜 부으심이 없는지 말입니다. 가족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뜻을 세우고 매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구원해 주셔도 그만, 그렇게 해주시지 않으셔도 그만인 사람처럼 분명한 목표도 없이 기도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지리멸렬하게 몇 년이고 가게 될 것입니다. 마음이 실려 있지 않은 그 기도는 결코 응답되지 않습니다.

다니엘에게는 이러한 뜻 정함이 있었습니다. 그 금령의 모든 영향력들을 알고도 신앙의 정조를 지키기 위해 뜻을 세웠습니다. 그러했기에 그는 이 긴긴 세월동안 나라를 생각하고, 함께 끌려온 동족들을 생각하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절대 절명의 목표를 가진 한 사람의 헌신이 그렇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의 수고를 항상 능가합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삶의 상황 속에 떠밀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이런 신앙의 기로에 서서 고민하는 순간이 있을까요? 깊은 혼돈 속에서 명철은 희미해져 가고, 마음은 복잡한 정서로 하나님을 향하지 못할 것입니다. 뜻을 곧게 세우십시오.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복잡하게 보여도, 신앙을 인생의 중심축에 견고하게 박아 넣는다면 그리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혼란도 없을 것입니다. 고생을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생생한 교제 가운데서 반드시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지 못하는 자는 하나님께도 세상에도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데 그 은혜가 쓰여 지도록 뜻을 정하고 신앙생활을 하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든지 그렇게 하십시오.

B. 하나님을 선택함

위대한 제국의 총리가 된 그에게 얼마나 큰 부귀와 영화가 따랐을 것인지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런 그에게 이러한 위기가 다가왔습니다. 자신을 총애하던 왕을 설득할 수도 있었고, 30일 간만 여호와 신앙을 저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문제를 아주 단순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 시련을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지, 타협안을 찾으며 신앙을 버릴 것인지를 물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뜻을 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이러한 신앙중심주의로 살리라는 뜻 정함 하나만으로 행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영웅적인 심리, 격앙된 감정 하나만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다니엘 속에 있었던 용기 그 이상의 뭔가가 시킨 일이었습니다. 일평생 살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전부이심을 믿는 믿음이 시키는 일인 것입니다.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입니다. 내 속에 이러한 신앙과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인 것이지, 한 순간의 영웅심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사도요한의 제자 폴리갑(polycarp)은 수많은 회유와 핍박과 심문 끝에 순교를 앞두고 이러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든 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를 한 번도 부인하지 않으셨고, 변함없이 사랑해주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어찌 모른다고 할 수 있습니까?”일제 강점기 때에 신사참배에 대한 순교를 결단하며 기도했던 수많은 사역자들과 평신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러한 시련이 닥쳤을 때, 그 뜨거웠던 기도의 현장에서 볼 수 있었던 모습과는 달리 그렇게 담대하게 보였던 자들은 신사참배에 굴복하였고, 너무나 미약하게 보였던 성도들은 옥에 투옥되어 순교를 기다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유혹과 핍박이 몰려 왔을 때에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결단을 하나 그 결단을 끝까지 밀고 나가게 하는 힘은 은혜입니다. 은혜가 있어야 자신의 온 인격을 건 결단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은혜의 힘이 함께 하는 결단은 생명을 건 큰일이 아닌 작은 일에서부터 끊임없이 하나님을 선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날마다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매 순간 주님과 세상을 선택하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이고, 용감하게 주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은 날마다 주님께 붙들린 사람만이 가능한 일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은 한 순간의 용기, 한순간의 결단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매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온 삶의 궤적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정절을 지키는 모든 힘은 혈기와 결단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세상적인 손길을 더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교제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가면, 그 사랑과 은혜 속에서 신앙을 유지할 힘을 주십니다. 그렇지 않으면 헛된 결단을 무수히 남발하게 될 것입니다. 매일 뜻을 정하고 지속적으로 은혜 하에 사는 자만이, 지금도 그 은혜에 붙잡힌 자만이 이것을 행할 수 있습니다.

다니엘처럼 매순간 하나님을 선택하는 사람이 됩시다. 그는 느부갓네살 왕의 종도, 다리오 왕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이국의 왕들을 섬겼으나 그는 결코 그들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단6:20)라고 그를 애타게 찾던 다리오 왕도 이를 인정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사람들 앞에 그분의 소유임을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C. 변함없이 기도함

이 모든 음모를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대전통의 오랜 습관을 좇아, 전에 행하던 그대로 예루살렘을 향해 하루에 세 번씩 늘 기도하였습니다. 그것도 감사함으로 말입니다. 백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자신은 남의 나라에 총리가 되었으나, 그가 바라는 바는 하나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이제 망하고 없었지만, 기도와 말씀을 묵상하며 이 고달프고 어두운 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루 세 번씩 모든 분주한 일들을 내려놓고 온 마음을 쏟아 기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어떠했습니까? 곤고한 인생의 길을 걷다 교회에 첫발을 디뎠을 때, 그때 어떤 마음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인생의 날개를 달아 주셨을 때, 그때 어떻게 행하셨습니까? 예수 안에 있는 그 은혜에 붙잡혔던 때, 그때 행하던 그대로 행하십시오. 다니엘은 그렇게 자신을 드리며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뜻을 세운 자였기에 자신이 흘러가야 할 곳을 알았고, 그 방해가 무엇인지, 어떻게 싸워야할지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변함없이 부르짖었습니다.

기도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긴 하나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 말씀에 은혜를 받고 있다면, 우리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기울어져 있다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쁜 전철 속에서도, 길거리를 걸어가면서도, 자동차를 운전해 가면서도 주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그 사랑에 복받쳐 울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게 주님께 기울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니엘만큼 바쁩니까? 그 사람처럼 생사를 건 위기에 서 있는 사람입니까? 다니엘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사랑의 교통이 있었기에 그 고달픈 인생 속에서도 이를 멈출 수 없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5).』

예수님의 생애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의 삶 속에서 그 어떤 냉랭함이나 무관심한 모습을 읽을 수 없습니다. 온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겼고, 그래서 그분은 마지막에 십자가를 선택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온전해지고자 몸부림치는 신앙이 아니면 그 신앙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데 이바지 할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임을 생 속에서 늘 경험하기 때문에 그는 늘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주님이 계시면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을 가져도 주님이 계시지 않으시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아님을 늘 고백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말씀을 통해 이러한 교통을 함으로써 역사의 어두운 밤을 지나면서 유일하게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위기의 순간에 넘어지는 자, 헛된 결단을 남발하는 자가 되지 말고 지금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 속에서 그분을 날마다 선택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능력은 사람의 수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든 사람, 다니엘은 전에 하던 그대로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세상이 자신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빼앗아 갈 수 없는 단 하나, 하나님이 가장 소중하였기에 그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간사한 존재입니까? 홍해 앞에서 죽음을 면케 하신 하나님께, 그들을 변함없이 먹이고 입히셨던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도 그들과 같이 물을 달라고, 음식을 달라고, 고기를 달라고 끊임없이 불평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은 모두 우리 안에 있는 탐욕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다니엘이 그 길을 걸어갔을 때, 오히려 오랫동안 다니엘을 괴롭혔던 대적들의 주모자들을 한꺼번에 처단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 그래서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붙잡았던 그 때처럼 변함없이 전해 행하던 그대로 주님께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인생의 핍박의 위기를 오히려 축복의 기회로 바꾸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

IV. 담대하라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 대적이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편에 서있는지가 문제입니다. 주님 안에 있는 자는 모든 것이 그들의 것입니다. 사물의 모든 표상들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한 분만을 절대가치를 받아들이며 그분을 생명처럼 지킬 때, 우리는 담대하게 믿음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유혹과 핍박이 많은 이 세상에서 믿음을 지키고 신앙을 유지하며,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힘쓰는 자를 하나님은 도우십니다. 어린아이처럼 뜻을 세우고, 매순간 그분을 선택하고, 변함없이 그분께 기도해서 인생의 시련을 이기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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