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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빛의 갑옷을 입자 (롬 13: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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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시내산선교회 주관으로 충청남도 광천에 있는 오서산을 다녀왔습니다. 저는 우리나라의 산들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오서산이 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 알았고 더욱 놀라웠던 것은 이 산이 우리나라 5대 명산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어째서 오서산이 5대 명산일까? 모르는 산인데 하면서 출발했습니다만은 산행을 시작하면서 그것이 사실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전날 비가온다던 일기예보가 밤새 온 비로 대신하여 해맑은 날씨도 좋았고, 수많은 등산객들이 일렬로 서서 산행을 하는데 참으로 장관이었습니다.

오랜 만에 산다운 산을 오른다는 것 때문에 사실 마음의 염려가 조금은 있었습니다. 이왕 등산을 하면 정상까지는 가야 하는데 과연 정상까지 갈 것인가 하는 부담을 안고 산행을 시작하여 3부 능선쯤에서 야외기도회를 드리고 숨을 고른후, 본격적으로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중턱에 다다르니 얼마나 가파른지 숨이 턱에 차 숨을 고르기 바쁜데 사람들이 그래서 이곳이 '깔딱고개'라는 것입니다. 난코스의 중간지점을 통과하면서는 몇 번 작은 산봉우리를 오를 때마다 산 밑을 바라보면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여기서 그만 둘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만 옆을 보면서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중단없이 올라가는 행렬 속에는 어린 아이도 있었지만 70대의 노인들도 계셨습니다.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나 이제 겨우 7학년 3반이요..."하는 한 할머니의 말씀에 머쓱해진 저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몇번의 작은 정상을 지나 결국 멋진 갈대밭 숲이 눈 앞에 펼쳐진 정상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정상까지 올라간 줄로 믿습니다. 우리 박정자권사님, 이순례권사님, 장윤석장로님도 모두 6학년 7반에서 9반임에도 불구하고 정상에 오르셨습니다. 장로님 나이가 되어도 이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면서 장로님을 보니 좋은 건강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다시한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10월이 지나고 11월입니다. 2006년도 새해를 다짐한지도 벌써 10달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러분들의 삶의 자리, 헌신의 자리는 어디에 계십니까? "이만큼 했으니까..."하시면서 시원한 바람부는 전망이 괜찮아 보이는 자리에서 한없이 머물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아니면 정상을 바라보면서 흐르는 땀을 닦으며 종아리에 근육이 뻐근함을 느끼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격려를 들으면서 용기를 내서 올라갈 준비를 하고 계시는지요?

연말만 되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중단의 유혹입니다. "올해까지만 하고 찬양대 쉬어야지..." "올해까지만 하고 교사 그만 두어야지. 그래 봉사는 올해까지야..." 그렇게 생각하며 숨을 고르고 계신 분은 안계십니까? 저는 어제 산행을 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도전을 받았습니다. 혼자 산행을 했으면 그냥 적당한 7부나 8부 능선의 봉우리에 올라앉아 기념 사진이나 몇장 찍고 쉬다가 내려왔을지도 모르는데... 중단없이 올라가는 분들을 보면서 용기를 얻고 도전도 받으며 결국 승리한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깨달아 가면서 도전 받아 가면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바울사도께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면서 말세에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켜 주는 말씀입니다. 8절부터 14절까지가 주요한 권면의 말씀이 두 주제로 묶어져 있는데, 8절에서 10절까지는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면서 사랑하며 살기를, 11절에서 14절은 이제 자다가 깰 때가 되었으며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으라면서 정신차리며 살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계속하여 말씀을 들었으면 좋겠어요. 바울 사도께서 로마의 성도들에게 하셨던 간곡한 권면을 되새기며 인사합니다. "집사님, 지금은 자다가 깰 때입니다..." 이렇게 인사하다보니까 정말로 졸던 분도 저절로 깨지네요. 지금은 깰 때입니다. 지금은 정신 차릴 때입니다. 요즘처럼 사단의 세력이 하나님에 백성들을 향하여, 교회에 대하여 도전하던 때도 없었을 만큼 심각한 영적존쟁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줄로 믿습니다.

자다가 깰 때라고 하는 말은 지금 우리의 시대가 어두움이 깊은 시기라는 것입니다. 12절을 보면 지금은 밤이 깊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깊은 밤의 시대, 영적으로 심각하게 타락한 시대, 도덕적으로 말할 수 없이 타락한 시기가 지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밤이 깊은 시대, 어두움이 깊어가는 시대에 우리는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들, 특별히 선지자들을 통하여 일깨워주신 것은 밤이 깊을 수록 새벽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전도하기가 점점 어렵다고 할 때 영적인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아, 지금이 교회가 부흥할 때이구나... 어두움이 깊을 수록 새벽이 다가옴을 알아채는 것처럼, 영적으로 어두울수록 광명의 시기가 다가온다고 하는 것을 알아채야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빛의 갑옷을 입으십시오" 사실 빛과 갑옷은 이미지가 서로 다르지요? 빛이라고 하는 것은 따뜻하고 부드러운 평화로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반면, 갑옷은 좀 딱딱하고 군사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평화와 전쟁라는 대립되는 이미지를 통하여 깨닫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자주 상반된 이미지를 가지고 우리를 교훈할 때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너희가 뱀의 지혜를 배울 뿐 아니라 비둘기 같이 온순하기를 요청하셨습니다. 뱀과 비둘기는 전혀 다른 이미지지만, 거기에서의 필요한 이미지를 우리가 갖기를 원하는 것이지요. 지혜는 뱀처럼, 온유함은 비둘기처럼 말입니다.

영국의 로이드존스라고 하는 목사님이 우리 모든 목회자들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강단에 설 때는 사자와 같이 서십시오. 그러나 강단을 내려서면 양과 같이 서십시오. 사자 이미지는 어떤 것도 흔들리지 않는 초원의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이로서의 강력한 권위를 요구하는 거지요.

그러나 양의 이미지는 뭡니까? 겸손하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이미지입니다. 목회자의 이 두가지 이미지는 서로 상반된 것 같지만, 반드시 가져야 할 두가지 이미지, 강단에 서서는 세상의 타협, 어떤 세상적인 것과도 타협하지 않는 강력함이 있어야 합니다.

나이가 많아도 나단선지자처럼 왕 앞에 가서 잘 못된 것은 잘 못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용기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강단을 내려서면 양과 같이 겸손하고 온유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목회자들에게 요구되는 두가지 이미지입니다. 강단에 서도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그냥 맥아리가 없고, 밖에 나서서도 여전하면 곤란하지요. 힘들어요. 성도들이 힘듭니다.

이 두가지 이미지는 언제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어둠이 깊을 수록 아침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면 이제는 깨달을 뿐만 아니라 요청되는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뭐냐 하면 13절 낮과 같이 단정히 행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을 낮으로 생각하고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군인들이 출동을 대비하기 위해서 남들은 다 옷을 벗고 자지만 옷을 입고 자는 사람들이 있어요. 군화도 신고, 탄띠도 메고, 철모는 옆에 벗어 놓고 자는 사람들이 있어요. 옛날에는 5분 대기조 그랬어요. 지금은 2분 대기조라고 하더라구요. 비상이라고 하면 철모만 쓰고 그냥 뛰어나가는 거예요. 옷 입을 틈이 없고, 군화 신을 틈이 없는 거예요.

준비되어 있는 자세, 지금 우리가 자다가 깰 때라고 하는 상황을 인식 했으면 우리가 단정하게 그리스도로 옷을 입고, 준비되어 있는 모습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상황이 발생하고 나서 그 때에 신 신고, 옷 주섬주섬 입으면 늦는다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단정하게 외형적으로도, 내면적으로도 준비되어 있는 그러나 그 준비되어져 있는 모습이 단정한 모습으로 준비되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람을 보면, 옷 입는 매무새를 봐도 좀 단정하게 옷 입는 모습을 보면 좀 좋지 않아요?

성도들은 목회자를 닮아야 하는데 제가 단정하지 않습니까? 아닌가요?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단정하기를 원해요. 지난 24년동안 평안의교회를 목회하면서 흐트러지지 않았어요. 단정하지 않았어요? 젊을 때부터 나이 50이 넘은 지금까지 단정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사람 앞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는 나의 삶의 태도가 단정함으로 나오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교회를 나오는 동안 단정함으로 해야 되는 거예요.

내가 하나님 앞에 가장 단정한 모습으로 나아가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단정함은 외형적인 부분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적인 삶의 자세도 단정해야 합니다. 끊고 맺는 것이 분명해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신앙생활의 언제나 중심이 어디예요? 바로 주일이지 않습니까? 항상 주일을 중심해서 우리의 삶의 싸이클이 돌아가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은 그 중심이 주일에 있지 않아요. 월요일, 자기의 사업을, 직장을 시작하는 월요일에 둔 사람도 있고요. 어떤 사람은 금요일날 오후에 둔 사람도 있어요.

어떤 분이 그럽디다. 요즘은 금요일에는 일이 안되요. 왜요? 금요일만 되면 일 다 팽개치고, 어디 등산 갈 거, 어디 놀러 갈 거 계획 짜느라고 금요일날은 직장마다 아주 엉망 진창이라는 거예요. 일 하는 분위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놀러갈거 준비하느라고 벌써 금요일이면 직장이 폐업이 되는 거예요.

실질적으로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밖에는 일을 안 한다는 거예요. 심각한 일이지요. 그런 사람들은 삶의 싸이클이 금요일날이 새로운 출발의 날이예요. 비실비실 하다가 금요일만 되면 눈이 반짝해 지는 사람이 있어요. 어디 놀러갈까? 누구와 뭐 먹을까? 그런 계획 하느라고 반짝 반짝 하는 사람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주일이 우리의 삶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사실은 토요일날은 힘쓰면 안되요. 다른데 힘을 빼면 안 되요. 그런 의미에서 사실은 토요일날 행사가 많으면 안 되요. 우리 성도들의 한계가 있으면 안 되잖아요.

우리가 주일날 주의 일을 하다 보니까 다른 것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 토요일날 몰아서 하니까 결혼식도 토요일날, 돌잔치도 토요일날, 무슨 일도 토요일날 하다 보니까 무척 분주할 수가 있어요.

제가 아무리 토요일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분주하게 돌예배, 결혼예배, 뭐뭐 해 가지고 탈진하고 기진맥진 했을지라 할 지라도 주일 날 힘없이 맥없이 서서 토요일날 어저께 너무나도 많은 일 때문에 지쳤다 할 지라도 오늘 내가 힘이 이렇게 없어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게 이해가 될 일입니까? 하나님의 종들의 사명은 주일날 생기가 넘치고 힘이 넘쳐서 펄펄 뛰어야 합니다.

제가 토요일 날 같은 날 축구선교회가 토요일 저녁에 축구한다고 하면 제가 기겁을 해요. 회장님 불러서 우리 담당 목사님 불러서 좀 절제 좀 해 주세요. 토요일날 저녁에 힘 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럽니까? 힘을 비축해서 주일날 최선으로 하나님 앞에 제일 힘이 넘치고, 의욕도 넘치고, 영육간에 강건해서 주일날 제일 멋있는 모습으로 주님 앞에 탁 나와서 힘있게 나와야지.

주일날 나와도 다 빠지고, 힘 다 쓰고 겨우 나왔는데 맥이 없어 가지고 그런 모습을 보면 하나님 앞에 그게 아니거든요. 그런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주일날 최선의 모습으로, 최고의 모습으로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오는 모습들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실은 삶의 모습, 정신을 차리면서 살기를 원해요. 그 정신을 차린다고 하는 구체적인 삶의 태도는 뭐예요? 자다가 깰 때라. 자다가 깬다고 하는 자세는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깨어 있기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13절에 보면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라. 말라고 하는 것은 굉장히 소극적인 거예요.

그러나 소극적이어도 중요한 일이 많습니다. 하지 말라고 하는 말씀, 방탕과 술취함, 이웃사촌입니다. 음란과 호색, 이것도 이웃사촌이예요. 쟁투와 시기함도 이웃사촌입니다. 이런 것들은 곤란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끊임없이 빛의 갑옷을 입고 자다가 깨어 있어야 할 성도들에게 끊임없이 이런 것들이 유혹으로 다가오고,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을 그냥 계속 찾아가는 것입니다.

아무개 성도 계속 자고 있음. 계속 어두움에 놓여 있음. 현재 우리의 상태를 진단해 볼 때 여전히 어려움에 놓여있음. 여전히 자고 있음. 그런 상태로 이런 유혹들이 우리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우리가 착각할 때가 많잖아요. 저는 어제 등산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고, 내 자신에게 결심을 했습니다. 힘들어서 올라가는 고개가 얼마나 가파른지 그래서 숨이 깔딱깔딱 넘고 그래요.

정말 그 이름 하나 잘 지었더라구요. 숨이 턱에 차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저 앞에 보니까 바위가 하나 보이는데, 정상이 하나 보여요. 저기까지 가면 그만 가야지. 그리고 올라서니까 저기 광천 뜰이 다 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요. 여기서 쉬어야 겠다. 그런 마음이 들어요.

그러다가 옆을 보니까 또 올라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래, 여기서 멈추면 안 되지. 그리고 또 용기를 내서 또 올라가요. 중간에 쉼은 필요하지만 그러나 멈추어서는 안 되는 것이 성도의 삶인 줄로 믿습니다.

하지만 이런 세상의 유혹들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거기서 쉬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버리게 만들어요. 잘못된 삶의 길로, 곁길로 가게 만들어요. 우리 성도들은 착각하면서 살 때도 있어요. 세상 사람이 사는 경우에 그런 경우가 많아요.

요즘은 카페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다방이라고 했습니다. 다방에서 하는 중요한 일은 사람을 만나서 대화 하는 일인데, 이상하게 본래의 목적보다는 다방에 가면 차를 타서 배달해 주는 그 사람이 있는데, 사람들이 가서 대화를 하는 것이 그 차를 나누어 주는 사람을 바라고 가는 경우가 있어요.

단순히 차를 주문하면 배달해 주어야 하는데, 많은 차를 팔고 싶은 욕심 때문에 오버하는 사람이 많잖아요. 그래서 오는 사람마다 무조건 뭐라고 불러요? 사장님이라고 부르죠. ‘아이고, 사장님 오셨어요?’ 온갖 아양을 다 떨고, 어깨를 치고, 엉덩이로 밀고 그러니까 그 재미에 그냥 주머니에 돈만 생기면 시골에서 깨를 털어서 팔고, 콩을 털어서 팔고, 그 퇴약볕에서 그 고생을 한 돈, 그거 팔아가지고 그 미스김 생각나는 거예요.

가면 사장님 오셨다고 아양을 떨면 넘어가는 거예요. 남자들은 죄송하지만 좀 덜 떨어진 부분이 있어요. 자기에게 막 친절하게 해 주면 좋아하는 줄로 착각을 해요. 조금 더 친절하게 해 주면 자기를 사랑하는 줄 알아요.

그래서 거기서 온갖 돈 가져다가 거기다가 빼요. 집에가면 자기 조강지처는 그렇게 호들갑은 안 떠니까 그냥 돈만 생기면 엉뚱한 곳에 가져다 주다가 결국은 착각을 하고, 자기 여자가 자기를 좋아하나보다. 사랑하나보다. 결국은 가정이 파탄되는 경우도 있어요. 정신을 차려야지요.

정말 우리가 자다가 깰 때 인줄로 믿습니다. 방탕함과 술취함이 음란과 호색이 쟁투와 시기가 끊임없이 우리가 때때로 유혹의 손길로, 사탄의 강력한 도전으로 우리를 머뭇거리게 하고, 우리를 멈추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럴 수록 우리가 분별해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분명히 알았으면 좋겠다, 지금 밤이 깊었으니 이 어두운 밤이 곧 지나가고, 새 아침이 올 것을 기대하고, 단정하게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준비하고 살기로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성도라고 말할 때, 우리가 목회자라고 말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입니까? 어두움 속에서도 세상을 볼 줄 알고, 어두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세계를 볼 줄 아는 눈을 가진, 영혼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인 줄 믿습니다.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고, 죄악의 길로 가면서도 그것이 좋아 보이고, 그것이 재미 같아서 그길로 달려가는 예루살렘 백성들을 향해서 지금 여호와 앞에 돌아올 때라고 얼마나 눈물로 호소했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예레미야의 그 호소를 외면했습니다. 듣기 싫다고 성밖으로 쫓아내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포로로 잡혀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아서 포로의 바빌론까지 쫓아가서 거기에 하나님의 백성이 돌아오기를, 우상을 떠나서 하나님만을 섬기기를 외친 줄로 믿습니다.

어두움에서 빛을 보고, 어두움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자리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정말 심각하게 어두운 시절이지만,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정말 어두움의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곧 새벽이 다가오고, 그러므로 먼저 우리가 깨어서 옷을 입고 단정하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준비해야 함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두움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적어도 평안의 성도들이, 평안의교회를 출입하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어두움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는 준비된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깨어 있기를 원합니다. 깨끗이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가 없는 삶을 청산하고, 예수그리스도의 옷을 입은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욱더 예수를 닮아가는 영적 성장의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주님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마지막 때에 밤이 깊을 수록 새벽이 다가옴을 기억하고, 예수로 옷을 입고 단정하게 준비하는 평안의 성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황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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