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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독수리 신자 (창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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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닭과 독수리의 이야기를 아시지요? 아시는 분도 계시고 모르시는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산에 갔다가 부모를 잃은 새끼독수리를 데리고 와서 한 마리를 병아리 닭 새끼들-병아리와 같이 키웠어요. 그랬더니 이 독수리 새끼가 자라서 닭들보다 월등히 큰데도 하늘을 날 생각을 하지 않고 닭 행세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육이나 환경이 그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독수리는 모양만 독수리지 그 행동이나 노는 것, 그리고 추구하는 것은 여느 닭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냥 구구구구 하면서 모이 만 쪼고 있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습기도 하고 ‘독수리가 저러면 안되는데...’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독수리를 ‘닭이 아니라 독수리답게 만들어야 겠다’ 생각해서는 훈련을 시키는데 잘 안됩니다. 그래서 잡아서 하늘로 던져보기도 하고 지붕위에 올라가서 내려 던져보기도 하지만 날개를 펴고 날아갈 생각을 않고 땅에 툭 떨어져서는 구구구구만 하는 것입니다. 이 주인이 ‘여기 집에서는 안되겠구나’ 해서 높은 산꼭대기로 이 독수리를 데리고 갔습니다. 거기에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닭 행세를 하는 독수리에게 하늘을 날아다니는 독수리를 보여줬더니 이 독수리에게 힘이 생기고 생기가 돋습니다. 이때 주인이 독수리를 높은 하늘로 집어 던지니 다른 독수리들과 함께 날개를 푸덕이고 하늘을 날더랍니다. 보다 큰 세계를 위해서 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저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닭이 아니라 독수리처럼 살기를 원하십니다.

아사야 40:31절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히리로다”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어서 독수리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교회도 닭을 키우는 곳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를 키워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닭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계시지는 않으신지요. 아직도 남의 이야기를 하고 나 자신을 봐도 내가 세상 사람과 다를 바가 없는.. 그래서 늘 자신을 볼 때마다 부끄럽기도 하고 죄송하기도 하고 한심하기도한 그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으신지요.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골로새서 3:1절에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가하지 말라” 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까? 세상을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엣 것을 보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이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인가? 그리스도로 다시 살게 되었으면 위엣 것, 하늘의 것을 찾아야 합니다. 땅의 것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왜? 땅의 것을 찾지 말고 위엣 것을 찾아야 합니까? 왜? 닭이 아니라 독수리가 되어야 합니까?

땅과 하늘, 닭과 독수리는 삶의 가치와 기쁨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변해야합니다. 변하려고 노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금덩이’가 발견될 때 99.9%의 금이 아니에요. 금과 함께 흙이 붙어 있는 것을 제련의 과정의 과정을 통해서 99.9%의 금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게 되면 이 세상에는 영적으로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육적인 사람이 있고, 하나는 영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육적인 사람은 세상사람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그리스도인도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고 하나는 영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육에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아직까지도 이세상의 것을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여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넘어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육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영적인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고 하늘을 날아가는 독수리와 같은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계는 변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제례시장도 변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대형할인마트를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장사도 잘 되고 있습니다. 교회도 변해야 살 수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교회는 도태되서 문을 닿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절대 망하지 않는다는 것 세가지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학교입니다. 둘째는 은행입니다. 셋째는 교회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학교도 망할 수 있습니다. 은행도, 교회도 문을 닫는 교회가 많습니다.

오늘 우리는 심각하게 우리를 돌아 봐야 합니다. 제가 안식년중에 관심을 가지고 찾아갔던 교회들, 그 교회들 중에 성장하는 교회의 특징을 보게 되면 변화였습니다. 4년 만에 2000명이 모인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시작부터 400명으로 출발을 했습니다. 가장 큰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성도들이 변화를 위해서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변화를 위해서 우리는 이 교회로 간다고 하고 나온 거랍니다. 변화를 추구하는 변화를 원하는 교인들이 그 교회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4년만에 2000명! 말이 이천명이지 더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없습니다. 학교 강단을 빌려서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이 교회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지역사회에서 인정을 받는 어느 교회가 있습니다. 한 1500이 모이는데 100명에서 150명이 모이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변화를 위해서 과감하게 강대상을 없애고 기존예배의 틀을 버리고 찬양과 말씀으로만 예배를 드리는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을 한 것입니다. 저는 이들을 평가할 때 목회 윤리적이라든가 그들의 하는 일이 옳으냐? 그르냐를 논하기 전에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변화구나! 변화를 원하고 있구나! 변화하지 않으면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변화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변화의 주제! 그것은 ‘doing’에서 ‘being’으로 변화입니다. 일에서 부터 존재로의 변화입니다. ‘일보다 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어떤 교회가 될 것이냐’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교인들을 바라볼 때도 무슨 일을 할 것이냐? 보다는 어떤 사람이냐에 더 관심을 둡니다. 일보다는 존재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것입니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합니다. 한마디로 목적이 분명한 교회입니다. 사실 거의 교회는 하는 일들이 비슷비슷합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지요. 오후예배 때 예배를 드리지요. 수요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지요. 금요일에 구역예배, 새벽기도하지요, 철야하지요. 봉사도하지요 전도도 합니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습니다. 성장하는 교회는 추구하는 목표가 다릅니다. 무엇을 할까? 예배를 몇 번드릴까? 봉사를 어떻게 할까? 전도를 어떻게 할까? 이것이 아닙니다.

성장하는 교회의 목표는 단하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를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 철저하게 사람이 원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기뻐하는 교회! 교회는 예배를 드려도 한번 더 드리고, 기도를 드려도 한번 더 기도를 드립니다. 일중심의 교회는 항상 시끄럽습니다. ‘그 일을 잘 했냐? 못했냐? 몇 명이 됐느냐? 돈을 어떻게 썼느냐?’ 그것을 따지다보니까 항상 시끄럽습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일은 잘 될 수도 있고 잘 안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닙니다. 우리는 과정입니다. 그 일을 통해서 잘 되면 잘 된대로 교훈이 있고 안되면 안 되는대로 교훈이 있습니다. 그렇게 배워 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일의 잘잘못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의 맞는 삶!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느냐?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닭들은 시끄럽습니다. 그저 모이만 던져주면 구구구구 하면서 모이만 몰려드는데 거기서 피터져라 싸웁니다. 그러나 하늘을 나는 독수리는 아닙니다. 늘 시간이 없습니다. 보다 더 넓은 세계를 다녀서 날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달려가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한 것입니다. 힘이 있습니다. 성장하는 교회! 교회의 존재가치를 중시하는 교회! 독수리처럼 날아가려는 교회와 성도들은 눈동자가 살아있습니다. 주인의식이 있습니다. 손님처럼 왔다갔다만 하지 않습니다. 그 교회에 가니까 대접을 잘 하더라, 잘 먹었다, 못 먹었다, 그런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왜? 주인이니까요.

제가 어느 교회에 갔습니다. 그랬더니 저를 안내하시는 분이 얼마나 많은 신지.. “오늘 처음 나오셨지요. 제가 목사님 만나 뵙고 가게 하겠습니다.” 보니까 안내위원도 아닙니다. 그냥 그 교인입니다. 저를 안내하고 앉게 하는데 제일 좋은 자리에 앉게 하더라구요. 제가 오실 줄 알고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주인의식입니다. 손님의식이 아니라 주인의식이니 눈이 초롱초롱합니다. 이들은 이 예배를 위해서 1부나 2부예배를 드리고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봉사하는 시간에는 철저하게 봉사만합니다. 시간을 바쳐도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드리는지. 물질을 드려도 얼마나 많이 드리는지.. 사랑하는 여러분!! 저는 그런 모습이 아주 부러웠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내가 변하는 것이지 누가 변하길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교회들을 보게 되면 이렇다. 저렇다 얘기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교회들을 보면 예배시간이 두 시간입니다. 저보고 설교를 부탁하시는데 1시간 10분을 해달라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그 두 시간동안 예배를 드리는데 아무도 그 예배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이 없습니다. 중간에 나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나 주님의 기쁨되기를 원하네.. ” 고백을 할뿐입니다. 분명한 것은 변하는 것은 내가 변하는 것이지 교회가 변화고 프로그램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시대가 좋아도 하나님 앞에 쓰임받는 일군들은 자기가 변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서 두 가지를 발견했습니다. 첫째는 비전을 공유하는 것에 있구나! 두 번째는 능력을 개발하는 것이 있구나!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두 시간동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게 되면 그런 사람을 찾았습니다. 저는 이 사람을 향해 독수리 신자라는 별명을 붙였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는 하늘을 나는 독수리 신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무슨 일, 부자되는 것보다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에 더 관심이 있었습니다. 「doing」이 아니라 「being」으로 존재의 가치를 위해 모험과 결단과 그리고 변화하는, 변화를 위한 용기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본래 닭처럼 살았습니다. 먹고살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다 살자고 하는 짓인데 교회도 믿음도 다 살자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틀린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옳은 말도 아닙니다. 그는 당대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당대 최고의 도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상지인 갈대야 우르에 살았습니다. 성서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2층집 정원이 있는 연못을 내다보이는 그런 집에서 살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최고의 수익을 얻기위해서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우상들을 제작해서 판매하는 일을 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에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변화하고 싶었습니다. 인생이 먹고 사는 것으로만 끝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부자는 죽어서 묘비를 만드는 그 묘에 기억에 남을 한글자를 넣어야겠다 해서 무슨 일을 했는지 없습니다. 그래서 “○○○ 먹다 죽다”라고 썼다고 합니다. 그것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세상이 변하고 있습니다. 워렌 퍼킷이라는 사람은 투자의 귀재입니다. 대단한 사람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자입니다. 이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3천만원짜리, 1958년에 구입한 그 집에 아직도 살고 있습니다. 지금도 머리를 1 2달러에 머리를 깎는 곳을 찾아 다닌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자가 그렇게 돈을 모아서 무엇을 하려나 했더니 최근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5 “그의 제산 47조원을 자선단체에 기부를 했습니다.”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게이츠가 2008년 7월에 은퇴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왜? 삶의 운선순위를 바꾸기 위해서 랍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에 자선사업을 위해서 자기를 투자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엊그제 신문을 보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연봉이 30만불을 받는 한 젊은이가 있는데 과감하게 그것을 내려놓았습니다. 관절염에 걸린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는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이보다 더 큰 행복은 없습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얼마나 변화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먹다 죽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변해야합니다. 닭이 아니라 독수리가 되고 땅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1) 비전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독수리가 눈이 아주 좋습니다. 6.0이라고 합니다. 1㎞ 앞에 있는 글을 본다고 합니다. 어떤 분은 20.0이라고까지 말을 하는 분도 계십니다. 사람들의 눈은 좋아야 2.0인데 독수리는 6.0이니까 사람이 볼 수 없는 것, 멀리 내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을 높이 나니까 높은 곳에 있으니까 멀리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남산타워 올라가 보셨잖아요. 멀리까지 볼 수 있잖아요. 여기서 보는 세상과 산꼭대기에서 보는 세상은 다릅니다. 그러니까 독수리가 3-5㎞반경을 다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닭은 몇 미터밖에 못 봅니다. 볼 수 있다고 해도 그 눈은 약시기 때문에 분간을 잘 못합니다.

왜 그런데 비전이 있는 사람들은 성공을 합니다. 멀리 내다보고 볼 수없는 것을 보게 되니 말입니다. 미국의 알라스카를 러시아 720만달러, 우리나라 돈 72억원을 주고 샀습니다. 거저 산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의회는 알라스카를 사는 것을 반대를 했습니다. 그는 눈이 덮혀있고 농사도 짓지 못하는 땅을 사서 무엇하느냐고 반대를 했습니다. 당시 재무장관 윌리암스 시어드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저는 눈 덮인 알라스카를 보고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감추어져 있는 보고를 보고 사자는 것입니다. 우리세대를 위하여 그 땅을 사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를 위하여 그 땅을 사자는 것입니다. ” ‘다음세대를 위하여 감춰진 무한한 보고를 보고’ 다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통사람들은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비전의 사람은 그것을 보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안목! 그것이 비전인데 이런 비전이 있는 사람이 이 시대를 앞서가고 성공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비전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비전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내 지식과 경험에 의해서 비춰지는 판단되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2000년이 시작이 될 때에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21세기를 내다보면서 2000년이 됐을 때 컴퓨터는 다 멎고 이 세계에 엄청난 혼란이 올 것이라고 했지만 이 세상에는 엄청난 혼란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경험과 말이 똑똑하고 다 맞은 것 같아도 맞지 않습니다. 영원한 진리되시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가 바라봐야 할 말씀인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시는 말씀을 꽉 붙잡습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케하고... 복이 되게 하리라... 복의 근원이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목적을 알고 그것을 삶의 비전으로 삼고 그 일을 위해서 그는 투자를 하고 모험을 하고 용기 있게 고향을 떠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받으면 비전이 생깁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 말씀을 보면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 부어주리니 너의 자녀들을 예언할 것이요 너희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 늙은이 들은 꿈을 꾸리라 ” 비전은 나이와 상관이 없습니다. 꿈을 꾸고 환상을 보고 예언을 할 수 있는 것은 경력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와 청년, 노인도 성령을 받으면 비전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은 비전이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니까 언제나 닭처럼 그저 대접받는 곳에나, 먹을 것이 있는 곳에나 그것 때문에 피터지게 싸우는 것입니다.

2)비전은 목적대로 사는 삶입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사는 삶입니다.

비전있는 아브라함은 목적 때문에 그 비전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너그러웠습니다. 조카 롯과 헤어질 때 ‘네가 좌하면 우하리라’ 소돔성으로 가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소돔성의 도적떼에게 붙잡혀가도 그는 그것가지고 상관하지 아니하고 가서 그를 찾아왔습니다. 목숨을 바쳐서 말입니다. 창세기22장에 하나님이 주신 귀한 아들 이삭을 재물로 바치라고 할 때 재물로 바칩니다. 그때 사람의 생각으로는 원망과 불평을 할 수가 있지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면서 하나님만을 믿었습니다. 또 하나님의 비전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아들의 생사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살아 갈때에 보다 너그럽고 보다 하나님이 기뻐하는 종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가는데 속상해하지 않습니까? 힘들어 하지 않습니까? 자녀들과 싸우지 않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이 아이를 어떻게 쓰실 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누구보다 힘들고 어려워하는 것이 내 자녀들입니다. 그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을 해 보십시오. “너무 염려하지마! 하나님이 너를 어떻게 쓰실지 우리가 어떻게 알겠니? 그곳에 하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을꺼야!” 하나님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안에 우리 자녀들을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 자녀들을 얼마나 귀하게 쓰실런지 그 말 한마디가 위로가 되고 힘이 돼서 여러분 독수리 날개치며 올라갈 뿐만아니라 달려가도 곤비치 아니하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는 복된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 비전을 가지고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런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더가 아하수로왕의 왕비가 되었을 때 이스라엘민족에게 어려움을 당할 때 아버지같은 외삼촌 모르드개가 이때를 위한 것이 아니냐고 했을 때 그가 유명한 말을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라” 자기 몸을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 바치니 자기도 살고 백성도 구원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 쓰임받기를 원하셨습니다. 성령받은 초대교회도 복의 근원으로 쓰임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가난한자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면서 세상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바울과 실라는 복음의 일꾼으로 내 보내면서 여러분 복의 근원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고 열왕기상 8장 43절에 이런 기도를 합니다. “무릇 이방인이 주께 부르짖는대로 이루사 땅의 만민이 주의 이름을 알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처럼 경외하게 하옵소서” 세상 모든 만민이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특권을 솔로몬성전을 통해서 하나님앞에 기도했던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비전은 성도의 비전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 교회를 위하여 나를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 땅의 모든 거민들이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은혜속에 살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일을 위해서 부름을 받았음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3)비전이 없으면 죽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아브라함과 함께 고향땅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물질의 복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소돔과 고모라성을 향해서 갔습니다. 독수리가 되어야 할 사람이 닭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유황불로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것은 당장에는 좋아 보이지만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무엇을 자랑하시겠습니까? 나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보리떡 다섯 개를 가지고도 오천명을 먹이는데 쓰임을 받았던 한 소년, 얼마나 귀합니까? 나는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는 창녀라고 할지라도 옥합을 깨트려서 주님의 발을 씻긴 그 여인의 손길이 얼마나 귀합니까?

70-80명이 모이는 시골의 한 교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이 교회의 중고등부학생들이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멕시코 선교를 가지고 세차아르바이트를 하고, 과자를 만들어 파는 바자회, 그리고 이삿짐을 날라주는 이삿짐 아르바이트를 해서 선교기금을 모금하더니 이들이 그 돈을 가지고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힘이 있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는 숫자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는 일에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가 힘이 있는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지고 러시아로 중국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선교를 계획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있던 샤론의 집에는 수련장이 있는데 인터콤으로 모인 전국의 모든 젊은이들 초등학교 1-2학년들까지 따라다닙니다. 전세계가 주님의 복음이 전해지기를 밤을 새면서 기도를 합니다. 이 일을 위해서 초등학교밖에 안된 아이들이 울며 금식을 하면서 기도하는 모습을 볼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뻐하실지를 생각해보았습니다. 이 아이들이 선교를 나갈 때 아무것도 안가져 가더라구요. 달랑 가방하나를 가지고 갑니다. 그것이 그들이 몇 주동안 지낼 짐의 전부였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에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서 그들이 발 벗고 나서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정으로 성장하는 교회!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 그 교회는 비전이 있는 교회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교회가, 온 땅에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기 위해서 다섯 나라에 선교사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케냐, 브룬디, 러시아, 콩고, 미얀마! 세계선교회를 통해서 중국과 북한과 중동에 식량을 지원하고 복음 선교를 전하고 있습니다. 전국의 미자립교회 농촌과 도시에 상관없이 15교회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원과 경찰여성들을 위해서 7기관을 후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고 어려운 가정들을 위해서 26가정을 우리가 후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저 지하에 드림방과후 교실이라고 해서 1시부터 5시까지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토요일이 되면 공부방에 와서 교인자녀들뿐만 아니라 지역의 많은 학생들이 와서 함께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중고등부 자원봉사학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데 발벗고 나서고 있습니다. 유치부에서는 유니게 아기학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지도록 우리가 애쓰고 있습니다. 때로는 장로님들이 집사님들, 권사님들이 교회를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우리교회가 성장할 수 있는 교회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를 하신답니다. 세상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조롱할지도 모릅니다. 인원이 몇 명인데... 예산이 얼마인데... 여러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런 것이 겠습니까? 인원수가 늘고 예산일 늘어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앞서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교회인지..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교회인지..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예배당의 축복을 위해서 나아갈 때 이 교회는 진정으로 성장하는 교회로 나아갈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독수리처럼 하늘을 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멀리 내다 볼 수 있는 비전을 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그 비전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서 떳떳하게 기쁜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신앙생활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변화하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창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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