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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전도회헌신예배] 사명받은 삶 (갈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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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및 죽은 자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 함께 있는 모든 형제로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여러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좀 색다르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하는 말은 '여러 질이다.' 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유형은 여러 질이고, 각양각색인 것을 보며 삽니다. 사람이 살아 있고, 각기 개성들이 있기에 당연히 살아가는 방식이 서로 다를 수 있으므로 그것을 누가 탓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을 먹고 살든지, 어떤 모습을 하고 살든지 사는 모습이 서로 다를 뿐이지 '너는 이랬으니 틀렸다.'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것은 자기 개성이고, 자기주관이기에 어떻게 살든지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중요한 것은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서 보람되고, 가치 있게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우리의 세상살이 다 끝나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으로부터

“너는 내가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다른 일만 하고 왔구나. 악하고 게으른 종아!”라는 책망을 들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나는 열심히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일했지만 하나님께서 '나는 너를 모른다.'고 하신다면 참으로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7:21-23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이미 경고하신 말씀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어떤 사람으로 인정받을 것 같습니까? 성도 여러분 모두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깊이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아버지의 일을 자장 아름답게 이루신 우리 구세주 예수님을 모델로 삼아 따라가야 합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모든 피조물의 으뜸이 되고, 하나님의 특별한 설계와 솜씨로 지음 받았으므로 결코 의미 없이, 가치 없이 살아서는 안 되며, 헛되이 보내어서도 안 됩니다. 인생의 마지막인 죽음 앞에서 '아 허무하다. 후회한다. 잘살 껄!'이라며 후회해서도 안될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살아야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이 될까요? 인생이 살아가는데 크게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의미 없이 적당하게 살아가는 삶'이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하루하루를 세월이 흘러 가는대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저 세월이 가는 대로 다른 사람이 하는대로 그저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어쩌면 충돌 없이 잘 사는 것 같습니다. 온갖 걱정 근심 속에 아옹다옹하고 사는 것보다 편하게 형편에 맞추어 사는 것도 삶의 좋은 방식 같지만, 이런 삶은 짐승들의 삶과 무엇이 다릅니까?

사람이 하루를 살아도 왜 사는지 그 의미를 알고, 무엇을 해야 되는지 의미를 찾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알고 살아야지 이렇게 되는대로 산다면 온전한 인격을 가진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인생을 허비하며 살아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런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줄 믿습니다.

그 다음은 '쫓기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좋은 표현으로 하면 '열심히 앞만 보고 사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부지런한 삶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 까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결국 이런 목적이 분명이 않는 삶은 후회하기 마련입니다. 열심히 살기에 남는 것도 있습니다. 부지런히 열심히 살았기에 소유도 늘어났고, 지식도 소유했고, 지위도 얻지만, 그러나 잃어버린 것도 많습니다. 마음 한 구석이 뻥 구멍이 난 것 같이 결국 후회하게 됩니다. 너무 앞만 보고 살다보니 정신이 없어진 것입니다. '정신이 없다.'는 말은 공허하고, 허무하고 뒤를 돌아보면 왜 그랬나? 싶은 마음이 드는 상태를 말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나의 이성의 판단을 따라 생활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지난 삶을 돌아보면 일의 노예, 돈의 노예, 자식의 노예, 직장의 노예, 성공의 노예, 사람의 노예노릇만 하고 살아온 것을 깨닫고 후회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 지으시고 내리신 최초의 5대 명령은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 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창1:28)라고 축복해 주셨지 성경 어디를 보아도 '정복당하라.' '노예가 되라.'는 말씀은 없는데, 세상에 쫒기다 보니 일과 세상 썩어지는 것에 목표를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에 결국 정복당하고, 노예가 되어 살아 온 것입니다. 이런 삶 역시 이것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삶은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가장 이상적인 삶은 "부름 받은 사명자의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음 받은 피조물입니다. 물론 모든 피조물들은 다 헛되이 지어진 것이 없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어졌지만, 특별히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지음 받았고, 이를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입니다.

??요한복음 6:38-39절에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자기 뜻을 행하며 살지 아니하셨고, 오직 자기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습니다. 일생을 그렇게 말씀에 순종하여 행하셨고, 마지막 십자가를 앞에 두시면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고난을 피하고자 하시는 육체의 갈망을 이기시고, "아버지여!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길 원하나이다."라고 기도 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가져야 할 의식은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귀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보냄을 받은 인생"임을 알고 그 일을 위해 헌신하는 일입니다. 당신은 왜 사는가? 라고 여러분에게 누가 질문한다면 가장 먼저 대답할 말은 "하나님께서 나를 자신의 선한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해 보내셨기 때문이에 그 일을 위해 헌신합니다."라는 의식과 대답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신학적인 용어로 '소명의식'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왜 여기 있는가? '어쩌다 보니 이 곳까지 왔네!'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곳으로 인도하셨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 1절 말씀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사도바울의 명함이었습니다.

'명함'이란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요.'하고 알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명함이 비좁도록 과거의 경력, 지금의 이력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전 회장, 전 이사, 현 이사장, 회장 등을 적어 놓습니다. 자신을 바로 소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도 사도가 되기 전의 명함은 화려했습니다. '유대인중에 유대인,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수학, 율법의 능통한 자,' 등 여러 가가 있었으나 예수 믿고 거듭난 후에 그런 것들은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기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고 이 땅에 보내셨기에 쓸모가 있는 귀한 존재요.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정확히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간 어디에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까? 헌신예배를 드리는 마리아 여전도 회원 여러분들께서 어디에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1. 가정을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본문 1절 후반 절에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된 바울은"이라고 하였는데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라는 본 구절에 해당하는 헬라어 본문은 '알라'('그러나')로 시작되고 있어 바울의 사도권이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음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사도권의 기원을 언급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를 함께 언급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여러분의 남편과 짝 지워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줄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가정을 이루어 주셨고, 자녀도 선물로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지금 여러분의 가정을 섬기도록 부름을 허락 받았슴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가정을 섬기도록 부르셨습니까? 무엇하게 하시려고 부르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 부르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간혹 주례사를 하면서 "아내는 가정 안에 있는 해가 되어야 하는 '안 해'가 되어야 된다."고 강조합니다. 그런데 혹시 반대로 지옥으로 만드는 사람 없습니까? '바가지 생산 공장'으로 만들지는 않았습니까? 하숙집으로 만든 남편들은 없습니까? 자기만을 위한 왕국으로 만든 적은 없습니까?

가정은 작은 천국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 128:1-4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고 말씀합니다.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정의 주인으로 하나님으로 모시고 온 가족이 하나님의 경외하며 살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는 가정이 되도록 함께 협력해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 찬송이 있고, 기도가 있는 가정으로 만들어가야 합니다. 서로 믿어 주고, 서로 사랑해 주는 가정이 되게 해야 합니다. 소망이 가득하고 가족이 보고 싶고 그리워지는 가정으로 가꾸어가야 합니다.

신명기 5:16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부모 공경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명"이요. 명령입니다. 인륜의 계명 가운데 첫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로서, 또 자녀로서 "마땅한 바니라" "옳으니라."고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에베소서 6장 1~4절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고, 출애굽기 20: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며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하셨으며, 신명기 5:16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했습니다.

16세기 말 조선 선조 대왕 때 송강 정철 선생(1536-1593)의 시(詩)에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길 다하여라. 한 번 가신 뒤에 애닯다 어이하리 생전에 고쳐 못할 일은 이뿐인가 하노라."고 가르침으로 부모가 돌아가신 후 불효를 후회하지 않도록 교훈하고 있습니다.

부모에게는 마땅한 바 공경을 다해야 하지만 자녀에게는  에베소서 6장 4절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 여러분들을 가정의 일원으로 부르셔서 이렇게 섬겨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런 소명의식이 없으면 가정은 지옥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2장 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시편 116:15절에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귀하지만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귀히 여김을 받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한 알의 밀알처럼 가족들을 위해 죽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철저히 말씀과 성령으로 죽어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실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사에 깡패 김익두를 목사님으로 사용해 주신 것도 그만큼 철저히 자신을 죽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짐승들도 야생의 성질이 죽어 잘 길들여지면 귀히 쓰이듯이 우리 성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십자가에서만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오시면서부터 그리고 삶 속에서 이미 죽으셨습니다. 마태복음 12:19절에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육성을 죽이지 않으시고 살려 두셨다면 자기를 죽이기 위해 잡으러 온 원수들에게 열두 령 즉 열둘도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하여 그들을 멸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미 육성과 죄와 상관조차 없이 죽으셨기에 양처럼 온유하셨고, 십자가의 구속사업을 완성하셨습니다.

어느 지역에 과일가게를 하는 장사가 있었습니다. 인근 어떤 교인이 자주 찾아와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과일장사는 예수 믿을 마음이 전혀 없기 때문에 귀찮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찾아와 전도하면서 과일을 사 가는데 사갈 때마다 매번 과일 중에서 가장 작고 흠집이 있고 말라져 팔기 곤란한 것만 골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과일장사는 귀찮은 중에도 호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손님이 와서 또 과일을 삽니다. 그런데 그분도 작고 흠 있고 좋지 않은 것으로만 골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은 자기도 모르게 "당신도 저 교회 교인입니까?"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은 과일장수는 그 다음 주일부터 자기 발로 자기 과일가게에 과일 사 주던 그분들이 출석하는 교회를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죽어 내가 손해보고, 내가 바보가 되고, 내가 섬기고 희생할 때 비로소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가족들 앞에 귀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내가 왜 귀한 이름입니까? 어머니가 왜 귀한 존재입니까? 가족들을 위해 말없이 희생하기 때문인 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우리 주님 본받아 '한 알의 밀알처럼 온전히 죽어 가정을 위해 헌신하는 여전도 회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 희생하자 주님께서 그녀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어 슬픔이 가득할 때 찾아오시어 살려주심으로 기쁨으로 바꾸어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행복과 기쁨을 만드는 가정을 사랑으로 섬김으로 가족들을 구원시켜 천국을 만드는 헌신 자가 되시고, 사명 자가 되시기를 부탁합니다.

2. 교회를 위해 부름을 받았습니다.

본문 4절에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위하여 자기 몸을 드리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는 교회의 지체로 귀한 사명자로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고 알려줍니다.  마태복음 18:20절에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주님게서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골로새서 1장 8절에서"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가 되십니다. 이 영적 진리는 피부로 느낄 수 있는 현실의 믿음의 실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주님을 '만물의 으뜸'으로 인정하고 섬길 수 있습 니다. 에베소서는 교회를 사람의 몸에다 비유를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머리가 되시고, 모든 성도들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체들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5:30절에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사실 몸은 작은 지체 하나까지 쓸모없는 것이 없고, 그 지체들이 서로 연결이 되어 머리의 지시를 따라 각각 자기 역할들을 함으로 인하여 건강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시 성도들이 서로 성령으로 연결되어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라 그 역할들과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함으로 인하여 건강한 교회,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어서 5절에 "영광이 저에게 세세토록 있을찌어다 아멘."이라고 하였는데 바울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는 흔히 인사말 뒤에 나오는 부드러운 송영(頌詠)의 의미라기보다는 롬 1:25절에 나타나는 송영과 같이 하나님과 아들 예수에 대한 헌신과 충성다짐하는 의도를 지닙니다. 그리스도께 충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이 그 중의 하나임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펄젼목사님에게 젊은 제자들이 찾아와 '소명'(Calling)이 무엇입니까? 물었습니다. 그들의 질문에 스펄젼은 세 가지로 나누어 대답해 주었습니다.

"첫째, 심리적으로 가장 귀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스스로 볼 때 모든 직업 중에서 가장 귀한 직업, 가장 귀한 일로 생각된다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일로 부르신 것입니다.

둘째, 그 일이 가장 수월해야 합니다. 쉬워야 되지 어려우면 소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맡기시려고 할 때에는 이미 거기에 필요한 달란트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미리 다 준비를 해 주셨기에 쉬울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 그 일을 하면서 즐거워야 합니다.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괴롭다면 소명을 잘못 찾은 것입니다."라고 알려 주었다는 것입니다.

참 좋은 가르침의 말씀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을 섬기도록 교회에 부르셨는데 섬기라고 주신 능력이 무엇이며, 달란트가 무엇이며,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찾아내어 활용해야 합니다.

그 일이 기도라면 기도의 사명자가 되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것인지, 구제하는 것인지, 계몽하는 것이나 문서 혹은 행정을 하는 일인지 먼저 내가 그 일들을 협력해서 섬겨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어 활용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도 계속 사용해야 더 오래 쓸 수 있습니다. 몇 일전 성은이 막내 이모가 와서 하는 말이 "1년전에 드럼세탁기를 사은품으로 받았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못쓰게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그냥 두었냐고 물어 보았더니 "아들 장가가면 줄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대 가면 더 좋은 세탁기가 나올 것이니 사용하고 했더니 "꺼내서 사요 해야겠다."고 하기에 "잘한 결단이라고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각자 은사가 다르고, 능력이 다르고, 재능이 다르지만 교회를 위해 내가 해야 할 일, 즉 사명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강원도 이철 목사님은 산촌 교회 목회하신데 그 교회는 산골인데 '도토리묵'이나 '국수' 같은 것을 생산해서 년 간 수억의 수입으로 귀한 선교를 하시고 계십니다. 그 교회는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랍니다. 목사님도 사업 수완이 좋으시지만 산 속에 막혀서 교인들도 더 불어날 것도 없고 누구 눈치 볼 이유도 없는 교회이며, 있는 교인들도 할 일이 없는데 모든 성도들이 직장 가질 수 있고 헌금할 수 있으니 다 그것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도 그 교회처럼 그대로 본받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쉽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은사를 잘 개발하여 교회 부흥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더욱 기뻐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주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자원하고, 앞장서야 하겠다.'는 이런 소명의식이 부족합니다. 주님의 한 지체로서의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마리아 여전도 회원 여러분만 아니라 모든 성도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흘러가다가 여기 걸려 있는 것이 아니고, 쫓겨 다니다가 이 곳이 잠시 피신한 것도 아니고, 만물의 주인이신 주님으로부터 인도함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하라고 교회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명을 발견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나의 재능, 시간, 물질, 몸을 드려 헌신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생명을 바쳐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충성을 다하셨고, 수고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한 알의 밀알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모범을 보여 주었습니다.

바울도 골로새서 1:28-29절에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람이었지만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감동에 순종하였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역사를 따라 이방인들의 사도로 부름을 받은 사명인 전도를 위해 힘을 다하여 수고하였습니다. 그가 생명 바쳐 충성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감동시킵니다(고후11:23-28).

중앙아프리카에서 선교하던 '죠지 아틀레이'라고 하는 젊은 선교사는 원주민의 창과 몽둥이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영국제 윈체스터 연발총의 방아쇠를 끝까지 당기지 않았습니다. 이 선교사가 자기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사람을 향해 총을 쏘지 않았던 이유가 있었습니다. 만일 그가 그들을 죽인다면 그 마을에서는 영원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방아쇠를 당기지 않고 총을 든 채로 개처럼 끌려 다니며 사지가 찢기며 죽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은 후 총알이 열 발이나 들어 있는 총이 발견되었고, 이 사실을 안 원주민들은 그 때서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위해 복음을 위해 나 한사람의 희생적 헌신이 필요합니다. 이 헌신을 우리는 '충성'이라고 표현합니다.

여호수아도 충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3:11절에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그 수종자 눈의 아들 청년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 역시 충성의 사람이었습니다. 삼상 17:34-35절에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라고 했으며,

사도 요한의 충성에 대하여 요한계시록 1:9절에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헌신예배에 임하는 사랑하는 여전도회 회원 여러분! 우리 주님을 모델로 참된 주의 일군들이 다 되십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 성령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도록 성령의 도구가 되기 위해 사명감으로 충성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열매는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열매 많이 맺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귀히 여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주님을 본받아 한 알의 밀알 되어 온전히 가정과 교회를 사명감을 가지고 잘 섬깁시다. 그래서 "잘 하였도다."라고 하나님께로 부터 칭찬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를 헌신예배를 드리는 마리아 여전도 회원 여러분과 성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부름 받은 자로서 가정에서 이 교회에서 대단히 중요한 '사명자'들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으로 인해 교회와 기관이 쓰러지기도 하고, 세워지기도 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흘러가는 삶도 아니고, 쫓기는 삶도 아닌 부름 받은 사명자의 삶을 살므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이루고, 그로 인해 여러분의 삶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충만해 지시기를 소원합니다. (황영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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