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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작은 자에게 베푸는 친절 : 자비의 열매 (신 24: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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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축복의 자산 - 친절

한 백화점에서 특별한 판매전략을 세우고 막대한 돈을 들여서 광고를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객들의 반응은 시큰둥했습니다. '광고 시간대가 잘못 편성되었나?' 생각하고 주요 시간대에 광고를 했지만 매상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광고 모델을 잘못 선택한 걸까?'하고 광고 모델도 바꿔 보았습니다. 그래도 고객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사장은 매장을 돌아보다가 한 직원의 퉁명스럽고 불친절한 태도 때문에 흥분한 고객이 항의하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왜 막대한 돈을 들여서 광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상고가 올라가지 않고 고객들의 호응을 사지 못하는지 이유를 알게 된 것입니다.

광고나 선전보다 더 소중한 백화점의 자산은 "친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심지어 "친절"은 상품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백화점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부흥의 큰 자산은 "친절"입니다. 신명기 24장 19-22절 말씀도 성도의 자산, 축복의 자산이 "친절"이라고 말합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왔을 때 호감, 비호감을 갖느냐 갖지못하느냐는 어디서 결정됩니까? 청와대나 공공기관들을 방문하기 전에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이 공항 직원과 택시 운전사들입니다. 우리교회에 새신자가 와서 예배를 드리기 전에, 목사의 설교를 듣기 전에 첫 인상을 어디서 받게 될까요? 주차, 예배 안내팀과 예배당 입구에서 영접하는 교역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전도대원이 될 수 있고 나아가 목회자일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성령의 열매 」중 「자비의 열매」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자비는 헬라어로 크레스토테스라고 합니다. 킹제임스버전(KJV)에서는 gentleness - 온유함 혹은 관대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을지라도 사랑으로 대하는 태도"를 자비라고 합니다. NIV 성경에서는 kindness - "친절"이라고 번역합니다. "모든 사람 - 특별히 긍휼이 필요한 작은자에게 특별한 관심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가 자비입니다.

친절, 자비라는 헬라어의 「크레스토테스」라는 말과 예수 그리스도 즉 「크리스토스」라는 말이 비슷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사람들은 「크레스토테스」와 「크리스토스」를 많이 혼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이미지를 친절하고 자애로운 분으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제자이면서도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당신은 그리스도인인데 왜 친절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고 합니다.

II. 절기 - 자비의 기회

신명기 24:19-22은 자비의 모델, 곧 시청각적인 그림을 그려주고 있습니다.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19절)

감람나무 열매를 떨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네가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그 남은 것은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20절)

포도 한송이를 딸 때도 꼭 같이 하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21절)

집 없는 사람, 아버지 없는 자녀, 남편 없는 여인들을 위한 특별한 배려가 자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키는 힘은 제사신앙과 절기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노예생활로부터 그들을 구속하신 목적과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맘껏 제사를 지내고 행복하게 절기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언제 일하고 뭘 먹고 살았나 할만큼 늘 제사요 항상 절기였습니다.

교회에 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이 있듯이 이스라엘에서도 3대 절기인 유월절, 맥추절, 초막절 즉 추수감사절이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 교회시대에 공통된 절기가 하나 있는데 추수감사절입니다.

이 절기 속에 인생의 목적, 행복의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바쁜 인생들에게 왜 절기를 꼭 지키라고 말씀했을까요?
첫째, 네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이 절기를 통해 인생의 주인, 생명의 주인을 늘 새롭게 깨닫고 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행복이 무엇인가?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불평은 인생을 불행하게 하고 감사는 인생을 행복하게 합니다. 큰 감사는 인생을 크게 행복하게 합니다.
셋째, 내 주변에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들이 있음을 기억하고 그들과 사랑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혼자 먹지 말고 함께 먹는 행복을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사를 지내며 제사장과 함께 나눠먹고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추수감사절
지난 1년간 살아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고백하고 감사하는 날이 추수감절입니다. 하나님께 1년에 한번 큰 봉헌으로 감사를 확인하는 날입니다. 내 주변의 사람들을 돌보고 서로 감사하는 날입니다. 잃어버리고 놓치고 살았던 친절과 자비를 베푸는 날입니다. 여기에 복받고 사는 원리가 있고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원리가 있습니다.

옛날 성민들은 초막절을 지킬 때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생각했습니다. 돌볼 가족이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신약성경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고하는 나그네 전도자들을 섬기는 것을 자비라고 말합니다. 강도 만나 피흘리고 쓰러진 사람을 돌보는 것을 자비라고 합니다. 아파하는 사람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자비라고 합니다. 누가 이웃입니까? "자비를 베푼자이니이다"

예수님께서 심판주로 오셔서 양과 염소, 왼편에 저주 받을자와 오른편에 영원한 낙원에서 복받을 자를 구별하실 때에 "자비"라는 잣대로 판단하신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부터 40절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이어서 예수님을 돌보지 않은 사람들, 주님을 섬기지 않은 사람들, 마시우게 하고 먹이지 않은 사람들을 향한 저주의 말씀이 나옵니다. "예수님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습니까? 예수님이 한번이라도 내 앞에 나타나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타나셨어야 섬겼을 것 아닙니까?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이 내 곁에서 배고파 쓰러져 있는데 대접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우리 곁에서 헐벗고 있는데 내 옷이라도 벗어 입혀 드리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주님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데 그분을 병원으로 모시고 가지 않을 신앙인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작은 자, 가난한 자, 병들고 소외된 자가 작은 주님인 것을 그들은 모릅니다. "지극히 작은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추수감사절은 행복의 기회를 잡는 시간입니다. 놓쳐서는 안 될 복 받을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때입니다. 감사로 행복을 찾고 감사로 복 받는 날입니다. 놓치고 살던 친절, 자비를 행하는 날입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내 주변의 사람이 복입니다. 가족, 셀가족, 교우 나아가 내 곁의 지극히 작은자, 내 도움이 필요한 그들이 모두 내 면류관임을 알아야 합니다.


III. 내가 먼저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며 자비덩어리이십니다. 이에 이의가 없지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눅6:36)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찬양하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흉내내 보라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니?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나 하나 일어서 있기도 힘이 드는데 내 주변 넘어진 사람을 늘 일으켜 주라니? 내 가슴도 상처투성이인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고 그에게 친절을 베풀라니? 내게 결정적 상처를 준 사람, 내 명예에 먹칠한 그 인간을 용납하고 오히려 자비하리니?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원수를 환대하고 사랑을 베풀라니? 나도 배가 고픈데 늘 내 곁에 있는 배고픈 자를 돌보라니? 누군가 나를 위로해 주고 나에게 행복을 나눠주어도 웃고 살기가 힘이 드는데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그의 웃음을 찾아 주기 위해 친절하리니?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하심 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이 명령 앞에 우리는 낙심하고 절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모르신다는 말인가? 하나님은 내게 자비가 없음을, 친절을 베풀 수 없는 존재임을 정말 모르고 하신 말씀이란 말인가? 모든 인간은 자기 중심적이요 저마다 내면 깊은 곳에 이기심이 도사려 있음을 모르실리 없을 텐데. 인간은 구원받았다고 하나 아직 죄성이 남아 있고 아직도 연약한 존재임을 아실 텐데. 비록 성격이 좋고 마음씨가 착하다 해도 어찌 인간이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할 수 있단 말인가?

여러분, 너무 절망하지 마십시요.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내가 맺고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내 안에서 행하시는 열매입니다. 내 힘으로, 내 성품으로, 내 노력으로 맺는 행위가 아니라 오직 성령님이 나를 통해 이루시는 열매입니다. 나는 성령님께 나를 드리고 성령님께 순종하는 것 뿐입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같이 자비했던 사람이 사무엘상 9장에 나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왕으로 기름 부으심을 받고도 사울 왕에 의해 긴긴 세월 쫓겨다니고 죽을 고생을 합니다. 원수 같은 사울 왕조가 무너지고 드디어 다윗은 왕이 됩니다. 이때 이전 왕통 삼족을 멸하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런데 왕이된 다윗이 사울 왕가에 누가 살아있는가 알아보니 사울의 손자 무비보셋이 살아있었습니다. 무비보셋은 다윗이 자신을 찾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 나도 죽는구나" 두려움에 떨었겠지요. 그러나 뜻밖에도 다윗은 무비보셋을 환대합니다. 모든 기업을 회복시켜 주고 왕실에서 왕의 가족처럼 함께 지낼 수 있는 특권까지 주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왕과 함께 식탁에 앉았습니다.

무비보셋이 감격에 겨워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삼하9:8)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다윗 왕이 이 엄청난 자비를 베풀 수 있었을까?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왕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남은 사람이 없느냐 내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 나의 자비, 나의 은총을 베풀겠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총을 베풀고자 하노라"하고 말합니다.

"은총"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구약성경에 250번 기록되어 있는데 용서받을 수 없는 자를 용서하고 사랑받을 자격이나 가치가 없는 자를 무조건 사랑하는 행위가 헤세드입니다. 신약의 크레스토테스 - 자비와 같은 뜻입니다.

내가 왕이 된 것은 가문이 좋아서 된 것 아니고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된 것 아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맬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건지시고 보호하시고 지키셔서 오늘 왕위에 나를 앉혀주셨으니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로다. 내가 가장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고 베푼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의 은총이나 나의 자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자비일 뿐이다. 이것이 다윗의 고백이었습니다.

다윗은 끊임없는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고 살았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자비를 체험한 대표적인 경우는 사무엘하 11장 사건에 나타납니다. 충복 우리야를 죽이고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간음합니다.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 보좌 앞에 엎드려 회개합니다. 시편 51편은 그의 참회록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1절). 내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엄청난 잘못을 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감히 엎드려 기도조차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오나 주의 많은 자비로 나를 용서하소서.

어떻게 우리가 자비할 수 있습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의 자비를 힘입어 구원받았고, 하나님의 자비 때문에 오늘도 살아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 성령님이 내 안에서 자비의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IV.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작은 친절

예수님의 자비가 내 안에 가득채워 지고 성령님이 임하셔서 아버지의 마음을 부어주시면 나를 통하여 자비가 이웃에게로 흘러 들어가게 됩니다. 자비는 이웃의 고통에 동참하는 작은 친절로 나타납니다.

자비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돈 많은 부자, 잘 나고 여유있는 사람이나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신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자비의 대상이라고 생각하고 "왜 내게 아무도 자비를 안 베풀어"하고는 섭섭증을 갖습니다.

성경에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린자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자에게 마실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자를 섬기는 어떤 분은 "깡통 들고 얻어 먹을 힘만 있어도 축복 받은 사람이다. 그는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나이팅게일에게 준 훈장엔 이런 글귀가 써 있습니다. "긍휼을 행하는 길은 하나 뿐이 아니다. 말로도 할 수 있고 돈으로도 할 수 있다. 돈도 없고 말도 할 수 없는 사람은 눈물로 할 수 있다."

내 곁에 슬픔의 눈물을 흘리고 있는 사람이 보입니까? 가슴아파 신음하는 사람, 병중에 외로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날 때부터 고통을 안고 태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병든자를 어루만지고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외로운 자, 소외된 자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주린자를 먹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자비는 이웃의 친구가 되어 주는 마음이었습니다.

한 나그네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옷은 찢겨지고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습니다. 제사를 집례하고 가던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것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의도적으로 도망갔다는 얘기입니다. 사마리아인이 가까이 가서 그를 불쌍히 여겨 포도주와 기름을 부었습니다.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갑니다. 치료비가 더 들면 제가 돌아오다 갚을 테니 정성스럽게 돌봐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물었습니다. "누가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자 이니이다" 너는 다른 사람의 이웃이냐? 너는 하나님의 이웃이냐? 예수님의 이웃이냐? 누가 내 이웃이냐? 자비를 베푼자 이니이다.

우리가 눈을 들고 성령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면 강도 만난 사람이 우리 가운데도 많이 있습니다. 건강의 강도를 만나서, 질병의 고통을 안고 외롭게 살아가는 사람들, 재물의 강도를 만나서 외로움과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사랑의 강도를 만나 힘들어하는 사람들, 우리 민족은 평화의 강도를 만나 온 국민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 기도하는 사람들, 성령의 마음으로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함께 아픔에 동참하는 사람들, 이들이 자비의 사람들입니다. 고통 당하는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 - 그것이 성령의 열매 자비입니다.

한 회사의 여직원이 처리할 일이 많아 야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용한 사무실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잘못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전화를 잘못하셨습니다.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친절하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또 다시 전화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또 그 목소리였습니다. "네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전화하시면 좋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요." 끊었습니다. 또 이어서 전화벨 소리가 울렸습니다. 또 그 목소리였습니다. "예. 자꾸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습니다. 저희 회사는 파이프를 생산하는 회사입니다. 파이프가 필요하시면 이 전화번호를 기억하셨다가 꼭 전화주십시요. 좋은 밤 되세요." 전화를 끊었습니다. 며칠 후에 사장실로 전화가 걸려왔는데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파이프를 주문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친절한 여종업원을 보았더니 그것 하나만으로 당신들의 모든 상품은 충분히 신용가치가 있었습니다. 내가 이것을 주문합니다."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나무라지 않고 품어주는 그 마음이 친절이요 자비입니다. 성령의 마음으로 내 주위를 살펴보면 언제나 자비가 필요한 작은 자는 있습니다. 신명기 15장 11장 말씀입니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V. 가장 좋은 자비는 예수를 나누는 것

신명기 24장 19-22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초막절 - 추수감사절에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을 돌보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이 양식 없어 죽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나그네입니까?
집 없는 자가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서 인생이 마쳐지는 날 갈 곳이 없는 사람, 하늘 집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이 객이요 나그네입니다. 피곤한 인생길 내 영혼이 쉴 곳 아버지의 집, 교회를 모르는 사람이 객이요 나그네입니다.

누가 고아입니까?
아버지 없는 자식이 고아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영혼의 고아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한 인생이 고아입니다.

과부는 누구입니까?
신랑 없는 여인이 과부입니다. 예수 신랑 모르고 버림 받은 인생이 과부입니다. 예수 신랑과 깊은 사랑 나눌 줄 모르는 사람이 과부입니다.

추수감사절이 되면 그들에게 양식을 나눠주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을 살리는 양식이 무엇입니까? 예수 양식 먹어야 삽니다. 복음 양식 나눠주어야 그들이 삽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이 구원 양식, 생명 양식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상의 자비는 복음입니다. 주고 주어도 아쉬울 것 없는 사랑, 후회도 실망도 없이 보람있는 자비,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주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축복이 되는 일입니다. 물질을 주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받으면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다 안 주면 원망이 생기고 받으면 약해집니다. 그러나 복음은 주는 기쁨이 있고 받는 자도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얻습니다.

대전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공군교육사령부에서 정신교육교관으로 지내다 보니 시간 여유가 있어서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퇴근하면 저녁 먹고 양복으로 갈아입고 공원길을 지나서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성경공부를 가르치곤 했습니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집에 와서 저녁 먹고 양복을 갈아입고 공원길을 지나서 교회로 가는데 해가 서산에 지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이곳 저곳에서 놀다가 언니, 형아, 엄마, 아빠가 와서 얘야, 아무개야... 불러서 다 집으로 돌아가고 한쪽 모퉁이에서 몇몇 아이들은 먼지투성이에 풀이 죽고 기가 죽은체 소꿉장난을 하고 있어요. "얘들아 집에 가야지!" "우리는 집이 없어요." 공원 옆에 있는 고아원 아이들이었습니다. "엄마, 아빠 기다린다 집에 가야지." "우리는 엄마 아빠가 없어요." "원장님이 엄마지. 원장님이 아빠지." "원장님은 원장님이고 엄마는 엄마지요." 해가 서산에 졌는데 집에 가고 싶지 않는 거예요. 그 아이들을 꼭 껴안아 주고 먼지 툴툴 털어서 손잡고 입구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 땅에 살 때는 모르지요. 인생 해가 서산에 지고 나면 갈곳 없는 사람?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들에게 하늘 집을 나누는 것 그것이 자비입니다. 이 땅에 하나님 아버지 없이 살아가는 사람에게 아버지를 나누는 것이 최고의 자비입니다. 그들에게 예수 신랑을 소개하는 것이 근사한 자비입니다. 그들에게 하늘 양식, 구원 양식, 복음 양식,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자비입니다.

지난번 섬기던 교회에 부임한 후 이 집 저 집 부임 심방을 다니던 중 교회 바로 앞에 사는 젊은 부인에게 심방을 갔어요. 가서 보니 남편이 병들어 누워있습니다. 심방을 마치고 돌아왔어요. 제가 심방으로 지쳐 보였던지 장로님께서 보약을 달여왔습니다. 먹으려 생각하다 병석에 누워있는 그 친구가 생각나서 그에게 갖다 주었어요. 장로님이 인사를 합니다. "보약 잘 먹었습니까?" "너무 너무 잘 먹었습니다." 장로님이 너무 너무 잘먹었다는 소리에 은혜를 받고 또 가져왔어요. 이번에는 개를 잡아 즙을 내왔다고 꼭 드셔야 된다고 합니다. 며칠 후 맛있게 먹었냐고 묻습니다. "너무 잘 먹고 있습니다." 이번엔 사슴을 또 가져왔습니다. 가져오는 대로 이 친구에게 갖다 주었지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석 달이 지나는 사이에 이 친구가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완전히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취직을 시켜줘야 되니까 이 친구가 가지고 있는 재능과 관계된 회사가 있어 소개하고 제가 보증을 하고 취직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돈 꽤나 벌고 건강해서 이제는 큰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되었어요. 그런데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겁니다. 바람이 난 거예요. 새벽기도에 부인이 와서 자꾸 웁니다. 울음소리 들어보면 알아요. 자식이 속썩여서 우는 울음소리와 남편이 속썩여서 우는 울음이 달라요. 상담을 하는데 부인이 하는 말이 "목사님 병들어 누워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어요. 목사님 보약 먹여 살려 놓았더니 그 인간이 그 인간이..." 엉엉 웁니다. 양식은 주고 보약을 주었는데 예수 양식은 못 주었구나 싶어서 이 친구를 찾아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친구가 착해서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부인도 남편도 집사가 되어서 교회를 잘 섬기는 모습을 보고 그 교회를 떠나왔습니다.

예수 없이 죽어 가는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 자비의 마음입니다. 아버지 모르고 사는 인생을 불쌍히 여기는 그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최고의 자비는 천국 집을 나눠주고, 예수 신랑 소개하고, 영생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풍성한 자비의 열매가 우리 모두에게 맺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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