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왕의 예루살렘 성전 심판 (마 24:1-35)

  • 잡초 잡초
  • 376
  • 0

첨부 1



마태복음의 다섯 개의 가르침 단락 중에서 24-25장은 마지막 단락에 속하며, 그 주제는 왕의 심판입니다. 24:1-35절은 예루살렘과 성전의 심판을 다루고, 24:36-25:46절은 주님의 재림 때에 있게 될 심판을 다룹니다.

24장은 성경학자들도 명료하게 해석하기 어려워하는 부분 중의 하나이고, 그만큼 다양한 견해들이 있습니다. 그 견해들 중에서 구약배경을 충실하게 반영해서 문맥을 해석한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는 본문이 구약 특히 이사야서와 다니엘서에서 용어들을 많이 빌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구약배경을 고려하지 않고 현대의 과학적 문자개념으로 접근하면 잘못 해석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차적으로는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 마태도 그 시대 유대인들을 일차 독자로 간주하고 복음서를 썼습니다. 그 시대의 유대인들은 본문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했을까요?

23:38절에서 예수님은 성전이 황폐하게 되고 버려질 것을 선언하셨습니다. 성전을 나오시면서 다시 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무너뜨리우리라”(2)고 선언하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무너짐이란 세상이 끝장난다는 말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충격 받은 제자들은 조용히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하시기 전에 먼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계하셨습니다(4). 5절과 11절에도 “미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때와 징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않도록 경계하셨습니다. 그 중에는 자칭 그리스도라 하며 속이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난리, 전쟁, 기근, 지진 등이 발생할 때 마다 마치 세상이 곧 끝날 것처럼 야단스럽게 흥분하거나 당황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두려워 말라”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재난의 시작”일뿐 “끝은 아직 아니”기 때문입니다(5-8).

9-12절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 이전의 팔레스틴 지역 상황을 그대로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사회적 혼란과 자연 재해들이 있을 때마다 ‘기독교인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외쳤습니다. 재난이 발생하면 기독교인들에게 모든 책임을 씌워서 환난과 죽음에 넘겼던 일이 많았습니다. 다른 모든 민족이 온갖 잡신들을 다 인정하는데 기독교인들은 유일하신 하나님만 섬겼기 때문에 아주 미워했습니다. 극심한 핍박 때문에 많은 배교자가 생겨났고,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는 일들이 생겼습니다. 그러면 다시 거짓 선지가가 많이 일어나 사람들을 미혹하고, 불법이 성행하여 사랑이 식어졌습니다.

난리와 전쟁으로 인한 사회혼란, 기근과 지진 같은 자연재해들은 늘 있어왔습니다. 혼란한 시기마다 세상 끝 날이 임박함을 강조하며 미혹자들이 있었고, 재림에 대한 과도한 기대로 흥분한 광신자들도 있었습니다. 사랑이 식는 현상이나, 예수 믿는 사람을 욕하고 불이익 당하게 하는 경향도 언제나 있었습니다. 늘 반복되었던 일들이지 ‘성전파괴나 세상 끝’을 알리는 특별한 징조가 아닙니다. 제자는 이런 일들로 바둑의 초읽기에 몰리듯이 초조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행여 내일이 세상 끝이라 할지라도 그때까지 묵묵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면 됩니다. 구원 얻을 자의 특징은 이런 저런 말에 속아서 요동하지 않고 진리 안에서 “끝까지 견디는” 것 입니다(13). 주께서 어느 날에 오실지를 계산하고 분별하려는 열심보다는, 그 날이 오기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가는 삶에 무게를 두는 것이 제자로서 바람직한 삶의 태도입니다.

14절은 성전파괴의 날이나 세상 끝 날이 왜 당장 오지 않고 지연되는지 설명해줍니다.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4) 21세기 사람들은 ‘온 세상’이라는 용어를 보면 5대양 6대주에 퍼져 있는 나라들을 생각하겠지만, 당시는 로마제국이 온 세상이었습니다. 바울은 AD 70년 이전에 이미 복음을 아시아와 유럽에 편만하게 전파했는데(롬 15:19), 그 당시 개념으로 보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 후에 성전이 파괴된 셈입니다. 그래서 14절의 ‘끝’은 세상 끝뿐만 아니라 성전파괴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온 세상’이라는 용어의 한계가 모호하기 때문에 복음이 전파된 정도로써는 끝을 분별하는 징조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성전 파괴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려주는 징조들은 어떤 것일까요? 15-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읽는 자는 깨달을진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다니엘 11:31절에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라고 했습니다. 이는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Antiochos Ⅶ Sidetes BC 139/138-129 재위)가 성전과 제사 제도를 더럽힌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벽을 완전히 파괴하고 성전 제단을 헐어 그 위에 제우스 제단을 만들고,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돼지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AD 66-70년에는 티투스(Titus Flavius Vespasianus, 79-81 재위) 장군이 로마 군대로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100만 명을 학살했습니다. 그 무렵에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라 할 수 있는 사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위기 상황에서 조금도 지체하지 말고 신속히 산으로 도망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고 도피해야만 화를 면할 수 있습니다(17-18). 그 날에는 신속히 피할 수 없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19). 또 피난하기 불편한 겨울이나, 멀리 이동하거나 물건을 옮기는 것을 금지한 안식일이라면 더 고난이 클 것입니다(20). 그 때에 전무후무한 큰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히틀러 정권에 의해서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학살되었고, 스탈린 치하에서 2,000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지만, 성전이 파괴될 때처럼 단기간에 주민들 모두 몰살당하고 노예로 끌려갔던 일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 보면 예루살렘 성전 파괴는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 군대의 승리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보면 메시아를 거부하고 대적하여 십자가에 죽인 자들에 대한 메시아의 승리였습니다. 주님은 계속해서 심판을 예고하셨고, 심판에서 피할 길도 알려주셨지만 끝내 주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들은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주님은 심판 중에서도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여 주셨습니다. 왕께서는 당신님의 왕 되심을 거부하고 대적한 자들은 철저하게 심판하셨으나, 당신님의 백성들은 완벽하게 보호하는 방향으로 역사를 주관하셨습니다.

23-28절은 다시금 경고의 말씀입니다. 환난의 때는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이 활개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주면서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려 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삶이 몹시 힘들거나 장래 문제로 갈등하고 방황될 때, 큰 능력과 확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의존하고픈 마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표적과 기사에 미혹되지 않도록 “미리 말하였노라”고 하셨습니다. ‘표적과 기사’를 따라 움직이는 신앙은 언제나 위험합니다. 물론 참된 신앙에도 분명 표적과 기사는 나타납니다. 그러나 표적과 기사는 매우 사악한 사교집단에서조차 나타납니다. 그래서 표적과 기사를 중심의 신앙은 바른 진리에서 떠나기 쉽습니다. 건강한 신앙은 ‘미리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의존합니다. 철저히 성경 계시에 의존하는 신앙이 아니고서는 미혹을 이기기 힘듭니다.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는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와 비밀스럽게 임할 것이라는 기대가 공존했습니다(26). 그러나 주님은 번개가 번쩍하는 것처럼 갑자기 임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임하실 것입니다(27). 그러므로 광야의 어느 수도원에서나 깊은 산중에서 큰 능력을 행하는 선지자가 있다고 하여도 속아서는 안 됩니다. 주검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이는 것처럼, 인자의 임함도 반드시 모든 사람이 보게 되며 피할 수 없습니다(28).
29-35절은 얼핏 재림에 관한 예언같이 보입니다만, 34절의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에 관한 말씀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사야 13:10절과 34:4절, 에스겔 32:7, 요엘 2:10, 아모스 8:9 등은 바벨론 제국과 에돔과 열국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묘사하기 위해서 비슷한 용어들을 썼습니다.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라고 말씀이, 21세기 사람들에게는 천체의 이변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구약에 익숙한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예루살렘과 성전의 정치적 몰락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30)는 말씀은, 다니엘 7:13-14절 용어들을 반영합니다. 다니엘서에서 인자의 오심은 인자의 권위와 왕권이 온 세상에 인지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전 파괴역시 인자의 권위가 온 세상에서 공개적이고 구체적으로 인지되는 결정적인 심판적 행위로 간주될 수 있습니다. 31절도 이사야 27:13절과 스가랴 2:6절을 반영합니다. 흩으셨던 이스라엘을 포로 생활에서 다시 모으셨던 주님께서, 성전파괴와 함께 세상 곳곳에 흩어져 있는 선택 받은 백성들을 모으실 것입니다.

팔레스타인에 흔했던 무화과나무는 늦은 봄에 잎사귀를 내기 때문에 여름이 임박했음을 쉽게 알게 했습니다. 이처럼 15-28절의 상황들은 29-31절의 성전 파괴 사건에 대한 명백한 징조 역할을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주제와 관련해서 자주 등장한다는 점도 오늘 본문이 전체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 대한 심판과 관련되어 있음을 잘 보여줍니다.

세상이 아무리 요동쳐도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의존해서 살아가는 삶이되도록 은혜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