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당신의 영적 상태를 체크하라! (삿 2:1-10)

  • 잡초 잡초
  • 690
  • 0

첨부 1


당신의 영적 상태를 체크하라!
사사기 2:1-10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참으로 심령에 자유를 얻기를 원한다면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인류 역사 이래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참된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든 억눌림과 상처와 포로 됨에서 자유하기를 원한다면 예수를 알아 가십시오.  예수를 배우십시오.  예수를 닮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내 삶의 이유인 사람은 모든 환경과 사람들로부터 참된 자유를 누리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름지기 하나님의 사람은 진리에 눈을 떠야 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성품이 주님을 닮아야 됩니다.  예수를 안다고 말하거나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내면의 성품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는 지금 종교놀이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종교놀이로는 구원의 깊은 감격을 누리지 못합니다.  종교놀이로는 복음의 능력을 누리지 못합니다.  그저 예배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한 시간 동냥하듯이 예배하고, 헌금하는 것으로 모든 종교적 행위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그런 종교놀이는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십니다.  내가 교회에서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으로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은 스스로 된 줄로 알지만 사실은 스스로 넘어진 종교인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주님의 제자가 되십시오.  자신의 내면의 성품이 거룩하게 변해 가는 하늘의 사람이 되십시오.  인간의 관심은 혼의 문제이기 때문에 인격을 중시하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성품에 있습니다.  영의 문제는 성품의 문제입니다.  성령은 그 사람의 성품을 붙듭니다.  영적인 사람은 그 사람의 성품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질대로 살지 마십시오.  가만히 보십시오.  성질대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입니다.  자기 생각의 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자기 방식만을 고집합니다.  어디 가서 하나를 들으면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자신의 입맛에 맞는 사람의 잘못은 아주 너그럽게 용납합니다.

그러나 자기 눈 밖에 난 사람의 잘못은 인정사정 없이 공격하고 비난합니다.  그래서 포용력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자신은 술을 마시고 전혀 주님의 제자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서는 아주 엄격한 잣대를 들이댑니다.

성질의 사람은 언제나 이중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은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이성적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에서 열까지 간섭하려고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자신이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다른 사람이 한 것은 도무지 성질에 차지 않습니다.

대개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성질에 자기가 넘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릴 때 받았던 아픈 상처들이 쓴뿌리로 자신의 내면에 깊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잘 모르지만 결정적일 때, 자신의 쓴뿌리가 상처를 입었다고 느껴질 때에 성질이 폭발합니다.  그래서 그 성질에 못 이겨서 거리를 방황합니다.  그 성질에 못 이겨서 혼자서 절망하고 분노합니다.  쉽게 결단을 했다가도 쉽게 넘어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힘들지만 가족과 다른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성질대로 살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그 모난 성질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심령에 쓴뿌리로 멍들게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것은 결코 주님이 원하시는 삶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질이 여러분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십시오.

사단은 언제나 그 사람의 성질 속에서 기생충처럼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사람의 성질을 이용해서 일을 그르치게 합니다.  사단이 내 안의 성질을 다스리지 못하도록 시간마다 때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채움을 받으십시오.  성령의 감화와 감동으로 내 심령을 새롭게 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결코 성질의 사람을 사용하지 않습니다.  성질의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백성이 어려움을 당합니다.  성질의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공동체가 곤고함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그 사람의 내면의 성품을 통해서 하늘 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능력으로 내 안에 있는 성품을 개발하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시는 그 성품의 사람이 되어 가십시오.

우리의 성품은 은사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은 성품은 그 모습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그 성품이 하나님의 능력에 붙잡히면 온유해집니다.  우리의 어떤 성품도 하나님의 은혜에만 붙잡혀 있으면 귀하게 쓰일 날이 올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 마음은 겸손입니다.  낮아집니다.  온유함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성품을 닮아간다면 내가 선 그곳은 바로 천국이 될 것입니다.

최근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는 직업적으로 성공한 사람의 성공 비결에 관한 설문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성공한 사람의 비결은 기술과 능력이 15% 미만이라고 답한 반면, 원만한 인간관계와 공감 능력은 85%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10년간 행한 어느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직장을 잃은 사람들의 해고 원인 중에서 95% 이상이 업무 수행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인간관계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현대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그리고 세상을 제법 잘 살아내려면 능력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겁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슴이 따뜻한 성품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슴이 따뜻한 성품의 사람에게서는 인간적인 매력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모여듭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지금 우리들에게 있어서 현장에서 일하는 능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대인관계의 능력입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많이 아는 이기적인 지식인보다 가슴이 따뜻한 성품이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딱딱하고 매정한 사람보다는 부드럽고 넉넉한 사람이 필요한 때입니다.  같은 재능, 같은 기술, 같은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사회가 선호하는 사람은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이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해 주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잘못된 세상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심판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상은 지금 가슴이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을 원하고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통하여 상처 난 심령들이 위로 받고 세움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망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희망을 노래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신앙을 심어주는 일과 꿈을 갖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 안에 잠자고 있는 꿈을 깨워야 합니다.  좌절된 꿈을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잃었던 신앙을 되찾아 주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오늘 이 땅의 사람들에게 꿈과 신앙을 심어 주고, 그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고, 하나님께 쓰임 받게 해야 합니다.  어린아이들의 가슴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심어주는 것은 오늘 우리들이 감당해야 할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끝나는 10절의 말씀은 우리들에게 소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

보십시오.  세대가 교체되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그러니까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데 있어서 그들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새로운 세대에 일어난 문제는 바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세대가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 앎을 상실했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사무엘상 2장에 기록된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불량자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
"여호와를 알지 아니하더라"는 말을 다른 성경에서는 '무시하였다, 여호와를 두려워할 줄 몰랐다, 주님의 일을 위해서는 전혀 힘을 쓰지 않았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엘리의 아들들이 여호와를 몰랐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분명히 이스라엘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전에 살았습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더 여호와를 잘 알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여호와를 알지 못했다고 한 것은 엘리 아들들의 중심에 하나님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리켜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3장 5절에서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 자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웃지 못할 신앙의 모습은 현대인들에게서 너무나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종교적인 색채가 과학으로 가려진 오늘날에는 참으로 하나님을 경험하려고 하는 사람이 적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중요시되는 이 시대에 하나님을 향한 영적 경험은 합리적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너무 쉽게 외면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도 수박 겉핥기 식으로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내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 이 시대가 그만큼 영적 위험의 시대에 처해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영적 위험의 시대에 빠지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면서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첫째로, 현실에 안주하려는 의식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안정'이라는 단어를 좋아합니다.  안정을 곧 행복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길을 따라오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중요한 메시지 가운데 하나는 '좁은 길'입니다.

사사기 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었지만 가나안을 정복하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 극심한 혼란의 시기에도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지경을 넓혀 나갔습니다.

이렇게 분투를 했던 백성들 사이에 점점 안일한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정도면 됐다.'  나 같은 사람이 이 정도 성공했으면 된 거지 더 이상 피곤하게 살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의 도전과 정복은 불행이라는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게 되면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병들어갔습니다.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안일한 생각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나타나는 영적 위기의 신호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내 삶에서 영적 위기는 현실에 안주하려는 생각과 더불어 찾아오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높은 이상, 새로운 가치에 대한 도전도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한 흥분된 기대도 없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저 적당히 살다가 적당히 즐기고 죽으면 그만이라는 현실안주 의식이 우리를 영적 위기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안주 의식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일까?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꿈은 결코 실패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을 소유하면 현실에 안주하는 모습보다도 미래를 위해 도전하는 모습이 강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모든 소극적인 삶의 자세를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나 내일을 향해 도전하십시오.  우리는 나사렛 예수의 이름과 성령의 능력으로 이 땅을 정복해야 할 하나님의 사람들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현실에 안주하려고 하는 의식은 바로 영적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사명과 비전을 붙잡고 일어나 달려가십시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성령의 능력으로 도전하는 삶을 시작하십시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가는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달려가도 피곤치 않는 강한 힘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위기에 빠질 수 있는 두 번째 이유는, 신앙 체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 벅 여사는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을 때입니다.  아버지가 먼 여행으로 집을 비운 사이 마을에는 백인인 펄 벅의 어머니가 신을 분노하게 만들어서 가뭄이 계속된다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사람들의 불안은 점점 분노로 변해 어느 날 밤 사람들은 펄 벅의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는 집안에 있는 찻잔을 모두 꺼내 차를 따르게 하고 케이크와 과일을 접시에 담게 했습니다.  그리고 대문과 집안의 모든 문을 활짝 열어 두고는 아이들과 함께 거실에 앉아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을 준비한 것처럼 어린 펄 벅에게 장난감을 가지고 놀게 하고 어머니는 바느질감을 들었습니다.

잠시 뒤 거리에서 함성이 들리더니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열린 대문을 통해 단숨에 거실로 몰려왔습니다.  사람들은 굳게 잠겨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문이 열려 있자 좀 어리둥절한 얼굴로 방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때 어머니는 "정말 잘 오셨어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서 들어와서 차라도 한잔 드세요."하며 정중하게 차를 권했습니다.  그들은 멈칫거리다가 못 이기는 척 방으로 들어와 차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습니다.  천천히 차를 마시며 그들은 구석에서 천진난만하게 놀고 있는 아이와 어머니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냥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그토록 기다리던 비가 내렸습니다.

훗날 어머니는 어른이 된 펄 벅 여사에게 그날 밤의 두려움을 들려주며 만약 도망칠 곳이 없는 막다른 골목이 아니었다면 그런 용기가 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펄 벅은 이 체험 때문에 언제나 절망 속에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본문 다음의 7절에 보면, 가나안을 정복하는데 앞장섰던 부모 세대의 신앙 체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

그러니까 여호수아와 고락을 함께 했던 세대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관을 경험하였습니다.  이 세대는 고난도 눈물도 고통도 함께 통과했습니다.  이런 고생의 세월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직접 체험한 것입니다.  이 체험이 선조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세대가 지나면서 점점 하나님을 향한 열린 마음과 귀가 약해졌고, 초롱했던 눈은 어두워졌습니다.  보이지 않는 진실하신 하나님을 찾기보다는 현재 보이는 현실만을 찾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도시를 정복하기보다는 현실에 안주해서 안락과 편안함을 쫓았습니다.  신앙은 형식에 치우치게 되었고, 싸워야 할 방향을 잃어 갔습니다.  그들은 선조들이 경험했던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체험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세대의 불행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들이 경계해야 할 교훈이기도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자녀들을 어떻게 키우기를 원하십니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고, 이 아이들이 자라나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거는 기대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좋은 배필을 만나서 좋은 가정을 이루고, 재산을 많이 모으는 것이 여러분이 자녀들에게 갖는 꿈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시려고요?
설마, 여러분은 이 아이들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존재로 사회에서 관계가 무너진 고립무원의 인생을 살기를 원하지는 않겠지요?
설마 여러분은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영적으로 경험하지 못하는,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의 삶을 살기를 원하지는 않겠지요?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경험하게 하십시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어떠한 고난과 역경 가운데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십시오.

기억하십시오.  영어 단어 한자를 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영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만군의 여호와 전능하신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입니다.

신앙 체험의 중요성.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적 체험을 소홀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신앙적 체험이 없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본문 2절에 보니까,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적 체험을 상실한 사람은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습니다.  영적 체험을 상실한 사람은 수많은 주님의 말씀이 선포되고 들려옴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역경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고통 중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쳐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도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음소리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불행이요, 저주입니다.

사사 시대에서는 바로 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신앙 체험을 상실했습니다.  이런 인생에는 반드시 영적 위기가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영적 체험을 소중하게 붙잡으십시오.

본문 4절 이하를 보십시오.  하나님은 영적 위기를 맞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치료하시려고 한 장소로 인도하십니다.  그 장소가 바로 '보김'입니다.  여기에서 '보김'이라는 말은 '우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영적인 헐벗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세대를 향한 자기들의 무책임한 모습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음성 앞에서 그들은 눈물을 흘리며 회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우리도 매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후세들에게 제대로 신앙을 가르치지 못한 무책임한 태도를 눈물로 회개해야만 합니다.  죽어 가는 저 많은 영혼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복음을 누리게 하지 못한 무책임하고도 안일한 우리의 신앙적 자세를 회개해야 합니다.

저는 가끔 하나님 때문에 얼마만큼 내 마음이 부요해지고 있는지 스스로 자문해 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어도, 주위에 좋은 친구가 없어도 하나님 한 분 때문에 만족하면서 살 수 있다면 그는 분명 영적인 하늘의 사람입니다

모세는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돈도 없이 무기도 없이 미지의 땅 가나안을 향해 200만 명이나 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행군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으나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찾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신앙적 체험이 상실되어 가는 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 시간 당신의 영적 상태를 가슴을 찢는 심정으로 체크해 보십시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라면 여러분은 진정 성공자입니다.
(오주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