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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정도를 떠난 사람들 (말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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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말라기 2 : 1 - 9
제목  정도를 떠난 사람들

서울 강남에 화장터가 생기는 문제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땅값이 떨어진다는 이유 때문이었지요.  어느 지역이든 들어서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시설물을 혐오시설이라 말합니다.  쓰레기 매립장, 쓰레기 소각장, 핵폐기장 등.  대부분의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혐오시설의 대표적인 것입니다.  우리 마을에는 이런 것들이 오면 안되겠다는 것이지요.

분당에서 커다란 교회가 역시 커다란 교육관을 짓겠다고 계획을 하고 공사를 하려고 하는데, 마을 주민들이 반대합니다.  매주일 마을 주민들이 교회 앞에서 시위를 합니다.  어느덧 교회도 혐오시설이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보통의 책망이 아니고 엄청난 책망입니다.  제사장들은 거룩한 사람들이예요.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뭔가 다른 사람들이예요.  그런데 그 제사장의 얼굴에 짐승들의 똥을 바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드시겠다는 것이지요.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누가요?  제사장들이요. 
사랑하는 여러분!
다행이시죠?  제사장이 아니니까.  베드로 전서 2장 9절 말씀을 보니까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나는 제사장이 아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나보고 제사장이래요.  여러분더러 제사장이래요.  보통 제사장도 아닌 왕 같은 제사장이래요.  오늘 말씀은 옛날의 제사장에게만, 오늘날의 목사에게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교회를 향하신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교회에 주시는 책망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통해서 크게 두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 제사장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치나 보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목사가 교인들의 눈치나 보고 있고, 교회는 세상의 눈치나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2절 上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교회가 해야 할 바른 일이 있어요.  교인들이 해야 할 바른 일이 있어요.  그런데 바른 일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거예요.  정도를 걷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가 정도를 걷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혐오시설로 전락해 버린 것이예요.  교인이 정도를 걷지 못하기 때문에 상종 못할 사람으로 전락되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희가 도대체 내 말을 어떻게 생각하길래 나를 영화롭게 하지 않고 사람들의 말을 따라가느냐?’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왜 이스라엘 백성들의 눈치를 보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왜 교인들의 눈치를 보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눈치를 봐야 하는데 왜 세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냐는 겁니다.
지난 주에 말씀을 드렸지요.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는데 눈 먼 것이나 다리를 저는 것, 또는 병에 걸린 것을 드리는 겁니다.  제사장들이 온전한 제사를 드리지 못하고 이렇게 병들고 불구가 된 제물을 드리는 이유가 뭐예요?  일차적인 이유는 백성들이 그런 제물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예요.  그러나 설사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온전치 못한 제물들을 가지고 오더라도 제사장 너희가 그런 제물들을 거부해서 하나님께 이런 제물들을 바칠 수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사장 저희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이 있으면 가르치고 바로 잡을 생각을 해야지 너희가 그들이 하자는 대로 따라가면 어떻게 하느냐 하는 뜻입니다. 

어느 글을 보니까 ‘교인이 강단을 좌우한다’라고 썼더라고요.  교인이 목사의 설교를 좌우한데요.  교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만 골라서 한다는 것이지요.  언젠가 말씀드렸지요.  미국의 어떤 교회는 강대상과 교인 사이에 방탄 유리가 설치되어 있데요.  목사가 회개하라 회개하라 설교하니까 그 설교 너무 듣기 싫어서 총으로 목사를 쐈대요.  그래요.  듣기 싫은 이야기 하면 고개 돌리고 귀를 막아버리는 것이 오늘 한국의 교인들의 모습이예요.  그래 목사들이 교인들 가려운 곳만 긁어줘요.  아부하고 아양떨고.  교인들 눈치만 보고 있더라는 말씀이예요.

사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교회는 침묵을 지켜요.  침묵만 지키면 좋게요?  한술 더 떠서 세상을 꼬드겨요.  세상에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함께 주거니 받거니 하며 가고 있어요.  선량한 시민에게 발포명령 내려, 많은 사람 죽이고 대통령 된 사람 찾아가서 축복기도 해 줘요.  세상 눈치만 보고 있더라는 말씀이예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만드시겠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정도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혐오시설로 전락되게 된 것이예요. 

그럼 왜 목사가 교인 눈치보고 교회가 세상 눈치보고 그래요?  목사가 교인보다 하나님 눈치를 더 봐야 하는데, 하나님보다 교인 눈치를 더 봐요?  교회가 세상 보다 하나님 눈치를 더 봐야 하는데 왜 하나님보다 교인 눈치를 더 봐요?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지난 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하나님을 실세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예요.  하나님을 하찮게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을 종이 호랑이 쯤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보다 교인이 더 무서워요. 
지난 주에 어느 목사님을 만났어요.  이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교인들이 ‘목사님 설교가 많이 변했어’ 그런데요.  팔짱끼고 앉아서, 고개 옆으로 돌리고 설교 듣던 사람이 그러더래요. 이게 압력으로 와 닿는데요.  여기에서 두 가지의 대응이 있겠죠.  하나는 초지일관,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또 하나는 교인들의 구미에 맞게 설교의 내용을 고치고 가다듬는 길.  교인보다 하나님이 무서우면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전할 것이고. 하나님보다 교인이 무서우면 교인 싫어하는 설교를 안할 것이고.
세상에서도 그래요.  하나님의 눈치를 볼 것인가 세상의 눈치를 볼 것인가?  세상이 무서우면 세상의 눈치를 볼 것이고, 하나님이 무서우면 하나님의 눈치를 보겠죠.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 교회의 실세가 누구예요?  여기 있는 목사예요?  장로님이예요?  아니면 여러분들이예요?  아닙니다.  우리 교회의 실세는 오직 한분 하나님이셔요.  그래 우리가 누구 눈치를 봐야해요.  누구 말씀을 따라야 해요.  오직 한분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삶에서의 실세는 누구예요.  돈벌어 오는 사람이 우리 삶에서 실세예요?  자신이 실세예요?  아니예요.  오직 한 분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실세예요.  그러기에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 살아가야 하는 것이지요.
눈치를 보는 두 번째 이유는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니 그래요. 
에스겔서를 읽다보니 당시에도 거짓 선지자들이 참 많았나 봅니다.  하나님께서 보여준 환상을 보지도 못하고 자기들 생각대로 예언하는 사람들이 있었대요.  하나님께서는 전혀 말씀하신 바가 없는데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대요.  그런 사람들을 향하여 에스겔 13장 19절에 이렇게 말씀하셔요.  “너희는 몇 줌의 보리와 몇 조각의 빵 때문에 내 백성이 보는 앞에서 나를 욕되게 하였다.  너희는 거짓말을 곧이 듣는 내 백성에게 거짓말을 함으로써 죽어서는 안될 영혼을 죽였다”  너희에게 돌아올 하찮은 이익을 위해서 몇 줌의 보리와 몇 조각의 빵을 위해서 거짓을 말한다는 겁니다.  그래 죽어서는 안될 영혼을 죽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제가 아는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부목사 가운데 능력이 있는 부목사가 하나 있었데요.  그런데 이 교회가 일년에 한번 부목사 맡는 교구를 바꾸는데,  자기가 원하는 교구가 있더래요.  자기는 꼭 어느 특정한 교구에서 해야 한다고 하더래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요.  그 교구에 기업 사장이 하나 있는데 집사야,  교역자에게 얼마나 잘하는지. 그래 그 교구에 가려고 하더래요.  그 교구에 가서 그 집사 끼고 돌았데요.  그래 함께 목회하던 목사들 왈.  나중에 알고 보니까 유학가려고 하는데 돈줄로 생각해서 그렇게 잘했데.  나에게 실질적인 이익을 줄 사람의 눈치를 보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은 이익을 쫓아가는 신앙이 아니야.  이익을 쫓아가는 것은 신앙이 아니야.  그것은 실리이지.  그리고 사업이지.

목사가 교인의 눈치만 보고, 교회가 세상의 눈치만 보고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뭐라 말씀하셔요?  얼굴에 짐승의 똥을 바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래 오늘날 어디 나가서 목사라고 말 못해요.  창피해서.  어디 가서 교회 다닌다고 말 못해요.  창피해서. 

둘째, 제사장에게 주어진 바른 사명을 잊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목사가 자기의 바른 사명을, 각 직분지가 자기의 바른 사명을, 교인이 자기의 바른 사명을, 교회가 자기의 바른 사명을 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5절 下에서 6절 말씀입니다.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으며 그 입에는 진리의 법이 있었고, 그 입술에는 불의함이 없었으며, 그가 화평과 정직한 중에서 나와 동행하며 많은 사람들을 돌이켜 죄악에서 떠나게 하였느니라”
제사장의 바른 사명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제사장이 어떠해야 하는가?  그리고 처음에는 제사장들이 자기의 사명을 잘 완수 했다고 말씀합니다.  처음에는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 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을 경외하지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래요?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크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아요.  하나님이 두렵지 않아요.  마치 어릴 때는 아빠, 엄마 손을 꼭 붙잡고 아니고, 세상에서 아빠, 엄마나 대단해 보이더니 조금 크니까 아빠, 엄마나 너무나도 시시해. 
왜 하나님이 두렵지 않아요?  신앙에 타성이 붙어서 그래요.  남아공에서 살면서 힘들었던 것 가운데 하나는 위험하다는 것입니다.  길거리에 다니는 것도, 집에 그냥 있는 것도.  그래서 늘 문을 닫고 쇠창살 속에서 사는데요.  일년 이년 되니까 그래 적응이 되더라고요.  처음에는 무서워서 아래층에 내려가 전화도 못했어.  그런데 걸어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익숙해 지는거예요.  하나님 무시하는 것도 익숙해 지고, 처음에는 난리 날 줄 알았는데 괜찮거든요.  그래 익숙해 지는 겁니다.  이게 무서운 거예요.  처음에 저는 거, 병든 것 드릴 때는 무서웠어요.  하나님이 두려운 존재였어요.  그런데 한번 드려보니까 괜찮거든요.  또 한번 드리니까 그래도 괜찮거든요.  그래 익숙해 지는 겁니다.  문제는 잘못된 것에 익숙해지다 보니 어떤 것이 정도이고, 어떤 것이 틀린 길인지 모르게 되는 것이지요.   

또 하나 처음에는 참된 법을 가르쳤어요.  참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어요.  하나님의 바른 뜻을 이야기 했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사라졌어요.  이 말씀을 말라기에서만 지적하고 있는 말씀은 아닙니다.  성서 전반에 걸쳐서 지적하고 있는 말씀이예요.  거짓을 이야기하면서 참인 것처럼 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지적은 너무나도 많이 있어요.  요즈음 잘 쓰는 말 가운데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있지요.  '대중영합주의'라는 말이지요.  본래의 목적을 위해서라기보다 대중의 인기를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정치는 그야말로 바르게 다스리는 것인데 국민들의 인기만 생각하고 인기만 얻기 위해 바르지 않은 것도 하는 것을 말합니다.  교회에도 이 포퓰리즘이 뿌리 내리고 있어요.  참된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교인들로부터 인기 얻기 위한 발언만 하더라는 것이지요.  교회가 사회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서 사회를 부패에서 방지하고 바른 곳으로 인도해 내야 하는데, 언제부터인지 그 일을 하지 못해요.  오히려 세상에 영합해서 함께 가고 있어요. 
옛날에는 목사들의 덕목 가운데 하나가 ‘청빈’이었어요.  그래서 옷도, 생활도 검소했지요.  그런데 천박한 자본주의가 우리 나라에 뿌리를 내리면서 ‘청빈’은 덕목에 들지 못해요.  아니요.  ‘청빈’한 목사는 대접받지도 못해요.  목사는 최고급 양복을 입어야 하고, 최고급 차를 타야하고.  그래야 사람들이 아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구나 인정받는 사회가 되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사회 풍조에 목사는, 교회는 아니다 이야기 해야 하는데 그냥 젖어 가는 거예요. 

옛날에 타잔이라는 영화를 보니까 정글에는 늪이 많은가 봐요.  가끔 늪에 빠지는 장면이 나왔는데,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래 들어가지요.  그런데 그게 늪이어서 좀처럼 빠져 나오질 못해.  빠지면, 한번 빠지면 죽는 늪인 줄도 모르고 오늘날 한국 교회는 하나님 말씀하시는 바른 길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말씀이지요. 

8절 上입니다.  “너희가 정도에서 떠나”  바른 길에서 떠났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만 바른 길에서 떠난 것이 아니라 이어진 말씀을 보니까 많은 사람들에게 율법을 버리고 곁길로 가도록 가르쳤다고 말씀합니다.  그래 우리 얼굴에 짐승의 똥을 바르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가던 길에서 돌이키라.  왜냐하면 내가 가는 길은 정도, 바른 길이 아니기 때문이예요.  사람의 눈치나 보는 것은 바른 길이 아니예요.  세상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이 바른 길이 아니예요.  하나님 주시는 참된 사명을 찾아 바른 길을 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른 길을 가는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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