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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 (신 2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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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기 21장부터 26장까지는 사람이 살고 있는 공동체 안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매우 일상적인 사건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군대의 화장실은 어떻게 조성할 것인가? 집을 지을 때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려면 난간을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가? 전쟁 포로 중 아내로 삼고 싶은 여자가 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돈을 빌려줬는데 이자를 받아야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등입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이런 사소하고 일상적인 문제까지 세심하게 배려하신다는 사실이 놀랍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혼자 살 수는 없습니다.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부적인 규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동체가 공의로운 공동체를 이루어야 된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는 작고 사소한 문제까지도 정의를 실현하면서 살아야 하며, ‘나 혼자만 의롭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됐지 공동체가 나와 무슨 상관인가’하는 영적 이기주의는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성경 교리를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21세기 이전의 체계신학, 혹은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자들은 죄를 하나님과 개인간의 일대일의 문제로만 다루었습니다. 그런데 1,2차 세계대전과 같은 갖가지 전쟁을 겪으면서 죄는 개인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죄는 집단성, 혹은 공동체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래서 21세기에 나온 조직신학 서적들은 죄의 공동체적인 면을 한 항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한 개인이 아무리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많이 보는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도 그가 속한 사회가 공산주의, 혹은 전체주의 사회라면 그 사람은 공산주의의 도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한국 남자들은 군대에서 죄의 집단성을 잘 배웁니다. 내무반에서는 한 사람만 잘못해도 모든 장병들이 체벌이나 기합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군대에 가면 ‘죄는 내가 짓지 않는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구나. 우리 공동체 중에 한 사람이라도 죄를 지어서는 안되겠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모세의 율법은 이미 그 옛날에 죄의 공동체성을 심각하게 강조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 규례의 내용

본문이 다루고 있는 규례(規例)는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서 살인사건이 일어난 경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피살된 시체가 들에 유기된 살인죄와 사체 유기죄가 경합된 경우입니다. 그런데 그를 쳐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미제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거룩한 땅과 하나님께서 택하신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에서 이런 야만스러운 문제가 성경에 기록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성경이 단지 이상만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히 현실적인 책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거룩하게 되었고, 거룩한 공동체를 이루며 살게 되었지만 완전하게 거룩한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와 투쟁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게 되면 죄에 미혹되기 쉽다는 사실을 먼저 마음속 깊이 새겨야 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든지 ‘나는 예수님을 믿어서 죄를 안 짓는 거룩하고 완전한 존재가 되었다’는 완전주의(perfectionism)를 말한다면 이는 그릇된 주장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거룩한 백성의 공동체 안에 이렇게 무서운 사건이 일어나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내가 범인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상관없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런 사건이 일어나면 이스라엘의 장로와 재판장이, 즉 행정부와 사법부가 모두 동원되어 시체가 유기된 장소로 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장소에서 가까운 동서남북 사방의 모든 성읍들의 거리를 측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살인죄에 대한 책임을 시체로부터 가장 가까운 성읍이 지게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비합리적이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조금만 살펴보면 이는 대단히 합리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살인죄를 저질러도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시체를 자동차에 싣고 가서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 유기할 수도 있지만, 옛날에는 자동차가 없었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면 시체를 스스로 운반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대낮에 시체를 메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아마도 밤에 움직였을 것입니다. 어느 나라에서는 사람을 사형시킬 때 이미 죽은 시체와 함께 꽁꽁 묶어놓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시체와 산 사람을 묶어 놓으면 시체에서 나오는 병균과 벌레 때문에 산 사람도 결국 죽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담대한 사람이라도 시체를 메고 먼 거리를 이동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자살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율법이 살인범을 알 수 없는 미제의 살인사건에 대한 죄책을 그 시체에서 가장 가까운 성읍 공동체에 돌리는 것은 대단히 합리적니다.

만약 어느 가게에서 빵을 절도한 사건이 일어났을 때 평소에 “배고파. 빵 먹고 싶어”란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사람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그 장소 주변에서 배를 두드리면서 트림을 하고 빵 냄새를 풍기고 다닌다면 그 사람을 의심하는 것이 불합리한 행위입니까? 

따라서 시체에서 제일 가까운 성읍에 있는 장로들은 살인죄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기 공동체가 그 죄와 관련이 없다고 하는 사실을 입증해야 했습니다.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장로들은 아직 부리거나 멍에를 메어 보지 못한 암송아지 한 마리를 취해 물이 항상 흐르고 농사를 한 번도 짓지도 않은 골짜기에 데려가서 그 암송아지의 목을 꺾어야 합니다. 그리고 목이 꺾인 암송아지 위에서 손을 씻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합니다.

“우리의 손이 이 피를 흘리지 아니하였고 우리의 눈이 이것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속량하신 주의 백성 이스라엘을 사하시고 무죄한 피를 주의 백성 이스라엘 중에 머물러 두지 마옵소서.” 그러면 그 피 흘린 죄를 사함 받게 됩니다.

2. 규례의 관찰

이 규례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살인죄는 범인을 아는 경우와 범인을 모르는 경우에 해결 책임자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살인죄의 범인을 아는 경우에는 피해자의 가족이 그 살인자를 처벌할 책임을 안게 됩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그 이웃을 미워하여 엎드려 그를 기다리다가 일어나 쳐서 그 생명을 상하여 죽게 하고 이 한 성읍으로 도피하거든 그 본 성읍 장로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를 거기서 잡아다가 보수자의 손에 넘겨 죽이게 할 것이라 네 눈이 그를 긍휼히 보지 말고 무죄한 피 흘린 죄를 이스라엘에서 제하라 그리하면 네게 복이 있으리라”(신 19:11-13)

성읍의 장로들이 살인자를 체포하면 피해자의 가족이 보수자가 되어서 살인자를 처형해야 합니다. 그러나 살인자가 누군지 모르는 경우에는 복수되지 않은 피에 대한 책임을 가장 가까운 성읍의 공동체가 져야 합니다. 이처럼 살인자를 아는 경우와 모르는 경우에는 각각 책임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죄를 짓는 주체와 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주체가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죄는 남이 지고 책임은 내가 뒤집어 쓸 수 있다는 말입니다. 대통령이 잘못해서 IMF 사태가 왔다 해도 온 국민이 그 책임을 모두 뒤집어쓰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국가 원수가 잘못해서 전쟁을 일으켰다고 해도 국가 원수 혼자 전쟁을 감당하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이 책임을 지고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이처럼 죄의 주체와 책임의 주체가 다를 수 있습니다.

살인죄의 경우, 주체는 물론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이 살인자가 증거를 남기지 않아서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경우에 살인죄에 대한 책임은 가까운 성읍 공동체가 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내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도 남이 지은 죄의 책임을 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분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죄책을 왜 우리가 져야 하는가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러나 이 규례에 비추어 볼 때, 아담이 죄를 지었어도 우리가 죄책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무엘하 21장에는 다윗 왕이 통치를 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3년 동안 기근이 계속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근으로 백성들이 모두 굶어 죽게 되자 다윗이 하나님께 기근이 이유를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삼하 21:1)고 대답하셨습니다. 이는 여호수아 9장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기브온 사람과 언약을 맺은 내용이 나옵니다. 기브
온 사신의 속임수로 이스라엘과 기브온이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 언약을 통해 기브온 사람들은 멸망을 당하지 않게 된 대신 이스라엘 중에 거하면서 나무도 패고 물도 긷는 이스라엘의 종이 되었는데 사울 왕이 성경도 모르고 역사도 몰라서 기브온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죄는 사울이 범했지만 죄책은 다윗 임금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어떻게 하면 이 죄책을 제거할 수 있는지 하나님께 질문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울의 자손 중에 일곱 명을 택하여 여호와 앞에서 목매달아 죽이라고 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다윗 왕이 사울의 자손 일곱 명을 뽑아서 목매달아 죽였을 때, 비로소 기근이 그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죄는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해서 반드시 나는 죄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죄는 공동체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 중에 누군가 죄를 지으면 우리가 그 책임을 뒤집어 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셋째로 목이 꺾인 암송아지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것을 전통적으로 살인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의 제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옳지 않은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알지도 못하는 살인자를 위해서 왜 제물을 드리겠습니까? 어떤 학자는 이 의식이 서약적이고 맹세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했습니다. 장로들이 송아지의 목을 꺾는 것은 우리 중에 누구라도 이 살인죄를 저지른 자가 발견된다면 목이 꺾인 송아지처럼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가능성이 있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암송아지는 살인죄로 인해서 떠안은 공동체의 죄책을 제거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는 사실입니다. 농사를 지어보지도 않은 암송아지가 농사를 짓지 않은 계곡에 가서 원시적인 순수성을 가지고 땅과 백성에게 임한 오염과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 희생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넷째로 범인을 알 수 없는 살인죄의 경우에 제사장의 책임은 무엇인지를 규정한 점입니다.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올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신 21:5) 제사장은 레위사람들로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하나님을 섬기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백성을 축복하며, 모든 소송과 투쟁에 최종적인 판결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역할을 따져 보았을 때, 이 미제의 살인사건에서 주도권을 지고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할 사람들은 제사장일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성읍의 장로들에게 주도권을 지고 이 문제를 해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제사장들은 현장에서 성읍의 장로들과 함께 있다가 오직 죄가 사함 받았다는 사실을 선포하기만 하는 수동적인 역할을 감당한 것입니다.

3. 규례의 목적

하나님께서 이처럼 원시적인 것처럼 보이는 규례를 주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너는 이와 같이 여호와의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여 무죄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신 21:9)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규례를 주신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공동체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정직한 일을 행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이런 규례를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혼자 먹고 살다가 혼자 죽었다면 정의가 필요 없을 것입니다. 정의는 공동체 안에서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서 정의가 실현되기를 원하십니다. 공동체가 정의를 왜곡하고 정의에 무관심하다면 이는 하나님께서 징벌하실만한 분명한 사유가 됩니다.

신명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정의로우면 복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불의하면 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정의에 대한 보상은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때때로 어떤 경우에는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나 성경을 살펴볼 때에 결코 불의가 이긴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불의는 현세에서도 이기지 못하고 내세에서도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정의는 잠깐 지는 것 같이 보여도 현세에서도 이기고 내세에서는 영원토록 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서 살 때에 정의롭게 살아야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속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정의를 이루어야 합니다. 억울한 사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어느 공동체든 억울한 사람이 많으면 하나님의 축복이 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복잡한 규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공동체에 정의가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목적은 죄가 뿌리내려 열매 맺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무죄자의 피 흘린 죄를 너희 중에서 제할지니라’는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서 설령 범인이 누군지 모르는 죄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 죄가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려서 열매를 맺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죄가 주인 노릇해서는 안 됩니다. 죄가 왕노릇 할 때에도 ‘나는 저 죄를 안 지었어. 내가 한 짓이 아니니까 나는 관계없다’고 생각하면서 모른 체 하는 이기주의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18세기 영국의 정치가였던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는 “악이 승리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은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으면 결국 그런 공동체에서는 악이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여러 해 전보다 획기적으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걱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들이 먹고 살만하기 때문입니다. 배가 부르고 땅도 가지고 있고 자식들에게도 양질의 교육을 시킬 수 있으니, 내 자신의 만족을 채울 수 있으니 다른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대합니다. 이런 일에 기독교인들이 앞장서고 있으니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의 죄악에 무관심(indifference)해서는 안 됩니다. 또 나는 이제 먹고 살만하니까 괜찮다고 하는 자기만족(complacency)에 빠져서도 안 됩니다. 무관심과 자기만족은 공동체가 악에게 질 수 밖에 없는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결 론

별세하신 거지(巨智) 이중표 목사님이 제 33차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김대중 대통령 내외분을 모셔놓고 설교를 할 때,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위대한 과학자이지만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교회는 연약한 사람들이 종교를 의지하러 가는 곳이라고 비하하며 무시했습니다. 이 아인슈타인이 활동할 당시에 독일에서 나치스가 일어났습니다. 그 때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대학의 지성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대학교수들은 즉시 나치즘에 무릎을 꿇고 아첨했다. 그들은 나치즘이 주장하는 잘못된 인종이론을 마치 옳은 것인양 떠들어 댔다. 또한 나는 신문과 언론인들을 기대했다. 그러나 신문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필봉을 놓았다. 그런데 오직 교회만이 독재자에 항거하여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줄지어 감옥으로 향하였다. 나는 교회에 한없는 찬사를 보낸다.”

죄는 남이 지었더라도 언제나 악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의로운 공동체, 정의를 지향하는 공동체, 억울함이 없는 공동체, 죄가 자리 잡지 못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교회가 불의하면 이 사회는 아예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교회조차 불의하다면 이미 다른 집단은 생각해 볼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의 왕이 자신의 공주를 너무 사랑해서 공주가 좋아하는 곰 인형, 토끼 인형 등 갖가지 종류의 인형을 사 주었고 공주도 인형을 너무 좋아해서 항상 인형을 안고 놀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공주가 폐결핵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음식도 좋고, 환경도 좋은 왕궁에서 어떻게 공주가 폐결핵에 걸리게 되었는지 왕이 애통해하며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곧 그 원인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자신의 왕국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잘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성 밖의 가난한 환경에 있는 사람들은 곧잘 폐결핵에 걸리곤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소일거리들뿐이었기 때문에 어떤 폐결핵 환자들은 인형을 만들어서 팔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들이 기침하면서 만들었던 인형을 공주가 갖게 되었고 그 인형을 통해 공주가 폐결핵에 걸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왕은 성 중에 있으면서 잘 먹고, 잘 입
고, 잘 지내면 늘 건강하고 괜찮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가 돌보지 않았던 가난한 사람들, 폐병환자로 인해 결국 자신도 사랑하는 공주를 잃게 되는 끔찍한 피해를 입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나만 괜찮으면 다 괜찮다는 태도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공동체가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어서 이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서로 정의를 격려하면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피영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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