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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감사] 다윗의 감사 (시 16: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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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지난주에 헨델의 오라트리오 ‘메시야’ 공연을 보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면서도 음악회를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일년에 한번 메시야 공연은 꼭 봅니다. 제가 해외에 나가 있던 기간을 제외하고 거의 참석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메시야를 들으면서 저는 ‘이렇게 한해가 끝나는 구나’ 생각하면서 한해를 뒤돌아봅니다. 또한 메시야를 들으면서 저는 음악이 주는 마음의 감동과 삶의 풍요를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메시야를 들으면서 저는 이 작품에 대한 신비로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매번 듣지만 이번에도 역시 대단함을 느꼈습니다. 이건 인간의 작품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이 곡은 20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성된 것입니다. 하이든의 천지창조가 3년에 걸린 것에 비하면 기간으로만 보아도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것입니다. 보통 작곡가가 꼬박 이런 대곡을 베끼기만 해도 한 달도 더 걸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작품을 만들면서, 그것도 53곡 중에 한 곡도 실패가 없는 작품을 20일만에 만든 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곡을 작곡한 헨델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던 사람입니다. 독일인이지만 영국으로 귀화해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 특이한 사람입니다. 동시대에 살던 바하와는 달리 헨델은 성공 지향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늘 주변에 적이 많았습니다. 그는 관중의 욕구에 맞는 음악의 장르인 오페라를 만들어 많은 돈을 벌었습니다. 그러나 위기가 찾아옵니다. 명예와 돈을 좇아 자신만만하던 헨델은 오페라의 흥행실패로 타격을 입고 결국 질병과 파산으로 발버둥치게 됩니다. 절망하며 괴로워할 때 메시야의 대본을 받게 되었습니다. 헨델은 이사야 53장 3절을 읽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이 대목에서 그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교만했던 자신을 회개하며 통곡했습니다. 그 후로 헨델은 하나님께 매달려 식음을 전폐한 채 이 곡을 쓴 것입니다. 헨델은 완성되자 이것을 만든 동기는 오직 하나님께 대한 ‘감사’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메시야는 이렇게 완성이 된 것입니다. 감사의 마음과 신앙을 통해 위대한 작품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감사하는 자에게, 감사가 있는 현장에, 하나님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위대한 역사를 행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들도 보면 한결같이 감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감사의 달을 맞이하여 이런 부분에서 뛰어난 자들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로 다윗입니다. 다윗에게서 발견하는 감사의 신앙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다윗이 평생 감사한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시편의 많은 시를 통해 그것을 알려주고, 본문은 더욱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평생 감사의 대상으로 삼던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본문에서 그것을 몇 가지로 발견합니다.

  첫째, 나의 복이 되신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이 지은 많은 시중에 시편 16편은 아주 의미가 있는 시입니다. 보통 다윗의 작품을 보면 대부분 ‘다윗의 시’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에 비해, 이 시는 ‘다윗의 믹담’이라고 서두에 강조합니다. 믹담이란 말에 대한 해석에는 의견이 다양하지만, 이 시의 내용과 다윗의 삶으로 보아 여기 ‘믹담’은 ‘황금’을 뜻하는 히브리어 ‘케템’과 동의어로 봅니다. 그러니까 이 시는 ‘황금의 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의 작품가운데 황금, 보석과 같은 것이고, 다윗의 생애에 황금과 같은 경험을 노래하는 것이며, 다윗의 신앙에서 특히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앙에서 보석과 같은 시입니다. 여기에서 다윗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하나님에 대해서만 찬양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표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매 구절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2절에서 이렇게 강조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이것이 다윗이 우선적으로 고백한 하나님께 淪?신앙의 고백이요, 감사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인생에 큰 복이 되셨다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받은 모든 복과 성공과 잘 된 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복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여기에서 그가 받은 복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잘 알려줍니다. 여기에 보면, 먼저 하나님을 만난 것(2)을 비롯하여, 사람(3), 물질(5-6), 건강(10), 기쁨과 즐거움(11) 등을 자세히 말합니다. 이 모두가 바로 하나님이 그의 인생에 주신 귀한 복입니다.

  다윗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면서 받은 모든 복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알고 우리도 다윗처럼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 되셔서 나의 분깃을 지켜주셨습니다. 나의 기업을 실로 아름답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의 복을 주셨습니다. 지금까지 특별한 질병 없이 이만큼 살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람의 복도 주셨습니다. 좋은 남편과 아내를 주셨고, 자녀의 복을 주셨습니다. 주위에 사람을 통해 함께 울고 함께 웃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물질, 건강, 자녀, 부부, 사람, 기쁨, 평안, 이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입니다. 내게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지금 내 삶에 나타난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인줄로 믿으시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런 복이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에게는 이런 복을 주시지 않았다고 아쉬워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가 구원의 복을 받았습니다. 천국의 시민권자가 되었고,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었고,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되었습니다. 내가 지금, 오늘,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은혜와 축복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의 진정한 복이 되셨고, 앞으로도 예비하신 큰 복을 주실 분이십니다. 이런 귀하고 놀라우신 하나님으로 인해 감사가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를 보호하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그는 황금의 시의 첫 구절을 자기를 보호해 달라고, 주님께 피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이 그의 생애에 그가 경험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방패가 되셨고, 산성과 요새가 되셨습니다. 시편 18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오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로다...“ 모두가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다윗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그를 보호해 주셨고, 지키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평생 바람막이가 되셨고 큰 우산이 되셨습니다.

  다윗의 생애는 한마디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왕이 되기 이전에 그는 사울의 추격을 받아 도망자로 살던 사람입니다. 왕이 된 이후에는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예루살렘을 떠나 망명길에 오르고, 왕권이 위태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본문은 정확히 언제 지었는지 잘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 지은 것입니다. 다윗 생애에 원수의 압제에서, 환난과 시련에서 그를 보존하고 지키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위기를 모면하지 못했을 것이고, 하나님이 아니면 결코 일어설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다윗의 고백은 바로 경험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생애처럼 우리의 인생도 시련과 고난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원수의 압제에서 몹시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삶이 지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그런 순간마다 하나님이 나의 방패와 산성과 요새가 되셔서 나를 붙잡고 계시는 것입니다.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이것이 은혜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이것이 진정 우리가 감사할 제목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사탄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택한 자라도 넘어트리려고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습니다. 사탄은 광명한 천사와 같이 가장하여 우리에게 접근합니다. 얼마나 달콤하게 우리를 유혹하는지 모릅니다. 조금이라도 긴장의 끈을 풀면 넘어갑니다. 이런 사탄의 공격과 싸움에서 누가 나를 붙잡고 계십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지키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가는 시련과 고통의 때에도 언제나 나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때에는 나를 더욱 보호하셨습니다. 세상에 고난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고난은 예고 없이 나에게 접근합니다. 그래서 나를 괴롭게 하고, 힘들게 하고, 아프게 합니다. 고난이 없으면 좋은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평안할거 같은데 문제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는 개인,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런 인생길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아파하고 괴로워할 때 뒷짐 지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붙잡고 계십니다. 그분이 힘과 위로와 용기를 주십니다. 그분이 지키고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분의 커다란 섭리와 주권 속에 내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나님을 믿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습니다. 원수와 압제와 그리고 환난과 시련에서 보호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동일하게 지키시고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에 지금까지 잘 지냈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깊이 묵상하시면서 위로를 받으시고 감사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셋째, 나를 훈계하신 하나님이십니다. 7절에서 다윗은 이런 의미심장한 고백을 합니다. “나를 훈계하신 여호와를 송축할지라 밤마다 내 심장이 나를 교훈하도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의 인생을 훈계하고, 깨닫게 하신 분이십니다. 밤마다 다윗의 심장에 큰 교훈을 주신 분이십니다. 다윗의 신앙과 삶에 날마다 말씀하시고 의지를 굳게 세우신 분이십니다. 다윗은 평생 이런 하나님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훈계하고 교훈 하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송축하고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뛰어난 사람 다윗이지만, 그의 인생에도 연약한 육신으로 인해 범죄 할 때가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겉잡을 수 없이 빠져 들어가는 죄 앞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도 이런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깨닫게 하기 위해 선지자를 보내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때 다윗은 어떠한 핑계도 대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낱낱이 죄를 고백하며 회개했습니다. 밤마다 침상의 베개를 눈물로 적시며 통회하고 자복합니다. 그에게 커다란 깨달음이 임할 때 그는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다윗의 생애는 한마디로 눈물의 생애입니다. 나의 눈물을 주의 병이 담아달라고 고백할 만큼 그는 많은 눈물을 흘린 사람입니다. 눈물이 많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만큼 깨달음이 컸다는 뜻입니다. 그 깨달음은 바로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니면 그가 어디에서 그런 깨달음을 얻고 눈물을 흘릴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삶의 의욕과 용기를 가지고 결단하며 나갈 수 있습니까? 그 은혜가 컸던 것입니다.

  지난 화요일인 10월 31일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89주년 되는 뜻 깊은 날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는 비텐베르크의 교회 문에 가톨릭의 부조리 및 부패에 대해 95조항을 발표하며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였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성공으로 당대와 후대에 큰 영예를 얻은 사람이었지만, 그가 처음부터 이런 용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믿음 생활하면서 늘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죄의 문제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그는 죄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기도도 많이 하고, 성경공부도 많이 했으며 성당의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는 것도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여전히 샘솟는 죄의 정욕은 결코 이러한 노력으로 해결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이러한 죄인에게 비추는 하나님의 빛을 발견합니다. 그야말로 그를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욕의 사람, 죄악의 사람, 더러운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으시고 그 죄를 예수님의 몸에 담당시킨 참 복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임하자 루터는 교황청이 죄의 용서를 빙자해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경의 진리가 무엇인지,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사는 게 무엇인지를 발견한 뒤, 큰 용기를 갖고 개혁을 일으켜 오늘날 개신교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다윗의 하나님, 루터의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순간마다 우리를 훈계하고 밤마다 내 심장에 교훈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어디에서 깨닫습니까? 하나님이 아니면 어디에서 바르게 사는 길을 찾습니까? 하나님은 나를 교훈하고, 훈계하십니다. 바른 길로 가도록 나를 자극하고, 잘못할 때 회개하도록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훈계하시는 하나님께 이제 나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이라도 내가 잘못한 것이 있습니까? 여전히 죄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부끄러운 모습이 있습니까? 하나님과 사람을 속이며 아직까지 해결하지 못한 죄로 고민하며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그것부터 해결해야 합니다. 나를 책망하고 교훈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여 바르게 이끄시는 하나님께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잘못했다고, 내가 죄인이라고, 인정하고 자복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자복하고 인정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십자가로 용서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데, 나는 지금 그것을 행하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살고, 어떻게 믿고, 어떻게 봉사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데 바른 길을 걷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훈계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나를 돌아보고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내 잠자는 영혼이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는 무감각한 시대에 나를 훈계하시는 하나님의 교훈을 듣고,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나의 복이 되신 하나님, 환난과 시련에서 보호하신 하나님, 그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훈계하신 하나님으로 인해 다윗은 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귀한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평생 하나님으로 인하여 감사합시다. 그래서 다윗처럼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받고, 이 시대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서해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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