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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전환 - 진정한 행복의 성취 (마 5:3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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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날씨가 제법 추워진 것을 보니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새로운 계절이 오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한 가지 달라진다는 것은 우리 주변의 많은 풍물이 다르게 바꾸어가고 있음을 봅니다. 날씨 하나 추워졌더니 우리의 옷차림도 달라지고 신발도 달라지고 얼굴 표정도 달라집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할 것인가도 달라지고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도 달라짐을 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무엇인가 한 가지 달라진다는 것은 아주 많은 것을 바꾸는 것을 봅니다. 일상의 생활에서 마음하나 바뀌어 지면 우리 생활에 많은 것들이 바뀜을 봅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삶의 변화가 이루어졌던 것, 특별히 그것이 우리의 삶의 방향의 전환이었다면 우리인생은 획기적인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그 바뀜이 한 단계 진보한 전환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전혀 다른 은혜의 세계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누리지 못했던 진정한 행복의 성취까지도 우리들에게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파격적이고 충격적이라 과연 내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의 의구심까지도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꼭 이 일들을 이루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아름다운 삶을 누리시기를 소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누리기위해서 마음의 변화를 가져와야하고 삶의 방향을 전환해야하며 마침내 진정한 행복을 성취하는 믿음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말씀을 좀 더 살펴봅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무엇보다도 이제와는 전혀 다른 삶의 방향에 전환을 원하시는 주님의 은혜의 세계가 우리들에게 열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오른 뺨을 때리면 왼뺨을 대라’ 그리고 ‘누가 송사를 해서 속옷을 달라고 하면 겉옷까지 주라’,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가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 말고,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아들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또 너희는 지금 하는 것 위에 무엇인가 더하여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 같은 사람들도 우리가 하는 대로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인사하고 또 내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 잘 대해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만큼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모든 내용을 조합해보면 우리에게 있어서 현재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던, 내가 현재 가치라고 느껴졌던, 그와 같은 것들을 극복하여 우리가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이루며 마음에 품지 못했던 것을 품으며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이루어가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와 같은 생각을 할 때 무엇보다 우리 생각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함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내가 생각했던 내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살아왔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 가치관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내가 추구하던 모든 것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알고 내 삶엔 얼마든지 새로운 삶이 있고, 내가 체험해보지 못한 세계의 삶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요즘 수험생들을 보면서, 또 기도하는 우리 부모님들을 보면서 이러저러한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올해도 제 마음속에 우리 수험생들의 명단을 작성해 놓고 기도하고 있는 중에 정말 시험 본 우리 학생들이 모두 다 자신들의 소원을 이루어 다 합격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저는 반드시 그렇게 되기를 믿고 기도 합니다. 그러나 또 한편 우리가 생각해 보면, 매년 수험 철이 지나게 되면 합격하는 학생들도 있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의심하지 않고 기도했지만 기도의 결과는 우리가 생각한 것하고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내 기도를 외면했다’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믿고 기도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응답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는 방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성실치 못했으면 더 성실하도록 우리들에게 기회를 주시기도 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갈망하게도 하며, 우리의 삶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인도하시기도 합니다. 언젠가 금요 기도회 때 한분씩 나와서 매주 간증을 합니다. 그런데 한 어머니가 간증하는 것을 듣고 지금도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아이들을 키우면서 느꼈던 일 가운데 마음의 은혜가 되는 것들을 성도들 앞에 간증을 하신 것 같습니다.

아이가 학교 들어가게 되고 그 아이가 공부 잘하기를 위해서 기도했어요. 그런데 아이의 성적이 좋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번 시험에는 평균 10점만 꼭 올려주세요. 하나님 이번 시험에는 꼭 평균5점만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라고 기도했지만, 아이는 여전히 성적이 좋지 않아요.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부모님의 마음을 압니다. 우리나라와 같은 입장에서 아이들 공부하는 것은 그냥 아이에 국한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마 가정경제 중에서 50%이상은 교육비로 쓰고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임을 생각하면, 애들이 학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애들의 문제가 아니라 온 집안 식구들의 문제가 달린 것 같습니다. 그러니 그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상심하겠습니까? 이 아이가 학교도 마음에 원치 않은 곳에 들어간 것 같아요. 대학 가서도 그렇게 공부를 시원하게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끊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어머니가 이렇게 간증을 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성적이 좋지 않아서 계속 마음에 상심하며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날 아이가 장학금을 받아왔어요. 왜 장학금을 받아왔나 했더니 이 학생이 공부는 그렇게 좋은 성적이 아니었지만, 볼링을 열심히 해서 볼링선수가 돼서 특기자로 선발이 되어서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는 겁니다. ‘장학금은 공부 잘하는 학생만 받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도 장학금을 받아오는구나.’ 생각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학교 졸업할 때가 되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취직하기 어렵고 직장을 못 정했는데, 이 학생은 실업팀에 스카우트되어서 월급도 많이 받고 졸업하고 바로 직장을 가지게 됐어요. 그 생각을 하니까 정말 하나님이 우리 삶의 길을 인도하는 것이 얼마나 오묘한가?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실망도 하고 낙심한 적도 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내가 기도한대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내가 기도한 것보다 더 좋은 은혜의 다른 방법을 인도해 주셔서 학생이 학교 다닐 때 장학금도 받고, 취직 걱정하는 때에 아무 걱정 없이 취직도 잘하고, 또 월급도 많이 받아서 전혀 마음속에 근심이 없고 더 기쁘게 해 주셨다하는 내용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나서 뭐라고 얘기 하냐면 이제 다른 자녀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는 ‘하나님 5점만 올려주십시오, 10점만 올려주십시오.’ 그런 기도는 이제 안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우리 아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쓰임 받는 아이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우리 아이가 믿음 안에서 바로 자랄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우리 마음에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이 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이제 어른이 되면 알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공부를 잘하는 것만이 모든 삶이 결정되는 요소는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에서 돈이 많아야만 행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 세상에 모두가 흠모할 만한 위치에 있어야만 행복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너무나 다양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 삶에는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면모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해서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또 이렇게 많은 성도들이 있는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많은 성도들의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이리저리 분주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겠죠? 그러나 제 마음의 또 한편에는 끊임없는 고독을 추구하는 삶의 면모가 있습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삶의 양면성 속에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제게 있어서 갈등의 요인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 두 가지가 저도 모르게 하나님이 조절해 주시는 모습에 따라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데 도움이 되고 있음을 봅니다. 우리의 삶에는 반드시 내가 어느 한쪽으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져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원하는 게 이루어지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을 이루어주시는 축복을 우리들에게 주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가 ‘좋다, 나쁘다’하는 나의 가치 판단 기준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또 다른 판단의 기준이 있음을 생각하고 때로는 내 마음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고, 때로는 내가 생각했던 이전까지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 생각을 결정하고 가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하여 한계 짓지 말고, 주님이 함께 하신다면 나도 예상 못했던 일을 할 수 있음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십리를 가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누가 우리에게 길을 물었다고 합시다. 우리 마음에 여유가 있고 언제나 우리 마음에 친절한 삶이 습관 되어져 있다면 길을 묻는 사람에게 말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잠깐 저를 따라와 보십시오. 하고 일정한 거리까지 가서 ‘이쪽으로 가면 됩니다.’ 라고 얼마든지 가르쳐 줄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옷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어요. 입지 않는 옷도 많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옷 한 벌을 달라고 하면 우리가 아까워서 못 주겠습니까? ‘아, 나 입지 않는 옷 지금 많습니다. 제가 새로 산 것인데 얼마 입지 않고 깨끗한데 이것 가져가시겠습니까?’ 우리는 오히려 그 사람을 애틋이 여겨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옷을 더 주고 한 벌이 아니라, 여러 벌을 줄 수도 있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좀 더 여유로와져요.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서 “저에게 밥 한그릇 사주시지 않겠습니까?” 한다면, 우리는 밥 한 그릇 사주는 것 아까와하지 않고 “아, 그렇군요. 사람이 때로는 어려울 수가 있습니다. 내가 이게 많지는 않지만 정말 드리고 싶은데 받아주셔서 일주일간 식사라도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마음이 왜 그렇게 못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여유가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있는데 왜 그렇게 못 되겠습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우리를 채워주시면 우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도 후덕해 질 수 있고 언제든지 관대로울 수 있습니다.
‘당신은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 가난한거야,’ 우리는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도 언젠가 하나님께서 은혜와 기회를 주시면 반드시 잘 될 수 있습니다. 저도 어려운 적이 있었고, 저도 능력이 없는데 그 능력이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합당한때에 은혜를 주십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따뜻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주시면 우리는 그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오히려 기쁨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진보는 주님 앞에서 이루어집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진보를 이룰 겁니다.
좀 우스운 내용인데요,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곤 했는데 오늘도 한번 따라서 합시다.
능력이 없으면 믿음이라도 있습시다.
대부분 우리 능력이 부족하잖아요. 능력이 없으면 믿음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능력도 없는 사람이 믿음도 없어요. 그러면 큰 문제죠?

능력도 없고 믿음도 없으면 어떻게 살까요? 자 우리 한 번 또 따라서 해 봅시다.
믿음도 없으면 정확히 계산이라도 하고 삽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면 그 능력가지고 살아야죠. 그런데 능력이 부족해요? 그러면 능력을 간구하면서 믿음으로라도 살아야죠. 믿음도 부족해요? 그러면 정확히 계산할 수 있는 능력이라도 우리들에게 있어야죠. 무엇이 나에게 정말 옳은가? 무엇이 나에게 유익이 되는가? 정말 면밀히 계산할 수 있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지혜라도 우리들에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늘 새로운 진보를 주실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십리를 가주며, 송사해서 그냥 달래는 것도 아니예요. 기분 나쁘게 송사해서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 오른뺨 때리면 왼뺨을 대고 우리가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들에게 불가해보이나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우리가 그 은혜를 받으면 그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 바꾸면 세상은 달라 보입니다.
내 생각 바꾸면 슬픔이 기쁨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기쁨의 길을 원하시지 슬픔의 길을 주시기 원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훨씬 커지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를 풍요롭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큰 믿음의 거인이 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우리가 풍요로운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라는 것입니다. 우리 한계를 넘어서자는 것이지, 주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믿자는 것이지, 우리에게 무리한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당하는 요구보다 오히려 큰 자가 되면 됩니다. 우리를 해하려는 자의 요구보다 오히려 더 많은 대인의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하나님의 샘은 퍼도 마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샘이 이와같이 마르지 않으니 마르고 마는 우리 인생의 샘에서 풀 것인가, 퍼도 퍼도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의 샘에서 풀 것인가를 우리는 분명히 결정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길이라는 것은 가다보면 좁아지기도 하고, 때로는 넓어지기도 하며, 때로는 가파른 낭떠러지의 길을 가야될 때도 있습니다. 또 평탄한 길을 가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내 앞에 놓여진 길이기 때문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거기서 짜증을 내고 불평한다 한들 그 길이 갑자기 우리 앞에서 바뀌어지지는 않습니다. 마음이 넉넉하면 우리는 세상의 어떤 것이든지 극복하고 갈 수 있습니다. 컨디션이 좋은날은 가파른 길이라도 갈 수 있습니다. 평탄해지면 좀 쉬라는 뜻인 줄로 압니다. 의외로 우리 삶이라는 것은 내게 주어진 여건 때문에 행복하고 불행한 게 아니예요. 내게 주어진 여건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을 느끼게 됩니다.

어저께 제가 아침에 일을 간단히 처리하고 또 기분도 새롭게 전환할 겸 또 설교 쓰기 전에 산이나 한번 갔다 올까 해서 동네 앞산을 갔습니다. 날씨도 좋고 아주 시원해서 상당히 상쾌함을 느꼈습니다. 요 앞산이라도 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그 조그만 산 갈 때도 숨이 차요. 제 마음에 “야, 나 높은 산도 여러 개 갔었는데 말이야 어떻게 조그마한 산 올라가는 것도 이렇게 숨이 찰까? 나는 실력도 안 느나?” 그런 생각이 들고는 하죠.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 보니까 숨찬 게 참 감사하더군요. 야 이거 내가 숨이 차다는 것은 천천히 걸으면 숨 찰 이유도 없잖아요. 천천히 걷지 않고 내가 비교적 빠르게 걸으니까 이게 숨찬 게 아닌가, 내가 비교적 빠르게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건강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생각하니 정말 감사한 것 같아요. 여러분 살다 어려운 일 있으면 감사한 겁니다. 삶의 힘겨운 일 있으면 감사한 겁니다. 여러분들의 능력이 그만큼 커서 어려운 일을 감당하고 있다는 뜻이고, ‘힘들다.’라는 것은 하나님이 여러분을 힘든 일을 감당할 만큼 여러분을 인정해서 그 일을 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미세한 감정 하나하나 자체가 다 기쁘고 감사한 것 같아요.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정말 몸이 아프면 우리에게 다른 건 생각도 안 나잖아요. 내가 얼른 나아야지. 나머진 다 짜증스러워요. 모든 생각이 나에게 의미가 없어진단 말입니다. 삶의 슬픔, 기쁨, 이러저러한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많은 축복을 주신 것입니다. 삶의 이러저러한 일이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 죽어있다면 그런 것을 느낄 기회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양한 삶에 감정들을 느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두 번째, 우리 이제까지의 생각 이상을 현재의 모습에서 무엇인가를 더 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무어라고 하죠? 너희가 이방인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 말은 너희는 다른 사람보다 무엇인가 더 해야 된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은 오리 가자고 하는 자에게 정말 그것조차도 거절하지만 너희는 십리까지도 가줄 수 있는 무엇인가를 더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방인들도 그들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잘 대해 주는데 너는 그들보다 무엇을 더하여 네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기쁨으로 대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무엇이라 그랬죠? 우리가 마음에 억지로 하는 것 거짓말이 아니라 <성숙함>이라고 말씀드렸죠? 숙성된 삶이라고 말씀드렸죠?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와 같이 하느니라. 주님은 우리가 현재의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고 무엇인가 새로운 진보의 수준, 더 큰 은혜와 축복의 수준으로 나아가길 원하십니다. 지금 나의 모습을 내 입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면밀히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내 입장에서 우리 인생의 모습을 보고 다른 이들을 판단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의 입장과 수준, 그리고 관점에서 우리를 바라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입장과 수준에서 보면 우리의 부족과 허물이 보이게 되고, 이제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자만했던 일, 헛된 기도,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 일에 만족했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살다보면 정말 다른 이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고, 나하나 잘되면 끝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께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한 달란트 받은 것처럼 한 달란트를 얼른 가지고 와서 ‘내가 이거 잊어버리지 않고 가져왔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모습은 아닌가 생각해봐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단지 한 달란트 맡은 사람처럼 나 실족하지 않고 나 잘 관리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습니다. 이 한마디 가지고 한 달란트 맡은 자처럼 하나님 앞에 달랑 한 달란트 내놓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지 않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많은 은혜를 받았다면 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고, 기쁨을 얻고, 삶의 소망을 가지고, 용기를 가지고,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를 이룰 수 있는 것이 믿음의 백성의 모습이어야 함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는 자꾸 내 자신에 대해선 관대하고 무엇인가 큰일을 한 것 같고 다른 이들은 별것 아닌 것 같고 날카롭게 판단하는 우리 자신의 경우를 봅니다. 비판은 우리를 향한 것이지 다른 이들을 향해서는 안 됩니다. 현재 지경에서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지경까지 나아가기 위한 일은 무엇입니까? 나의 모든 것을 부인하고 현재에 머무르려는 안주의 심정과 자만감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인가 되지 못한 상태에서 된 줄로 알면 거기는 더 큰 진보가 없습니다.

우리는 매년, 매달, 매주, 매일 새로운 출발을 이루어야 하고 우리의 삶의 진보를 위해서 끊임없는 애씀의 장면에 우리를 몰두시켜야 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는 현재를 누리면서 또 앞으로의 진보를 위해서 도를 닦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도자죠. 하나님의 은혜의 도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도는 산속에 가야 닦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과의 대면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의 길을 갈고 닦아가는 사람입니다. 이제는 내 한계를 넘어 더 큰 수고와 애씀의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나를 바라보고, 나의 부족을 인정하고, 무엇인가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고 채우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수준을 넘는 한계를 넘는 수고와 애씀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끌기 위해 원하시는 진보의 장은 끝이 없습니다. ‘야, 나는 가도 가도 끝이 없겠네.’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축복의 은혜는 너무 무한하구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진보의 끝이 없다는 것은 우리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야 할 곳이 너무나 멀어, 그리고 가야 할 곳이 너무나 많이 남아있어, 우리는 지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쁘고 감사한 것입니다. 이 말은 우리들에게 새로운 용기와 마음의 각오를 추구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백 미터쯤 있는 곳에 목적을 지정하고 갔다 와야겠다고 하는 사람하고 멀리 있는 곳에 갔다 오려는 사람은 마음가짐이 틀려요. 낮은 산 가려는 것과 높은 산 가려는 것은 밑에서 출발하는 마음의 자세가 틀린 겁니다. 한 시간쯤 걸으면 ‘숨차고 힘든데’ 라고 생각할거예요. 얕은 산가면요. 그런데 높은 산을 가려면 한 열 시간 간다고 합시다. 한 시간쯤 가면 ‘이제 초입도 못 들어 왔구나.’ 라고 생각하며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거기서부터 힘들어하면 어떻게 끝까지 갔다 올 수 있겠습니까? 우리 마음이 우리를 어떻게 다르게 하는가를 수시로 느끼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무엇인가 우리들에게 더 많은 일을 너희는 해라.
너희는 수준을 더 높여라.
오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그 정도 가주는 것이 아니라 십리까지 가주어라.
그리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서 기도하라.
오른 뺨을 때리면 왼 뺨까지 대라. 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무엇인가 한 수준을 높이라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 생각을 할 때 우리는 마음을 달리 먹고 내 삶의 목표를 다시 정하고 하나님 앞에 우리 삶의 길을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머물러 있겠습니까? 언제까지 내 수준에 머물러 이만하면 족하오니 라고 생각하시겠습니까? 이제는 이만큼 살았으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아름다운 은혜의 길을 위하여 또 한걸음, 또 한 계단, 또 한 층 올라서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인가를 더해야 한다는 것은 부담이 아니라,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셨고, 축복해 주시겠다는 신호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감당할 수 있는 자에게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더 요구하신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의 풍요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여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하고,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게 될 때 삶의 진정한 봉사와 헌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의무감이 아니라 그것이 기뻐서 그 일을 이룰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삶에 있어서 정말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시겠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큰 믿음의 사람으로 키우시겠다는 뜻 아니십니까?
늘 말씀드리지요. 어린아이가 우리 뺨을 탁 쳤다고 합시다. 그 어린아이를 아주 징계해버리는 사람은 없어요. 그래 이쪽도 한번 해봐. 우리가 큰 믿음의 사람이 된 거예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내게 없는 것 까지 만들어서 주고 싶다면 우리는 그만큼 큰 사람이 되고 늘 끊임없이 공급해 줄 수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공급을 끊임없이 받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아름다운 꿈을 이루어드리기를 소원합니다. 이제는 힘없는 자가 아니라, 무엇인가 내 있는 상태에서 우뚝 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누추한 삶이 아니라, 은혜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 시인이 웨스터민스터 성당의 묘지에 가서 그 묘비들을 보고 이렇게 시를 썼어요. 묘비들 보면 뭐라고 써있지 않습니까? 아이들 비석에 새겨진 부모의 슬픔을 읽을 때, 내 마음은 연민으로 가득해 집니다. 먼저 아들과 딸을 보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애련하겠어요.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너를 이 엄마, 아빠보다 먼저 떠나보낼 때 내 마음이 너무 아파. 네가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더 많은 것을 보고 기쁨을 누리고 가기를 소원했지만 그 모든 것도 누리고 가지 못하는 네 모습을 생각할 때 정말 마음이 슬프다.” 라고 쓸 수 있겠죠. 그런데 그 부모의 마음을 느껴보니까 너무너무 가슴에 연민이 가득 차는 거예요. 그다음에 뭐라고 썼는지 아세요? 하지만 그 옆에 있는 부모들 자신의 무덤을 볼 때 곧 따라가게 될 사람을 슬퍼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 일인가를 깨닫는 거예요. 그렇게 슬퍼하던 사람도 갔어요.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서 두 사람을 보니 둘 다 묘비로 서있는 거예요. 조그만 시간차이죠. 곧 같이 떠나서 만나게 될 사람이 슬퍼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겁니까?

여러분 또 생각해 봅시다.
쫓겨난 왕들이 그를 쫓아낸 사람들 옆에 묻혀있는 것을 볼 때 왕을 쫒아내고 자기가 왕이 됐어요. 그 사람의 묘비 옆에 자기가 무덤 쓰고 묘비를 세우는 거예요.
우리 인생이라는 게 그럼 쫓겨난 사람은 무엇이고 쫓아낸 사람은 무엇입니까? 시간 지나면 다 묘비 하나로 남는데.
온갖 논리와 주장으로 세상을 갈라놓던 학자와 논객들이 나란히 묻힌 것을 볼 때 인간의 하잘 것 없는 다툼, 싸움, 논쟁에 대해 나는 슬픔과 놀라움에 젖는다. 시간 지나면 큰 차이가 없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그 가운데 더 많이 가지려하고, 누구를 이기고 싶어 하고, 내 생각을 강하게 주장하고, 다른 사람이 틀렸음을 입증해서 내가 옳았음을 주장하고 싶은 것이 우리 인생의 삶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또 다른 시간대가 있지요.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 그리고 내 마음에 어떠한 더 큰 마음을 가지는가. 하는 것들은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이 기쁨과 슬픔을 능가하는 더 큰 마음을 가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우리 마음에 실패와 성공을 능가하는 더 큰 은혜를 입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처럼 너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48절>을 보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도대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처럼 온전해집니까?
<로마서 3장 23절>을 보면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다 죄인이예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요 그 다음절을 보니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은혜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모두 다 의롭다 하심을 입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불가한 모든 일들이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고 새로운 생명의 삶을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도 구원을 받습니다. 이룰 수 없던 꿈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는 새로운 삶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따르다 보면 우리 자신은 전혀 모르나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 생각해 봤죠? <후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다보면 우리도 모르게 그 주님의 모습을 닮고 그 힘과 능력과 아름다움을 우리는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의식하고 나도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이루고자 할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주님을 닮고 주님의 영광을 닮고 주님의 은혜의 모습을 소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린 온전해지기 위해서 어떤 마음과 애씀을 이루어야 합니까?

‘나는 부족해. 주님의 은혜를 입어야 해.’ 하는 마음의 절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회개의 심정으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수고하고 애씀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를 날마다 공급받아야 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경건해 지려고 해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경건해 질수 없어요. 저는 늘 이런 생각을 하는데 우리가 아무리 애써도 하나님이 축복하지 않으면 한계가 있는 것 같아요. <너희가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파수꾼이 아무리 성을 지켜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파수꾼의 수고가 헛되고, 집을 짓는 자가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그 수고가 헛되다고 말씀하죠. 우리 인생에는 결국 하나님이 축복하셔야만 마지막 완성이 이루어지는 것을 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고 하나님의 인도함과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야 합니다. 내 마음의 방향이 온전히 주님과 일치된 정렬된 삶을 위하여 우린 날마다 정리하고 정돈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이루어야 됩니다.

여러분 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야 되죠? 여러분 이런 때 있죠?
‘내가 오늘부터 정말 바르게 살꺼야. 한 치도 오류가 없이 정말 오늘부턴 곧게 살 꺼야.’ 그렇게 생각한 그날 바로 아침부터 시작해서 벌떡 넘어지죠. 여러분 그런 적 없어요? 가만히 있는 것 보니까 저는 상당히 열등감을 느끼는 데요. 아니, 그렇게 생각하면 별일이 다 일어나서 그날은 더 넘어지는 것 같아요.
‘이렇게 마음먹으나 저렇게 마음먹으나 다 똑같으니 되는대로 살자.’ 그렇게 하면 안 되죠. ‘너희는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는 자가 되라고 했으니 내가 또 일어나야지.’ 하고 시작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우리가 온전해진 모습이란 과연 어떤 수준이고 그때 우리는 어떠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닮는 모습이지요. 우리의 모습이 하나님을 닮고자 애쓰는 모습 자체가 하나님의 모습을 이루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예요. 우린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처럼 온전해지라고 했으니 하나님처럼 온전해지기 위해 애쓰다 보면 주님께서 어느덧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의 모습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 모습에는 하나님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향기가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의 마음이 그윽하고 편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얘기 아십니까? 한 늙은 인디언 추장이 있다고 해요. 이제 나이가 들고 노년에 무슨 교훈을 후손들에게 주기를 원해요. 손자를 데리고 얘기를 했어요. “우리 마음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한 마리는 악한 늑대로써 그 놈이 가진 것은 화,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거만, 자기 동정, 죄의식, 회한, 열등감, 거짓, 자만심, 우월감, 그리고 이기심 이런 것들이란다. 그런데 다른 한 마리는 좋은 늑대로써 그가 가진 것은 기쁨, 평안, 사랑, 소망, 인내심, 그리고 겸손함, 평온함, 친절, 동정심, 아량, 진실, 그리고 믿음이란다.” 그러니까 그 말을 듣고 이 손자가 물었어요. “그럼 할아버지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그러니까 이 추장은 간단하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세요?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우리 마음에 두 가지 생각이 싸우는데 어느 쪽이 이길까요? 내가 손들어주는 쪽이 이기는 겁니다. 내 마음속에 선을 향한 의지를 내가 손들어주면 그것이 우리 마음을 지배하는 거예요. 내 마음의 악한 생각들, 분노, 시기, 질투, 거기에 내 손을 들어주면 그게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겁니다. 여러분 선하게 살려고 마음먹으면 우리 마음에 선한 감정이 가득 차게 됩니다. 내 마음에 악한 감정을 가지면 시기심, 질투, 이기심, 욕망 가지고 내가 살려고 하면 또 우리 삶은 그렇게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정말 하나님 앞에 오리를 가고자 하면 십리를 가주는 여유를 가지고 속옷 달라고 재판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줄 수 있는 아량과 풍요로움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댈 수 있는 이런 여유로움과 하나님이 주시는 관대함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진정한 사고의 전환이야말로 우리 인생을 전혀 다른 삶으로 인도합니다. 이제 우리는 그때가 된 것 아닙니까? 누추한 삶에서 수려한 삶으로, 쫓기던 삶에서 여유 있는 삶으로, 늘 부족했던 삶에서 풍족함을 느끼며 다른 이들을 배려할 수 있는 삶.
우리교회는 이제까지 설립부터 시작해서 아주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에 이제까지 무엇인가 줄 수 있었어요. 있어서 준 것이 아니라, 주다보니까 자꾸 줄 것이 생겼어요.

제가 이 문장을 깊이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있어서 준 것이 아니라, 주다보니 자꾸 줄 것이 생깁니다.” 뭔가 있어서 주려고 하면 생전 그때가 안와요.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래도 주다보면 뭔가 줄 것이 자꾸 생기는 거예요.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샘을 푸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평생을 주다가 가는 사람도 있어요. 평생을 기쁘게 살다가는 사람이 있어요. 평생 다른 사람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들다 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평생 받기위해 애쓰는 사람이 있어요. 평생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안 해 준다고 마음에 상심하는 사람이 있어요. 평생 다른 사람의 마음에 슬픔과 상처를 끼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까지 알지 못한 봉사와 헌신과 진정한 섬김의 삶에 눈을 뜨면 그 순간 우리 삶은 다시 태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나 하나 잘 살면 되지. 내 가족 하나 잘 살면 되지. 그와 같은 모습에서 이제 또 다른 세계가 보이고, 내 마음이 넓어지고, 그것이 나의 기쁨이 될 때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늘 말씀드리지요. 봉사와 헌신은 중독과 같아요.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 맛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봉사와 헌신의 기쁨, 섬김의 기쁨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저는 요즘 성도님들이 목사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을 기도 가운데 많이 느끼고 있어요. 왜냐하면 제 마음에 복음의 원초적인 역사에 대해서 그렇게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뜨거워짐을 크게 느끼게 됩니다. 주님은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 복음전파에 대한 뜨거운 마음이 늘 새롭게 일어나는 것을 봐요. 주님은 복음 전파를 하면서 무슨 일을 하셨죠?

병든 자를 고치셨어요. 배고픈 자는 없는 떡도 만들어서 먹이셨습니다. 그리고 눈물 흘리고 슬픈 자는 위로하셨어요. 그리고 소망이 없는 자들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도할 때, 복음을 전파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어요. 그와 같이 우리는 말씀해야 되지만 또한 예수님이 한 것처럼 우리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병든 자가 있으면 우리는 고쳐주기 위해서 애써야 하지 않겠습니까?
배고픈 자가 있으면 없는 밥도 만들어서 줘야 되지 않겠습니까?
눈물 흘리고 슬퍼하는 자들이 있으면 그들의 슬픔과 눈물에 동참해 그들의 눈물과 슬픔을 거두어주는 일을 우리는 함께 하며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적어도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자라면 주님이 하신대로 모양도 흉내 내고 우리의 마음도 흉내를 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삶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을 극복하고 넘어서서 새로운 은혜의 세계로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님들 언제까지 우리가 머물러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이라는 것은 제한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 앞에 새로운 은혜를 누리고 새로운 목표를 정하고 새로운 삶의 차원을 이루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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