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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보자를 필요로 합니다 (행 9: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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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에 관심이 있으신지요. 다시 오실 예수님 뵈올 준비는 되셨는지요. 신앙의 본질은 사실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나에 대한 관심에서 하나님에 대한 관심으로 옮겨져 가는 것, 이것은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요소입니다.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이제 “한 사람이 또 한사람을 구원하자”는 119 새 생명 축제가 다음 주일입니다. 이날에 준비는 되셨습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오늘 말씀에는 주님을 만나 구원을 받고 사도가 된 바울의 이야기가 소개 되고 있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만난 사울은 주님과의 보다 깊은 영적 교제를 위해 경건의 시간들을 갖기 위하여 아라비아라는 광야에 가서 3년을 넘게 영적 훈련을 받게 됩니다.
바울은 주님 안에서 깊은 영적 훈련을 받으면서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한걸음, 한걸음 준비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울이 바울로, 핍박 자가 전도자로 만들어져 가고 있을 때 간교한 사단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말하는 자 이지만 자신도 모르게 사단의 조롱을 받고 있는 유대인들은 어느날 부터인가 바울을 죽이려고 공모하기 시작합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의 뜻 앞에,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앞에 사단은 한 번도 잠잠한 적이 없습니다.

430년 종살이 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계획에 모세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마귀는 바로의 마음을 움직여 사내아이를 죽이는 법을 만들듭니다. 아기 예수로 오시어 위대한 구원역사가 시작될 무렵 사단은 헤롯의 마음을 움직여 두 살 미만의 아이를 죽이라는 법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의 일들을 방해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사도바울을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부르셨고 사도바울이 이제 예수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기로 한 이상 고난과 박해는 피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스데반과 예루살렘 교인들에게 앞장서 가했던 박해와 고난을 이제는 바울 자신이 받게 된 것입니다. 유대인들, 과거의 친구들은 사울이 바울된 자신에게 적이 되어 나타났고 함께 그리스도인을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제 바울에게 생명의 위협자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위협을 느낀 바울은 다메섹 성에서 광주리에 담겨 겨우 도망 나와야 했습니다. 과거의 친구들이었던 과거의 적들에게서 도망친 바울의 갈 곳은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읽는 말씀처럼 예루살렘교회를 찾아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과 신앙적인 깊은 교제를 나누며 힘을 얻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도들은 바울의 기대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이 다 두려워하여 그의 변화되었음을 사울이 바울 되었음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과거의 친구들에게 그리 되었던 것처럼 앞서 주님을 만난 형제자매들에게도 몸 하나 맡길 곳을 찾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해야 했습니다.

이때 이 절박한 상황에서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바울과 제자들 사이에 중보자가 되어 바울의 진심을 믿게 했습니다. 바나바는 중보자가 되어 바울을 예루살렘교회에 정착하게 했을 뿐 아니라 위대한 사도로서의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중보자인 바나바의 역할, 이 아름다운 한 사람의 수고와 헌신은 교회를 아름답게 했습니다.

31절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게 든든히 서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한절은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소망하는 부흥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수고로 교회가 평안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수고로 주님을 더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수고로 성령님의 위로와 성령님의 역사가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수고로 모이는 수가 점점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우리 모두가 소망하고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가 이렇게 건강한 교회가 된 것은 그냥 저절로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에도 이런 바나바와 같은 헌신 자들이 많이 있어지길 소원합니다. 저절로 되는 교회는 없습니다. 교회는 수고와 헌신을 먹고 자라는 공동체 입니다. 수고와 헌신이 없이는 절대로 교회가 교회될 수 없는 것입니다. 바나바의 수고와 헌신은 교회를 평안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의 수가 더 많아지게 했습니다. 바나바가 어떻게 했습니까? 바나바의 여러 수고와 헌신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중보의 사역입니다. 변화된 바울과 제자들 그리고 교회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중보의 사역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중보의사역자들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이런 중보의 사역자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단순한 성도를 넘어 중보의 사역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그냥 오신 것이 아니라 중보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구원의 사람들 사이를 화목케 하셨고 땅과 하늘을 하나로 연결하는 중보의 사역자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나를 위한 중보의 사역자로 오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님 사역을 위해 중보의 사역자를 사이에 두고 오셨습니다. 누구일까요? 세례요한 입니다. 사람들 마음에 복음을 영접할 수 있도록 세례요한은 길 닦는 자로 중보자의 사명을 맡겨 보내셨습니다. “예수”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구원자로 오시기 위해 세례요한을 먼저 보내신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어떤 사람을 구원의 백성 되게 하실 때 또 한사람의 중보사역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어떤 사람을 축복 주실 때 또 한사람의 복의 근원을 삼으시는 것입니다. “중보의 사역”을 구약적 표현으로 하면 “복의 근원”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갈데아 우르의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단순한 부르심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너를 큰 민족을 이루겠으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니라”는 복의 근원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름 받은 너 아브라함, ‘네가 복 받으라’가 아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 안에서만 끝나기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어 아브라함의 울타리를 넘어 또 다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마음이 전해지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복을 얻고 나를 통해서 또 다른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앞서 구원의 백성이 된 우리를 통하여 또 다른 사람이 복을 얻고 또 다른 사람에게 구원자 되기를 원하시니 이것이 중보의 사역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어떤 중보의 사역자들이 필요합니까?

먼저 영혼 구원에 있어 중보자가 필요합니다. 사도바울이 그러했고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또 다른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복음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 28:19~20),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1~2),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입니다. 십계명이 하나님의 명령입니까? 복음을 전해야하는 것도 주님의 명령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유언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모든 날에 증인이 되라”(눅 24:4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시니라”(행 1:8)입니다.

영혼구원은 주님이 오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마 4:19)했습니다. 주님은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고난을 받으셔야 했고 죽으셔야했고 부활하셔야 했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전도의 다른 의미가 무엇입니까?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내 삶의 주변에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를 두시고 나를 통하여 찾아내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전도의 바른 의미는 무엇입니까? 잃어버린 자를 찾아 주 앞에 인도하는 것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하니”(눅 15:24),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했습니다.. 전도에 있어 주님의 마음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인 것입니다. 자식은 또 다른 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식은 바로 또 다른 나입니다. 자식이 아프면 함께 아프고 자식이 힘들면 함께 힘든 것입니다. 자식을 위해서는 어떤 댓가라도 지불할 수 있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고난 받으셨고, 죽으셨으며 부활 하셨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전도는 자식을 찾는 마음인 것입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그 자식이 어떤 부족한 점이 있다해도 부모는 그 자식을 찾는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는 부모에게는 자식이 가진 어떤 조건이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잘난 자식이기에 찾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한 생명이 부모에게 돌아올 때 마치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기쁘고 즐거운 것입니다.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눅 15:4), 반드시 찾아내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부탁입니다. 잃은 자를 찾아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 때문에 왔고 너도 이것 때문에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기뻐하시는 전도는 하늘을 진동시키는 것입니다. 전도는 땅에서 하늘로, 육에서 영으로,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옮기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필요한 중보사역자가 되는 것은 교회 부흥의 필수요소입니다. 교회 성장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전도하는 교회가 성장합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구원역사를 주관하시지만 전도라는 방편을 통해서 구원역사를 이루어 가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시니라”(막 16:20)입니다. 또 한 사람에게 구원이 실현되는 일은 전도 밖에 없습니다. 물론 전도는 성령의 사역입니다. 하나님이 하십니다. 그럼에도 성령은 먼저 믿어 구원 받은 성도를 통하여 전도, 즉 복음전파라는 방편으로 인간을 구원해 가시는 것입니다. 전도는 생명의 문제입니다. “죽느냐, 사느냐”입니다. 전도는 예수님의 기쁨이기도 하지만 교회의 기쁨이요 목사의 기쁨이요 온 성도의 기쁨이기도 합니다. 영혼 구원에 있어 중보사역자는 우리 모두에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입니다. 누가 보내심을 받은 자입니까? 저와 여러분입니다. 우리 모두가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할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가 가야합니다. 요나가 니느웨로 가야하듯 사마리아 여인이 마을 사람을 향해 달려가듯 우리 모두가 가야합니다. 그들이 원수이든지 어떤 나라, 어떤 사람이든지 중요한 것은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가든지 보내든지 했는데 이것도 바뀌어야 합니다. 보내시는 분은 오직 성령님이십니다. 이제는 모두가 가야합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선교사만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 영혼구원의 중보자도 우리도 보냄을 받은 것입니다. 선교지로, 직장으로, 학교로, 이웃에게 멀리든지 가까이든지 가야합니다. 가야할 사람이 가지 않으면 전하지 않으면 펑크가 납니다. 왜 교회가 부흥이 안 됩니까? 그것은 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이 복음을 듣기 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이 복음을 듣기 싫어한다 해도 우리는 열심히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와 여러분은 영혼구원의 중보 사역자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보내신 자를 즐겁게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전도하지 않는 것은, 선교를 하지 않는 것은 본질을 잃은 것입니다. 성경공부를 하는 것도, 예배를 드리는 것도, 재직회도, 당회도, 남선교회, 여선교회는 전도를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른 일은 바빠서는 안 됩니다. 복음전하는 일로 바빠야 합니다. 주님 앞에 올 때마다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자, 보십시오. 잃어버린 양을 교회로 인도해 오시는 모습을 주님이 바라보실 때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주님이 잔치한다는 것 아닙니까? 특별히 이번 주간은 영혼구원의 중보사역자로 무장하여야 합니다. 다음 주 새 생명 축제에 주님은 저와 여러분에게 원하심이 있습니다. 말씀하십니다.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하시고”했습니다. 가자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과 함께 가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을 열라는 것입니다. 내가 역사할 것이고 내가 전할 것이니 그리해보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경험합니까? 선교사님입니다. 복음의 사역자의 현장에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금번 한 주간 여러분의 가슴 속에 잃어버린 또 한 영혼을 향한 떠거운 마음이 여러분의 마음에 살아있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된 영성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유재명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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