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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찬] 성만찬 식탁 (눅 22: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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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과 그 제자들이 모여 앉은 초라한 식탁이 성만찬이다. 이 식탁이 2000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기 까지 우리에게 전해오고 있다.
슈라이에르 마허는 “하나님의 은사를 체험하는 통로가 3가지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성경말씀이고 또 한가지는 기도이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것은 성찬예식”이라고 했다. 그러면 성만찬 식탁은 어떤 것인가? 잠깐 생각하고 성찬예식을 거행하고저 한다.

(一) 사람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식탁이다

둘러앉은 제자들과 주님사이의 그날 밤의 식탁은 사랑이 짙은 식탁이었다. 주님께서 사랑 때문에 자신을 희생하시고 죽으실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셨다.
그리고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식사 중에 제자들의 발을 친히 씻겨주시면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 하셨다.(요13:34-35)
이것은 예수님께서 베푸신 식탁이 사랑을 가르치는 식탁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의 식탁이란 사랑하는 사람들이 둘러앉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의 이야기를 나눌 때 성립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토록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의 만찬 상에 참여하는 것은 나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약속이며 서원이기도 한다.

17절 보면 주님이 떡을 주시며 “너희끼리 나누라”고 하셨다. 이것은 “사이좋게 지내라. 너희끼리 실천하라” 는 뜻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엡2:13 보면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와졌느니라”고 했다. 원수 되고 대립되고 맺혀있던 것을 바꾸어야 함을 말씀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찬의 떡과 잔을 나누면서 가족 간에, 친구 간에, 이웃 간에, 성도 간에 각 조직 내에서 섭섭한 마음, 분노의 감정을 가진 것이 있으면 바로 이 떡과 잔과 더불어 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용서할 것은 용서하고, 이해할 것은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불화의 자리에 사랑의 새순을 움돋게 하고 분쟁의 자리에 평화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성찬의 떡과 잔은 나와 이웃 간에 평화를 이루게 하는 식탁이다.

(二) 풍성한 생명을 얻게 하는 식탁이다

성찬식과 관련한 매우 중대한 말씀이 요 6:53-55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영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만일 성찬식에서 우리가 성도간의 교제와 사랑만을 강조하고 만다면 그 것은 큰 잘못이다. 왜냐하면 성만찬의 음식이 아니더라도 세상의 식탁을 통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애정은 얼마든지 증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에서도 애찬이 있다. 먹음으로써 즐겁고 먹음으로써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을 누린다. 교회의 모든 식사와 성도 사이의 모든 식사가 애찬이다.

그러나 성만찬은 애찬과 다르다. 성만찬에서 중요한 것은 떡과 잔이다. 떡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찢기신 살(몸)이요 잔은 십자가에서 흘린 그리스도의 피이다. 이것은 상징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의미한다.
물론 Rome 카토릭에서 말하듯이 집례하는 목사님이 기도할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을 믿는 것은 아니다. 개신교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신다는 “영적 임재설”을 믿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임재하시는 살과 피를 먹는 것이다. 사람들은 육신의 양식을 먹어야 산다.
그러나 예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로서 내려온 만나를 먹고도 죽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세상에서 아무리 비싸고 기름진 음식을 먹어도 우리를 살리지 못 한다.
그러나 여러분이 보시기에 빈약하고 초라해 보일지 몰라도 성찬의 양식이 여러분을 살린다.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독수리 날개 치듯 새 힘을 주신다.

그러므로 성찬을 베푸는 이 시간에 의미 없이 떡과 잔을 받아 먹고 마셔서는 안 된다.
오늘 성찬의 떡과 잔을 먹고 마심으로 연약한 죄인은 죽고 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시도록 하여야 한다.
성찬의 떡을 가지면서 이제부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새 마음, 새 출발, 새 삶을 시작해야 하겠다고 결단을 다짐하시기 바란다.

(三) 모형이 되는 식탁이다

16절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리라” 고 했다.
18절에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성만찬 식탁이 단순히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 식탁의 모형이요 그림자임을 말씀해 주는 것이다. 성만찬의 식탁은 여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 나라까지 연결 된다.

지금은 그 시작에 불과하나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때 그 식탁에는 풍요가 있고, 영육간의 만족이 있고 우리 주님이 식탁의 주인으로 좌정 하신다. 바로 완성 될 식탁을 바라보며 거행하는 것이 성만찬이다. 성만찬의 구별과 거룩함이 여기에 있다. 그것은 세상의 식탁이 아니다.

우리가 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안식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 나라로 부르실 때에 우리는 꼼짝 없이 모든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께로 나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주일에 세상 사람처럼 충분히 쉬지 못하고 예배 드리고 봉사의 일을 하는가?
그것도 하나님나라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천국의 안식은 이 세상의 안식과 같이 먹고 놀고 자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김과 예배가 천국 안식의 특성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일에 세상 사람과 같이 먹고 쉬고 노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나와서 예배와 봉사의 일을 하는 것이다. 성찬의 식탁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 나라에서의 그 거룩하고 영생하는 식탁의 연습입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 그 어느 식탁이 이렇게 거룩하고 경건합니까? 그 어느 식탁이 우리에게 생명을 제공합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식탁 외에는 없다. 하나님 나라 식탁의 거룩함, 경건, 생명을 미리 맛보도록 허락되고 마련된 것이 성만찬이다.
그러므로 이 식탁을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을 생각하고 받을 때 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어야 한다.

(결론)

기독교 역사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 생활에 속한 일이기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문제가 되어 왔으며 그 때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귀한 영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주셨다.예수님도 성만찬을 통해 교회 식탁 공동체로 묶으셨다.

그래서 초대 교회는 식탁 문제를 대단히 중시했다. 성찬의 그 식탁은 단순히 육적 만족을 주는 세상적인 식탁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이 되살아나고 믿음이 재충전 되며 거룩함이 소성되는 식탁이다.
성도 간의 뜨거운 사랑이 솟구치며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 넘쳐 나는 것이다.오늘 성만찬 식탁을 통해서 이런 변화들이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부탁한다. (원사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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