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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수 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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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본문. 여호수아 1:7-9

(7)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미국 링컨 대통령의 어린시절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링컨이 살던 집은 3면으로 된 오두막집이라 불릴 정도였습니다. 마루도 문도 창문도 없는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링컨의 나이 9살에 그 어머니 낸시마저 죽었습니다. 낸시는 죽으면서 어린 링컨에게 자신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던 성경책을 주며 이렇게 유언하였습니다. “나는 너에게 100에이커의 땅을 물려주는 것보다 이 한 권의 책을 물려주는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마치 오늘 읽은 본문의 여호수아의 형편이 어린 링컨과 같다 할 것입니다. 모세가 죽은 이후 두려운 마음 가운데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한 권의 책을 던져줍니다. 칼과 창과 마병을 던져주면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눈에 보이는 세력이나 무력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줍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목전에 두고 승리의 비결은 무력이 아니라 오직 말씀에 대한 순종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어린 링컨이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생을 살았을 때 그를 대통령과 존경의 자리에 오르게 하는 축복을 받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신명기 4장 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규례와 법도를 듣고 준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살 것이요 너희의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얻게 되리라” 이어지는 26절에서는 “(너희가 말씀대로 살지 않고 우상을 섬기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한 나라의 흥망성쇠, 한 인생의 영화와 축복이 이 말씀 순종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학자들은 여호수아로부터 시작하여 사사기, 사무엘 상하, 열왕기 상하까지 이어지는 성경을 한 줄에 엮어 신명기 역사서라 부르기도 합니다. 역사를 기록할 때는 역사를 평가하는 사관이 있습니다. 이 사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신명기 말씀입니다. 신명기서의 주제는 말씀대로 살면 약속에 땅에서 장구히 살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속히 망한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로부터 열왕기에 이르는 역사서는 이 관점에 의거하여 이스라엘 왕들과 지도자들 백성들의 행태들을 평가하고 기록합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 신명기 역사서가 기록된 때를 학자들은 남북 왕국이 망하고 난 후, 바벨론 포로기 때라고 주장합니다(기원전 6세기). 나라가 망한 후 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 약속의 땅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었는지 눈물을 흘리며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역사서들입니다. 옛 역사의 기록들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신명기 말씀에 근거하여 엄밀히 분석을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의 결론은 이스라엘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점에서 사관을 가지고 기록한 최초의 역사서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회복시켜 주신다면 다시는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입술을 깨물며 기록한 것이 바로 이 역사서들의 말씀입니다.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우리 인생의 성공을 결정하는 것은 누가 더 말씀을 가까이 하느냐 누가 더 말씀에 순종하느냐 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하나님과 씨름하는 시간을 더 늘리십시오. 시편 1편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1:1-3)

진정 행복한 사람, 축복받는 사람이 되는 비결은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총사령관 여호수아에게 기발한 전략을 가르쳐주시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법을 가르쳐줍니다. 실상 요단강을 건너 첫 번째 전투였던 여리고성 전투는 여호수아와 그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를 잘 보여준 사건입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여리고 성을 도니 성이 무너졌습니다. 아이 성 전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을 때 그 결과가 또한 어떠한지 잘 보여줍니다. 아간이 말씀에 불순종하니 이스라엘이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에서 승리하고 축복받는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과 씨름 하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교회의 일 뿐만 아니라 사업을 할 때도 주님 앞에 엎드리고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씨름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 가는 길을 평탄하게 하시고 형통하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라”(8)고 명령하십니다. 주야로 묵상한다는 것은 한가하게 말씀을 읽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전쟁터입니다. 순간적으로 위기가 찾아오고 순간적으로 악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것을 이기기 위해서는 우리 입에서 말씀이 떠나서는 안 됩니다. 아침 새벽기도나 QT는 오늘 하루 우리를 보호하는 말씀을 받는 순간입니다. 이 받은 말씀이 우리 머리와 가슴과 입에서 떠나지 않음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 하루를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와의 싸움을 말씀으로 승리하셨듯이 말씀으로 무장한 삶이 주야로 묵상하는 자의 삶입니다. 마귀가 돌로 떡덩이를 만들라고 할 때(삶의 우선순위)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마4:4)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사탄이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뛰어 내리라 할 때(신뢰의 문제)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4:7)는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마귀가 내게 엎드려 경배하며 천하만국을 다 주리라로 유혹 했을 때(과정과 방법의 문제) 예수님은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4:10)고 물리치셨습니다.

‘묵상한다’는 원래 단어의 뜻은 ‘읊조린다’ ‘나지막하게 소리 내어 읽는다’의 뜻입니다. 조용한 명상이나 침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 사람들은 인쇄술이 발달되어 있지 않아 책이 거의 없었습니다. 문맹률도 높아 책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알았는가?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듣고 암송했습니다. 그 암송한 말씀을 길을 걸어갈 때나 일을 할 때나 혼자 있을 때나 자녀들과 함께 있을 때나 나지막하게 읊조리면서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유혹들을 이겨냈습니다. 이렇듯 주야로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말씀의 울타리를 쳐서 세상의 유혹이나 시험이 우리 영혼 속으로 침투하는 것을 막는 것을 말합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명령하십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7) 말씀을 지켜 행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라’고 강조하십니다. 말씀은 지키겠다고 결단하고 나가야 겨우 지킬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만 40년을 살았고, 가나안 땅은 풍요로운 도시 문화를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도시 문명은 바알 우상의 문화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바알 우상을 섬기는 것은 단지 우상을 섬기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가나안은 농사의 풍요를 얻기 위해서는, 곧 가나안 땅에서 잘 살기 위해서는 바알 우상을 섬겨야 한다는 가치관이 장악하고 있는 사회입니다. 이런 물질문화의 유혹을 견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24장 15절에 보면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강하게 결단하며 나아갑니다. 여호수아가 노년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 놓고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결심을 표명해야 할 정도로 유혹이 만만찮은 곳이었습니다.

우리에게도 결단이 필요합니다.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거짓이 판을 치는 사회에서 정직하게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경쟁 논리가 판을 치는 곳에서 사람을 생각하며 오직 사랑의 원리로 기업을 이끌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동산 투기의 광풍이 몰아치는 한국사회에서 집을 단지 자기 살 목적 외에 투기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직장 상사의 명백한 잘못에 대하여 ‘아니오’ 라고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네가 형통하리라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말씀 순종의 길로 가라고 요구하십니다. 말씀 순종의 길은 처음 보기에는 죽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7절에 주님은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라고 말씀하시며 8절에서는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정직한 자가 형통하게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의 약속이기에 반드시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을 말합니다. 저는 우리 믿음의 식구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살 때 정말 형통한 삶을 산다는 것을 모범으로 세상에 보일 수 있는 증인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전쟁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영적 전쟁이라고 하면 귀신이나 흑암의 세력과 싸우는 것을 생각하기 쉬운 데 그것은 오히려 작은 전쟁입니다. 더 큰 전쟁은 이 세상 가치관과의 싸움입니다. 바알의 풍요문화, 쾌락과 사치의 문화, 경쟁과 거짓의 문화 이기주의와 무정함의 문화와 맞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문화, 섬김의 문화, 정직의 문화, 평화의 문화, 사람 중심의 문화가 더 가치 있다고 확신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 결국은 그 길이 평탄하고 형통하게 될 것을 믿으며, 이를 세상이 알게 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그리고 크고 중요한 영적전투입니다. 

사실 우리가 이후에 형통하게 되든지 그렇지 않든지 상관없이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사는 것 자체가 복이고 형통함입니다. 양심을 속이며 한 번 살아보세요.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정직하며 진실되게 사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고 좋습니다. 자기 인생에 대해서도 당당합니다. 가족과 자녀들을 보기에도 떳떳합니다. 그 게 행복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느 순간에 말씀을 순종했기 때문에 가난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다는 것 자체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2, 눅6:20)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할 때의 천국은 현재형입니다. 말씀 때문에 가난해진 이들은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 천국의 기쁨을 마음껏 누리세요.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말씀에 순종하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주님은 명령하십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은 중도 노선으로만 달려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곧장 진리의 길로만 가라는 말씀입니다. 진리의 말씀에서 벗어난 것이 바로 좌요 우입니다.

예컨대 여리고성을 공략할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서 여리고성을 도는 것이 말씀의 길입니다. 이 말씀의 길에서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은 인간적인 술수나 무력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아이 성을 공격할 때는 철저히 매복 작전을 써서 승리했습니다. 패한 척하고 달아나고 이 뒤를 적들이 추격하자 매복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을 점령하는 매복 전법을 썼습니다. 이 때의 좌는 인간적인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기도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인생에서 하나님은 극단적인 두 경우를 보여줌으로써 우리의 신앙생활이 어떠해야 함을 잘 시청각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모든 싸움은 여호와께서 하시는 싸움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초월적인 능력으로 역사하실 수도 있고, 극히 인간적인 방편으로 도움을 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느 쪽이든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할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것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신앙인의 모습은 열심히 기도하고, 또 기도해서 얻은 감동을 좇아 열심히 일하고 부지런히 행동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서도 좌로나 우로 치우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 일에만 열심히 하며 도무지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로 세상에 나아가 빛으로 또 선교자로 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또 다른 반대쪽에는 세상 일만 열심히 하지 도무지 영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영혼은 곧 피폐해지고 말 것입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사람은 교회에서 열심히 은혜 받고 세상에 나아가 열심히 세상 일을 감당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일과 이성적인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신앙생활을 귀신 마귀 하면서 지나치게 영적인 일들에만 주목합니다. 기독교 어떤 이단들은 감기에만 들어도 감기 귀신이 들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주체적인 판단보다는 신비적인 소리나 운명 느낌에 의존하려는 태도가 강합니다. 그래서 느낌이 좋지 않거나 일이 잘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쉽게 단정 지어 버립니다. 어느 때는 우리가 의지를 사용하여 난관을 돌파하여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보십시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결박을 받으리라는 예언의 말씀을 들었지만 이때 단호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이런 일사각오의 신앙이 있었기에 바울을 통하여 초대교회가 든든히 서고 멀리 로마까지 확장될 수 있었습니다.

영적으로 지나치게 민감한 사람의 반대쪽 극단에는 지나치게 자기 이성과 의지만 신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인 현상에 경도된 사람보다 잘못될 확률은 적지만 이런 사람은 생활이 피곤합니다. 모든 것을 자기 이성과 의지로 만들어가야 하니까요. 또 우리 영혼 저편에서 들려오는 그 풍요롭고 우리 영혼을 평화롭게 하는 그 음성에 둔감하게 됩니다. 우리 영혼을 만족하게 만드는 경우는 이성적인 논리적 경험보다 이런 영적 충만감일 때가 더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성과 의지를 주체적으로 활용하면서도 충분히 영적이며 감성적인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 사람입니다.

좌우로 가장 치우치기 쉬운 경우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념 논쟁일 경우가 많습니다. 신앙인들이 추구해야 할 나라는 좌파의 나라도 아니고 우파의 나라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어중간한 중도의 자리가 우리가 서야할 입장이라는 것도 아닙니다. 신앙인이 추구하는 나라는 중도가 아닌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인이 되시고 예수님의 말씀이 통치 원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그 나라와 합하다면 좌파에도 설 것이고, 우파에도 설 것입니다. 만약 그 나라에 합당치 않다면 우리는 좌파도 거부할 것이요, 우파도 거부할 것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와 관련되지 않은 것들은 모두 다 좌로 우로 치우쳤다 할 것입니다.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우리는 말씀을 다 지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대의 축복은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실”(9) 것이라는 임마누엘의 약속입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사43:2)

하나님은 이 예배드리는 현장뿐만 아니라 우리가 운전할 때도 함께 하시고, 우리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 싱크대에도 함께 계시고, 많은 일들이 산적해 있는 회사의 책상에도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곁에 계시며 우리를 도울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분께 우리 연약함을 아뢰면 그분이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

주님은 우리 혼자서 말씀을 지키라고 무정하게 버려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주님은 자신이 명령한 일인만큼 우리 곁에 계시면서 우리가 말씀을 좇아 살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여호수아로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하셨던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함께 하심으로 우리 길을 평탄하게 하실 것입니다. 형통하며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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