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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나의 조직 (눅 12: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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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도 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지난 몇 주간 동안 오늘 시대의 특성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미래가 불투명해서 모두 불안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이 불확실하고 내일이 불확실하고 우리의 종말이 불확실합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기쁨과 행복함을 빼앗기고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또 오늘은 자신을 위해서 바벨탑을 쌓는 일에는 너무 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불필요한 일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정말 생각하고 되새겨야 할 일에는 자신감이 없고 불필요한 일에는 너무나 큰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둘 다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이 제시하는 메시지에 귀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본문은 나의 미래, 나의 운명, 나의 삶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의 하나님이시고 우리의 생사와 화복을 책임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별로 염려될 것이 없습니다. 불투명한 것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불투명하기는 내 할아버지 시대에도 내 아버지 시대에도 불확실 했습니다. 내 소년시대에도 불확실하기는 마찬가지였고 나의 미래에도 불투명하기는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10년 후 50년 후에도 사람들은 오늘처럼 그렇게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말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어느 시대나 불투명하다고 말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불투명한 시대를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어느 시대나 확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그 시대를 확실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도 내일도 아주 분명하게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믿음의 근거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 근거를 오늘 읽은 본문말씀으로 대답하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아주 자신있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니라, 고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도 하지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세상에 이 보다 더 확실한 근거가 어디 있습니까. 세상에 이런 담보나 이런 증거 그리고 이런 보험이나 이런 약속이 또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이 약속과 근거를 믿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가 아무리 불확실하다고들 말하지만 전혀 염려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또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에서 이론적으로 설명하시다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까마귀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들풀들을 보라, 그것들도 하나님이 입히시고 먹이시고 기르시는데 하물며 너희야 말하면 무엇하겠느냐“하고 반문하십니다. 여기 비유에 나오는 세 가지 동식물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하찮은 존재들 입니다. “까마귀, 들의 핀 백합꽃 그리고 들풀“ 이것은 모두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들입니다. 까마귀를 누가 귀여워합니까. 생김새가 아주 흉측하게 생겼고 그 울음소리 또한 아주 듣기가 싫습니다. 그리고 들에 핀 백합을 누가 알아줍니까. 이스라엘에는 백합이라는 꽃이 없습니다. 아주 보잘 것 없는 작은 들꽃을 성경에서 백합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들풀입니다. 이 들풀은 잡초를 말합니다. 누가 들에 자라는 잡초를 귀하게 여깁니까.

여기 비유에 나온 세 종류의 동식물은 아주 보잘 것 없는 대상들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것들조차도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들조차도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것을 염려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식물들이 사람들이 관심밖에 있는 동안에도 편안하게 먹고 마시고 입고 여름에도 겨울에도 비가 올 때에도 죽지 않고 생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비입니다. 그러면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너희야 먹이고 입히고 잠자게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하십니다. 이 정도면 더 이상 우리가 무엇을 요구하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들이 생각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이 조직하시고 태어나게 하셨다”

나는 자연발생적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존재가 아닙니다.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면 분명 나를 향하신 어떤 계획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나의 몫이 주어져 있을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계획도 없이 대책도 없이 태어나게 하셨겠습니까. 그분이 창조주이고 하나님이라면 나에 대한 분명한 섭리와 목적과 계획과 내용과 뜻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나는 그분의 섭리를 따르며 살아가면 됩니다. 우리에게는 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거기서 암담한 미래에 대해서도 그 삶이 평안해지고 믿음이 전제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삶이 참 평안합니다. 저는 미래에 대해서 전적인 소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뜻을 주님께 두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소망의 주님입니다. 나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축복이고 가장 큰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고 계획했던 것 보다 훨씬 나은 길로 지금까지 나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나는 앞으로도 그분에게 나의 모든 것을 맡기고 의존하고 살아가려고 합니다. 그 분은 나의 생각보다, 나의 계획보다, 나의 준비 보다 더 월등한 지혜로 나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자신감이 있고 믿음이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미래를 불확실하다고 말했습니까. 우리의 미래가 왜 막연하고 불확실 합니까. 아닙니다. 이 보다 얼마나 더 미래가 확실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나를 조성하시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날 때 그냥 태어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계획이 있었고 섭리가 있었고 준비가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내가 지금 미래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삶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준비해 주신 나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오늘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주님이 주신 일을 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는 모두 일자리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내게 할 일이 다 주어져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 정신이 청지기 정신입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대해서 청지기 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는 일에 기쁨이 있고 즐거움이 있고 감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하는 일이 신성하게 됩니다. 그래서 루터는 무슨 일을 하든지 성직 수행하듯이 하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일이 주님께로부터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삶에 얼마나 엄숙함이 있겠습니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일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목회자가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저는 사람들 앞에 나서서 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활동적이지도 못하고 사교성에도 소극적입니다. 그리고 저는 꾸미고 권위적이고 체하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금 이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이 제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역을 하다 보니까 이 목회하는 일이 참 좋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까 처음 이 길을 들어서려 했을 때 상당히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때 내가 잘 순종했다고 생각됩니다. 앞으로도 이 목회를 잘해서 은혜롭게 끝맺으려고 합니다. 

저는 기금까지 이것은 안 되고 이것만 된다고 해서 무엇인가를 피하고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서 발버둥을 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순리를 무시하면서 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억지로 무엇을 만들고 이루고 성취하려고 안간힘을 쓴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순순히 순응하면서 살아왔습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 삶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도 목회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저는 이 교회에서 여러분들과 함께 목회하고 있는 것이 참 행복합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얼마나 더 행복한 일입니까. 나는 그런데 여러분은 안 그렇다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싫다고 하면 그만 둘 것입니다. 싫다는데 억지로 붙어 있으면서 사역하는 것도 피곤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왜 혼자 고집을 부리고 거부하고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나의 마음이 얼마나 편안한지 모릅니다. 이 세상을 아주 편안하게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길입니다.

“나의 종말도 하나님의 것”

사람들이 종말의 문제를 놓고 부질없이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이 문제는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문제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문제는 내 소관사항이 아닙니다. 그 종말의 문제는 나의 문제가 아니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그 문제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소관사항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일을 내가 왈가왈부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그런데 왜 염려하느냐.” 그 말은 우리들이 부질없이 근심하고 염려함으로 우리의 삶에서 행복과 기쁨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특히 종말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염려가 참 많습니다. 좀 깊이 생각해 보면 정말로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 자신의 종말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2031년 4월 둘째 주 토요일 오후 2시. 그 시간이 나의 시간입니다. 제가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제시한 시간입니다. 그 날이 제가 85세 되는 봄날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께로부터 응답받았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시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제가 무엇에 근거해서 그렇게 자신있게 말씀 드리는가 하면 거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나에게 모든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 한 가지 이유이고 또 한 가지는 “제가 그 시간을 위해서 틈틈이 준비해 오고 천국에 갈 것을 생각하고 그 천국을 위해서 열심히 그리고 많이 심은 것” 때문입니다. 

저는 평생을 목회를 해 왔습니다. 이 일 한 가지만 해도 저는 나의 종말 때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 가지만 해도 하나님은 저에 대해서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는 천국을 위해서 심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저는 천국에 대해서 열심히 심어 왔습니다. 내가 세상에서 순교는 하지 못했지만 순교하는 심정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는 열심히 하나님께 헌금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헌금하는 일이 참 행복합니다. 저는 하나님께는 아낌없이 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이 헌금하는 마음을 천국에 심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가 천국을 위해서 많이 심은 것이 있으면 자연히 천국에 대해서 믿음이 커지고 애착이 커지고 기대가 커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종말에 대해서 자신감이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평생을 주님을 위해서 헌신의 삶을 살아갔습니다. 죽음의 길을 걸어갑니다. 고난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수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배고픔의 길을 걸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온전히 주님 때문입니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걸어가다가 종말의 때가 되어 갈 길을 다 간 다음에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가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자신만만한 고백입니까. 심지 않은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가오는 종말이 두렵기는커녕 즐거웠고 천국에 가서 받을 상이 있기 때문에 종말의 때가 다가오는 것이 신이 났을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소망과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희망과 기대와 소망을 빼앗고 싹을 잘라내는 일입니다. “너는 못해, 너 같은 아이가 뭘 해” 이것은 살인행위입니다. 그리고 믿음의 길에서 시험에 들게 해서 떨어져 나가게 하는 행위도 살인행위입니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소망을 뺏고 희망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희망과 소망과 믿음이라는 재산이 있으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에 소망을 주셨고 희망을 주셨습니다.

  미국의 어느 여인이 임신을 했습니다. 임신 5개월이 되었을 때 사고로 인해서 상처를 입었는데 뇌사 판정을 받게 됩니다.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뱃속에서는 아이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낳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충격에 의해서 뇌사상태에서 깨어났습니다. 이 여인이 깨어나서 고백하기를 자신이 뇌사상태에서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몸은 꼼짝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때 뱃속의 아이가 뱃속에서 다리 짓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뇌사상태인데도 이 아이를 위해서라도 살아야지 하는 소망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낳게 될 때 통증으로 충격을 받고 깨어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축복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희망입니다. 미래입니다. 천국입니다. 기대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에 대표적인 3대 선물을 믿음 소망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창조의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조성하시고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적어도 나는 하나님이 나를 위한 계획을 세우셔서 세상에 보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그 분은 지난날도 나의 인도자였지만 미래에도 나를 책임지고 내 인생 끝까지 대책을 가지고 계실 것을 분명히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너무 조급할 것도 없고 걱정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수단을 쓸 필요도 없고 밤잠 안자면서 안달할 것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 가장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어찌 다른 일들을 염려하느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시느니라,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런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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